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불안'의 노예가 된 明태조 주원장(朱元璋)

주원장이 어진 임금에서 포악한 임금으로 변모한 원인은 정치 투쟁의 필요보다는 심리적 요인에 있었다.
주원장은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6부를 설립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를 개혁했다. 또한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황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통치 중하반기에 공을 세운 충신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걸핏하면 수만 명을 연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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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아명이 重八로 안휘성 봉양 사람이다. 일찍 부모를 잃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어린시절 출가했다. 1352년 사람을 이끌고 홍건군에 들어가 元나라 말의 농민 봉기에 참여했으며, 1368년 明나라를 세워 皇位에 올라 수도를 남경으로 하고 연무를 洪武라 했다. 황제에 오른지 반년 후 지금의 북경을 공격하여 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했다.

주원장은 승상 제도를 폐지하고 6부를 설립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행정기구를 개혁했다. 또한 군사조직을 정비하고 과거제도를 시행하는 등 황권강화를 위한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통치 중하반기에 공을 세운 충신을 대대적으로 숙청했고, 걸핏하면 수만 명을 연좌시켰다.

하버드대 출신의 중국계 심리학자인 웨샤오둥 박사는 주원장을 중국의 역대 황제들과 비교하여 “내면의 자질이 가장 형편없었던 사람”으로 꼽았다. 웨샤오둥 박사는 주원장이 “심각한 성격장애와 인격분열 증상을 겪었다”고 분석했다. 주원장은 비천한 신분에서 황제로 도약한 일생을 살았지만 마음은 오히려 열등감으로 가득 채웠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는 자신의 업적과 황위에 대한 불안이 초래한 것이었다. 심리적 부담감은 커져가는데 성과를 낸 일은 적었기에 업적에 대한 불안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안정감을 상실한 나머지 모든 것을 의심하게 되는 헤어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황권에 대한 불안은 깊어만 갔다. 주원장은 이 두 가지 불안으로 결국 비국을 초래했고 중국역사에서 폭군이 되었다.

주원장은 “나는 요순(堯舜)에 미치지 못했다”면서 임종 직전에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를 ‘마음의 감옥’에 가둔 인물이었다. 웨샤오둥 박사는 주원장의 업적과 잘못을 평가할 때 그가 처했던 시대적 배경과 사건 변화를 관찰하면서 그의 성격변화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중팔에서 원장으로의 성격 변화는 주원장 말년의 건강상태, 그가 복용했던 약, 치료 과정과 기상 등을 기록한 홍무26~28년 사이의 사료를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시절 중팔에서 황제가된 원장으로의 극심한 성격 분열 양상을 추적해야 주원장이 어진 임금에서 포악한 임금으로 변모한 원인이 정치 투쟁의 필요보다는 심리적 요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 웨샤오둥 박사는 주원장의 행동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정치학적 혹은 역사학적 관점으로 접근할 때보다 그에 대해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관련 글] 開國공신을 모두 처형한 明태조 朱元璋
(2014년 5월29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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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日本학자 야마구치 오사무(山口修)가 쓴《中国史を語る》는 明나라를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洪武帝)이 얼마나 많은 人命을 처형했는지에 대해 자세히 기록한 책이다.

    주원장은 부모가 疫病으로 사망해 일찍이 고아가 된 인물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을 딛고 일개 兵卒에서 將軍을 거쳐 皇帝의 자리에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다.

    그는 元나라 말기의 혼란을 틈타 각지에서 일어난 群雄들을 차례로 무찌르며 지금의 南京 땅에 자리를 잡았다.

    주원장이 천하를 평정했을 무렵인 1368년 정월, 南京에서 皇帝의 자리에 올라 국호를 大明, 연호를 洪武라했다.

    皇帝가 된 주원장이 정치적으로 가장 중시한 것은 자신의 전제권력 강화였다. 이를 위해서라면 공을 세운 將軍이나 學者들을 숙청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天下를 얻기 전에는 이들 공신들의 힘을 빌렸지만 일단 목적을 달성하자 남김없이 제거해 버렸다. 이 때문에 歷史學者들은 주원장에 대해 “그 잔인함은, 실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비할 데가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호유용(胡惟庸)이라는 재상의 예를 들어보자. 안휘성 정원현(定遠縣) 출신의 호유용은 주원장의 신하 이선장(李善長)과 절친한 사이로 이선장의 추천을 받아 주원장과 함께 싸웠다.

    호유용은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인물로 明나라 성립 후 중서성(中書省)의 관리를 거쳐 좌승상(左丞相)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는 주원장이 거병 했을 때 활약한 공신 유기(劉基)를 몰아내고, 자신에게 반대하는 일파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전횡을 했다.

    이 때문에 주원장은 그와 사이가 멀어졌다. 또 유기가 病死하자, 호유용에 의한 毒殺이라는 의혹이 일어나 의심이 심한 주원장은 호유용을 더 멀리하며 내심 불신감을 쌓았다.

    그러던 중 1380년 호유용은 北元(明의 건국이후 北方으로 돌아간 몽골), 그리고 日本과 내통해 모반을 일으키려고 한 죄로 주원장에 의해 처형당했다. 당시 連坐制에 걸려 호유용의 무리들이 모두 살해됐는데, 그 수가 무려 1만5000여명에 달했다.

    호유용과 절친했던 이선장도 마찬가지였다. 주원장은 홍유용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명했다. 이 과정에서 이선장의 조카 이존의가 호유용과 몰래 내통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건으로 이선장은 자결을 하고 그와 관련된 인물 1만5000명을 또 처형했다.

    주원장의 광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큰 공을 세운 장군 남옥(藍玉)을 모반죄로 처형했는데, 그와 연루된 사람들이 무려 2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건국을 위해 몸 바친 文武의 인재들은 이렇게 해서 주원장 말기 약 10여 년 사이에 모조리 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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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철권을 휘두르던 주원장도 1398년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뜬다. 그의 죄가 컸는지 하늘은 그의 첫 아들과 둘째아들, 그리고 셋째 아들을 모두 일찍 요절시켰다.

    주원장의 뒤를 이은 것은 16세의 황태손(皇太孫)으로 이듬해 지어진 연호를 따라 건문제가 됐다.

    거의 모든 中國왕조는 建國 초 수 많은 인명을 처형했는데, 대체적으로 중국 역사학자들은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자신들의 과거사를 두둔한다. 

    주원장의 開國 초기 暴政을 보면서 세삼 대한민국을 建國한 李承晩 대통령과 5.16으로 정권을 잡아 産業化를 이룩한 朴正熙 대통령이 위대해 보인다.

    이 두 거인은 建國과 産業化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적을 不法으로 숙청한 적이 없다. 李承晩 대통령은 共産化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했고, 朴正熙 대통령은 우리 民族을 역사상 최초로 배고픔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주원장도 북한 독재자 김일성-김정일에 비하면 양반이었다)

    김필재 spooner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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