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론조사로 입법과정을 대신할 수는 없다
여야간 미디어법 합의사항이 여론조사 채택 문제로 전면 무효화 됐습니다. 민주당 문방위 간사인 전병헌 의원은 며칠전 라디오에 출연해서 “미디어법 표결 전 대전제인 국민 여론 수렴 절차가 한나라당 추천 위원 측 방해로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면서 여야 합의 무효화를 주장했고, 한나라당 간사인 나경원 의원은 “여론조사를 하는 것이 반드시 여론 수렴 절차라고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여야간사의 이와 같은 설전(舌戰)이 여론조사 개입의 당위성 또는 불가함의 논거(論據)로 충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미디어법 찬반 여부와는 무관하게 여론조사 종사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전병헌 의원이나 민주당 지지자분들께는 섭섭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여론조사 업무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저로서는, 미디어법 개정이 사실상 여론조사 채택 문제 때문에 무효화된 것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당부 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여 미디어법 개정 관련, 여론조사의 과도한 개입이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 한나라당과의 코드 맞추기라는 편견을 갖고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 드리는데요. 제 주장을 여론조사 기관 종사자로서 드리는 고해성사 정도로 생각해 주십시오.
사실 리얼미터는 왼쪽에서 보시는 분들한테는 오른쪽에 있고, 또 오른쪽에서 보시는 분들한테는 왼쪽에 있습니다. 일례로 최근 시사IN과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일부 네티즌들에 의해 소위 ‘좌파’ 여론조사 기관으로 낙인찍혀 이미 저희 입장과는 상관없이 ‘왼쪽’으로 조금 가 있습니다. 저희 원칙이 불편부당(不偏不黨)임에도 말이죠. 여전히 제가 한나라당과의 코드 맞추기로 이 글을 쓰신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말씀 드리죠. 저는 야당 추천 공동위원장인 강상현 교수님의 대학원 제자입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여론조사 기관의 입장에서는 여론조사의 영향력과 매출이 증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 정책결정 단계에서 여론조사 개입은 매우 달콤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씀드리면, 정책 결정을 위한 보조적 자료로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는 하되,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사실상 여론조사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합니다. 여론조사로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자는 여론조사 만능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는 몇 가지 경험적 사례를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여론조사에 의한 정책 결정이 항상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인간이 지닌 이기적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례는 미디어법과는 거리가 있는 사안이지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지요. 저희 리얼미터가 2007년 9월에 이른바 님비현상(Nimby: Not in my back yard)과 관련하여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다수의 국민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 화장장 등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의견이 46%였고, 찬성의견이 37%로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혐오시설 유치 반대의견이 많았습니다. 예측이 가능하고 매우 당연한 지역 민심입니다.
만일 여야 합의를 통해 화장장, 쓰레기 소각장 등의 혐오시설 유치를 여론조사로 결정하게 되서, 가장 반대가 적은 지역에 혐오시설을 건립하게 된다고 하면, 해당 지역 주민들이 혐오시설 유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2007년 당시 혐오시설과 관련하여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혐오시설 유치의사를 밝힌 바 있는 김황식 하남시장 기억나시죠? 당시 김 시장은 주민투표와 국내 첫 주민소환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시설 유치를 포기한 바 있는데 지역 민심, 즉 여론에 의해 시장의 소신 있는 정책이 묻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님비현상과 같이 본능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안과 관련해서는 여론조사로 도입여부를 ‘결정’한다는 건 사실 무의미하겠죠. 보나마나 반대가 많을 테니까요.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여론조사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 긴밀한 협의가 우선 되어야합니다.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 없는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있습니다. 가령 여론조사로 공공요금 인상 여부를 결정한다면 공공요금은 인상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군 복무 기간도 상당기간 단축되거나 모병제로 전환될 날이 그리 멀지 않으며, 군복무 가산점 제도도 간단히 부활될 수 있고, 어쩌면 여성도 군대를 의무적으로 가야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나 간통죄도 폐지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네요.
두 번째. 주요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한 경우, 일반 국민의 의견 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겁니다. 만일 일반 국민들의 의견, 즉 여론조사에 의해 해당 사안을 결정하려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전문가의 식견을 갖도록 교육한 후에 조사를 해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겠지요. 다음의 사례를 볼까요? 2005년말 우리 국민은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혐의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 모두가 줄기세포 준(準)전문가가 돼서 갑론을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황 교수 사건은 만 3년이 넘은 지금도 1심이 진행중일만큼, 상당한 전문가들이 증인이 되어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는 난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국민들은 황 교수를 인류를 구원해줄 슈퍼맨과 동격으로 생각했었던 터라, 정말 패닉 상태가 됐었죠. 누리꾼들도 나름 줄기세포에 대해 공부해가면서 논쟁은 달아올랐고, 당시 리얼미터도 어김없이 여론조사를 해봤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여론조사 결과, 황 교수의 교수직 사퇴가 결정된 이후에도, ‘황 교수에게 연구기회를 다시 줘야한다’는 의견이 80%로 압도적이었구요. 서울대 교수들로 이루어진 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발표 후 여론조사에서도 70%가 ‘황 교수에게 줄기세포 재연 기회를 줘야한다’는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전문가들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논문 조작이 사실이라고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여론은 한 동안 황 교수 편이었던 거죠. 만일 당시 전문가 조사위원회가 아니라 일반 여론조사에 의해 황 교수 사건이 결론지어졌더라면 황 교수는 서울대에 다시 복직해서 연구를 재개했을지도 모릅니다. 최종 결정은 해당분야 전문가와 법조인들에 의해 다가오는 8월쯤 법정에서 내려진다고 하는데요. 최종 결정이 법정으로까지 가게 된 것은 그 사안이 여론조사로 결정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미디어법 개정이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줄기세포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처럼 미디어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미디어법 개정이 쉬운 문제였다면 전문가로 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실 저도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을 하지만,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의 위원들만큼 이번 미디어법 개정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비전공자이거나 무관심한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 역시 표피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할 텐데, 전문가 위원회에서 결론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 1,000명에게 이분법적으로 찬반 의견을 물어 그 결과로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사실상 ‘결정’한다면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찬성이든 반대이든 말입니다. 마치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의견이 동률로 나왔다고 해서 여론조사로 최종 결정을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민주당의 이번 논리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됐을 때에도 대의 민주주의 회의론이 있었는데, 전문가 위원회도 모자라 결국 국민 여론으로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결정한다면, 국회의원 스스로 대의 민주주의와 입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거를 할 때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공약, 학력, 경력을 참고하는 것은 후보자의 능력과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보기 위함이고, 그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국회 소위원회에서 국민을 대신하여 입법 활동을 하게 되는데, 미디어법 개정을 위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법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그 해결책을 전문가 위원회, 나아가 국민들에게 묻는다는 것은 스스로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제 간단명료하게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첫째. 여론조사는 분명 국회의원과 대통령 등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선거 과정에서는 결정적 요인으로 활용될 수 있고, 적정 수준으로 반영될 경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렇게 선출된 공직자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 주요 참고 지표로 여론조사가 또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론조사 개입은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의사결정 과정을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의사결정을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들을 선거로 뽑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TV토론과 여론조사 기관만 있으면 입법 활동이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진행될 수 있으니 말이죠.
미디어법 합의사항 무효화의 원인이 여론조사 채택 여부 때문이었다는 점은 향후 정치공방에 있어서 여야간에 두고두고 활용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상대를 공략하는 무기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론조사 기관 종사자로서 별로 득이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야 입장이 바뀌어 여론조사 만능주의자에서 여론조사 무용론자가 될 수 있다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서라도 국회의원 여러분들께서는 여론조사의 신중한 활용 부탁드립니다.
글을 맺겠습니다.
국회의원 여러분. 여론조사 기관을 그냥 제자리에 냅둬 주시는 게 어떠하실지요. 안그러면 어느 새 여론조사 기관이 입법기관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점 생각하시고 말이죠. 밥그릇 뺏기는 겁니다. 그나저나 진짜로 리얼미터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여론조사 기관이라는 점 제발 믿어주십시오. 리얼미터 입장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과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모두 소중한 고객이거든요~
여의도에서 비오는 어느 늦은 밤에.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
여야간 미디어법 합의사항이 여론조사 채택 문제로 전면 무효화 됐습니다. 민주당 문방위 간사인 전병헌 의원은 며칠전 라디오에 출연해서 “미디어법 표결 전 대전제인 국민 여론 수렴 절차가 한나라당 추천 위원 측 방해로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면서 여야 합의 무효화를 주장했고, 한나라당 간사인 나경원 의원은 “여론조사를 하는 것이 반드시 여론 수렴 절차라고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제 입장에서는 여야간사의 이와 같은 설전(舌戰)이 여론조사 개입의 당위성 또는 불가함의 논거(論據)로 충분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미디어법 찬반 여부와는 무관하게 여론조사 종사자로서 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전병헌 의원이나 민주당 지지자분들께는 섭섭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으나, 여론조사 업무에 사명감을 갖고 임하는 저로서는, 미디어법 개정이 사실상 여론조사 채택 문제 때문에 무효화된 것에는 공감할 수 없습니다.
본론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먼저 당부 드릴 것이 있습니다. 혹여 미디어법 개정 관련, 여론조사의 과도한 개입이 옳지 못하다는 주장이 한나라당과의 코드 맞추기라는 편견을 갖고 오해하실까봐 미리 말씀 드리는데요. 제 주장을 여론조사 기관 종사자로서 드리는 고해성사 정도로 생각해 주십시오.
사실 리얼미터는 왼쪽에서 보시는 분들한테는 오른쪽에 있고, 또 오른쪽에서 보시는 분들한테는 왼쪽에 있습니다. 일례로 최근 시사IN과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일부 네티즌들에 의해 소위 ‘좌파’ 여론조사 기관으로 낙인찍혀 이미 저희 입장과는 상관없이 ‘왼쪽’으로 조금 가 있습니다. 저희 원칙이 불편부당(不偏不黨)임에도 말이죠. 여전히 제가 한나라당과의 코드 맞추기로 이 글을 쓰신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말씀 드리죠. 저는 야당 추천 공동위원장인 강상현 교수님의 대학원 제자입니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여론조사 기관의 입장에서는 여론조사의 영향력과 매출이 증대될 수 있다는 점에서 주요 정책결정 단계에서 여론조사 개입은 매우 달콤한 제안입니다. 하지만 단도직입(單刀直入)적으로 말씀드리면, 정책 결정을 위한 보조적 자료로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는 하되,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사실상 여론조사로 ‘결정’하고자 하는 의도에는 몇 가지 이유로 반대합니다. 여론조사로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하자는 여론조사 만능주의가 위험할 수 있다는 몇 가지 경험적 사례를 말씀 드려 보겠습니다.
첫 번째. 여론조사에 의한 정책 결정이 항상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인간이 지닌 이기적 본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사례는 미디어법과는 거리가 있는 사안이지만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지요. 저희 리얼미터가 2007년 9월에 이른바 님비현상(Nimby: Not in my back yard)과 관련하여 여론조사를 한 적이 있었는데요. 다수의 국민이 자기가 사는 지역에 화장장 등 혐오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대의견이 46%였고, 찬성의견이 37%로 지역별로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지역에서 혐오시설 유치 반대의견이 많았습니다. 예측이 가능하고 매우 당연한 지역 민심입니다.
만일 여야 합의를 통해 화장장, 쓰레기 소각장 등의 혐오시설 유치를 여론조사로 결정하게 되서, 가장 반대가 적은 지역에 혐오시설을 건립하게 된다고 하면, 해당 지역 주민들이 혐오시설 유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2007년 당시 혐오시설과 관련하여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혐오시설 유치의사를 밝힌 바 있는 김황식 하남시장 기억나시죠? 당시 김 시장은 주민투표와 국내 첫 주민소환제로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시설 유치를 포기한 바 있는데 지역 민심, 즉 여론에 의해 시장의 소신 있는 정책이 묻혀버린 사건이었습니다.
님비현상과 같이 본능적으로 반대의견이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사안과 관련해서는 여론조사로 도입여부를 ‘결정’한다는 건 사실 무의미하겠죠. 보나마나 반대가 많을 테니까요. 때문에 이런 경우에는 여론조사로 결정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자체 간 긴밀한 협의가 우선 되어야합니다. 여론조사로 결정할 수 없는 사례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더 있습니다. 가령 여론조사로 공공요금 인상 여부를 결정한다면 공공요금은 인상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군 복무 기간도 상당기간 단축되거나 모병제로 전환될 날이 그리 멀지 않으며, 군복무 가산점 제도도 간단히 부활될 수 있고, 어쩌면 여성도 군대를 의무적으로 가야할 날이 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형제도나 간통죄도 폐지될 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네요.
두 번째. 주요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전문가의 견해가 필요한 경우, 일반 국민의 의견 보다는 전문가의 의견에 의해 결정되어야 할 겁니다. 만일 일반 국민들의 의견, 즉 여론조사에 의해 해당 사안을 결정하려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전문가의 식견을 갖도록 교육한 후에 조사를 해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겠지요. 다음의 사례를 볼까요? 2005년말 우리 국민은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혐의 사건과 관련하여 국민 모두가 줄기세포 준(準)전문가가 돼서 갑론을박한 적이 있었습니다. 황 교수 사건은 만 3년이 넘은 지금도 1심이 진행중일만큼, 상당한 전문가들이 증인이 되어 법정공방을 벌이고 있는 난해한 사건입니다.
당시 국민들은 황 교수를 인류를 구원해줄 슈퍼맨과 동격으로 생각했었던 터라, 정말 패닉 상태가 됐었죠. 누리꾼들도 나름 줄기세포에 대해 공부해가면서 논쟁은 달아올랐고, 당시 리얼미터도 어김없이 여론조사를 해봤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여론조사 결과, 황 교수의 교수직 사퇴가 결정된 이후에도, ‘황 교수에게 연구기회를 다시 줘야한다’는 의견이 80%로 압도적이었구요. 서울대 교수들로 이루어진 조사위원회의 진상조사 발표 후 여론조사에서도 70%가 ‘황 교수에게 줄기세포 재연 기회를 줘야한다’는 의견을 나타냈습니다. 전문가들의 면밀한 검토에 의해 논문 조작이 사실이라고 발표됐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여론은 한 동안 황 교수 편이었던 거죠. 만일 당시 전문가 조사위원회가 아니라 일반 여론조사에 의해 황 교수 사건이 결론지어졌더라면 황 교수는 서울대에 다시 복직해서 연구를 재개했을지도 모릅니다. 최종 결정은 해당분야 전문가와 법조인들에 의해 다가오는 8월쯤 법정에서 내려진다고 하는데요. 최종 결정이 법정으로까지 가게 된 것은 그 사안이 여론조사로 결정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죠.
미디어법 개정이 바로 이러한 경우라고 생각을 합니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줄기세포에 대해서 잘 몰랐던 것처럼 미디어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잘 모릅니다. 미디어법 개정이 쉬운 문제였다면 전문가로 위원회를 구성할 필요가 없었겠지요. 사실 저도 대학원에서 언론학을 전공해서 많이 안다고 생각을 하지만,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의 위원들만큼 이번 미디어법 개정안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비전공자이거나 무관심한 대다수의 일반 국민들 역시 표피적으로는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알지 못할 텐데, 전문가 위원회에서 결론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국민 1,000명에게 이분법적으로 찬반 의견을 물어 그 결과로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사실상 ‘결정’한다면 매우 위험한 발상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찬성이든 반대이든 말입니다. 마치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의견이 동률로 나왔다고 해서 여론조사로 최종 결정을 하자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민주당의 이번 논리는 궁극적으로 그렇게 해석될 수밖에 없어 보입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참고하기 위해 위원회가 구성됐을 때에도 대의 민주주의 회의론이 있었는데, 전문가 위원회도 모자라 결국 국민 여론으로 미디어법 개정 여부를 결정한다면, 국회의원 스스로 대의 민주주의와 입법부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선거를 할 때 유권자들이 후보자의 공약, 학력, 경력을 참고하는 것은 후보자의 능력과 해당 분야의 전문성을 보기 위함이고, 그렇게 뽑힌 국회의원들은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국회 소위원회에서 국민을 대신하여 입법 활동을 하게 되는데, 미디어법 개정을 위해 국회의원들이 스스로 법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그 해결책을 전문가 위원회, 나아가 국민들에게 묻는다는 것은 스스로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한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이제 간단명료하게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첫째. 여론조사는 분명 국회의원과 대통령 등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선거 과정에서는 결정적 요인으로 활용될 수 있고, 적정 수준으로 반영될 경우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그렇게 선출된 공직자들이 의사결정을 할 때 주요 참고 지표로 여론조사가 또한 활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론조사 개입은 거기까지여야 합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의사결정 과정을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의사결정을 여론조사로 대신할 수 있다면, 그들을 선거로 뽑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TV토론과 여론조사 기관만 있으면 입법 활동이 훨씬 빠르고 깔끔하게 진행될 수 있으니 말이죠.
미디어법 합의사항 무효화의 원인이 여론조사 채택 여부 때문이었다는 점은 향후 정치공방에 있어서 여야간에 두고두고 활용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상대를 공략하는 무기로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여론조사 기관 종사자로서 별로 득이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해성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여야 입장이 바뀌어 여론조사 만능주의자에서 여론조사 무용론자가 될 수 있다는 날이 올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서라도 국회의원 여러분들께서는 여론조사의 신중한 활용 부탁드립니다.
글을 맺겠습니다.
국회의원 여러분. 여론조사 기관을 그냥 제자리에 냅둬 주시는 게 어떠하실지요. 안그러면 어느 새 여론조사 기관이 입법기관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는 점 생각하시고 말이죠. 밥그릇 뺏기는 겁니다. 그나저나 진짜로 리얼미터는 불편부당(不偏不黨)한 여론조사 기관이라는 점 제발 믿어주십시오. 리얼미터 입장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과 민노당, 진보신당, 창조한국당, 친박연대 모두 소중한 고객이거든요~
여의도에서 비오는 어느 늦은 밤에.
리얼미터 이택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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