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화폐와 동전에는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이 글은 1861년에 처음 화폐에 등장했다. 南北전쟁기간이었다. 北軍이 처음에는 패전을 거듭했다. 이때 한 지방의 목사가 재무장관에게 편지를 써 땅에 떨어진 북쪽의 사기를 높여주기 위해서 이런 글을 돈에 넣자는 제안을 했고 체이스 장관이 이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 뒤로는 이 글을 넣다가 안 넣다가 했는데 1956년에 의회가 이를 미국의 국가적 모토(The United States National Motto)로 결의하여 모든 화폐에 이를 반드시 새겨넣도록 법제화해 버렸다.
돈과 하느님, 다른 말로 하면 정신과 물질이다. 상충하는 두 개념을 조화시키고 있는 것이 이 모토이다. 물질의 뒷받침 없이는 정신의 순수성이 지켜질 수 없고 정신이 빠진 물질은 타락의 수단이 되기 쉽다는 의미가 이 모토에 들어 있다. 이를 동양사상적으로 해석한다면 [恒産이 있어야 恒心이 있다]는 뜻이고 氣(물질)와 理(정신), 야성과 지성의 통합을 말한다. 성공한 인간, 성공한 사회, 성공한 국가는 예외없이 이처럼 상반되는 요소들을 충돌시키지 않고 하나의 큰 질서 속에서 조화시키고 있다. 미국은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국가이면서도 극도로 국가주의적인 나라이다. 개인주의와 국가주의라는 상반되어 보이는 요소를 이처럼 한 덩어리로 묶는 논리는 무엇인가. 이런 통합의 비밀을 알아낸다면 한국 사회에도 응용이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위선적 명분론과 속물적 물신주의를 어떻게 지양(止揚)할 것인가. 정신이 빠진 야성과 힘이 없는 지성을 어떻게 묶어 知性的 野性을 만들어낼 것인가.
미국의 건국 과정을 이해하면 미국인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미국의 국가적 성격의 상당 부분은 미국인의 성격 속에 녹아 있다. 한 미국영어 교사에게 한국인들이 덕목으로 생각하는 단어는 겸손과 성실이라고 하니까 {미국에서는 어서티브니스(Assertiveness)가 최고의 덕목이다}고 주장했다. 어서티브니스, 즉 확실한 자기 주장이 그 사회가 기리는 장점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할 수 있고 반대로 유교문화권에서는 자기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사람은 무뢰한이나 건방진 사람으로 매도될 것이다. 미국인들은 개인이 어떤 단체, 예컨대 가족 국가 교회 회사 종족에도 종속될 수 없는 신성한 존재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들은 부모와의 관계조차도 역사적이고 생물학적인 우연의 결과라고 본다. 父子관계도 인연을 뗄 수 없는 그런 불가피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부모가 18세 정도까지만 양육을 해주면 그 뒤로는 집을 나가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만 20세가 지났는데도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청년들은 독립심이 부족한 얼치기로 취급받는다.
절대 공간
성년이 지나서도 부모와 함께 살 때는 일종의 하숙비조로 돈을 내는 것이 보통이다. 부모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의존적인 인간이라는 인상을 주기 싫기 때문이다. 개인은 누구에도 종속될 수 없고 누구의 명령도 아닌 오직 스스로의 결단에 따라서 나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진다는 것이 미국식 개인주의의 핵심이다. 보수와 진보도 이런 개인주의를 보는 시각을 기준으로 하여 나뉘어진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편이 보수이고 사회와 환경의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진보이다. 이런 개인주의에서 프라이버시(Privacy)의 개념이 등장한다. 누구한테도, 즉 국가 회사 부모 그 누구에 의해서도 침범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을 확보하겠다는 것이 프라이버시의 철학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심리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들은 고독한 시간과 공간이 있어야 인간은 소진된 정신적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이 때부터 나의 방, 나의 장난감, 나의 책, 나의 옷을 가지고 나만의 절대공간을 확보하는 데 이력이 난 미국인들은 마음속에 하나의 분명한 선을 그어놓고 그 안쪽을 남에게 열어놓지 않는다. 이 선을 건드리면 그들은 신경질을 내거나 냉담해지거나 굳어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독립선언의 인간관은 미국인들의 생활 속에 정착되어 있다. 인종 남녀의 불평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는 분명히 평등한 인간 세계이다. 미국인들은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들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과 그렇게 대우받는 것을 굉장히 거북하게 생각한다. 이런 인간관에서 나온 생활습관이 인간관계나 옷차림, 대화, 행사에 있어서의 간편성이다.
그들은 딱딱한 공식성을 매우 싫어한다. 미국인들은 미래, 변화, 진보를 지향한다. 이것은 조국인 영국을 버린 淸敎徒의 행동이 과거, 역사,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사람들의 강박관념이 그들을 앞만 보고 뛰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유럽의 역사와 단절한 것이지 자신들이 16세기부터 건설하기 시작한 새로운 역사와 단절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이 짧은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서 느끼는 애착은 대단하다. 미국인들은 인간을 일단 선량한 존재라 전제하고 출발한다. 교육, 자원봉사, 再活, 민주정부에 대한 확신, 개인주의 평등 자유에 대한 신념 같은 것이 인간은 얼마든지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품성을 갖고 있다는 긍정적 시각에 기초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시간의 흐름을 항상 느끼면서 살아가는 존재처럼 긴장되어 있다. 시간을 즐기는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건설하고 생산하며 성취해야 하는 자원으로 생각한다. 능률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의 표현이다. 미국인들이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잘 정리되어 있고 두서와 절도가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맥도널드 햄버거 같은 [패스트 푸드]를 발명한 것도 미국인들이다. 이런 시간관으로 해서 그들은 일을 열심히 하고 어려운 일을 해내는 것을 美德으로 생각하며 행동파를 존경하고 물질지향적인 태도를 비판하지 않는다.
결투
미국인들은 솔직하고 직접적인 대화를 좋아한다. {우리 카드를 이 탁자위에 모두 펼쳐놓고 이야기를 시작합시다}느니 {우리 이제 말장난을 그만 두고 핵심으로 들어갑시다}는 식이다. 그래서 분쟁이 있을 때는 당사자들끼리 속을 털어놓고 해야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든지 중개인을 내세우는 것을 허약한 인격의 탓으로 보고 경멸하기도 한다.
미국 사회는 경쟁사회인데 이것을 지탱하는 규칙은, 경쟁은 공정해야 한다는 합의이다. 정부 판사 언론은 이 공정한 게임을 관리하는 심판자의 역할을 한다. 미국 형사재판에서는 피고인과 검사가 배심원들을 심판관, 재판장을 사회자로 두고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벌이는 하나의 결투를 연출한다. 재판장의 역할은 이 결투가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유의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살인혐의자도 보석을 받아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도록 하는 이유도 그렇게 해야 피고인이 검사와 공평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언론이 어떤 사람에게 불리한 보도를 할 때는 그 사람의 反論을 실어주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공무원의 부정 부패가 나쁜 이유도 그것이 특정한 사람에게 특혜를 주어 공정한 게임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정한 게임을 유지하려면 심판관의 권위에 대한 존경이 있어야 한다.
1996년 미국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뉴욕 양키즈의 타자가 친 외야 플라이를 볼티모어 오리올즈의 외야수가 받기 직전에 외야석에 있던 어린이가 끼고 있던 글러브를 내밀어 받아버린 사고가 있었다. 그때 외야심판은 이것을 홈런으로 판정했다. 텔레비전 중계방송을 보면 명백한 수비방해로서 소년의 개입이 없었다면 아웃을 당했으리라는 것이 확실했다. 당시의 언론이나 팬들은 잘못 판정한 심판을 비판하기보다는 이 소년의 애교어린 행동을 소개하는 식으로 처리했다. 볼티모어 오리올즈는 결국 이 사고가 원인이 되어 그 시합도 지고 시리즈도 놓쳤지만 재시합 운운하는 이야기는 나오지도 않았다. 공정한 게임을 위해서는 심판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가 있어야 하고 모든 인간은 불완전하니까 그런 실수는 불가피한 것으로 치부하여 참아야 한다고 하는 성숙한 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젊게, 때로는 철없이 보이는 미국인, 항상 결투하듯이 살아가는 사람들, 이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자존심을 굽힐 수 없다고 생각하는 미국인, 얌전하다는 평을 수치로 아는 사람들…. 이런 미국인들을 보면서 나는 이들이야말로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사고방식과 행태, 그리고 사회의 규칙이 칼로 자르듯이 분명하고 날이 서 있는 것이 꼭 軍事文化를 사회에 응용한 것 같았다.
변명의 논리
지금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서양의 나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騎士들이 지배층으로서 오랫동안 민중을 다스렸다는 공통점이 있다. 동양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들어간 일본도 오랜 무사계급의 통치를 받은 적이 있다. 군인통치와 선진화의 관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군인은 칼이나 총을 갖고 다니기 때문에 서로 조심하지 않으면 칼부림, 총부림이 나게 된다. 자연히 상대방에 대한 경계와 함께 조심성이 따라야 하고 사람을 대할 때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言行을 정확하게 또 정중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총이나 칼을 갖지 않는 민간인들끼리의 싸움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만 무장한 사람에게 그랬다간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른다. 기자는 미국에 있었던 1년간 고함을 치면서 싸우는 모습을 정말이지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총기의 소지가 사실상 허용되고 있는 나라에서 상대방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모욕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1990년대 말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 가구의 약 40%가 권총 단총 장총 등의 총기를 소지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개신교 신도들의 총 소지율이 46%로서 舊敎신도들의 30%, 유태교 신도들의 10%보다도 높다는 점이다. 미국의 개척을 선도했던 청교도정신의 영향과 총기 소지율은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정치적 성향에서는 보수파인 공화당 지지자의 소지율이 민주당 지지자보다도 약간 높았다. 군사문화의 전통을 가진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우선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아야 내가 안전하겠다]는 계산을 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보니 서로가 서로를 조심하는 시민윤리가 정착되며 이런 공중도덕의 바탕 위에 민주주의가 들어오니 자유롭지만 질서가 있는 민주주의, 즉 부드럽지만 무서운 얼굴을 한 민주주의가 가능한 것이다.
일본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민속학자는 {교수로 부임하니 동료 교수가 주의를 주는데 일본인들에게는 절대로 인격적인 모욕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하면 보복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그 한국인 교수는 그러면서 {오랜만에 한국에 와 보니 사회생활에서 인격 모독적인 언행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데 정말 놀랐습니다}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총을 소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한결 조용해질 것이다. 한국은 결투의 전통이 없는 사회이다. 승부에서 지면 재빨리 변명의 논리를 개발하여 승복하지 않는다.
돈에 "우리는 신을 믿는다"고 써넣은 미국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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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3-15, 17: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