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人宗의 명령을 받아 金富軾이 주관하여 만든 三國史記는 1145년에 완성되었다. 민족사 2000년 역사 가운데 1000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正史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김부식은 이 책을 편찬할 때 《古記》, 《海東古記》, 《三韓古記》, 《本國古記》, 《新羅古記》 등 지금은 전하지 않는 옛 기록을 제1차 史料로 삼았다. 중국 史料와 우리의 史料가 어긋날 때는 우리 것을 우선적으로 썼다고 한다. 삼국사기엔 고조선, 가야, 동예, 옥저, 삼한, 발해 등의 역사는 빠져 있는데, 이것은 먼저 출간된 《舊三國史》를 읽기 쉽게 정리한 형식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의 간행본은 없어지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태조와 중종 시절에 간행되었다.
*韓民族의 성경
만약 三國史記가 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우리는 三國시대 1000년을 중국과 日本 史書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짐작하면서 神話와 說話처럼 이해하여야 했을 것이고 한국인은 아주 얕은 역사를 가진 2등 민족 취급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三國史記가 있으므로 삼국시대가 있고, 민족의식이 생긴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는 한국인을 한국인으로 만드는 기억정치이다. 성경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처럼 삼국사기를 모르면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데 문제가 생긴다.
이 三國史記를 쉽게 접하지 못하게 하는 몇 가지 제약조건이 있었다. 필자의 경우엔 중학생 때의 역사 교육이 잘못된 先入見을 주었다. 역사 교사가 자신 있게, 때론 울분을 토하듯이 말한 몇 마디가 삼국사기를 멀리 하게 하였다.
"삼국사기는 사대주의자인 김부식이 사대주의적 관점에서, 또 신라 중심으로 쓴 것이다."
이 말이, "대한민국은 親美주의자인 李承晩이 친일파를 업고 세운 나라이다"는 주장처럼 왜곡된 거짓임을 깨닫는 데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다. 필자가 삼국사기를 읽은 것은 나이 50을 넘겨서이다. 기독교 신도가 성경을 그 나이에 처음 읽는다고 생각 해보라!
*삼국 왕들을 중국의 황제와 同格으로 대우
三國史記는 민족주체적 관점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쓰여졌다.
이 책은 紀傳體로 작성되었다. 기전체란 司馬遷의 史記에서 처음 채용된 구조인데 인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다. 임금 이야기는 本紀, 제후 이야기는 世家, 신하의 이야기는 列傳에 넣는다. 조선조 때 편찬한 '高麗史'는 歷代 왕들의 이야기를 '世家'로 분류하여 기술하였다.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조 지배층은 고려를 중국에 종속된 제후국 정도로 본 것이다.
金富軾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중국과 맞먹는 독립王朝로 생각하여 本紀에 넣어 기술하였다. 즉 삼국의 왕들을 중국의 황제와 同級으로 놓은 것이다. 황제를 칭하는 '폐하(陛下)'나 황제에게 올리는 글을 뜻하는 '표(表)' 등의 용어도 사용하였다.
신라本紀를 쓸 때는 신라를 '우리(我)'라고 표현하고, 고구려本紀를 쓸 때는 고구려를, 백제本紀에선 백제를 '우리'라고 표기하였다. 고구려와 신라가 唐과 싸우는 기사를 적을 때 敵은 唐이고 고구려와 신라는 우리편이다. 주체성과 객관성에 입각한 기술방식이다.
고구려本紀는 동명성왕에서 시작하여 보장왕에서 끝난다. 신라本紀는 박혁거세에서 시작, 경순왕에서 끝난다. 신라本紀엔 삼국통일 이후의 역사가 포함되어 고구려本紀보다도 길다. 하지만 삼국통일 때까지만 계산해 보면 고구려本紀가 신라本紀(박혁거세~문무왕)보다 약간 길다. 이는 신라중심으로 쓰여졌다는 통설에 어긋 나는 결과이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는 고구려, 백제에 관한 기록은 적었고, 신라에 대한 기록은 많았을 것이다. 고구려, 백제는 삼국통일로 망해버렸지만 신라는 勝者였다. 신라 경순왕은, 고려에 평화적으로 정권을 넘김으로써 신라귀족들은 고려귀족으로 變身하였다. 따라서 신라의 자료가 압도적으로 많았을 것이다. 그런 자료량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최대한 공정한 편집방침을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金庾信을 최고 인물로 봐
列傳에 누구를 넣고 빼느냐를 보면 편찬자의 인물관이 드러난다. 69명이 소개되었는데, 압도적 분량이 金庾信에게 할애되었다. 태종무열왕 기록보다도 50% 정도가 더 길다. 열전 10권중 1~3권이 金庾信 이야기이다. 경주 金氏인 김부식이 가야 金氏인 김유신을 이렇게 비중 있게 다룬 이유가 흥미롭다.
列傳에서 金庾信에게 배분된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환산하여 약200장이다. 그는 생생한 묘사와 드라마틱한 사건을 통하여 ‘살아 있는 인격체’로 再生되었다. 김유신은 死後 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일반인이 이런 대우를 받은 경우는 한국 역사상 유일하다. 김부식은 김유신을 ‘삼국시대의 제1인물’로 평가하였던 것 같다. 김유신을, 후손들이 닮고 싶어하는 모범사례로 만들려 했을 것이다.
김유신 열전의 마지막에서 김부식은 論評 형식으로 이렇게 요약하였다.
<신라에서 유신을 대함은 친근하여 틈이 없고, 위임하여 변함이 없었다. 꾀를 내면 말을 다 들어주어 부리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못하게 하였다>
김유신은 亡國(금관가야)의 왕족이었으나 군인을 알아주는 시대에 태어나 兵權을 쥔 제2인자로서 네 왕(선덕여왕, 진덕여왕, 태종무열왕, 문무왕)을 모시면서 통일大業의 꿈을 이뤘다. 군인을 멸시하는 조선조에서 태어나 국가의 뒷받침을 받지 못하고 고독하게 싸워야 하였던 李舜臣의 비장한 생애와 대조되는 것이 김유신의 장엄한 79년 생애였다.
김부식은 김유신을 ‘자주정신의 化身’으로 그렸다. 당시 신라 지도부가, 세계최대강국이던 唐의 힘을 빌어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唐마저 한반도에서 축출하여 민족통일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김유신은 엄청난 말들을 내뱉는다.
“대장군이 황산벌의 싸움을 보지 못하고 늦게 왔다고 죄를 주려 하는데 나는 결코 죄 없이 욕을 당할 순 없다. 먼저 唐軍(당군)과 싸워 결판을 낸 다음 백제를 부수겠다.”
(唐將 蘇定方이 김유신의 副將을 벌 주려 하자 김유신이 반발하면서 한 말)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하였는데 어찌 스스로를 구원하지 않겠습니까?”(백제 멸망 후 唐將 蘇定方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태종무열왕에게 對唐결전을 건의하면서 한 말)
*우리가 중국인이 되지 않은 이유
신라공격을 포기한 소정방은 귀국, 당 고종에게 보고를 하니 고종은 “왜 내친 김에 신라마저 치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金富軾은, 이 질문에 소정방이 이렇게 답하였다고 三國史記에 기록하였다.
“신라는 임금이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며 그 신하가 충성으로 나라를 섬기고, 아랫사람은 윗사람 섬기기를 父兄과 같이 하니 비록 나라는 작지만 함부로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말은 唐의 최고 장수가 신라에게 바친 찬사인 셈이다. 이런 대화와 기록은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조 史官들이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金庾信의 言動은 부모님 같은 나라 중국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하여 삭제되었을 것이다.
나는 뒤늦게 三國史記를 읽으면서 삼국통일기의 신라 지도부가 지녔던 정신력에 감탄하였다. 태종무열왕, 김유신, 문무왕 같은 사람들의 무서운 自主정신이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기 668~670년 사이 문무왕과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 지도부가 對唐결전을 선택하지 않고 唐 지배체제 아래서 순응하는 자세를 취하였더라면 韓民族은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점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삼국사기가 가르치는 가장 큰 교훈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국인들이, 對中결전을 각오하지 않고는 남북통일을 이룰 수 없고, 평화공존이란 명분하의 分斷고착을 선택하면 자주와 독립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경고.
*삼국통일의 원동력은 복수심
三國史記는 400년 전에 나온 일본의 正史 日本書記에 비교하면 내용이 정확하고 이성적이다. 김부식은 유학자로서 검증되지 않은 說話나 異說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라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소개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日本書記를 읽으면 어디까지가 神話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헷갈려 안개 속을 헤매는 느낌인데, 삼국사기는 명료하다.
특히 문무왕條에 실려 있는 '答薛仁貴書'는 신라 지도부의 교양과 안목, 그리고 시대정신을 이해하게 해주는 천하名文이다. 나는 민족사 2000년을 통틀어 이 외교문서를 第一名文이라고 평가한다. 그 가운데 이런 귀절이 있다. 唐將 薛仁貴가 당에 도전하고 나선 신라를 배은망덕하다고 책망하는 데 대하여 문무왕이 답하는 문장의 일부이다.
<1만 명의 唐兵이 신라의 도움으로 먹고 입었으니 劉仁願과 병사는 비록 漢나라 땅에서 태어났으나 피와 혈육은 신라 것이라 할 것이다>
'皮骨雖生漢地 血肉俱是新羅'라는 표현은 백제지역에 주둔한 唐兵을 먹여살리기 위하여 신라가 감당하였던 고통을 직설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이런 인간적 표현들이 많아 소설적이기도 하다. 서기 660년 백제가 항복하였을 때 나중에 문무왕이 되는 태종무열왕의 아들 金法敏은 <의자왕의 아들 隆(융)을 말 앞에 꿇리고 그 낯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지난 날 너의 아비가 내 누이를 원통하게 죽이고 옥중에 묻어 나로 하여금 20년간 마음 아프고 머리 앓게 하였으니, 오늘의 네 목숨은 나의 손에 있다"하나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이 없었다>.
김법민이 가슴에 품고 있었던 원한이란 그 18년 전인 642년 大耶城(대야성. 지금의 합천) 전투에서 아버지 金春秋의 사위와 딸이 백제군에게 항복하였으나 죽임을 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三國史記 선덕왕條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기둥에 기대어 종일토록 눈을 깜박이지 않고 사람이나 동물이 앞을 지나가도 살피지 않더니 이윽고 말하기를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없애지 않겠는가"하고 왕에게 나아가 "신이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고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겠습니다"하니...>
이때부터 김춘추의 목숨을 건 외교가 시작되어 드디어 648년 唐 태종과 羅唐동맹을 맺게 된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신라 지도부의 복수심에서 생긴 면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백제는 왜 降將(항장)을 용서하지 않고 죽였던가? 백제가 품었던 원한의 뿌리는 서기 554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백제+가야+倭의 연합군 3만 명과 신라군 3만이 지금의 충북 옥천 관산성에서 결전, 백제의 聖王이 포로가 되고 백제 연합군이 전멸하였다. 신라의 진흥왕은 성왕의 딸을 小妃(소비)로 맞은 관계임에도 하급 무사를 시켜 성왕을 목 베어 죽이고 屍身을 백제에 돌려주지도 않았다. 백제 의자왕이 집요하게 신라를 친 데는 백년 묵은 원한을 갚겠다는 뜻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신라-백제 감정이 韓日감정으로 轉移되다
백제와 신라의 원한은 백제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멸망한 백제 땅을 관할하게 된 것은 신라가 아니고 唐이었다. 백제 땅에선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백제의 동맹국인 倭는 663년 400척의 군함에 3만 명의 대병력을 태워 보냈다가 羅唐연합작전으로 전멸한다. 唐將 유인원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엔 신라까지 복속시켜 한반도 전체를 唐의 지배하에 둔다는 大戰略에 맞춰 서기 665년 就利山이란 곳에 문무왕과 夫餘隆(의자왕의 아들. 당에 의하여 옛백제 땅을 다스리는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을 불러 억지 會盟을 시킨다. 문무왕은 5년 전 자신이 얼굴에 침을 뱉었던 그 隆과 형제관계를 맺고 평화를 다짐하여야 하였다. 이때 문무왕과 김유신은 판단하였을 것이다. 唐과 힘을 합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엔 唐과 결전, 이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지 않으면 唐의 조종을 받는 백제 세력에게 당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신라 지도부로 하여금 은인자중하면서 결전의 기회를 기다리게 하였을 것이다.
676년 신라가 唐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함으로써 백제-신라의 원한관계가 끝난 것인가? 후일담이 있다. 일본으로 건너간 亡國 백제의 지식인들은 일본 정권의 핵심부에 들어간다. 8세기 초 나온 日本書記는 일본 정권의 실세였던 백제系 편집진에 의하여 쓰여졌다. 자연히 그 내용은 신라를 비방하는 것이었다. 신라를 폄하할 목적으로 쓴 책이란 인상마저 든다. 이 일본서기가 그 뒤 일본인의 한반도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韓日감정의 배경엔 신라-백제의 敵對감정이 깔려 있는 것이다.
12세기 중반 三國史記를 편찬하면서 金富軾은 日本書記를 참고하고 의식하였을 것이다. 三國史記는 신라, 고구려보다는 백제를 다소 홀대하는 기술을 하고 있는데 日本書記에 대한 유감의 표시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三國史記는 재미 있는 책이다. 한국인으로 의식하면서 살아가려면 이 책을 의무적으로 읽어야 한다.
三國史記는 韓民族의 성경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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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4-26, 1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