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 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황제의 사망 200주년 석 달 뒤인 지난 8월 초, 나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우버 택시를 타고 남쪽 워털루 마을로 향했다. 약 30분 걸렸다. 운임은 30유로. 워털루 결전장은 1815년 6월18일 오전처럼 간밤에 내린 비로 젖어 있었다. 2004년 봄에도 여길 온 적이 있어 기념관에 들르기 전에 전장(戰場)이었던 들판을 먼저 걸어보았다. 206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전원풍경, 잡초가 무성한 평지이다. 그날처럼 땅이 질퍽거렸다. 그날 나폴레옹은 대포를 제대로 운용할 수 있도록 땅이 굳기를 기다리느라 세 시간 이상 개전(開戰)을 미뤘고 이게 치명적이었다.
연합군 총사령관 웰링턴 영국군 장군(공작, 이름은 아서 웰즐리)이 현장 지휘소를 설치했던 곳엔 ‘사자의 언덕’이란 기념물이 있다. 226개 계단을 40m쯤 기어 올라가면 사자상이 있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펼쳐진 전투현장이 내려다보인다. 웰링턴이 선점한 북쪽이 약간 높다. 남쪽에 포진한 나폴레옹은 그날 줄곧 완만한 비탈을 올라가면서 공격하였다. 이것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정치나 전쟁에선 상대가 선택한 무대나 조건에서 싸우는 건 늘 위험하다. 유럽 역사가 바뀐 그날 아침 나폴레옹은, 한 번도 웰링턴과 싸운 적이 없었는데도 그를 깔보는 논평을 하곤 했다.
사자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전장은 3X3km쯤 되어 보였다. 여기에 쌍방 약 20만 명의 병력이 뒤엉켜 아홉 시간 동안 대포, 소총, 칼, 창, 기병돌격, 백병전, 포격전으로 격돌했다. 전투가 끝났을 때는 늦은 밤이었고, 이 좁은 땅에 약 5만 명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쓰러져 있었다. 신음, 비명, 확인사살, 확인자살(刺殺) 속에서 동맹군 소속 군인들과 근처 주민들이 몰려와 전사자와 부상자들의 소지품을 빼앗거나 훔쳤다. 특히 전사자들의 이를 뽑아가 치과에 판 이들이 많았다.
워털루 전투 기념관에는 이긴 웰링턴보다 진 나폴레옹이 더 부각되어 있다. 이 부근이 프랑스어권이고 당시 벨기에가 프랑스 지배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다소 편향적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은 웰링턴에게 지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운이 나빴고, 오후에 웰링턴 군대와 합류한 프러시아군의 블뤼헤 장군 때문에 졌다는 식으로 설명하곤 한다. 거의 1000년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영국의 라이벌 의식이 워털루에 투영되고 있다. 특히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유고의 ‘레미제라블’이 워털루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면서 나폴레옹의 불운을 적극적으로, 사실을 왜곡하면서 변호했다. 유고는 신(神)이 나폴레옹을 질투하여 불운의 덫을 놓았다고 했다.
한국의 나폴레옹 팬 박정희
‘웰링턴 때문에 졌을까, 블뤼헤 때문에 졌을까, 아니다 그가 신을 건드렸으니 이길 수 있었겠는가.’
신의 질투가 나폴레옹의 신기(神器)인 포병을 무력화시켰다는 것이다. 전날 밤 비를 쏟게 하여 땅을 진창으로 만드는 식으로. 워털루 기념관의 짤막한 3D 영화보다는 파노라마 관에서 본 길이 110m 기록화가 압권이다. 이 그림도 진 나폴레옹 군대 중심이다. 그날 전투는 나폴레옹군의 포병 일제사격, 보병돌격, 기병돌격, 황제 근위대의 최후돌격 순으로 진행되어 공세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 그림은 워털루 100주년을 맞아 프랑스 화가가 그린 것이다. 그림의 주제는 프랑스 기병돌격이다. 실패로 끝난 돌격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은, 소설적 비장미(悲壯美)는 몰라도 정확한 역사기록은 아디다. 기념관 서점도 나폴레옹 관련 책이 많았다. 나폴레옹 이미지는 여러 상품의 브랜드로 활용되는데, 이 서점에서 산 책을 읽어보니 한 한국 기업인은 그의 유명한 모자를 100만 달러 이상을 주고 매입, 회사에 전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티픈 클라크라는 저술가가 쓴 책을 샀는데 제목이 ‘프랑스는 어떻게 워털루에서 이겼나(혹은 그렇게 생각하는가)’였다. 프랑스인들이 영국을 질투, 나폴레옹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 요설(饒說)을 구사한다는 비판서이다.
한국의 가장 유명한 나폴레옹 팬은 박정희일 것이다. 그는 보통학교 다닐 때 이순신과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 병정놀이를 하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고 한다. 박정희의 최후는 이순신과 닮았지만(“난 괜찮아”,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그의 비장한 생애는 나폴레옹의 판박이다. 두 사람은 식민지에서 태어나 종주국 군대에 들어갔고, 포병장교가 되었으며 쿠데타로 집권해 국가의 기틀을 세웠다. 독서인의 교양으로 근대국가 건설을 주도했으며 이혼 경력, 단신(短身), 사후(死後) 재평가도 공통점이다. 두 사람은 군인, 혁명가, 교사, CEO의 자질을 갖추었지만 큰 차이점도 있다.
나폴레옹은 알렉산더 대왕, 시저, 칭기즈칸급의 군사적 천재로서 16년간 이어진 나폴레옹 전쟁에서 약 300만 명의 죽음을 불렀다. 박정희는 국가건설 과정에서 최악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에 최대의 업적을 남겼다(18년간 수많은 시위에 직면했지만 한 번도 발포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인구 5000만 명 이상의 큰 나라로서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 이상이고, 민주주의를 하는 진정한 강대국은 일곱뿐이다.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그리고 한국!
파괴자와 건설자(나폴레옹 법전, 프랑스 은행, 교육제도 특히 교사 양성제도, 기병·포병·보병을 일체화한 국민군 건설)의 양면(兩面)을 지닌 나폴레옹에 비교하면 박정희는 건설자의 면모가 압도적이다.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 워털루
1815년 6월18일 워털루 결전은 약 20년간 유럽 대륙을 석권하였던 나폴레옹 군대를 파멸로 몰고 가, 루이 14세 전후부터 약 200년간 패권국가 행세를 하던 프랑스를 내려 앉혔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25년간 진행된 대격동의 시대가 지고 19세기의 새로운 격변이 시작된다. 프로이센과 러시아가 강대해지기 시작하고(독일 통일로 이어진다), 영국은 라이벌을 제거함으로써 ‘팍스 브리타니카’ 시대를 연다. 영국은 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긴다는 말이 있다. 전광석화의 군사적 천재 나폴레옹에게 이긴 웰링턴은 우직하고 끈질긴 지휘관이었다.
워털루 전투는 그 3년 전 러시아 원정 실패의 결산이었다. 1799년, 프랑스 대혁명 10년 뒤 쿠데타를 일으켜 29세에 집권한 나폴레옹은 1804년에 황제가 되고 그 이듬해 숙적 영국을 치려다가 트라팔가 해전(海戰)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에 의하여 저지된다. 넬슨은 이순신처럼 목숨을 바쳤다. 19세기 영국의 가장 유명한 두 장군 넬슨과 웰링턴은 나폴레옹 덕분에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트라팔가 해전에도 불구하고 1805년은 나폴레옹 최고의 해였다. 그해 12월2일 지금의 체코 브르노 근방 아우스터리츠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3제(帝)회전’에서 나폴레옹군 7만 5000명은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프란츠 2세가 이끈 동맹군 8만 5000명을 격파(사상자 2만 7000명),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권을 잡게 된다(이 전투로 오스트리아 황제가 겸하던 신성로마제국도 거의 1000년 만에 해체되었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는 나폴레옹의 거의 예술적 지휘로 그의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나폴레옹의 야망은 1808년부터 분수를 넘게 된다. 러시아 알렉산드로 1세와 독일 에르푸트에서 만난 그는 프랑스와 손잡고 영국을 고립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꽁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러시아가 영국에 대한 대륙 봉쇄령을 어긴다는 트집을 잡아 거대한 전투를 구상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르샤바 공국 등 동맹국 병력까지 동원, 약 60만의 대군을 편성, 1812년 6월24일 러시아로 쳐들어갔다. 병력 수에서 역사상 최대규모였다(정확한 수치이다). 수레가 3만 대, 전마(戰馬) 수십만 마리, 포도주를 2800만 병이나 싣고 갔다. 개전일은 공교롭게도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기습한 날(6월22일)과 비슷한 날짜이고 두 야심가에게 종말의 시작을 연 점에서도 비슷하다.
사라져간 60만 대군
러시아는 약 40만 명을 동원했으나 결전을 피하고 초토화 작전을 펴면서 후퇴, 나폴레옹군의 길어지는 보급선을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나폴레옹은 9월 중순 모스크바를 점령했으나 러시아 측이 불을 질러 도시의 90%를 태우니 잘 곳도 먹을 것도 없어졌다(당시 수도는 페테르부르크). 한 달 뒤 나폴레옹은 철수를 결심, 후퇴하는데 겨울이 일찍 닥쳤다. 러시아군은 쿠투조프 장군의 지휘하에 나폴레옹군을 공격, 60만 대군은 러시아 대평원에서 사라져갔다(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이 대목을 실감나게 묘사했다). 20만 명이 죽고, 18만 명은 포로, 20만 명이 탈영했다. 겨우 3만 명이 생환하였다. 이런 인적 손실만큼 치명적이었던 것은 수십만 마리의 말을 잃은 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원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이듬해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패배, 1814년 황제 퇴위, 지중해의 엘바섬을 일종의 영지로 받아 물러났다. 유럽을 호령하던 나폴레옹의 그때 나이는 44세, 그는 이 섬에서 쓰레기 처리 시스템까지 만들어주면서 마음을 붙여보려고 했으나 그의 뜨거운 피와 프랑스 상황이 나폴레옹을 마지막 무대로 불러냈다. 루이 18세의 실정과 감군에 따른 제대군인들의 불만, 패전국으로 전락한 프랑스 국민의 상한 자존심을 전해 들은 나폴레옹은 1815년 2월26일 대대 병력의 부하들을 데리고 엘바섬을 탈출, 남불(南佛) 앙티브 근방에 상륙, 투항하는 정부군을 흡수해가면서 3월20일 파리로 들어왔다. ‘괴물탈출’이라고 보도했던 신문은 ‘황제귀환’이란 제목으로 환영했다.
그때 비엔나에서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 재편을 논의중이던 열강은 프랑스 외상(外相) 탈레랑의 제안과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주도로 나폴레옹을 무법자로 규정, 동맹군을 결성하기로 결정한다.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가 각기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기로 합의했다. 나폴레옹은 이 대군이 집결하기 전에 선제공격을 하여 각개 격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영국군과 프로이센군 약 20만 명이 벨기에로 집결하는 사이 나폴레옹은, 6월12일 먼저 보낸 약 12만 명의 프랑스군을 따라 벨기에로 들어왔다. 그는 6월16일 워털루 남쪽 두 곳에서 웰링턴의 영국군(주력)과 블뤼헤의 프로이센군을 격파, 흩어버렸으나 치명타를 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패전 후 갈라진 웰링턴과 블뤼헤 부대가 다시 결합하기 전에 우선 웰링턴군을 섬멸한 다음 블뤼헤군을 무찌른다는 나폴레옹의 작전은 성공할 것인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