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이 4km이다. 이 해협이 발틱海의 목구멍이다. 이곳을 장악하면 北歐와 독일 및 러시아가 이용하는 발틱海를 통제하게 된다. 15세기부터 해양강국 덴마크가 이곳에 크론보그 요새를 짓고 출입하는 선박으로부터 통과세를 받았다.
요새가 있는 마을 이름은 헬싱괴르인데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의 무대이다. 관광객들은 크론보그성을 '햄릿城'이라고 통칭한다. 이 성은 바다로 돌출한 곳에 있어 더욱 장대하다. 세익스피어가 활동하던 16세기 이 城은 유럽에서 유명하였다. 덴마크 왕들은 이 성에서 여름을 보내기도 하였다. 헬싱괴르가 덴마크의 수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세익스피어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이 城의 정원에서 공연되었다. 그 뒤에도 '햄릿'이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최근엔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거드, 크리스토퍼 프러머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였다. 크론보그성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시절의 城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론 덴마크가 발트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던 황금기를 상징한다.
1423년 덴마크 에릭왕은 독일 북부의 한자 동맹 소속 상인들을 소집, 스웨덴-덴마크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일단 헬싱괴르에 닻을 내리고 통과세를 내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당시 한자동맹 도시국가들은 北歐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이 해협을 많이 이용하였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핀란드 포함)를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던 强國이었다. 1427년까지 크론보그 요새를 완성한 에릭은 여기에 砲臺를 설치하였다. 세금을 내기 위하여 정박하는 배와 선원들이 돈을 쓸 수 있도록 항구 마을도 개발하였다. 수많은 통과 선박이 19세기까지 거의 400년간 낸 세금은 덴마크를 먹여 살린 큰 財源이었다. 서기 1500년 이전엔 연간 1000척 정도가 이 해협을 통과하였다. 그 이후엔 5000척을 넘었다. 네덜란드 선박들이 많았다.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16~17세기에 여섯 차례 전쟁을 벌였다.
정치적 학살은 주로 반대세력에 겁을 주기 위하여 이뤄지지만 오히려 반발을 불러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엔 거대한 왕궁(王宮)이 평온한 바다를 내려다 본다.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왕궁 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단조롭고 육중하게 보이는 왕궁의 방이 600개가 넘는다. 이 왕궁 정문 앞은 ‘스톡홀름의 피바다’(Stockholm Bloodbath)라고 불리는 사건이 난 곳인데 기념물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스웨덴이란 나라의 탄생지이다. 국가가 피바다 한가운데서 태어난 경우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덴마크를 중심으로 연방국가를 만들어 살아왔다. 덴마크 왕가(王家)가 지배자였다. 16세기 초 스웨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귀족들이 중심이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두 차례 진압군을 보냈으나 스웨덴 반군(反軍)에 밀렸다. 세 번째 진압군은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용병(傭兵)들을 포함한 대군(大軍)이었다. 스텐 스투레가 지휘하는 스웨덴 반군은 연패(連敗)하였다. 스투레도 부상당한 뒤 죽었다.
스웨덴의 귀족회의는 덴마크 왕이 반란 책임자들에 대한 사면(赦免)을 약속하면 다시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반군은 스투레 부인의 지휘하에 그 뒤에도 스톡홀름에서 항전(抗戰)을 계속하였다. 덴마크의 해군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에서 공격해 들어오자 스웨덴 반군은 사면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1520년 9월 7일이었다.
11월 1일 스웨덴의 대표자들은 크리스티안 2세에게 충성을 다짐하였다. 덴마크 왕이 스웨덴 왕위(王位)를 세습하는 데도 동의하였다.
11월 4일 크리스티안 왕은 트롤레 대주교가 집전(執典)한 스웨덴 왕위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 축하 행사도 사흘간 벌어졌다. 7일 크리스티안 왕은 스웨덴의 지도자들을 궁정의 저녁 회의에 초청하였다. 다음 날 저녁, 덴마크 군인들이 난입(亂入), 스웨덴 지도자들을 끌고나가 감금하였다. 9일 트롤레 대주교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지도자들에게 사형(死刑)을 선고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 지도자들은 수년 전 덴마크 王家 편인 트롤레 대주교를 쫓아내려는 모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대주교는 그 음모자 명단을 가지고 보복에 나선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반군을 지원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바깥으로 끌려나가 참수(斬首)되거나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졌다. 이틀간 82명의 스웨덴 지도자들이 처형당했다. 크리스티안 왕은 반군 지도자 스투레와 그의 어린 아들 무덤까지 파헤치고 屍身을 꺼내 불태우게 했다. 이때 처형된 에릭 요한슨의 아들 구스타프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는 스웨덴의 북쪽 달라르나 지방으로 피신,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반란군을 조직, 독립전쟁을 일으켜 덴마크 군대를 쳐부순다.
115년 사이 여섯 번 싸운 덴마크와 스웨덴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년 6월 24일 스톡홀름에 입성(入城)했다. 그 보름 전인 6월 6일 그는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再)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국교(國敎)로 택한다. 1525년엔 신약(新約)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거의 동시에 가톨릭을 버렸다.
덴마크는 1523년에 스웨덴의 독립을 허용한 뒤에도 실지(失地)를 회복, 스웨덴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1563~1679년의 115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전쟁을 하였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스웨덴은 반격에 나서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와 코펜하겐을 2년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덴마크는 결국 북구(北歐)의 패자(覇者) 자리를 스웨덴에 넘겨주고 만다.
스웨덴 수도(首都) 스톡홀름에 아주 인기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VASAMUSEET)이다. 1628년 8월 10일의 처녀항해 때 침몰한 전함(戰艦) ‘바사’를 1961년에 건져내어 복원,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매년 100만명 이상이 구경하러 온다. 낙후되었던 스웨덴을 유럽의 강국(强國)으로 만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대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전함은 상부가 너무 무거워 풍랑이 불자 뒤집히면서 침몰하였다.
전함은 길이가 69m, 높이가 49m였다. 배수량(排水量) 1200t에 64개의 대포를 실었고, 탑승 선원은 400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약 50명이 구조되었다. 침몰한 곳이 해안에 가깝고 얕은 바다 밑이어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1만4000개의 조각을 맞추어 복원한 전함이므로 원래의 재질(材質)에 원래의 모습이다. 전복 사고 후 구스타프 대왕은 관련자를 문책하도록 지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과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설계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전가(轉嫁)하였다. 사고원인은 ‘신(神)의 뜻’으로 귀착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신교도를 지켜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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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전의 아버지’로 불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 |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은 전쟁의 천재(天才)였다. 나폴레옹과 클라우제비츠가 숭배한 장군 겸 왕이었다. 구스타프는 기병, 보병, 포병, 보급부대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기동전을 펼쳤다. 기병과 보병도 대포를 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병과(兵科)가 달라도 서로 도왔다. 전사학자(戰史學者)들은, 그를 ‘현대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대왕은 열일곱 살에 왕이 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영명(英明)한 인물이었다.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그 사신의 나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틴어로 말하고 쓸 줄 알았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1618년 독일을 무대로 한 30년 전쟁 때 그는 신교도(新敎徒) 편에서 참전하였다. 그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구교(舊敎) 편인 합스부르크 왕조(신성로마제국)와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해 갔다. 한때 뮌헨이 있는 바이에른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 군은 당시 유럽 최강이었다. 잘 훈련된 스웨덴 보병의 사격은 명중률이 높았고 발사 시간이 빨랐다. 구스타프 대왕은 1632년 11월 6일 독일에서 전투 중 전사(戰死)하였다. 왕이 죽어도 스웨덴군(軍)은 승리하였다. 스웨덴 왕 가운데 ‘대왕’ 칭호는 그가 지금까지 유일하다. 죽었을 때 나이 38세, 재위(在位)는 21년이었다. 스웨덴은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유럽에서 러시아, 스페인 다음으로 면적이 큰 강국이 되었다.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가 되었다. 전함 바사호 앞에 서면 스웨덴 전성기의 영웅적인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스웨덴 군대가 신교도 편을 들지 않았으면 30년 종교전쟁은 구교도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거의 패배한 신교도 세력을 구한 것이 스웨덴이었다. 한때 스웨덴 군대는 독일의 반을 점령하였다. 30년 종교전쟁에서 그들은 독일에서 1500개의 도시, 1만8000개의 마을, 2000개의 성(城)을 파괴하였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에선 종교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바이킹의 군사적 전통이 다른 모습으로 꽃을 피운 곳이 스웨덴이다.
王을 수입한 노르웨이와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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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군(軍) 원수(元帥) 출신으로 스웨덴 왕위에 오른 칼 요한 14세. |
노르웨이는 138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와 연합국을 이뤘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가 패전국(敗戰國)이 되는 바람에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통치하였으나 큰 압박은 없었고 자치(自治)를 허용하였다.
노르웨이는 1905년 평화적으로 스웨덴과 분리, 독립한다. 이때 국민투표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왕국을 선택하였다. 노르웨이는 오래 전에 王家의 맥이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왕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칼을 모셔 와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바이킹 시절의 노르웨이 왕 이름인 하콘 7세라 칭하고 아들 올라프를 왕세자(王世子)로 임명하였다. 지금 왕은 올라프의 아들인 하랄드 5세이다.
1810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있을 때 스웨덴 왕은 칼 13세였다. 왕세자가 죽어 후손이 끊어지자 귀족회의는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장군을 왕세자로 추대하였다.
베르나도트 장군은 나폴레옹이 신임하는 부하였다. 원수(元帥) 계급을 가졌던 그는 함부르크 일대를 통치하는 총독으로 근무 중 스웨덴의 왕세자로 영입되어 군의 참모총장도 겸했다. 스웨덴이 연합군 편에서 나폴레옹을 공격할 때는 이를 지휘하였다. 1818년 칼 13세가 죽자 베르나도트 장군이 스웨덴의 왕이 되어 칼 요한 14세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왕조(王朝)를 이어가고 있다.














유수불합.
한국당에서 배신자들을 걷어내지 못하면 필망한다. 보수 유권자들이 다 도망간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뭉치자는 무식하고 무책임하고 엉성한 술책에 놀아날 보수들은 없다. 자유배신당에 표를 줄 애국자들은 이 나라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