"당신들의 血肉은 신라의 것이오."

文武王의 피를 토하는 항변을 담은 天下名文 答薛仁貴書의 한 대목.
671년 문무왕은 唐將 薛仁貴가 신라의 對唐결전 태세 대하여 문책하는 글을 보내오자 이에 답장을 쓴다. 삼국사기에 실린 答薛仁貴書는 천하의 名文이다. 유학자 强首가 썼다는 설이 있다.

문무왕은 신라가 백제 멸망 뒤 이곳에 주둔한 漢兵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 대한 군량미 수송의 2중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였는가를 절실하게 적고 있다.


<6월에 先王(태종무열왕)이 돌아가서 장례가 겨우 끝나고 상복을 벗지 못하여 부름에 응하지 못하였는데, (황제의) 勅旨에 신라로 하여금 평양에 軍糧을 공급하라고 하였소. 이때 웅진에서 사람이 와서 府城의 위급함을 알리니, 劉德敏총관은 저와 더불어 상의하여 말하기를, '만약 먼저 평양에 군량을 보낸다면 곧 웅진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웅진의 길이 끊어지면 머물러 지키는 漢兵이 敵의 수중에 들어갈 것입니다'라고 하였소.

12월에 이르러 웅진의 군량이 다하였으나 만약 웅진으로 군량을 운송한다면 칙지를 어길까 두려웠고, 만약 평양으로 향하게 운송한다면 웅진의 양식이 떨어질까 염려되었으므로, 老弱者를 보내어 웅진으로 운송하고 강건한 精兵은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으나 웅진에 군량을 보낼 때 路上에서 눈을 만나 人馬가 다 죽어 100에 하나도 돌아오지 못하였소.

劉총관은 김유신과 함께 군량을 운송하는데 당시에 달을 이어 비가 내리고 風雪로 극히 추워 사람과 말이 얼어죽으니 가지고 가던 軍糧을 능히 전달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의 大軍이 또 돌아가려하므로 신라의 兵馬도 양식이 다하여 역시 회군하던 중에, 병사들은 굶주리고 추워 수족이 얼어터지고 路上에서 죽는 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소. 이 군사가 집에 도착하고 한 달도 못되어 웅진 府城에서 곡식 종사를 자주 요청하므로 前後에 보낸 것이 수만 가마였소.

南으로 웅진에 보내고 北으로 평양에 바쳐 조그마한 신라가 양쪽으로 이바지함에, 人力이 극히 피곤하고 牛馬가 거의 다 죽었으며, 농사의 시기를 잃어서 곡식이 익지 못하고, 곳간에 저장된 양곡은 다 수송되었으니 신라 백성은 풀뿌리도 부족하였으나, 웅진의 漢兵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소. 머물러 지키는 漢兵은 집을 떠나온 지 오래이므로 의복히 해져 온전한 것이 없었으니 신라는 백성들에게 권하여 철에 맞는 옷을 보내었소. 導護 劉仁願이 멀리 와서 지키자니 四面이 모두 적이라 항상 백제의 침위가 있었으므로 신라의 구원을 받았으며, 1만 명의 漢兵이 4년을 신라에게 衣食하였으니, 仁願 이하 병사 이상이 가죽과 뼈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살은 신라의 育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唐軍의 皮骨은 당나라 것이지만 당신들의 血肉은 신라 것이오'라고 부르짖듯이 말한 文武王의 이 절규야말로 신라가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견디면서 삼국통일의 大業을 위해 희생했던 심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문장이 答薛仁貴書의 한 絶頂이다.

신라가 백제지역 주둔 唐軍과 고구려 원정 唐軍에게 동시에 군량미를 공급하기 위하여 노약자까지 동원하여야 했던 상황에 대한 묘사는 르포 기사를 읽는 것처럼 생생하다. 이런 고통을 지배층과 백성들이 장기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신라 사회의 내부 단결이 잘 유지되었다는 것이 증명된다. 唐은 신라 지배층 내부의 분열을 기다렸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신라가 對唐 결전을 통해서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데는 내부 단합과 이에 근거한 동원체제의 유지가 결정적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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