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甲濟의 세계사 산책/유대인과 탈북자를 보호한 불가리아 이야기

유럽에서 가장 오랜 國名

불가리아와 오토만-투르크


불가리아라는 이름은 유럽의 국명(國名)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서기 681년 東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 부족의 칸(Khan) 아스파루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함으로써 불가리아라는 국가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기 865년 불가리아 왕 보리스 1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종교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비잔틴의 동방정교도 아니고, 카톨릭도 아닌 불가리아 교회를 창설했다. 서기 9세기 후반 시릴과 매소디우스 형제는 古불가리아 문자를 발명하였다. 그때는 라틴語와 그리스語만 쓰일 때였다.

불가리아 문자는 세르비아와 러시아로 퍼져갔다. 러시아 문자의 기원이 불가리아語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소피아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0세기 초 불가리아는 시미온王의 治世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영토는 흑해(黑海)에서 아드리아海에 이르고 많은 문학, 예술, 건축 작품이 탄생하였다.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걸린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비잔틴의 식민지가 되어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저항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나 서기 1185년에 피터4세의 지도下에 독립을 쟁취, 제2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14세기 불가리아는 다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오토만-투르크의 팽창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의 최남단에 위치한 불가리아는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아시아 세력에는 항상 길목이 되어 제1파(波)의 공격을 견디어야 했다. 14세기 오토만-투르크는 유목 기마민족의 특징인 기마술과 활을 결합한 막강한 군사력에다가 이교도를 이슬람化한다는 聖戰의 사명감으로 무장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그리스, 발칸반도, 불가리아가 오토만-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간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500년에 걸친 오토만-투르크의 지배를 후진성의 이유로 꼽고 있다. 西유럽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에 있던 죄로 해서 아시아 및 이슬람 세력의 西進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다가 보니까 희생을 크게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불가리아가 西유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투르크族이 건설한 이 나라가 9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데서 비롯된다. 비록 불가리아가 투르크族의 나라로서 백인들의 나라인 西유럽보다는 인종적으로 오토만-투르크와 더 친근한 데도 불가리아는 종교적 충성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 교수는 1993년에 포린  어페어誌에 발표한 「문명의 충돌」이란 유명한 논문에서 『사람들이 이중국적을 가질 수가 있지만 반은 기독교도이고 반은 이슬람교도일 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종교가 인종적 동일성보다도 인간의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헝가리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한국의 기독교화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族도 불가리아族처럼 투르크族의 한 부족이었으나 10∼11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西유럽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13세기초에 몽골 기마군단(지휘부는 몽골족, 그 이외는 대부분이 투르크族으로 구성)이 쳐들어왔을 때는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최전방이 되어 희생적으로 싸웠다. 한 역사학자는 마자르族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은 유럽의 가장 성공적인 투자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기독교화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지 2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全인구의 약 4분의 1이 기독교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더구나 사회적, 경제적 신분이 높을수록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높은 것과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화 및 민주화 과정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감안한다면 이 종교가 한국사회를 脫유교화시켜 서구지향으로 끌고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가리아와 헝가리처럼 한국도 서구 기독교 문명권의 가장 성공적인 투자로 판명되어질 것인가. 예컨대 21세기에 중화문화권과 미국이 패권을 다툴 때 한국은 제2, 제3의 불가리아, 헝가리가 되어 미국의 편을 들 것인가, 아니면 중국 편을 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中正하여 兩大 세력 사이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하나 흥미 있는 관점은 몽골족이 세운 국가들은 대체로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몽골, 한국, 일본, 티벳(국가는 아니지만), 월남, 카자흐스탄이 그런 그룹이다.

이들 나라는 최근 들어서, 또는 전통적으로 미국과는 사이가 좋다. 이들 몽골 국가는 공교롭게도 동서남북으로 중국을 포위하고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은 중국 학생들보다는 일본 학생들과 친밀해지기가 더 쉽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문화적 친근성으로 따지면 중국인과 더 친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인종적 친근성에서 비롯된 공통된 감수성이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줄을 잘못 선 나라

불가리아를 오토만-투르크의 지배하에서 구출해준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78년 투르크를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켰다. 공산주의 시절에 불가리아가 가장 친소적(親蘇的) 국가로 남아 있었던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줄을 잘못 선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국제정세가 급변할 때 지도자 그룹이 선택을 잘못하면 국민들이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 나라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편에 서도록 했다는 점일 것이다. 1913년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졌다. 다음 해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 편에 섰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하여 러시아 전선에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왕은 나치 독일의 압력을 뿌리치고 自國 內의 수십만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불가리아의 민중들은 대중운동을 통해서 정부에 압력을 넣으면서까지 유태인의 보호에 힘썼다고 한다. 1944년 소련군은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공산화했다.

저명한 국제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집권했다가 사망한 뒤에는 투도르 지프코프가 1954년부터 1989년까지 집권했다. 공산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1인 장기집권下의 공산국가는 공산당 내의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체제를 자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집단을 양성할 수가 없게 된다. 동구(東歐) 공산국가들 중 체제전환기를 그래도 잘 넘긴 것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처럼 공산주의 시절에 이미 공산당 엘리트들이 고민하고 국민들이 피의 저항을 하는 등 몸부림쳐본 적이 있는 나라들이다.

반대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1인 장기집권으로 그런 시도조차 못해 본 나라들로서 체제전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역사 발전에는 공짜가 없는 것이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서기장 지프코프는 1984년에 불가리아 국민으로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터키系 사람들에게 이름을 기독교-슬라브式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에 반발한 터키系 사람 약 30만명이 터키로 이주해버렸다. 이중에는 희대의 역도선수 슐레이마노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많은 전란과 압제를 당하고도 보복을 하지 않았던 관용과 인내의 불가리아 사람들은 지프코프의 이 정책이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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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불가리아 방문기

불가리아의 최초 탈북자(脫北者)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출발하여 2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공항에 내리니 꼭 시골 간이역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뉴스도 암담한 것이었다. 불가리아가 외환 부족과 인플레 및 은행의 不實로 사실상의 파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IMF도 금융개혁을 하지 않으면 구제대출을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수십 개의 은행과 國營기업이 정리대상이 돼 있다는 것이다. 외환보유고는 작년의 12억 달러에서 올해는 지난 10월 현재 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청년공산당 조직가 출신인 현 비데노프 수상 정부는 국영기업의 民營化를 늦추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올해는 선거의 해이기 때문에 대량 실업을 부르는 국영기업 정리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실업률이 거의 20%에 육박하고 있다. 物價는 월평균 인상률이 두 자리 숫자이다.

 3일간 불가리아 문화부 장관 이반 마라조프, 외무부 대변인 카라시메오노프, 필립 디미트로프 前 수상, 소피아 대학 교수 드라간 드라가노프氏들을 만났다. 불가리아가 건국된 지 1300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한결같이 생각이 깊고 신중하며 인내하는 인상들이었다. 고통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숙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 동구 여행에서 실감했다. 마라조프 문화부 장관은 『나는 터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성장했는데 어떤 차별의식도 갖지 않고 자랐다. 우리 헌법에는 소수민족이란 말까지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과 거의 면적이 비슷한 이 나라의 인구는 약 900만 명인데 약 9%가 터키系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당도 갖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우리를 안내한 崔東俊씨는 脫北人이었다. 함흥이 고향인 崔씨는 1956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대학에 유학을 왔다. 수리공학과(水理工學科)에 다니다가 졸업을 열흘 앞둔 1962년 초 駐불가리아 북한대사 임춘추의 호출을 받았다. 대사는 내일 즉시 귀국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닌가. 네 학생은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충직한 친소(親蘇) 공산국가였지만 북한에 비하면 天國이었다. 네 청년은 金日成이 말하는 평등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의 바람이 든 네 청년은 자신들에 대한 정보 보고가 평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소환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소피아 근교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산은 소피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비토샤山이었다. 기자 일행은 崔씨와 함께 비토샤산에 올라가 소피아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회고담을 들었다. 나라는 망해도 山河는 아름답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감상하면서 듣는 절박한 옛 이야기는 기자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崔씨와 친구들은 산 속에 숨어살다가 소피아 시내로 빠져 나와 영화구경을 했다. 영화관에서 나오다가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대사관 5층에 감금되었다. 철사로 꽁꽁 묶인 채였다. 이상종(李尙鍾)씨와 李상직씨는 탈출했다. 李尙鍾씨는 『우리를 감시하던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옆방으로 간 사이 이불 천을 잘라 끈을 만들어 타고 내려갔다』고 했다. 李씨는 『우리가 귀환 명령을 거부한 데는 6·25의 진실을 알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불가리아에 유학 중 인민군 출신 선배를 만났다. 그는 『나는 그때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있었는데 새벽에 깨우더니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고 실토하더란 것이다. 이 네 학생들은 귀환을 거부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서 북한 대사관에 부치기도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북한의 외교 단절로 비화(飛火)

 이상종(李尙鍾)씨는 『대사관에 감금돼 조사를 받을 때 저들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사주하여 탈출하게 되었다고 허위자백을 하도록 강요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버티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분쟁으로 소련편인 불가리아와 중국편인 북한은 사이가 좋지 않을 때였다. 먼저 탈출한 두 사람은 불가리아 당국에 신고했다. 탈출 못한 두 친구가 소피아 공항에서 평양行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지기 직전에 불가리아 당국의 개입으로 구출되었다. 북한 대사관 측에선 자진귀국이라고 우겼다. 불가리아 측에서는 월맹 대사관 사람을 입회시켜 두 학생의 진의(眞意)를 확인시켰다. 이 자리에서 최동준(崔東俊), 최동성(崔東成)씨는 여권을 찢어 버렸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번져 불가리아 정부는 북한 대사를 추방했고 북한도 불가리아 대사를 추방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네 사람에게 國籍을 주지는 않았지만 거주는 허용했다.

 네 망명자가 불가리아 국적을 얻은 것은 공산주의 붕괴 후인 1991년이었다. 현재 대통령 젤레브씨는 네 한국인들과는 소피아 대학 동창으로서 이들의 國籍 취득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崔東俊씨는 음료수 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불가리아 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있다. 딸은 치과의사이고 아들은 소피아 대학 수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엉덩이에 시퍼런 몽골 반점이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놀라더군요.』

 崔씨는 지난해 우리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해외동포 수기(手記) 현상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기념식에도 초청받아 조국을 찾았고 청와대에도 초대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崔씨는 돌아올 때 배추씨를 갖고 와서 심었는데 사람 몸통만한 배추가 자라 소피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李尙鍾씨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고 李상직씨는 삼성물산 지사장으로 있으며 崔東成씨는 화학공장 副공장장으로 있다.

우리의 고향은 몽골고원

 불가리아는 유럽의 동남쪽 변경에 자리잡고 있어 동쪽 아시아에서 밀려오는 몽골-투르크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유라시아 草原의 서남단(西南端)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록 산악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지형이지만 초원의 질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가리아라는 국명(國名)은 몽골-투르크族에 속하는 불가르(Bulgar)族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불가리아는 이 불가르族이 서기 7세기에 카스피海 북쪽 지금의 러시아 남쪽 草原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와서 이곳의 정착민인 슬라브族을 정복하여 세운 국가에서 기원한다. 보지다르 디미트로프라는 학자가 쓴 「불가리아人-슬라브族을 개명(開明)시킨 사람들」이란 책에는 불가르족의 원거주지는 몽골고원이었다고 적혀 있다. 예수 탄생 전 수백년 동안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했던 흉노를 자신들의 선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에는 이 몽골에서 한국인의 선조와도 섞여 살았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부족명을 국명으로 쓰고 있는 또 다른 나라는 헝가리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국명을 마자르(Magyar)라고 부른다. 마자르族도 유목민족인데 서기 5∼7세기경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불가르族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은 서기 4∼7세기 사이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국가(부족국가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불가르란 말은 혼합이란 뜻이라고 한다. 부족연합인데다가 인종·종교의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초원의 법칙이므로 불가리아族은 몽골族에서 아리안族까지 섞여 있는 지금의 아메리카와 비슷한 다종족 사회였다.

불가리아族의 특징은 큰 건축물을 짓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제철기술(무기를 항상 많이 만들어야 하는 유목민 사회에선 제철기술은 늘 앞서 있었다)과 천문관측기술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학자들은 이들이 만든 달력은 세계에서도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는 이 달력을 그대로 세계공통의 달력으로 채택하자는 논의가 유네스코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불가리아族은 장신(長身)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중세 사람들의 평균 키는 160cm인데 불가리아族은 175cm였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군율(軍律)도 엄했다. 1∼2년간의 의무복무를 끝내면 軍馬 두 마리와 무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출동하는 예비군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 군마를 전투가 아닌 사용(私用)으로 부리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의 西進

 서기 7세기 중반 불가리아族은 다른 유목민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유목민족 국가의 한 특징은 영토개념이 거의 없으므로 불가항력일 때는 사수(死守)가 아닌 퇴각을 택한다. 그들의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처럼 땅에 붙박인 게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리아國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이사(移徙)를 결정했다. 主流는 북쪽 볼가강으로 이동하여 국체(國體)를 보존했다. 불가리아 왕자 세 명은 볼가강쪽으로 이동하는 데 반대하여 서쪽으로 무리를 데리고 나아갔다.

  장남은 지금의 독일 남부 바바리아 왕에 복속하기로 했으나 의심 많은 왕은 이들이 잠든 사이 습격하여 몰살시키려 했다. 생존자들은 탈출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北이탈리아 지방 롬바르디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곧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도 이곳에는 불가리 또는 불가르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들은 불가리아族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둘째 왕자는 지금의 헝가리서 강성하고 있던 아바르國에 복속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동조자들을 이끌고는 지금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정착한다. 셋째 왕자가 불가리아의 국부(國父)에 해당하는 아스파루 칸(Asparuh Khan)이다. 이 칸이란 명칭은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의 중요한 상징어인데 王을 지칭한다. 신라가 아직 부족국가 단계에 있을 때 왕이란 호칭 대신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간(干)은 칸의 한자표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의 동쪽 끝과 유럽의 남쪽 끝에서 왕을 칭하는 중요한 정치적 용어가 같았다는 것은 몽골-투르크 정치체제의 광범위한 확신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한국인이 이 문화권과 같이 호흡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사력이란 자본

 아스파루 칸은 수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뉴브江 하류 삼각주 지방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곳을 불가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볼가강변의 불가리아와 다뉴브강변의 불가리아 두 개의 同族 국가가 생긴 것이다. 다뉴브 강변의 원주민은 슬라브族이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있던 비잔틴 제국(東로마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슬라브 귀족들은 불가리아 부족의 기마군단이 가진 강력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아스파루 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수의 불가리아 군사집단과 다수의 슬라브 민족이 일종의 합작회사를 구성한 것이다. 이 합작회사의 대표는 군사력이란 다수 주식을 소유한 불가리아였다. 사람들의 머리수가 아니라 군사력이 위력 있는 자본이 될 수 있던 시대였다. 이 자본(기마군단)을 잃지 않는 한 기마군단은 어디를 가든지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기마군단은 이 시대에는 국가도 살 수 있는 통화이자 자본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의 언론이 김우중(金宇中) 회장의 동구권 투자를 징기스칸의 유럽침략에 비교하고 그의 세계경영을 몽골식 전략과 비슷하다고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영토, 조국, 고향, 조상과 같은 정태적이고 폐쇄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버리고 자본(군사력)과 정보(기동력)만 있으면 어디를 가든지 나의 세계(국가나 회사)를 만들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金宇中식은 전형적인 몽골 기마군단식 기동 전략이다. 이 전략의 요체는 기동력이다. 군사력(자본)을 신속하게 전개시킬 수 있게 했던 말(馬)은 세계화 시대에는 경영자의 빠른 결정과 정보수집 능력에 비교할 수 있다. 金宇中 회장의 행동양식을 분석해 보면 기동성을 그 어떤 요소보다도 중시하고 있다. 金회장은 1988년 서울 올림픽 직전부터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을 돌면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나라가 있으면 지도층과 담판을 지어 대규모 투자계획을 확정짓는 식으로 전략거점을 선점해 나갔다고 한다.

 金宇中씨는 6·25 때 대구에서 신문팔이 고학을 했다고 한다. 金宇中 소년은 신문이 나오면 무조건 시장 상인들에게 한 부씩 갖다 놓고 시장을 한바퀴 돈 다음에 수금을 하러 다녔다고 한다. 물론 수금을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先手를 치는 이 전략이 대체로 적중했다는 것이다. 전쟁이나 경영에서는 전략적 거점을 선점하는 것이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것을 그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체험으로서 터득한 것이다.

 金회장은 회사는 꼭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수하고 매입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농경민족과 제조업 종사자들은 농토와 회사는 만들고 가꾸고 지키며 물려주는 것이란 고착 관념을 갖고 있다. 유목민족과 무역업자와 상업종사자들은 군사력=돈만 있으면 나라는 정복하여 접수하면 되고 회사는 좋은 것을 골라잡으면 되는 것이란 상당히 유연한 발상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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