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시아 군의 출현
네이의 연락을 받자 그는 다시 일어나 망원경을 눈에 대었다. 오른쪽으로 약 8km 떨어진 숲속에 정체불명의 부대가 보였다. 참모들은 부대의 복장으로 보아 프러시아 군인 같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참모는 프랑스 군인 같다고 했다. 잠시 뒤 포로가 된 프로이센 기병장교가 불려왔다.
그는 웰링턴과 합류하기 위해서 달려오고 있는 블뤼헤 장군의 부하 장교라고 자백했다. 문제가 심각해진 것이다. 나폴레옹은 글로시 장군이 퇴각 중인 블뤼헤 장군 부대를 추적 중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부대가 나타난 것이다. 나폴레옹은 약 20km 멀리 있는 글로시 장군에게 긴급 지시문을 보낸다.
‘즉시 아군 쪽으로 돌아오라’는 내용이었다. 이 명령서를 기병장교가 갖고 달려가는 데 두 시간 이상 걸리고 이 명령서를 수령한 글로시 장군이 워털루까지 온다고 해도 한밤중일 것이다. 나폴레옹은 우선 기병과 보병을 보내 접근중인 프로이센군의 선봉을 요격하도록 조치했다. 이 단계에서 전투를 중단시키거나 후퇴하는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침 우리는 90 대 10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지금도 우리는 60 대 40으로 유리하다.”
오후 1시30분 네이 원수는 포병에 웰링턴 군대를 향하여 일제 포격을 명령했다. 9~15kg짜리 포탄들이 날아갔다. 양쪽 합해서 14만 군대가 가로 세로 3X3km 정도의 공터에 밀집해 있었다. 밀집대형을 향하여 포탄이 쏟아지니 죽고 다치는 군인들이 많았다. 강철탄을 맞은 군인의 몸이 두 동강 나고, 머리통이 날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웰링턴 군대는 잘 견뎠다. 동맹군은 유럽의 여러 나라 군대로 편성된 혼성군이었는데 영국군이 약 4분의 1이었다. 이들은 스페인에서 단련된 고참이었다. 웰링턴은 영국사병들을 다국적 군대 사이에 끼워 넣어 다른 나라의 신참 군인들을 붙들어놓도록 했다.
프랑스군의 포격은 포탄이 진흙땅에 박혀 불발하는 등 큰 타격을 주진 못했다. 웰링턴은 보병들을 능선 뒤로 일단 물려 포화를 피하도록 했다. 프랑스 포병은 저(低)지대에 있었으므로 능선 뒤의 웰링턴군 동향을 잘 알 수 없었다. 네이는 동맹군이 뒤로 물러나는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붕괴하고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보병의 정면 공격을 명령했다.
보병 돌격 실패
약 1만 7000명의 보병(步兵)이 대열을 유지하면서 동맹군을 향하여 서서히 진격하는 모습은 장엄했다. 북소리에 맞추어 ‘황제 만세!’를 부르짖으면서 거대한 인간덩어리가 뚜벅뚜벅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양쪽에서는 기병이 따랐다. 엄청난 물체의 관성이 적진(敵陣)을 자연스럽게 돌파할 것 같았다. 여기에 약점이 숨어 있었다. 프랑스 보병은 너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장교들의 명령이 들리지 않았다. 간밤에 온 비로 땅이 질퍽질퍽했다.
많은 보병은 신발이 진흙에 감겨 벗겨졌다. 맨발의 보병이 되었다. 바지에 진흙이 붙어 행군에 지장이 컸다. 밀집대형 한가운데 있는 군인들은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적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태로 적진(敵陣)에 돌입하면 총을 쏠 수 있는 보병은 앞의 3열뿐이었다. 뒷줄 병사들은 덩어리로 엉켜 있어 장전도 발사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밀집대형은 포격의 좋은 표적이었다. 포탄 한 발이 정면의 병사를 타격하면 그 뒤의 스물세 명을 칠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랑스 보병이 접근하자 최전방을 지키던 네덜란드-벨기에군은 달아났다. 오후 2시30분쯤 프랑스 보병은 능선까지 올라갔다. 스코틀랜드 보병 3000명이, 능선 뒤에 숨어서 프랑스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능선을 넘은 프랑스 보병이 50보 거리로 접근했을 때 이들에게 명령이 떨어졌다. 그들은 능선으로 달려가 다가오는 프랑스 보병들을 향하여 일제 발사했다. 한 발을 발사한 다음 제2탄을 쏘려면 30초가 걸린다. 그 사이 프랑스 보병이 덮치므로 제2탄 발사를 포기하고 총검에 의지하여 돌격, 백병전에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두 덩어리의 인간집단이 정면충돌했다. 찌르고 쏘고 비명과 함성과 괴성이 오고 가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순간 웰링턴의 부하 욱스브리지 중장이 2600명의 중기병 부대를 투입했다. 그들은 동쪽 비탈을 달려 내려가면서 프랑스 보병을 흩어버리고, 일순의 승리에 도취하여 너무 깊숙이 진격했다가 프랑스 창기병 2400명의 반격을 받았다. 영국 기병대는 지휘관 폰손비 소장 등 1205명과 1303마리의 말을 잃고 물러났다. 이 중기병 돌격은 괴멸적 타격을 입었지만 웰링턴군의 중앙에 집중된 프랑스 보병공격의 기세를 꺾는 데는 성공했다. 프랑스 보병은 적진 돌파에 실패하고 일단 물러나 전열을 재정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두 군대가 일진일퇴하는 사이에 오후 3시가 지나고 프로이센군이 속속 도착, 동맹군에 합류하기 시작하였다. 전세가 웰링턴에 유리해지고 있었다.
기병 돌격도 실패
오후 4시를 넘은 시각, 네이 원수는,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웰링턴 진영의 중앙부가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판단하였다. 사실은 부상자를 뒤로 옮기는 것이었는데 후퇴라고 본 것이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네이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기병돌격을 명령한다. 보병 지원 없이 너무 서둔 돌격이었다 67개 중대의 9000명으로 구성된 기병이었다. 돌격이 시작된 직후 이를 지켜보던 나폴레옹은 ‘한 시간이 빠르다’고 중얼거렸으나 멈출 수가 없었다. 영국군 진영의 한 기록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네 시 경, 우리 앞의 적 포대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거대한 기병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진격을 개시하였다.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영원히 그 장엄한 광경을 잊을 수 없었다. 기병이 다가올수록 바다의 파도가 햇볕을 받은 것처럼 번쩍거렸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이 엄청난 질량을 저지할 자는 아무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은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유럽 전장에서 용맹을 떨친 그들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을 때 영국군에 명령이 떨어졌다. 기병은 ‘황제만세’를 외치며 돌진하고, 영국 보병은 무릎을 꿇고 총검을 세웠다.>
기병은 비탈길을 질주하지 못했다. 너무 붙어 있어 그런 공간이 나오지 않았다. 웰링턴군은 이들에게 집중포격을 가했다. 말과 기수가 무더기로 무너져 벽이 될 지경이었다. 웰링턴군은 대혼란에 빠졌으나 방어진을 만드는 데 성공, 무너지지 않았다. 동맹군은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프랑스의 기병 돌격에 보병·기병·포병 합동작전으로 저항하였다. 빅토르 유고는 ‘레미제라블’에서 기병돌격의 실패를 지형에 돌렸다. 기병이 능선을 넘는 순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구덩이처럼 파진 지형이었고 이 속으로 기병이 쏟아져 들어가버렸다는 것이다. 1970년대에 상영된 영화 ‘워털루’(로드 스타이거 주연)는 이 주장을 따른 것이다. 유고의 이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약간 파진 지형으로 실패의 원인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황제 근위대의 최후
이날 오후 돌아온 프로이센 군대는 프랑스군의 우익으로 접근, 본격적으로 전투에 가담한다. 워털루 인근 마을을 공격하고 프랑스군이 응전, 수 차례 주인이 바뀐다. 나폴레옹은 아껴둔 근위대에서 4200명을 빼내 이들을 막도록 보냈다. 웰링턴 군대를 제대로 제압하기 전에 프로이센군이 나타나 양면 전투를 강요당했다.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도록 3만 3000명의 병력을 붙여 보냈던 글로시 원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그는 워털루 전투가 시작되어 포성이 들리는데도 프로이센군의 행방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글로시 군이 워털루에서 약 10km 떨어져 있어 즉각 추격을 포기하고 워털루로 돌아와 나폴레옹군과 합류했더라면 승패는 달라졌을 것이다. 참모들도 포성이 들리는 워털루로 돌아가자고 건의하였으나 글로시는 이를 거부, 더 멀리 행군했다. 이 바보짓으로 두고두고 비판을 받는다. 나폴레옹도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회고록을 구술하며 글로시를 속죄양으로 삼았다.
오후 5시를 넘어 프랑스 보병은 연합군 정면의 농가를 점령, 포병이 이를 방패 삼아 동맹군의 중앙 방어선을 때릴 수 있도록 했다. 네이 장군은 부관을 나폴레옹에게 보내 증원군을 요청했다.
“증원군? 없어. 내가 만들어내야 한단 말인가.”
웰링턴은 흔들리고 있었다. 중앙이 무너질 위기임을 감지한 것이다. 그는 참모들에게 “밤이 빨리 오든지 블뤼헤가 오든지 해야 할 텐데”라고 중얼거렸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독백을 인용, 프로이센 원군의 주력이 오지 않았더라면 웰링턴을 끝장낼 수 있었다고 주장, 나폴레옹이 결코 영국군에 진 건 아니라고 강변한다.
오후 7시30분 드디어 나폴레옹은 마지막 카드를 꺼낸다. 예비로 아껴두었던 황제 근위대를 투입하기로 한 것이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웰링턴군에 속속 합류하고 있었지만 어찌되었든 승부를 내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황제 근위대는 항상 최후에 등장, 무너지는 적군의 심장에 대못을 박아 승부를 결정짓는 역할을 해왔다. 이 정예부대는 한 번도 전투에 진 적이 없었다. 이날은 달랐다. 전세를 굳히는 결정타가 아니라 불리해지는 전세를 회복시키기 위한 마지막 도박에 투입된 것이다. 남은 근위대는 5000명이 안 되었다. 나폴레옹은 이들 앞에 나타나 짧은 연설을 했다.
“결정적 순간이다. 귀관들은 사격하지 말고 총검으로 돌진하여 저들을 쓸어버려라.”
프랑스 포병의 포격 뒤, 근위대는 비탈을 올라갔다. 능선에 접근, 속보로 달려드는 순간, 웰링턴군은 집중포화를 안겼다. 첫 포격에 500명이 쓰러졌다. 보병이 이어서 나타나 근위대를 향하여 20보 앞에서 총검 돌격을 감행했다. 근위대의 뒤편에선 휴고몽 요새를 지키던 동맹군이 나와서 후군을 공격했다.
근위대는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 불패의 근위대가 멈칫하자 ‘졌다’는 패배감이 프랑스 전군(全軍)을 감싸고 순식간에 전염되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웰링턴 장군이 능선 위에 나타나 모자를 벗어 흔들어 총진격을 명령하였다. 황제 근위대를 비롯, 프랑스군 전체가 등을 돌려 비탈을 내려가면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20년간 유럽을 휩쓸었던 나폴레옹군의 총붕괴였다. 프로이센군이 앞장서서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블뤼헤 사령관은 포로를 살려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살아남은 근위대가 나폴레옹을 호위, 파리로 달아났다. 밤 10시쯤 웰링턴과 블뤼헤가 한 농장에서 만나 승리를 축하하였다. 들판엔 쌍방 약 5만 명의 군인이 시신(屍身)이나 부상자로 변하여 누워 있었다. 이웃 농민들이 밤에 시신을 뒤지면서 물건을 약탈하고 프랑스군 부상자들을 죽였다. 달밤 아래 신음과 비명으로 뒤덮였던 그 들판에 차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는지 지금도 잡초만 무성하다. 웰링턴은 이날 밤 영국으로 보낸 전황 보고서에 ‘워털루 전투’라고 적어 이곳을 불멸(不滅)의 지명으로 만들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