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아침, 치질통
운명의 그날 벨기에 브뤼셀 근교의 작은 마을 워털루 민가 지휘소에서 나폴레옹이 일어난 것은 새벽 5시쯤이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은 잠이 적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는 평소에는 하루 8시간씩 충분히 잔 뒤 일찍 일어나면 측근들로부터 정보 보고를 받고 그 자리에서 명령을 구술하곤 했다. 하루 평균 15통의 명령을 내렸다. 그는 아침에 집중적으로 일을 했다.
그런 그가 워털루 결전 날은 달랐다.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먹을 때까지 네 시간 동안 별달리 의미 있는 활동을 보이지 않았다. 사후(事後) 여러 증언들을 종합해보면 심해진 치질과 방광염 및 고열(高熱)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투병중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부하들로부터 숨기면서 전투지휘를 해야 하는 삼중고(三重苦)를 겪고 있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치질로 패전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회고록을 구술할 때도 워털루 패전은 부하들의 잘못 때문이었다고 주장했다. 아침을 먹은 뒤 나폴레옹은 식탁 위에 지도를 펴놓고 부하 장군들에게 말했다.
“우리에게 유리한 정황이 90이고 불리한 점이 10이다.”
워털루 전투의 실질적인 야전 지휘관이 되는 네이 원수가 찾아와서 ‘웰링턴이 철수를 준비하는 것 같다’고 보고했을 때는 면박을 주었다.
“귀관은 오판하고 있어. 웰링턴은 주사위를 던졌어. 그런데 우리에게 유리한 판이 되었어.”
나폴레옹은 참모장 술 원수가 ‘패주한 프로이센 군대를 추적중인 글로시 원수의 3만 3000 병력을 불러들이자’고 건의하자 무안할 정도로 잘랐다.
“귀관은 웰링턴에게 패배했기 때문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내가 말해두건대 그는 엉망인 장군이고 영국군도 엉망이며 이번 전투는 그냥 산보 가는 거야.”
이날 오후에 가면, 글로시 원수의 병력을 빨리 회군시키지 않은 나폴레옹의 선택은 치명적 실수로 판명된다. 다른 장군이 영국 보병은 끈질기고 조준이 정확하기 때문에 정면 공격으로 중앙을 돌파하는 것보다는 측면이나 후방을 치는 우회(迂廻)기동을 건의했을 때도 나폴레옹은 비웃듯이 감탄사를 내지를 뿐이었다.
나폴레옹의 동생 제롬이 찾아와서 또 다른 정보를 전했다. 전날 저녁 제롬은 웰링턴이 그 전에 식사를 했던 워털루의 한 식당에 들렀는데, 웨이터가 엿들은 이야기를 해주더란 것이다. 요지는 퇴각중인 블뤼헤 원수의 프로이센 군대와 영국군이 합류하여 프랑스군에 대항하기로 약속을 하더란 것이었다. 나중에 정확한 정보로 밝혀지지만 나폴레옹은 “그건 난센스야. 두 군대가 합류하려면 이틀은 걸릴 거야”라고 일소에 붙였다.
보병과 기병
이날 나폴레옹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가 전투를 시작하기를 못내 꺼려한 낌새를 차릴 수 있다. 나폴레옹은 오전은 별다른 이유 없이 허송했다. 전투 개시를 늦추는 명분이 생기긴 했었다. 포병사령관이 오더니 간밤에 내린 비로 땅이 젖어 포대를 움직이기 어렵다고 보고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 정도의 이유로 결전 시간을 늦출 나폴레옹이 아니었지만 이날 그는 순순히, 혹은 기다렸다는 듯이 포격 개시 시간을 연기했던 것이다.
열병식을 마친 나폴레옹은 로솜이라 불리는 여관 앞에 지휘소를 정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팔꿈치를 무릎에 대고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한 사람은 나폴레옹이 갑자기 멍한 상태에 빠지는 듯했다고 기억했다. 이때 그는 치질로 인한 고통을 참으면서 전투상황에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자리 잡은 지휘소도 전장(戰場)이 내려다보이는 곳이 아니었다.
해는 거의 중천에 떠올랐다. 오전 11시였다. 이때 영국군을 주력(主力)으로 하는 동맹군 6만 7000명과 프랑스군 7만 2000명이 1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나폴레옹과 웰링턴은 이제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양군(兩軍)은 다 같이 보병, 기병, 포병으로 구성되었다. 보병이 가진 소총은 그 전 150년 동안 거의 개량된 적이 없었다. 당시의 소총 총탄은 지름이 2cm, 보병은 종이로 싼 화약을 가지고 다녔다. 입으로 봉지를 물어뜯어 화약을 발사판과 총대 속에 부어 넣은 뒤 총알을 총대 속으로 밀어 넣고 쑤시개로 쑤셔 단단하게 틀어막고 발사하는 데 30초가 걸렸다. 훈련을 잘 받은 보병이라야 1분에 두 발을 쏠 수 있었다.
1815년 6월18일 워털루에서 보병(步兵)들이 쓴 소총은 50발 이상을 쏘면 화약을 점화시키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게 되고 총대 안에 화약이 차서 발사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 쑤시개로 총대를 쑤셔 소제하느라고 시간을 까먹어야 했다. 이 때문에 보병(步兵)들은 여러 줄을 만들어 교대로 총을 쏘게 되었다. 유효(有效) 사거리(射距離)는 수백 미터였지만 좀처럼 명중하지 않았다. 전장(戰場)에서는 조준사격보다는 한 방향으로 몰아 쏘는 지향사격이 주(主)였다. 근접하면 총검으로 백병전에 돌입했다.
기병(騎兵)은 칼, 권총, 소총, 창 등으로 무장했다. 칼보다는 창이 효과적이었다. 프랑스 기병만이 가슴을 보호하는 갑옷을 입었다. 기병이 말에서 내리면 갑옷 무게로 움직임이 둔해졌다.
포병술의 천재
워털루의 결전 날 웰링턴이 지휘하는 영국군 중심의 연합군 6만 7000명은 156문의 대포를, 나폴레옹의 7만 2000명은 246문의 대포를 갖고 있었다. 포병장교 출신인 나폴레옹은 포병을 활용하는 데 천재였다. 포격으로 적진을 흔들어놓은 뒤 보병, 기병, 마지막엔 정예 근위대를 투입, 결정을 짓는 방식이었다. 대포알은 세 종류였다. 터지지 않는 강철탄, 터지면서 파편으로써 살상(殺傷)하는 것, 그리고 바늘, 침 같은 것을 속에 넣었다가 폭파시키는 수류탄 비슷한 포탄. 터지지 않은 강철탄은 무게가 5kg 정도였는데, 보병 기병 밀집대형을 향하여 쏘면 수십 명이 한 방으로 살상당하기도 했다. 대포의 발사 충격을 흡수하는 장치가 개발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번 쏠 때마다 포대가 움직여 다시 조준하여야 했다. 발사속도는 소총과 같아 1분당 두 발 정도였다.
기병이 보병을 향해서 돌격하면 보병은 밀집대형으로 쪼그리고 앉아 총검을 숲처럼 세웠다. 말들도 이 총검의 숲을 향해서 질주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밀집대형을 만들면 보병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달아나고 싶어도 이탈할 수가 없게 된다. 대형(隊型)을 벗어나면 기병에 당하기 때문이다.
보병이 빨리 밀집대형을 갖추어 총검의 숲을 만들기만 하면 기병이 당해내기 어려웠다. 그런 대형을 갖추기 전에 돌격하여 보병을 패주(敗走)시켜야 했다. 이 때문에 기병이 돌격할 때는 보병이, 보병이 돌격할 때는 기병이 보조해주어야 했다. 이날 나폴레옹은 이런 상식을 무너뜨리는 이상한 작전을 편다.
통상적인 전투 절차를 보면, 먼저 포병의 집중 포격이 시작된다. 포격으로 적진이 흔들리면 보병이 앞장서고 기병이 뒤를 따른다. 보병은 적의 최전선(보통 포병)에 접근할 때까지 사격을 삼간다. 충분히 접근한 뒤 일제사격, 그런 다음 총검을 앞세워 바로 돌격을 개시한다. 이 직후 기병이 뒤에서 나타나 전열(戰列)이 흩어진 적진(敵陣)으로 돌입, 敵의 보병이 밀집대형을 갖추기 전에 전선(戰線)을 붕괴시켜야 한다. 이런 타이밍이 승패를 결정지었다. 어느 쪽이 끈질기게 버티는 보병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했다. 해군 국가인 영국은 그런 보병도 갖고 있었다. 이것이 웰링턴의 자랑이었고 이날 진가(眞價)를 발휘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의 후방, 여관 앞에다가 지휘소를 잡았다. 이곳에선 적군이 장악한 능선 뒤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능선상의 웰링턴은 저지대의 프랑스군 동향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포격 시작
머뭇거리던 나폴레옹이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포격을 명령함으로써 전투를 시작한 시각은 오전 11시30분쯤이었다[이 시간에 대해선 이견(異見)이 있다]. 첫 표적은 프랑스 군대의 좌익 앞에 있는 휴고몽이라 불리는 농장건물군(群)이었다. 2000명의 영국군이 지키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프랑스군의 포격과 잇단 보병공격은 워털루의 본 게임은 아니었지만 전략적 중요성은 컸다.
요새화된 건물을 둘러싼 포격전과 백병전은 종일 계속되었다. 영국 군대는 끝까지 건물을 지켜내었다. 한때는 정문이 돌파되어 약 100명의 프랑스 보병이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정원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한 영국군의 수기(手記)이다.
<나(맥도넬 대령)는 프랑스 군인들의 함성이 등 뒤로 들렸을 때 정원에 있었다. 나는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양쪽 군인들이 뒤섞여 도끼, 총검, 칼로 백병전을 펼치고 있었다. 영국군의 일부는 계단을 따라서 저택 입구로 물러나고 있었다. 다른 군인들은 저택의 창을 통해 몰려오는 프랑스 군인들을 향해 총을 쏘았다. 나는 부하 세 명을 데리고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프랑스 군인들이 바깥에서 문을 밀어붙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이 문을 다시 닫고 큰 나무틀을 내려 안에서 잠그는 데 성공했다.>
나중에 웰링턴은 ‘워털루의 승리는 이 정문을 닫는 데 성공했기에 가능했다’고 쓴 적이 있었다. 영국군은 정문을 봉쇄한 뒤 안에 들어와 있었던 프랑스 군인들을 찾아내 죽이느라고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북 치는 소년병은 살려주었다.
동맹군 요새로 변한 휴고몽 농가(農家)를 점령하기 위한 프랑스군의 공격은 한 시간을 넘어도 성공하지 못하고 국지전(局地的)인 공방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오후 1시 프랑스의 야전 지휘관 네이 원수는 전선(戰線)의 후방에서 의자에 앉은 채 지휘를 하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전령을 보내 보병 총공격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보고한다. 이때까지도 나폴레옹은 이상한 모습이었다. 그는 전투가 진행중인데도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시 일어나 망원경으로 전장을 훑어보고는 다시 앉고 했다.
(계속)












죽이고 죽이는 인간은
악귀와 다름없다!
동서고금 도처에 아비규환.
이게 지옥 아니고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