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미드 라시드가 쓴 '그레이트 게임'(원명은 Taliban. 월간조선에서 발간)에서 발췌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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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경제난 속에서도 탈레반에 3000만 달러 원조
1998년 6월 말, 파키스탄의 재무부와 외무부에는 대혼란이 일어났다. 고위관료들은 여러 부서의 서명을 받아야 할 서류가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이두 부와 수상의 비서실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며칠 안에 1997~1998 회계연도가 끝나고, 새 회계연도가 시작되게 되어 있었다. 모든 부서는 그 회계연도의 예산을 소진해서 재무부로부터 다음해의 예산을 더 많이 타내려고 하고 있었다. 몇 주일 전 (5월 28일), 파키스탄은 인도의 뒤를 이어 여섯 차례 핵실험을 했다. 서방국가는 이 두 나라에 제재조처를 취했다. 파키스탄에는 심각한 외환위기가 발생했고, 1996년 이래 계속된 불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28일, 돈에 쪼들린 재무부는 카불에 있는 탈레반 행정기구에 3억 루피(미화 600만 달러)를 봉급지불용으로 인가했다. 외무부는 이 돈으로 앞으로 6개월 동안 매달 5000만 루피씩 아프가니스탄 지배자들의 봉급을 지불하게 되어 있었다. 외무부는 이 자금을 자신의 예산과 다른 부서의 예산에 숨겨 1998~1999년 예산보고서에 나타나지 않도록 했다. 위기에 몰린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정부지출을 대폭 삭감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세계 금융기관의 날카로운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1997년에서 1998년까지 파키스탄은 3000만 달러로 추정되는 원조를 탈레반에게 제공했다. 여기에는 60만 톤의 밀, 디젤, 석유와 등유, 폭탄, 탱크와 야포 등 소련시대의 군사장비 부품, 탈레반 공군의 수리 및 정비, 공항운영, 도로건설, 칸다하르시의 전력공급, 봉급 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파키스탄은 또 탈레반이 독자적으로 우크라이나와 동유럽으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봉급용으로 제공된 돈은 공무원에게 가는 대신 전쟁수행을 위해 사용되었다. 카불에 있는 탈레반 관리들은 몇 달 동안 한번도 봉급을 타지 못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공식적으로는 탈레반 지원을 부인하고 있었다.
이 같은 원조제공은 과거의 유산이었다. 1980년대에 ISI는 서방과 아랍국가들이 무자헤딘을 돕기 위해 제공한 수십억 달러의 돈을 처리했다. 이 돈은 CIA의 장려와 기술적 도움으로 ISI를 대폭 확장하는 데도 사용되었다. ISI는 수백 명의 군장교를 뽑아 아프가니스탄뿐만 아니라, 인도와 파키스탄의 모든 외국 정보기관을 추적했고, 국내 정치, 경제, 미디어 그리고 이 나라의 모든 사회 및 문화 생활을 감시했다.
CIA는 ISI에게 이 나라의 모든 전화를 도청할 수 있는 장비를 포함한 최신 기술을 제공했다. ISI는 지아 대통령 군사정부의 눈과 귀가 되었고, 1989년에는 파키스탄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 및 외교세력이 되어, 그 후 그들이 안보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정책분야에서 민간정부나 의회의 결정을 몇 차례나 번복시켰다. 그 분야는 주로 인도와 아프가니스탄이었다.
탈레반의 후원자 나시룰라 바바르
ISI는 1990년대를 통해서 파키스탄의 아프간 정책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냉전의 종식으로 ISI는 자금줄이 끊겼고, 파키스탄의 심각한 경제위기로 비밀자금도 대폭 삭감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ISI의 얼마 안 되는 자원을 다른 소모전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1989년 인도에 대항해서 봉기한 카슈미르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싸움이었다.
베나지르 부토의 두 번째 임기(1993~1996) 중에는 은퇴한 전 내무장관 나시룰라 바바르가 탈레반을 밀어주었다. 그는 아프간 정책을 ISI의 손에서 떼어 놓으려고 했다. 부토와 바바르는 ISI의 세력과 자원을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ISI는 부토의 첫 임기 중에 그에 대한 불만을 선동해서 1990년 사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ISI는 처음에는 탈레반의 잠재력을 의심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ISI는 굴부딘 히크메티야르를 지원하고 있었고, 아프간 학생들의 운동을 지원할 자금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바바르는 탈레반에 대한 지원을 민간 차원으로 돌렸다. 그는 내무부 안에 아프간무역개발실을 만들었다. 이 기구는 표면상 중앙아시아로 연결되는 무역루트를 지원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실제 주요임무는 탈레반에게 병참지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그 자금은 비밀자금 대신 정부 부처의 예산에서 조달되었다. 바바르는 파키스탄 통신회사에 탈레반을 위한 전화망을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화망은 파키스탄 전화망의 일부가 되었다. 파키스탄의 어디에서도 국번 081만 돌리면 국내전화처럼 칸다하르와 통화할 수 있게 되었다. 건설국과 수자원 및 전력개발청의 엔지니어들은 도로를 수리하고, 칸다하르에 전력을 공급했다. 바바르의 직접 지휘를 받는 준군사조직 국경수비대는 탈레반을 도와서 그들의 부대장들이 사용할 국내 무선망을 설치했다. 파키스탄 국제항공(PIA)과 민간항공청은 기술자를 파견해서 칸다하르 공항과 탈레반이 노획한 제트전투기나 헬리콥터를 수리했다. 라디오 파키스탄은 지금은 라디오샤리아트로 이름을 바꾼 레디오아프가니스탄에 기술적 지원을 했다.
탈레반이 1995년에 헤라트를 점령한 뒤, 파키스탄의 노력은 강화되었다. 1996년 1월, 아프간무역개발실 책임자는 민간항공청, 파키스탄 텔레콤, PIA, 파키스탄 철도, 레디오파키스탄, 파키스탄국립은행의 관계자들과 함께 차편으로 퀘타에서 투르크메니스탄으로 여행했다. 정부부서와 국영회사들은 파키스탄의 경제를 개발하게 되어 있는 예산으로 탈레반을 돕는 사업을 시행했다.
탈레반을 돕고 통제하기 위해서 이처럼 노력했지만, 그들은 누구의 괴뢰도 아니었고, 파키스탄 정부의 간섭을 거부했다. 아프간의 역사에서 아프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외부세력은 아무도 없었다. 영국과 소련은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그 교훈을 배웠다. 파키스탄은 CIA와 사우디아라비아의 자금으로 지하드의 방향을 좌우하고 있던 과거에 머물러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더구나 20년 간의 전쟁과 파키스탄 내의 난민생활을 통해 형성된 탈레반과 파키스탄 파슈툰 변경지대 간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유대는 너무나 강력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 내 난민캠프에서 출생해서, 파키스탄의 마드라사에서 파키스탄에 기지를 둔 무자헤딘 그룹으로부터 전투기술을 배웠다. 그들의 가족은 파키스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의 주인이 아니라 희생자
탈레반과 파키스탄의 정부기구, 정당, 이슬람 그룹, 마드라사 조직망, 마약마피아, 사업 및 운송그룹 간의 밀접한 관계는 파키스탄의 권력구조가 와해되면서 분열되는 상황에서 발전했다. ISI 같은 파키스탄 내의 어느 단일세력에 발목을 잡히고 싶지 않았던 탈레반에게는 유리한 상황이었다. 이에 반해서 1980년대 무자헤딘은 ISI와 자마티이슬라미와 배타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다른 정치적 또는 경제적 그룹과는 유대를 갖지 않았다.
탈레반은 대부분의 파키스탄인보다 더 영향력을 가진 로비나 그룹과 연결되어 있었다. 이 덕택으로 탈레반은 그런 로비세력을 서로 경쟁시키면서 파키스탄 내의 영향력을 더욱 확대할 수 있었다. 그들은 때로는 정부각료나 운수마피아를 동원해서 ISI에 저항하기도 했다. 발루치스탄과 파키스탄 서북변경성정부의 지원을 얻어 연방정부에 도전하기도 했다. 탈레반 운동이 확장되자 누가 누구를 조종하고 있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파키스탄은 탈레반의 주인이기보다는 이들의 희생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안보의식은 서북변경성 지역 일부와 발루치스탄에 대해서 아프가니스탄이 영토권을 주장한 데서 시작되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는 이 두 나라 사이에 국경충돌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은 파키스탄의 파슈툰족 거주지역이 독립을 하거나 파키스탄 또는 아프가니스탄에 편입되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이 좌익 파키스탄 파슈툰족의 지원을 받은 ‘대파슈투니스탄’을 주창했기 때문에 양국관계는 1955년과 1962년 등 두 번이나 단절되었다. 지아 정권은 아프간의 지하드를 이용해서 카불에 유순한 친파키스탄 파슈툰 무자헤딘 정부를 수립하면 이 같은 주장을 영원히 봉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군사전략가들은 이렇게 하면 파키스탄이 그의 주적인 인도에 대해서 ‘전략적 종심’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파키스탄은 지리적으로 국토가 길고, 면적과 심도, 후배지 같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군대는 인도와 장기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 밖에도 1990년대에는 아프가니스탄이 우호적이면, 인도와 싸우는 카슈미르 전사들에게 기지를 제공하여 훈련을 시키고, 자금을 주고, 무장할 수 있다는 고려도 있었다.
1992년에서 1993년 사이에 미국은 인도의 압력으로 파키스탄을 테러리즘 후원국가로 선포하려 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기지를 둔 카슈미르 전사들이 인도의 카슈미르 지방에 게릴라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은 1993년 카슈미르 그룹의 기지를 대부분 동부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기고, 나중에 탈레반이 된 잘랄라바드 슈라에 자금을 제공해서 그들을 장악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또 이슬람 단체에게 이들의 훈련과 자금을 책임지도록 함으로써 카슈미르 무자헤딘 지원을 민간 차원으로 전환했다. 정부는 또 1966년, 빈 라덴을 설득해서 탈레반에 가입하도록 했다. 그 역시 코스트에 있는 카슈미르 전사의 기지를 후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슈미르 문제는 점점 더 파키스탄의 아프간 정책과 탈레반 지원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탈레반은 이것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파키스탄의 다른 요구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그들이 카슈미르와 파키스탄 투사에게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한 파키스탄 정부는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라 오마르는 1998년에 말했다.
“우리는 카슈미르 내의 지하드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일부 아프간인들이 카슈미르에서 인도점령군과 싸우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아프간인들은 자기들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탈레반의 승리로 파키스탄-아프간 국경이 사실상 사라졌다”
‘전략적 종심’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류와 오해를 일으켰다. 국내의 정치적 안정, 경제적 발전, 교육수준 향상, 이웃과의 우호관계가 아프간 산악지대의 가상적인 전략적 종심보다 더 국가안보에 도움이 된다는 자명한 지상의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파키스탄의 학자 에크발 아마드는 이렇게 썼다.
‘전략적 종심은 지아 울 하크 장군 이래 파키스탄의 아프가니스탄정책에서 주요목표가 되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볼 때, 패배한 군대가 안전하게 들어가 숨을 수 있는,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 아니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그 결과 나라는 잘못된 가정, 마지노선적 개념, 실패한 정책, 비탄력적 자세, 파벌적 폭력 등으로 얽힌 쇠그물 속에 빠지고 말았다. 탈레반의 승리는 그것을 개선하기는커녕 파키스탄을 더욱 정치적 및 전략적 파탄으로 몰고 갈 것이다.’
군부는 영국이 두 나라 사이에 그어 놓은 말썽 많은 국경선인 두랜드선을 탈레반이 인정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아프간 정권도 이 국경선을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군부는 또 탈레반이 서북변경성의 파슈툰 민족주의를 억제하고, 파키스탄의 이슬람 급진세력에 출구를 제공해서 국내의 이슬람 운동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탈레반은 두랜드선을 인정하거나, 서북변경성에 대한 아프가니스탄의 영토권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탈레반은 비록 이슬람적 성격을 가지긴 했지만 파슈툰 민족주의를 지원했고,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에게도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탈레반이 파키스탄의 시아파를 죽인, 파키스탄에서 가장 폭력적인 수니파 극렬그룹에게 성역을 제공하고 무장시켰으며, 파키스탄이 수니파 국가임을 선언하고 이슬람 혁명을 통해서 지도층 엘리트를 일소하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올리버 로이는 1997년에 이렇게 예언했다.
“탈레반의 승리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이의 국경은 사실상 사라졌다. 그 양쪽에서 파슈툰족들이 근본주의로 기울어지고, 마약거래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있고, 이미 파키스탄 땅에는 소규모의 근본주의자 부족에미레이트가 출현하고 있다. 사실상의 아프가니스탄 흡수는 파키스탄 안에서 원심력 현상을 가속시킬 것이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으로부터 오는 역류가 파키스탄의 ‘탈레반화’를 일으키고 있다. 탈레반은 파키스탄에게 전략적 종심을 제공하지 않았지만, 파키스탄은 탈레반에게 전략적 종심을 제공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자기 자신의 전략적 구상뿐만 아니라 그 자체 정보기관의 희생자가 되었다. ISI가 아프간 지하드를 정밀하게 관리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정부 아래였고, 해외에서 엄청난 자금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ISI는 국내에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할 수 있었다. 지아와 ISI는 아프간 정책을 수립해서 시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CIA를 포함해서 다른 어떤 정보기관도 그런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이 때문에 ISI는 거대한 단일목표와 공작범위를 가질 수 있었다. 당시 ISI는 어떤 독립적인 강력한 로비나 정치적 경쟁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탈레반시대에 들어와 그들은 독자적으로 탈레반을 지지하고, 서로 다른 목표를 가진 수많은 파키스탄의 로비단체와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ISI는 아프간 정책과 공작을 모두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비판적으로 재평가를 하거나, 반대의견을 수용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변화하는 상황이나 끊임없이 발전하는 지정학적 환경에 대해서도 적응할 수 있는 상상력이나 융통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ISI는 탈레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으면서도 고집과 경직성의 희생물이 되고 있었다. 이 기관의 아프가니스탄 내 공작원은 모두 파슈툰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강력한 이슬람근본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 파슈툰 요원들은 히크메티야르, 그리고 나중에는 탈레반과 밀접하게 협력하면서, 소수민족과 온건파 이슬람을 물리치고 아프가니스탄에 파슈툰의 세력과 급진적 이슬람을 확립한다는 그 자체의 목표를 개발했다.
ISI와 군부내 파슈툰족이 탈레반 지지
은퇴한 한 ISI 장교의 표현에 의하면 이 요원들은 탈레반보다 더 철저한 탈레반이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반탈레반 연합과 파이프라인 사업에 관한 그들의 분석은 경직성과 잘못된 가정으로 가득 찬 엉터리 보고가 되었다.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자기들의 강력한 이슬람 이념을 토대로 작성된 보고서였다. 그러나 그 무렵 ISI는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정부는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고, 어느 군참모총장도 그들을 제거하지 못했다.
탈레반이 처음 등장했을 때, ISI는 그들의 성공가능성에 대해서 회의적이었다. 당시 히크메티야르가 카불 점령에 실패하고, 자금이 떨어져 ISI는 물러서고 있었다. ISI의 세력이 약화되자, 부토 정부는 탈레반을 지원하기 위한 독자적인 기회를 잡았다. 1995년 내내 ISI는 탈레반 지원문제를 토의했다. 토론은 탈레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아프가니스탄 내 파슈툰-이슬람 일선장교와 파키스탄의 지원을 최소한도로 유지해서 중앙아시아 및 이란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기를 바라는 장기전략담당 장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95년 여름, 육군 내의 파슈툰 조직과 ISI는 탈레반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부르하누딘 라바니 대통령은 파키스탄의 경쟁국인 러시아, 이란, 인도의 지원을 얻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ISI는 탈레반과 접선을 하고 있던 급진적 물라와 마약거래상 등 모든 파키스탄의 로비에 직면했다. ISI와 정부 그리고 이 모든 로비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경쟁으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파키스탄 정부의 정책수립 과정은 지리멸렬 상태가 되었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이 혼란으로 약화되어 사실상 아프가니스탄에서 손을 떼었고, 러시아, 이란, 중앙아시아국가 등 모든 인접국이 파키스탄 정부가 이 지역을 불안상태로 몰아가고 있다고 비난을 하는 등 외교환경이 악화되고 있어도 대응할 수 없었다. ISI 책임자들은 이런 비판을 제거하기 위해 모스크바, 테헤란, 타슈켄트, 하바트를 방문했지만 허사였다.
국제적인 비판이 증대되자, 새로 선출된 나와즈 샤리프 정부와 ISI는 더욱 탈레반에 대한 지지를 고집했다. 1997년 5월, 탈레반이 마자르를 점령하려고 하자, ISI는 탈레반 정부를 승인하면 적대적인 이웃들이 탈레반과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리라고 판단했고, 파키스탄 정부도 탈레반과의 관계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이 성급하게 탈레반을 승인했을 때 그들은 마자르에서 쫓겨나 그 도박이 위험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파키스탄은 아프간 파벌에 대한 외부의 모든 지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된 UN이 포함된 모든 비판세력을 비난하는 등으로 반격했다. 파키스탄은 UN 사무총장 코피 아난이 편파적이라고 비난했다. 1998년 1월, 파키스탄의 UN대사 아마드 카말은 “UN이 점차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으며, 공정한 중재자로서의 신임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카말은 이슬라마바드에서 열린 파키스탄 대사들의 회의에서 아프가니스탄에서 고립된 것은 파키스탄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나라가 파키스탄에서 고립된 것이며, 이들은 탈레반에 대한 파키스탄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이 국제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의 정책을 옹호하는 동안, 이 나라 정부는 그로 인한 손실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 중에서 가장 파멸적인 손실은 아프가니스탄을 통한 밀수무역에 의한 것이었다. 중앙아시아, 이란, 페르시아만으로까지 확대된 이 무역으로 이 나라에서 국고수입이 크게 줄어들었다. 특히 파키스탄은 외국의 밀수 소비재 때문에 국내산업이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아프간중계무역(ATT)이라고 완곡하게 표현된 이 밀무역 때문에 세계 최대의 밀수시장이 등장했고, 파키스탄 밀수업자, 운송업자, 마약상, 관료, 정치인, 경찰, 군장교들이 탈레반과 어울렸다. 이 무역은 이웃 나라의 경제를 악화시켰지만, 탈레반에게는 가장 중요한 공식수입이 되었다.
탈레반 통한 밀수로 국고수입 30% 감소
발루치스탄성의 차만과 아프가니스탄의 스핀 발다크 사이에 있는 국경초소는 이 밀무역을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300대 가량의 트럭이 통과한다. 트럭들이 긴 줄을 이어 국경을 통과하는 동안, 트럭운전사와 파키스탄 세관관리, 탈레반은 서로 어울려서 끊임없이 차를 마시면서 기다린다. 여기에 온 사람들은 서로 잘 알고 있다. 운전기사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세계무역기구 직원들은 놀라 자빠질 것이다. 커다란 메르세데스(벤츠) 트럭이나 베드포드 트럭은 대부분 도난당한 것으로, 가짜 번호판을 달고 있다. 그들이 운반하는 물품에는 송장이 딸려 있지 않다. 운전기사들은 가짜 운전면허를 가지고 운송허가나 여권도 없이 여섯 개 가량의 국경을 통과한다. 이들이 위탁물품에는 일본제 캠코더로부터 영국제 하의와 얼그레이차, 중국제 실크, 미국제 컴퓨터 부품, 아프간산 헤로인, 파키스탄산 밀과 설탕, 동유럽제 칼라슈니코프 소총, 이란산 석유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관세나 물품세를 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무법지대의 자유무역은 아프가니스탄의 내전 및 마약산업과 아프가니스탄 국경지대에 설치된 파키스탄, 이란, 중앙아시아 등의 국가기관이 부패한 덕분으로 번창하고 있다. 이 밀수업은 이 지역에서 소비재에 대한 욕구와 부합되고 있다.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운수업자와 마약마피아들은 이 욕구를 부채질하고 있다. 1995년 초, 파키스탄의 중앙수입위원회 관리는 내게 말했다.
“이제는 전혀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탈레반은 수송업자들로부터 밀수를 위한 도로사용료를 받고 있습니다. 이 마피아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정부를 만들거나 붕괴시키기도 합니다. 파키스탄은 이 ATT무역에 따른 관세손실로 금년에 국고수입이 30% 가량 감소될 것입니다.”
무역은 언제나 이슬람세계의 중심지에서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었다. 중세 때 중국과 유럽을 연결한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고 있었고, 오늘날 트럭을 운전하고 있는 사람과 똑같은 부족과 유목민이 그 길을 다녔다. 그 실크로드는 유럽과 아랍 정복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 대상들은 사치품만이 아니라 사상과 종교, 신무기, 과학적 발견까지 전해 주었기 때문이다. 낙타대상은 5000~6000마리의 낙타로 구성되어 대형 상선 하나에 상당하는 물품을 운반할 수 있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의 저서에 의하면, 대상은 군대처럼 지휘자와 참모가 있었고, 엄격한 규칙과 의무적으로 묵어야 하는 숙박지가 있었다. 유목민의 약탈에 대비한 경계대책도 있었다. 그 후 거의 2000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늘날의 밀수업자들도 비록 낙타 대신 트럭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당시와 유사한 군대식 조직을 가지고 있다.
퀘타 운수 마피아
1950년, 파키스탄은 국제협정에 따라 내륙국가인 아프가니스탄에게 카라치항을 통해서 면세로 상품을 수입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트럭운송업자는 ATT협정에 따라 봉인된 컨테이너를 카라치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반입하여 카불에서 그 일부를 판 다음, 다시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나머지를 시장에다 판다. 제한된 규모이기는 하지만, 이 사업은 번창하고 있으며, 파키스탄 사람들에게는 값싼 면세 외국소비재, 특히 일본제 전자제품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ATT는 1980년대에 확장되어 아프가니스탄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는 도시에 상품을 공급했다. 1992년 카불의 함락은 중앙아시아에 새로운 시장이 들어선 것과 때를 같이했고, 아프간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옴에 따라 식량, 연료, 건축자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 운수마피아에게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운수업자들은 계속되는 내전과 그 통로를 한 번 통과하는 데 십여 차례나 돈을 뜯는 군벌 때문에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페샤와르에 근거를 둔 운수마피아들은 카불 주변에서 벌어진 전투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과 북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간을 운행하면서 사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퀘타에 근거를 둔 운수마피아들은 파키스탄에서 출발한 국도를 따라 십여 개의 수금초소를 설치해 놓은 탐욕스러운 칸다하르 군벌 때문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퀘타의 운수마피아들은 부토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란과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들어가는 안전한 길이 열리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탈레반 운동에 최초로 자금을 제공한 이 퀘타 마피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퀘타 마피아가 탈레반에게 한 달에 얼마씩 제공했지만, 탈레반이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자 더 많은 돈을 요구하게 되었다. 1995년 4월, 내가 퀘타에서 만난 한 증인의 말에 의하면, 차만의 운수업자로부터 하루에 600만 루피(미화 13만 달러)를 징수했고, 헤라트에 대한 첫 공격을 준비하던 그 다음날 퀘타에서는 그 두 배나 되는 돈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 ‘헌금’은 탈레반이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오는 트럭에게 부과하고 있는 종합적인 단일 관세와는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다. 이 관세는 탈레반의 공식 수입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무역루트가 안전해지자, 밀수량과 밀수지역은 대폭 확장되었다. 트럭대열은 퀘타를 출발해서 칸다하르로 간 다음 다시 남쪽으로는 이란, 서쪽으로는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서 다른 중앙아시아 공화국과 러시아까지도 간다. 얼마 안 가서 퀘타의 운수마피아들은 투르크메니스탄으로 가는 도로를 완전히 사용할 수 있도록 탈레반에게 헤라트를 점령하라고 촉구하게 되었다. ISI는 처음에는 탈레반에게 헤라트를 공격하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탈레반에 대한 영향력은 퀘타 마피아 쪽이 더 컸다. 1996년, 운수업자들은 카불을 점령해서 북으로 가는 루트를 열어달라고 촉구했다. 탈레반은 수도를 점령한 다음, 페샤와르에서 카불로 가는 트럭 한 대에 평균 6000루피(미화 150달러)의 세금을 부과했다. 그 전에는 트럭 한 대마다 3만~5만 루피를 지불했다. 운수마피아는 탈레반 지도자들에게 트럭을 사거나 친척들에게 알선을 하도록 해서 자기들 사업에 참여시켰다. 게다가 마약마피아들이 헤로인을 운반하기 위해 자카트(세금)를 내겠다고 했기 때문에 이 중계무역은 탈레반의 재정에 없어서는 안 될 수입이 되었다.
이 무역으로 가장 큰 손해를 본 것은 파키스탄이었다. 중앙수입위원회(CBR) 추산에 의하면, 파키스탄은 1992~1993 회계연도에 35억 루피(미화 8000만 달러)의 관세수입을 잃었고, 1993~1994 회계연도에는 110억 루피, 1994~1995 회계연도에는 200억 루피, 1997~1998 회계연도에는 300억 루피(미화 6억 달러)를 잃는 등, 탈레반의 세력확장에 따라 급격히 손실이 증가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ATT무역 때문에 파키스탄에는 엄청난 부패구조가 생겼다. 세관, 세관정보국, CBR, 변경경찰, 부족거주지역의 행정기관 등, 이 무역에 관련된 모든 파키스탄 기관이 뇌물을 받았다. 돈이 생기는 아프간 국경지대의 세관으로 가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위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얻은 사람은 자기들이 바친 뇌물을 투자로 간주하고 그 돈을 회수하기 위해 무역업자들에게서 뇌물을 받았다.
실크로드 밀수 사업
이 부패구조는 발루치스탄과 서북변경성 정치인과 장관 등에게도 확산되었다. 이 두 성의 수상과 지사들은 트럭운송면허와 아프가니스탄으로 수출할 밀과 설탕의 허가장을 발행했다. 1995년과 1996년에 고위 군장교들은 이 두 성 장관과 지사들이 이런 허가를 내주기 위한 경쟁 때문에 부패가 생기고, 행정기구 전체를 마비시키고 있으며, ISI의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방해하거나 때로는 대립하기도 하고, 탈레반이 파키스탄 정치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내게 불평했다.
마피아는 그들의 무역을 확장하면서 아프가니스탄의 자원을 약탈했다. 그들은 파키스탄 시장에 내다 팔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산림을 수백만 에이커나 벌채했고, 그리고서도 나무를 심지 않아 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은 녹슬고 있는 공장을 해체하고, 탱크와 차량을 파괴하고, 전신주까지 잘라서 라호르에 있는 강철공장에 고철로 팔아 넘겼다. 카라치와 다른 도시에서는 자동차도둑이 번성했다. 마피아들은 그 지방 자동차도둑을 조직해서 차량을 훔쳐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냈다. 마피아는 그 차량을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의 고객에게 팔았다. 1922년에서 1998년 사이에 카라치에서만 6만5000대의 차량이 도둑맞았다. 그 대부분은 일단 아프가니스탄으로 갔다가, 번호판을 바꾸어 달고 파키스탄에 다시 나타났다.
운수마피아들은 또 두바이, 샤르자 및 기타 페르시아만 항구에서 전기제품을 밀수했다. 이들은 아프간의 말린 과일과 마른 목재에 헤로인을 숨겨,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간의 국영항공사 아리아나에 실어 수출했다.
칸다하르, 카불, 잘랄라바드에서는 걸프지역으로 직항선이 열렸고, 탈레반은 제트기 시대로 진입해서 실크로드 밀수사업을 현대적으로 발전시켰다.
ATT 덕분에 그 전부터 번성하고 있던 파키스탄의 암시장이 발전했다. 한 연구에 의하면, 파키스탄의 지하경제는 1973년에 150억 루피에서 1996년에는 1조1150억 루피로 늘어났고, GDP에서 차지하던 비율도 20%에서 51%로 확대되었다. 같은 기간에 관세포탈을 포함한 세금포탈은 15억 루피에서 1520억 루피로 늘어나 매년 880억 루피씩 늘어난 셈이 되었다. 밀수무역은 1993년에 지하경제에 1000억 루피를 공헌했고, 1998년에는 그것이 3000억 루피 이상으로 늘어났다. 이것은 이 나라 총 수입액인 100억 달러나 1998~1999년의 수입목표(3000억 루피)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마약무역은 매년 500억 루피에 상당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서북변경성에서는 바라라고 부르는 밀수시장에 수입된 소비재가 밀려들어 파키스탄 산업에 막심한 손실을 주었다. 예를 들면, 1994년에 독자적으로 에어컨을 생산하고 있던 파키스탄이 3000만 루피에 상당하는 외국제 에어컨을 수입했다. 당시 전기가 전혀 없었던 아프가니스탄이 ATT를 통해서 10억 루피에 상당하는 에어컨을 수입했는데 이들은 모두 파키스탄의 바라로 들어가 그 지역 생산업자들에게 타격을 주었다. 면세로 들여온 일본제 텔레비전이나 식기세척기를 사실상 파키스탄 국산품과 거의 같은 가격으로 살 수 있다면, 사람들은 자연히 일본제품을 선호하게 마련이었다. 페샤와르 근교 하야타바드의 바라에서는 고객을 끌기 위해서 영국의 마크스 앤드 스펜서나 마더캐어, 또는 일본의 소니 같은 상표를 내건 상점이 생겼다. 이곳에서는 이 회사의 진짜제품을 면세가격으로 살 수 있었다. 1998년 12월, 서북변경성의 수석장관 마탑 아메드 칸은 말했다.
“ATT는 이 성의 경제활동을 파괴했고, 사람들은 정직하게 돈을 번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밀수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헤로인과 칼라슈니코프 문화
이에 못지않은 경제파탄과 광범위한 부패가 이란에서도 일어났다. 운수마피아가 이란에서 연료와 기타 상품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으로 밀수했기 때문에 국고수입이 줄고, 지방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정부 고위층에 부패가 만연했다. 이란의 관리들은 사석에서 분야드(국영공업재단)와 혁명수비대가 석유제품 밀수의 덕을 보고 있다고 내게 말했다. 이 밀수품을 아프가니스탄에서 팔면 이란에 비해 2000~3000%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전쟁을 하고 있던 아프간의 군벌은 대량의 연료를 소비하고 있었다. 발루치스탄의 주유소 주인들은 파키스탄의 회사를 우회해서 관세를 물지 않고 마피아를 통해 이란에서 값싼 연료를 주문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은 마지못해 전자제품의 수입을 금지하는 등 ATT를 규제하려고 몇 번 시도했지만, 항상 탈레반이 그런 금지조처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마피아가 정부 각료들에게 압력을 가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파키스탄에는 이 나라 경제에 미치고 있는 피해를 솔선해서 지적하거나, 탈레반에게 법을 지키라고 압력을 가하려는 사람들이 없었다. ISI는 탈레반에게 굴복할 때까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할 생각이 없었다. 어리둥절한 외국과 파키스탄의 투자자들은 파키스탄이 탈레반을 위해서 그 자신의 경제를 파괴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파키스탄 정부는 사실상 국고수입이 파키스탄으로부터 탈레반으로 이전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탈레반을 도와주고, 그 밀수에 관련된 파키스탄인들을 엄청난 부자로 만든 일종의 비공식적 원조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반동은 파키스탄의 불안한 정국을 더욱 악화시켰다. 1980년대에는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여파가 ‘헤로인과 칼라슈니코프 문화’를 만들어 파키스탄의 정치와 경제를 잠식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폴 케네디는 이렇게 썼다.
‘아프간 전쟁에 10년 동안이나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 파키스탄의 사회적 양상은 어느 정부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변화되었다. 파키스탄의 사회는 이제 정교한 무기의 범람으로 더욱 분열되고, 민간인들의 폭력으로 잔인해졌으며, 마약이 확산되고 범람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그 영향은 훨씬 더 확산되어 이 나라의 모든 제도와 기구를 잠식하게 되었다. 파키스탄의 경제는 ATT 때문에 파탄에 직면하고, 외교정책은 서방국가와 인접국가로부터 고립되게 되었다. 법과 질서는 무너지고 이슬람 투사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법을 시행했다. 탈레반이 피난처를 제공한 새로운 세대의 반시아파 이슬람 급진주의자들은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수백 명의 파키스탄 시아파를 죽였다. 이 파벌 간의 유혈참극은 파키스탄의 수니 다수파와 시아 소수파 사이를 이간시켰고, 파키스탄 및 이란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동시에 8만 명이 넘는 파키스탄의 이슬람 투사들이 1994년부터 탈레반에게서 훈련을 받고 그들과 함께 싸웠다. 이들은 이슬람 운동의 핵심세력을 형성하여 언제든지 파키스탄에서도 탈레반식 이슬람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키스탄은 아프간·수단·소말리아처럼 ‘실패한 나라’
서북변경성과 발루치스탄의 파슈툰지대에는 탈레반을 모방한 부족그룹이 생겼다. 일찍이 1995년에 마울라나 수피 모하메드는 그의 탄짐 니파즈 샤리아티 모하메디를 이끌고 바자우르 에이젠시에서 봉기하여 샤리아법을 요구했다. 이 봉기에는 수백 명의 아프간 및 파키스탄 탈레반이 가담했으나 군대에게 진압당했다. 그러자 탄짐 지도자들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게 피난처를 구했다. 1998년 12월, 오라크자이 에이젠시의 테리키툴레바(탈레반 운동)는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2000명의 관중 앞에서 한 살인자를 공개처형했다. 그들은 파슈툰지대 전역에 탈레반식 사법제도를 도입하겠다고 약속하고, 탈레반을 모방해서 텔레비전과 음악, 비디오를 금지했다. 퀘타에는 다른 친탈레반 파슈툰 그룹이 생겼다. 이들은 영화관을 불태우고, 비디오가게 주인을 사살하고, 위성안테나를 파괴하고, 여자들을 거리에서 쫓아냈다.
그러나 탈레반이 1998년 마자르를 점령한 뒤, 파키스탄은 승리를 선언하고, 세계 각국에게 아프가니스탄을 80% 장악하게 된 탈레반을 승인하라고 요구했다. 파키스탄의 군부와 민간 지도자들은 탈레반의 성공이 파키스탄의 성공이고, 그들의 정책이 옳았으며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 내 이란의 영향력은 종식되고,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파키스탄을 통해 탈레반과 협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서방국가는 탈레반의 이슬람 해석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파키스탄의 탈레반화에 대해서 사람들의 우려가 증대되고 있었지만,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증대되고 있는 내부의 혼란을 무시했다. 외부세계에서는 점점 더 파키스탄이 아프가니스탄이나 수단, 또는 소말리아처럼 실패과정에 있거나, 이미 실패한 나라라고 보게 되었다. 실패한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죽어 가는 나라라고는 할 수 없다. 물론 그럴 수는 있다. 실패한 국가란 파산한 정치엘리트에 의해 정책의 실패가 반복되고 있어도 그것을 재검토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나라다. 파키스탄의 엘리트는 아프가니스탄 정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아 장군은 무굴의 황제처럼 이교도 힌두스탄, 이단자(시아파이므로) 이란, 기독교 러시아의 한복판에 수니파 무슬림의 세계를 재창조하려던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아프간 무자헤딘의 메시지가 중앙아시아로 확산되어 이슬람을 부활시키고, 파키스탄이 영도하는 새로운 이슬람 국가군을 창조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지아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유산이 파키스탄에게 끼칠 영향이었다.
파키스탄은 왜 탈레반을 키웠나?
- 라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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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8-10, 18:3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