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京 주원장 무덤의 수수께끼

이 잔혹한 황제의 관은 과연 明孝陵에 묻혀 있는가?
朱元璋은 칭기즈칸의 자손들이 세운 元을 몽골 고원으로 쫓아버리고 漢族의 明나라를 건국한 太祖의 이름이다. 그는 1328年10月21日에 출생, 1398年6月24日에 죽었다. 황제로 在位한 기간은 1368年 - 1398年의 30년간이었다. 그의 在位 기간에 고려가 망하고 李成桂의 조선이 건국하였다. 그의 治世 年號를 따서 洪武帝라고도 불린다.

그는 세계 역사상 황제에 오른 사람들 중 가장 비천한 밑바닥 인생을 보낸 인물이란 평을 듣는다.

현재의 안휘성(安徽省) 봉양현(鳳陽県)에서 貧農 집안의 末子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元의 말기 정치혼란기에 굶어죽었고 그만이 살아 남아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었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구걸하여 먹고 살았다.

1351년 백련교도의 집단인 홍건적이 중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주원장은 郭子興(곽자흥)이란 홍건적 중간 보스 밑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郭의 양녀를 처로 맞았다. 이 여인이 나중에 馬황후가 된다.

주원장은 이 무렵 李善長이란 사람으로부터 이런 충고를 듣는다. '당신은 '천하대란을 수습하여 귀하게 될 사람이다. 농민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漢高祖 劉邦처럼 행동하여야 한다.'

1355년 곽자흥이 죽은 뒤 홍건적의 두목이 된 주원장은 이듬 해 남경을 점령하고 1364년엔 吳王을 자칭한다. 역시 왕을 참칭하던 張士誠을 무찌른 그는 양자강 남쪽의 江南지역을 통일하였다.

1368년 1월 그는 남경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국호를 大明이라 하였다. 주원장은 그 직후 북경을 점령, 원을 북으로 내쫓았고, 그 뒤 약20년간 끊임 없이 北元(몽골로 물러간 원의 잔존세력)을 쳤다. 1387년에 元의 최후 主力인 만쥬리아 군단을 격멸, 통일을 사실상 완성한다.

주원장은 貧農 출신의 정서를 살려 重濃정책을 썼다. 大商人과 大地主들을 미워한 그는 이들의 재산을 몰수, 황무지로 강제이주시켰다. 그는 建國 공신들을 거의 다 죽였다. 지식인들도 무자비하게 숙청하였다. 그는 가족만 믿고 측근은 불신하였다.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이 30만 명을 넘었다고 하니 중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황제중 한 사람이다.

문서 작성의 편의를 위하여 미리 승인을 받은 것처럼 도장을 받아 놓은 이른바 '空印의 案'을 트집잡아 이 문서를 취급하였던 全國의 관리들을 모조리 죽였다. 관리들과 지식인들이, 光, 秀, 僧, 道, 生이란 글자를 이용하여 비천하였던 자신의 과거를 비꼰다고 오해한 그는 이런 한자를 쓰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였다. 예컨대, '천하에 道가 있다'는 글을 써놓으면 道가 盜와 발음이 같다고 하여 한때 도적떼였던 황제를 가리킨 것이라 曲解, 대역무도죄로 죽이는 식이었다.

1385年에는 郭桓 사건이 일어난다. 戶部侍郎(호부시랑)인 郭桓이 경리부정을 일으켰다고 사형을 시킨 후 그와 조금이라고 관련 있는 수만 명을 연좌시켜 죽였다.

그는 아들 장남인 朱標에게 황제 자리를 물러주려고 계획하였는데, 큰 아들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다. 이를 걱정한 주원장은 아들을 위협할 만한 權臣들을 모조리 죽였다. 자신이 죽기 직전엔 건국 공신들을 중심으로 약3만 명을 죽였다. 그런데 1392년 그 朱標가 죽었다. 주표의 아들을 황세손으로 지명해놓고 생각하니 또 후사가 불안해졌다. 그는 1398년에 죽을 때까지 피의 숙청을 계속하였다. 享年 71세였다.


이렇게 잔인한 그였지만 가족들을 끔찍이 아꼈다. 어릴 때 고아가 된 주원장은 가족의 품이 늘 그리웠다. 군사적 소질이 없는 가족들에게도 군대 지휘까지 맡겼다. 상인, 지주, 지식인들에 대한 그의 증오와 농민들에 대한 동정심은 그의 소년 시절 생활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주원장의 무덤이 南京에 있다. 어제 남경에 도착한 필자는 오늘 오전 강연을 마친 뒤 오후엔 明孝陵을 구경하였다.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명단에 올랐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 시설중 하나이다.

명효능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고 지하궁전과 地上궁전, 성벽으로 구성된 하나의 도시였다. 墓域을 둘러싼 성벽은 길이가 22.5km였다고 한다. 그는 죽기 전 이 무덤 건설 사업을 명령하였고 완성하는 데 25년이 걸렸다.

대부분의 목조 건물은 그 뒤의 戰禍로 불타버렸다. 이 墓域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明樓이다. 지하궁전을 둘러싼 성벽의 關門과 같은 요새인데, 원래 모습을 많이 보존하고 있다.

명효능의 수수께끼는 주원장의 무덤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이다.
明樓 뒤에는 寶頂이란 언덕이 있다. 둘레 1100미터, 높이 130미터, 직경 400미터의 원뿔형인데 그 지하에 주원장과 마황후의 무덤이 있고, 여러 가지 지하시설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주원장을 묻을 때 도굴을 염려한 신하들이 똑 같은 棺을 13개의 성문을 통하여 동시에 내보냈다고 한다. 진짜 주원장의 관은 북경에 묻혔다는 소문까지 났다. 중국 정부는 1997년에 위성 위치 측정 장치까지 동원하여 寶頂 일대를 탐사하였다. 그 결론은 지표면에서 수십 미터 들어간 지하에 주원장의 진짜 棺이 안전하게 묻혀 있다는 것이었다. 도굴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寶頂의 약60%는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라 한다. 작은 산 같은 이곳으로는 멋진 산책길이 나 있다.

명효능이 있는 산은 紫金山이라고 불린다. 이 산의 다른 기슭에는 신해혁명으로 淸을 멸망시킨 근대 중국의 아버지 孫文의 무덤인 中山陵도 있다. 명효능 바로 근처에는 삼국지 시절의 吳나라 왕 孫權의 무덤도 있다. 손권, 주원장, 손문은 다 남경을 근거지로 하여 천하를 잡았거나 노렸던 이들이다.

남경은 중국에서 가장 物産이 풍부한 강남 지방의 중심으로서 북경, 서안, 낙양과 더불어 중국의 4大 역사 도시로 불린다. 지금은 인구가 650만 명이다. 1937년 일본군에 의하여 저질러진 南京대학살로도 유명한 도시이다. 이 도시의 名物은 Y형의 키 큰 플라타나스 가로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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