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보: "독립군이 아니라 만주국 경찰"
2004년 10월호 月刊朝鮮은 <추적특종/마침내 풀린 金希宣 의원의「독립군 家系 의혹」>이란 제목의 기사(吳東龍 기자)에서『金希宣 의원의 아버지는 독립군이 아니라 日帝下 만주국 경찰이었다』는 金學奎 장군 큰며느리 등의 증언을 소개하였다.
吳 기자는 <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고 작은할아버지는 金學奎 장군이라면서 親日청산 문제를 주도적으로 거론해온 열린당 金希宣 의원의 「독립군 家系」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고 단정하였다. 金學奎 장군의 큰며느리 田鳳愛씨 등 복수의 인사는 『金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씨(사망)가 만주국 경찰로 근무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었다. 金의원은 『아버지 金一鍊이 한독당 비밀청년 당원으로서 金九 선생의 밀명으로 활동하다가 실종됐다』고 주장했으나, 만주에서 옆 마을에 살았던 田鳳愛씨(金學奎 장군의 큰며느리) 등 복수의 인사는 『金一鍊이 日帝下 만주국 柳河 경찰서 경찰관으로 일했다』고 증언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대하여 金 의원은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하였으나 아버지가 독립군임을 증명할 수 있는 反證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제2보: 만주국 경찰 特務 재직 증명서 확보
月刊朝鮮 吳東龍 기자는 다음호(2004년 10월호)에서 결정적 物證을 제시하였다. 그는
<중국 유하현 공안국 유하경찰서 발행 김희선의 아버지 在職 증명서를 입수해보니 金一鍊은 만주국 유하경찰서에서 독립운동가를 잡는 특무경찰관으로 근무하였음이 밝혀졌다>고 보도하였다. 月刊朝鮮은 재직 증명서 原本을 공개하였다. 2004년 10월10일자로 된 증명서는 金一鍊이 1945년 8월15일까지 僞滿(괴뢰 만주국) 시절 유하현 공안국 경무계 특무로 근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유하현 사람들이 기억하는 金一鍊에 대한 이야기도 소개하였다. 열린당과 김희선측은 월간조선의 증명서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제3보: 만주국 관리명단에도 수록
월간조선은 두 달 뒤 12월호에서 더 구체적인 자료를 제시하였다. 鄭權鉉(조선일보 도쿄 특파원)-吳東龍(월간조선 기자)가 공동 취재한 기사였다. 1942년 말 만주국 총무청 인사처가 발행한 ‘滿洲國官吏錄’에 유하현 경찰서 소속 警士로 金井英一(가나이 에이이치)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金井英一은 金一鍊(김일연)의 創氏改名한 이름이다.
월간조선은, 1976년 10월 일본 在外公務員援護會(재외공무원원호회)가 발간한 「만주국 경찰小史(소사)」에서, 金의원의 아버지 金一鍊의 특무 행적을 추적할 만한 단서가 발견됐다는 사실도 보도하였다.
<「만주국 경찰小史」를 살펴보면, 만주국 通化省(통화성) 柳河縣(유하현)에 근무했던「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라는 일본인 경찰의 功績(공적)사항이 등장한다. 도쿠나가 겐지(1908년生)는 관동군 헌병대 출신으로 1937년 11월 만주국 치안부 警務司(경무사) 兵事恩賜室(병사은사실)을 거쳐, 통화성 유하현 경무과 특무股(고) 股長(고장: 係長에 해당)으로 임명된다.
「만주국 경찰小史」에는, 도쿠나가 겐지가 1943년 유하현에서 조선독립운동단 소우잔교(ソウザン敎) 관계자 10여 명을 검거했고, 1945년 5월 東北失地回復中央黨員(동북실지회복중앙당원) 관계자 수명을 검거한 것으로 기록되는 등 독립운동을 탄압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때는 金一鍊이 도쿠나가의 직속부하로서 유하현 경무과 특무股(고) 特務로 근무 중인 때였다.
패전 후인 1946년 5월, 도쿠나가 겐지는 중국 安東에 잠복 중인 중공군에 체포·투옥됐다. 그 후 北安·치치하얼(齊齊哈爾) 등지로 끌려 다니다가 1947년 9월 脫走(탈주)해, 같은 해 10월 사세보(佐世保)港으로 귀국했다.
鄭權鉉 기자는 『기록을 확인한 뒤 도쿠나가의 소재를 수배했으나, 오래 전에 사망한 사실을 확인했다』면서 『도쿠나가 특무계장의 공적사항을 보더라도 당시 김일련이 근무한 유하현 특무계가 어느 정도 악랄하게 독립운동가를 때려 잡는 데 앞장섰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당시 만주국 경찰에는 한국인·중국인·몽골인 등이 주로 일선 경찰서에 근무했고, 省의 경찰 본부인 경무과에는 주로 일본인들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당시 만주국 경찰의 계급구조는 警士(경사), 警長(경장), 警尉補(경위보·주임), 警尉(경위·계장), 警佐(경좌·일선 경찰서장), 警正(경정)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제4보: 중국경찰 보관 자료 열람
吳東龍 기자는 2004년 10월24일, 다시 중국 유하현에 가서 金一鍊에 관한 특무 활동 기록을 찾는 취재를 하였다. 유하현 공안당국은 金一鍊, 즉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 관련 문서는 있으나, 이를 복사해 줄 수는 없다고 잘랐다.
공안국 관계자는 『유하현 공안국이 관리하는 범죄기록은 내부 기밀이다. 한국 정부를 통해 절차를 거친다면 복사하도록 협조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외국인인 吳 기자는 공안국 木當案室(당안실: 당은 木과 當이 합쳐진 한 글자임)에 들어갈 수 없었고, 대신 현지인인 A씨가 공안국의 협조로 당안실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마침내 金一鍊의 「범죄기록」을 발견했다.
당안실은 5~6평 되는 공간에 淸나라 말기부터 僞滿(위만·만주국) 경찰, 貪汚分子(탐오분자·부정부패 사범), 형사범 등 각종 범죄자들의 당안(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당안실에서 金의 기록을 읽은 A씨는 이렇게 전해주었다.
『僞滿 시절의 경찰 기록은 3개의 캐비닛에 잘 정리가 돼 있었다. 金에 대한 기록은 당안 2卷(권) 30번째 서류에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란 이름으로 존재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가로쓰기 정자체로 기록돼 있었는데, 20페이지 가량이었다. 3권에는 金의 직속 상관인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의 기록이 30페이지 분량으로 정리돼 있었다』
「金井英一」이라고 적힌 표지를 넘기자 두 번째 페이지에는 문서의 작성 유래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金井英一에 관한 僞滿 시대의 당안을 1959년 發現(발현: 발견의 의미)해서 증언을 수집·정리해 1961년 卷宗(권종: 문서를 완성하는 것)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페이지에는 金井英一이 속해 있는 경무과 특무股에 대한 「系統(계통)」이 소개됐다. 金의 상급자인 경무과장·특무股長과 부하직원인 特務들의 이름이 열거돼 있었다고 한다.
『경무과장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특무고장은 도쿠나가 겐지(德永源治)임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金의 직속 상관으로 돼 있더군요. 金井英一은 광복 당시 직급이 경위보(주임급)로 「간부」에 해당했습니다』
당안의 3페이지부터는 7~8명의 증인 기록이 등장했다. 1959년경 발견한 문서를 기초로 유하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金의 特務 활동 기록을 採錄(채록)한 것이다>
*제4보: "김희선측 알고도 은폐"
그래도 김희선 의원이 승복하지 않자, 월간조선 2005년 6월호는 <열린黨, 金希宣 의원 부친 만주국 특무 활동 사실 확인하고서 은폐>라는 제목의 기사를 또 실었다. 네 번째 추적 기사였다. 열린당과 김희선 의원의 의뢰를 받고 金一鍊의 행적을 현지에 가서 조사를 하였던 양모씨가 증언한 내용이 중심이었다. 김희선 의원은 양씨에게 아버지의 사진을 여러 장 주면서 아버지가 만주국 경찰관으로 근무하였는지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였다는 것이다. 양씨는 金一鍊을 기억하는 여섯 명을 만나 장시간 인터뷰를 하였을 뿐 아니라 유하현 공안국에 보관된 金一鍊 관련 자료를 직접 보고 읽었다고 주장하였다. 김희선 의원이 건네준 金一鍊 사진을 현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니 알아보는 이들이 적지 않아 조사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白承俱 기자가 쓴 월간조선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金希宣 의원은 홈페이지에 한 통의 엽서 사진을 띄워 놓고 이런 요지로 썼다.
“저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 하나 있습니다. 金九 선생의 명으로 중국 천진에서 활동하다가 행방불명된 후 베르호얀스크 감옥에서 보내온 한 통의 편지가 소중한 보물입니다. 아버지와 저의 마지막 대화가 된 이 한 통의 편지는 제 삶의 이정표가 되어 주었습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는 감옥이라기보다는 강제노동수용소가 있었다. 시베리아 극동지역에 위치한 베르호얀스크는 북극권 내의 寒極地(한극지)이다. 일년에 겨울철이 9개월에 달하며 1월 평균기온이 -50℃이다.
이곳에도 감옥이 아닌 수용소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8월 소련군은 포로로 잡은 일본 관동군 60만 명을 시베리아를 포함해 東유럽, 중앙아시아 등으로 데려가 강제노역을 시켰다.
소련군은 그해 10월 만주 관할권을 중국 측에 넘겼고, 그해 연말까지 철수를 완료했다. 1948년까지 國共내전이 벌어졌고 이후 만주지역은 중국 공산당의 지배로 들어갔다.
양씨는 『金의원이 자신의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로 공개한 노란색의 엽서가 거꾸로 친일파였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1945년 광복되기 전부터 소련 홍군은 만주지역에 들어와 일본 관동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소련 홍군은 광복 직전에 柳河지역에 들어와 柳河 일대를 포위하고 일본군과 앞잡이를 모두 체포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용시설이 모자랐습니다. 소련군은 이들을 시베리아 개척에 이용하고자 極地로 보냈습니다. 베르호얀스크가 이들을 수용했던 곳이었습니다』
―베르호얀스크는 북극권內에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엽서 앞쪽에는 연해주 하바로프스크에서 보낸 것으로 돼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베르호얀스크 수용소는 걸어서 탈출할 수 없는 곳입니다. 아마 탈출을 시도하다가는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가능성이 높아요. 그만큼 奧地였답니다. 일부 수용자는 물자수송 차량을 통해 엽서나 서신을 전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金一鍊이 보냈다는 그 편지는 바로 베르호얀스크 수용소에서 차량을 통해 연해주 하바로프스크로 옮겨진 후 한국으로 전달됐을 겁니다. 그래서 발신지가 소련 하바로프스크로 돼 있어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중국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어요. 이 영화는 중국內에서 꽤 알려진 것으로 압니다. 그 영화를 보면 金一鍊이 어떻게 베르호얀스크로 가게 됐는지, 또 그런 엽서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어요』
―金希宣 의원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저는 이미 그쪽 사람들에게 「金의원이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서라」고 했어요.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팔아서 국회의원이 됐는데 그것이 사실과 다르면 국회의원을 그만둬야지요』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렇게 말했다.
『제가 정치하는 사람도 아니고, 돈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목동에 아파트를 가지고 있고, 재산이 중상층 이상은 될 겁니다. 외국을 20여 년 가까이 다녔습니다. 저는 金希宣 의원과 열린당 사람들에게 「정의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어요』
월간조선은 『지난해 가을 柳河에서 30여 명의 증인들을 만나고, 증언 내용을 비디오로 녹화했다』는 양씨의 주장을 확인했다. 그의 주장은 사실과 일치했다. 그와 인터뷰했던 한 노인은 당시 양씨에게 받았던 여권 사본과 신분증 사본을 월간조선에 보내줬다.
양씨를 만났던 중국 柳河 주민 A씨의 말이다.
『2004년 11월 초였습니다. 당시 양모라는 사람이 한국에서 왔어요. 그가 金一鍊에 대해 묻고 다니더라구요. 그의 행동이 수상해서 그의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여권과 신분증(학생증)을 복사해 우리에게 줬고, 그의 이름과 서울 연락처까지 自筆로 써 주었습니다. 그는 당시 우리의 증언을 들은 후 「친일파 자제가 독립운동가 후손이라며 대우를 받고, 특히 친일파를 청산한다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라고 했습니다. 그는 金一鍊에 대한 우리의 증언 내용을 비디오로 촬영해 갔습니다』>
제5보: "인민에게 맞아 죽었을 것"
2005년 8월호 月刊朝鮮은 또 金一鍊 관련 기사를 실었다. 다섯 번째 추적 기사였다. 白承俱 기자는 앞서 양모씨가 증언한 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중국 柳河현에 가서 金一鍊(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을 기억하는 최모씨(당시 80세)의 증언을 얻었다.
<일본刀를 허리에 차고 사범학교에 나타난 金井英一을 기억하고 있는 崔모(80)씨를 만나 金井英一의 활동과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崔씨는 지난해 열린당이 보낸 梁씨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당시 梁씨가 제시한 金希宣 의원 부친 사진을 본 후 『金井英一이 맞다』고 증언했다.
―시간이 60년이 넘게 흘렀는데 어떻게 사진 한 장을 보고 기억을 할 수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잊겠소. 그는 가나이 에이이치(金井英一)라는 이름 외에 가네야마(金山), 가네가와(金川)라는 變名(변명)을 썼지요. 내가 공부를 조금 했으면 아마도 縣長(현장·군수)을 했을 것이오. 나의 기억력과 知的 의식을 의심하지 마시오』
崔모씨는 金井英一에 대해 다시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柳河 양식고 근처에서 자리 잡고 살았습니다. 젊은 청년으로서 계급은 금줄 한 개에 별이 두 개였고, 長刀를 차고 다녔지요. 분소장도 했습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은 후 도망을 갔는데 이곳에 남아 있었더라면 인민들에게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제6보: 중국법원이 金一練=特務임을 公認
月刊朝鮮은 2006년 12월호에서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인 기사를 실었다. 月刊朝鮮 특별취재반의 이름으로 쓰여진 이 기사의 시작은 이러하였다.
<지난 11월 초 중국 北京으로부터 판결문 寫本(사본) 1건을 입수했다. 중국 길림성 柳河縣 인민법원의 2005년 12월31일자 판결문이었다. 이 판결문 안에는 「열린우리당 金希宣(김희선) 의원의 부친 金一鍊(김일련·창씨 개명은 金山英一 혹은 金井英一)이 만주국 시절 유하현 경찰서에서 독립군을 잡는 特務(특무)로 근무했다」는 사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月刊朝鮮은 2004년 11월호에서 중국 유하현 공안국이 발행한 金希宣 의원 아버지 의 特務 근무 증명서를 보도했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유하현 공안국에 보존돼 있는 문건을 세밀히 조사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음. 金山英一은 남자로서, 1919년에 출생한 자이다. 이 사람은 1945년 광복 전까지 僞滿(만주 괴뢰 정부) 시대 유하현 공안국 경무과 특무계에서 특무로 근무하였음. 위와 같이 증명함. 2004년 10월10일, 유하현 경찰서”
月刊朝鮮이 유하경찰서에서 입수한 재직증명에 대해 열린당 주요 간부들과 金希宣 의원은 「月刊朝鮮이 가짜로 만들어낸 증명서」라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한국 언론은 月刊朝鮮의 金希宣 의원 부친 행적 관련 보도에 대해 「金希宣 의원과 月刊朝鮮의 의혹공방」이라는 애매한 태도를 보여 왔다.
유하현 인민법원의 판결문을 보면, 月刊朝鮮에 재직증명서를 발행해 준 유하현 공안국의 姜모씨(유하현 공안국 정치처 부주임)는 비밀서류를 상부의 허가 없이 열람시켜 주고, 재직증명서를 발급해 준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姜씨는 지난 11월 초 현재 복역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姜부주임이 실형을 선고받은 데는 金希宣 의원과 열린당 측이, 중국 대사관과 중국 정부에 거센 「정치적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었음이 판결문에 나타나고 있다. 月刊朝鮮은 언론의 사실보도를 억지주장과 정치공세로 뒤엎으려 했던 열린당과 金希宣 의원 측에 유감을 표시하며, 재직증명서 발급으로 인해 囹圄(영어)의 몸이 된 姜부주임에게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뜻을 전한다. 1심 판결문은 「姜부주임이 문서를 발급하는 과정에서 뇌물을 수수한 사실이 없다」고 명시했다.
姜부주임은 중국과 한국의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특무 金山英一에 대한 義憤(의분) 때문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金山英一의 特務 근무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하지만 1심 판결문을 보면, 열린당과 金希宣 의원이 중국 대사관과 중국 정부 측에 강력히 항의했고, 이런 항의들이 사실관계를 그대로 적시한 증명서를 떼어 준 姜부주임을 처벌하는 근거가 됐음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증명서가 한국으로 보내진 뒤 月刊朝鮮은 2004년 11월호에 이것을 게재했고, 이로 인해 국회의원 金希宣의 항의를 불러왔다. 또한 우리 외사부문에 사실 진상 확인을 요구해 왔다. 이로써 극도로 나쁜 국제적 영향을 야기했으며, 우리나라로 하여금 한국 정당 간 투쟁에 말려들게 했다.”
유하현 법원의 판결문이 확인됨으로써 金希宣 의원 부친의 特務 행적에 대한 불필요하고 근거 없는 논란에 종지부가 찍혔다. 1심 판결문을 그대로 싣는다. 1심 판결 내용은 항소심에서 확정됐다. 1심 판결문에 등장하는 私人(사인)들의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열린당과 金希宣 의원 측이 또다시 이 판결문 보도에 대해 근거 없는 정치공세를 펼쳐, 불필요한 韓·中 마찰과 희생자를 만들지 않기를 月刊朝鮮은 희망한다>
*金一鍊은 빠지고 朴正熙는 넣고
한편 김희선 의원이 회장으로 있던 국회의원 모임은 2002년 2월28일 광복회와 함께 심사한 이른바 親日인사 명단(708인)을 발표하였다. 민족문제연구소(소장 임헌영)란 단체는 작년 11월 박정희를 포함한 4300여 명을 소위‘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였는데, 김희선씨의 아버지 김일연, 전 열린당 의장 신기남씨의 아버지 신상묵(일본군 헌병 伍長)은 빠져 있었다(*). 신기남 당시 의장 김희선 의원과 함께 친일파 조사에 열심이었던 사람인데, 신동아가 아버지의 正體를 밝히자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그럼에도 민족문제연구소라는 단체는, 日帝 때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것을 業으로 삼았던 特務 경찰관과 헌병은 빼주고 滿軍 장교 시절 毛澤東 군대와 싸운 것밖에 없는 朴正熙를 넣은 것이다. 나는 조갑제닷컴(chogabje.com)에 이런 글을 남겼다.
<최고 애국자 朴正熙를 친일파라고 모는 이들은 金姸兒 선수가 금메달 받는 장면은 묵살하고 엉덩방아 찧는 장면만 틀어주면서 3流라고 욕하는 격이다. 朴正熙의 滿軍장교 경력만 부각시키고, 장교 시절에 배운 군사기술로 나라를 지켜내고 나라를 근대화하여 '일본을 우습게 여기는 세계 유일의 나라'로 만든 사실은 묵살한다.
이런 위선자들에 대하여 신약 성경 마태복음 7장은 名文을 남겼다.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위선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해방 뒤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민족반역자 김일성을 위하여 봉사한 진짜 친일파들은 빼주고, 朴正熙, 安益泰, 徐廷柱, 金東仁, 金東振, 張勉, 홍난파, 金性洙, 방응모 같은 애국자들을 친일파로 모는 이유는 세계사의 성공스토리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주인공들을 매도하여 조국을 태어나선 안 될 나라였다고 선전함으로써 敵을 이롭게 하고 젊은이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청산할 친일파는 없고 숙청해야 할 親北派는 많은 시대에서, 그 친북파의 핵심들이 주도하는 친일파 소동은 대한민국을 불리하게, 敵을 유리하게 만드는 의도를 깔고 있다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이념적 편향성에 입각하여, 국민들의 70%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여론조사에서는 세종대왕보다도 더 위대한, 민족사의 제1인물로 평가되는 朴正熙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그들의 自充手이다. 무식하면서도 오만한 좌익들은 항상 내부적 요인, 즉 自充手로 망한다. 이런 親北派들에게 내가 남기는 경고는 "저주 받지 않으려거든 저주하지 말라"이다>
김희선, 신기남 의원은 민주당 후보로 2008년 4월 총선에 출마, 낙선하였다.
*新東亞 2004년 9월호는 "신기남 열린우리당 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 伍長이었다"는 기사를 냈다. 당시 辛基南 의장은 김희선 의원과 함께 좌파세력이 주도한 이른바 親日인사들에 대한 조사를 응원하였다. 그는 일부 네티즌들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하여 의혹을 제기하자 "선친은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광복 때까지 전남 화순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광복 후인 1946년 국립경찰 양성 1기로 경찰에 입문하였다"고 반박하였다. 신동아는 이런 주장을 뒤엎었다.
辛 당시 의장의 아버지 辛相默은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던 1940년 7월25일 조선특별지원병 제1차 시험에 응시, 1415명의 합격자 중에 들어갔다. 합격자 명단은 조선총독부 기관지 '每日新報'에 실렸는데 신상묵의 이름은 全北지역 합격자 명단 맨 앞에 나와 있었다. 더구나 그가 훈련소에서 시게미쓰 구니오'로 創氏改名한 후에 매일신보 주최 좌담회에도 등장, 발언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辛 의장은 이 기사가 나온 직후 의장직을 물러났다.
月刊朝鮮의 만주국 特務경찰 金一鍊 추적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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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2-15, 22:3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