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한계와 세상의 복잡성을 모르는 한국의 無知한 기자들

모든 인간은 슈퍼맨이어야 하고 세상은 極樂이어야 한다고 확신하는 한국의 기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



한국 기자들의 철학 빈곤이 한국사회를 근원적으로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간다. 無知,교만, 몽상에 한국 기자들의 냄비근성은 대한민국의 지성적, 감정적, 정치적, 문화적 풍토를 황폐화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경박한 지식과 말초적 감성에 근거한 한국기자들의 호들갑이 광우亂動사태와 같은 무지의 광란극을 全 세계 앞에 연출한다. 한국 기자들의 치명적 無知는 인간의 실존적 곤경에 대한 無知이다. 그 결과 인간세계에 불가능한 이상적인 세계와 완벽한 인간을 요구한다. 모순이 완전히 제거된 이상사회와 한계가 전혀 없는 슈퍼맨을 당연시하는 망상적 시각으로 한국 기자들은 정보를 양산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국사회는 선동방송의 지원을 받는 망상적 깽판꾼들의 투쟁장이 되어 있다.

인간실존의 구조적 한계를 무시하니까, 벼락맞을 확률도 안 되는 광우병을 미국산 쇠고기에 덮어씌운 반란적 깽판을 기자들이 연출한 것이다. 이 세상의 흥망성쇠를 거부하는 해괴한 완벽주의에 빠진 기자들이 환경 히스테리, 인권 히스테리, 통일 망상증, 복지 사기극 등을 연출한다. 그 결과 노동자들의 天國을 요구하거나 경찰의 공권력을 매도하는 미친 짓을 기자들이 해댄다. 노동자의 권리를 무한하게 보장하라고 하면서, 경찰은 일체 공권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게 된다. 지난 1년 한국사회에서 발생한 많은 광란적 현상들은 한국 기자들의 몽상성과 광란성에 기인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성공하는 자의 좋은 점과 실패하는 자의 나쁜 점만 보도하는 언론은 인간의 운명과 사회의 구조에 대한 공정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 인간의 登落(up and down)은 매우 자연스러운 순리이고, 사회의 일정한 불평등은 매우 자연스러운 섭리이다. 영웅에게 완벽한 승리나 성공만 기대하는 것은 인간의 本性을 모르는 無知의 소산이고 교만한 판단이다. 사회에 완벽한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세상의 순리에 거스르는 不義이다. 나쁜 철학인 교조적 이념에 물든 완벽주의자들은 인간의 약점과 사회의 모순을 참지 못한다.

9.11사태가 터졌을 때에 미국의 방송은 일단 부시 정권의 안보 헛점에 침묵하고 외부의 敵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하고 홍보했다. 그리고 9.11참사로 죽음을 당한 가족들의 울음을 극도로 자제해서 내보냈다. 우리나라의 방송은 북한의 핵무기 실험에 직면해서 계속 自國의 정부를 비방하고 敵의 공세를 무마하는 반역질을 해댄 것에 비해, 미국의 방송은 확실히 帝國의 언론다운 자기통제를 했다. 한국의 언론인들은 自國의 안보와 질서에 대하여도 무책임한 저항논리로 보도한다. 아직도 한국의 언론인들은 자기 나라에서 독립운동 하는 것 같다.


최근 박태환 선수의 부진한 수영 성적에 대한 언론의 호들갑은 한국 기자들의 빈곤한 철학을 잘 증거한다. 기적과 같은 능력으로 세계 수영계에 한국인을 진입시킨 박태환이 부진한 성적을 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인데, 한국 언론은 마치 이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뜬다. 세계수영의 역사를 공정하게 계산하면, 박태환의 善戰이 기적이었지, 박태환의 성적不振이 일어나지 말아야 할 잘못된 현상은 아니다. 체육선수의 영광은 원래 수명이 길지 못 하지만, 박태환 예선탈락에 대한 한국 언론(스포츠 기자들)의 매도는 人生과 세상을 모르는 완벽주의 히스테리에 불과하다. 교만한 기자들의 히스테리가 국민들의 히스테리로 감염되는 수가 많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정확한 계산을 하지 않은 기자들은 초인적 영웅을 기대하거나 극락과 같은 유토피아를 강요한다. 박태환이 항상 이겨야 한다는 착각은 인간實存의 한계와 등락을 계산하지 않은 기자들의 철학빈곤 때문이다. 노동자가 멋대로 무제한적 깽판을 치고, 경찰들은 어떤 폭력적 수단으로 공권력을 수행하면 안 되고, 박태환 선수는 항상 이겨야, 無知와 교만에 휩싸인 한국 기자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다. 미국 언론들이 수영 영웅인 마이클 펠프스의 일시적 추락을 마구 때리지 않았는데, 한국 기자들의 박태환 때리기 히스테리에 대해, 조갑제 대표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인간의 한계와 사회의 모순을 감안한 기자와 감안하지 않은 기자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조영환 편집인: http://allinkorea.net/]

펠프스도 예선 탈락한 적이 있었다!

-그때 미국 언론은 뭇매를 때리지 않았다. 한국의 스포츠 기자들은 스포츠도 정치화하여 보도한다.
趙甲濟

로마 세계 수영선수권 대회에서 無敵의 마이클 펠프스(미국. 북경올림픽 8개 금메달)도 물을 먹었다. 200m 자유형에서 독일의 폴 비더만이 우승, 펠프스가 2등을 차지하였다. 비더만은 北京올림픽 200m 자유형에선 1분46초로 5등을 했는데, 이번엔 4초를 단축시켜 1분42초였다. 1년 사이에 4초 단축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곳이 수영부문이다. 비더만이 입은 폴리우레탄 수영복이 마찰을 줄여 속도를 높인다고 한다. 세계수영협회는 이 수영복 착용을 금지시키기로 했으나 기간은 정하지 않았다.

마이클 펠프스도 2005년 세계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예선 탈락한 적이 있다. 미국 언론이 그때 펠프스에게 뭇매를 가하였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승부의 세계에서 지고 이기는 것은 兵家常事이다. 박태환 선수가 경쟁이 극심한 400m, 200m 부문에서 예선탈락하였다고 한국의 스포츠 기자들이 비난성 기사를 쏟아낸다. 박태환 선수를 둘러싼 관계자들의 갈등을 신나게 보도한다. 北京올림픽의 영웅을 순식간에 동네북으로 만든다.

스포츠까지도 政治부문의 권력투쟁처럼 다루는 게 한국 기자들이다. 대표팀이 지면 감독을 바꾸라고 소리지르는 게 기자들이다. 객관보도에도 힘이 붙이는 기자들이 人事에까지 개입하는 꼴이다. 스포츠의 政治化를 先導하는 한국 기자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런 스포츠 기자들의 존재가 한국 스포츠 정신 발전의 가장 큰 장애물이다. 지는 것을 나쁜 짓 한 것, 부끄러운 일과 동일시한다. '치욕의 완패'라는 제목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풍토에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한다. 이기는 것은 무조건 잘하는 것, 좋은 것이 되는 나라이다. 깨끗하게 이기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기자들이 민주주의의 방해물이다.

1998년 프랑스에서 열렸던 월드 컵 대회 때 한국 팀이 不振하자 차범근 감독을 중도하차,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웠던 것도 기자들이었다. 과도한 영웅만들기와 과도한 역적 만들기는 같다. 한국의 일부 글쟁이들은, 인간 존재의 장점과 약점을 두루 살피면서 인간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모른다. 때로는 좋은 점만 부각시키고 때로는 나쁜 점만 강조한다. 성숙한 인간관은 성숙한 민주주의의 기초이다.

기자들은 제발 박태환 선수를 내버려 두라! 때론 무관심이 최선의 치료이다. 박태환 선수는 작년 北京 올림픽의 두 개 메달로 한국인으로 태어난 의무를 다하였다. 그에게 뭘 더 바라는가? 百戰百勝하기를 바라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완벽주의가 자신의 子女와 이 사회를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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