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方又榮 전 회장 별세

기자의 열정과 경영자의 계산을 생산적으로 통합한 분, 88세에 永眠하다.
"方又榮 회장은 기자의 열정과 경영자의 계산을 생산적으로 통합한 분이 아닐까? 사실을 추구하는 기자정신과 營利를 우선시하는 경영은 상호 모순될 것 같지만 그래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하여는 좋은 신문을 만들어야 하고 좋은 신문을 만들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方 회장의 持論이었던, “재정적 독립이 있어야 언론의 독립도 가능하다”는 말은 實證된 진리이다."

조선닷컴 보도: 조선일보 방우영(方又榮) 상임고문이 8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세.

故人은 1928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아버지 방재윤(方在胤)과 어머니 이성춘(李成春)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方 고문이 5살 되던 1932년 할아버지 계초(啓礎) 방응모(方應謨)가 민족진영의 요청을 받아들여 경영난을 겪고 있던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이후 ‘조선일보’는 민족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신문으로 성장했으나 1940년 日帝의 탄압으로 폐간당했다. 같은 해 고인은 정주에서 조일심상(朝日尋常)소학교를 졸업했다.

방 고문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경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49년 졸업했다. 이어 1952년 조선일보 공무국 견습생으로 入社, 8년간 사회부·경제부 기자로 일한 뒤 1960년 조선일보 계열사인 아카데미극장 대표를 맡았다.

고인은 1962년 조선일보 상무로 복귀해 1963년 발행인, 1964년 전무 대표이사가 됐다. 1970년엔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1980년 ‘월간조선’을 창간하고 월간 ‘산’을 인수해 잡지 전성시대를 선도했다.

故人은 1981년 한국언론연구원 초대 이사장과 연세대 동문회장을 각각 맡았으며, 중앙대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에는 연세대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5년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프랑스 니스 시(市)로부터 명예시민금장과 감사장을 받았다. 1987년 한독(韓獨)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고인은 1990년 스포츠조선을 창간한 뒤 1993년 조선일보 대표이사 회장, 1994년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1997년 연세대 재단이사장에 각각 취임했다. 2003년 조선일보 명예회장에 추대됐다.

방 고문은 2008년 55년 언론계 생활을 정리한 팔순 회고록 ‘나는 아침이 두려웠다’를 펴냈다. 고인은 “밤새 전쟁을 치르듯 만든 신문이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매일 아침 신문을 펼치는 독자들이 우리 신문에 만족할지 언제나 가슴 떨렸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2010년 조선일보 상임고문으로 추대됐고, 2013년 조선일보 창간 93주년을 맞아 60년 근속상을 받았다.

고인은 별세하기 전까지 조선일보 상임고문, 연세대 재단 명예이사장, 고당 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 이사장, 연세대 명예동문회장, 대한골프협회 명예회장을 맡았다. 고인은 1959년 결혼한 부인 이선영 여사와 사이에 아들 성훈(스포츠조선 대표이사 발행인 겸 조선일보 이사), 딸 혜성·윤미·혜신을 뒀다.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 장례식장 특1호, 발인은 12일 오전8시.

*方又榮 회장 추억(米壽 문집 기고문)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前 월간조선 편집장 및 대표)

'方又榮 회장은 기자의 열정과 경영자의 계산을 생산적으로 통합한 분이 아닐까? 사실을 추구하는 기자정신과 營利를 우선시하는 경영은 상호 모순될 것 같지만 그래서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돈을 벌기 위하여는 좋은 신문을 만들어야 하고 좋은 신문을 만들려면 돈을 벌어야 한다. 方 회장의 持論이었던, “재정적 독립이 있어야 언론의 독립도 가능하다”는 말은 實證된 진리이다.' 

朝鮮日報가 方又榮 사장 시절에 영향력과 판매부수 면에서 1등이 된 일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1980년에 창간된 月刊朝鮮도 그 시절 오랜 종합잡지들을 제치고 1등으로 올라섰고 지금까지 그 餘勢로 守成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은 놓치는 경우가 많다.

민주화의 격동기 1980년대에 月刊朝鮮과 新東亞는 폭로성 특종과 秘話 기사 경쟁을 펼치면서 부수를 늘렸다. 19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민주화가 天下大勢로 되는 분위기에도 편승, 신문 방송이 다루지 못하는 禁域에서 틈새시장을 개척하였다. 全斗煥 정부의 언론 통제가 느슨해지자 月刊朝鮮은 신문 방송이 엄두를 내지 못하던 ‘禁斷의 선악과’를 따서 독자들에게 제공하기 시작하였다.

1985년 5월호가 釜馬사태와 金載圭를 다루니 발행부수가 15만을 넘어서서 신동아를 앞서기 시작하였다. 그해 7월호엔 월간조선과 신동아가 같이 ‘광주사태’라는 禁忌에 도전하는 특집을 냈다. 월간조선은 20만 부(인쇄 기준)를 돌파하였다. 1987년 9월호 월간조선은 그때까지도 접근금지로 여겨졌던 12·12 사건의 당시 계엄사령관 鄭昇和 장군을 인터뷰하였다. 이 기사로 30만 부 이상을 찍었다. 노점상들도 두꺼운 월간조선을 펴놓고 열심히 읽던 시절이다.

1987년 10월호에서 월간조선과 신동아는 다 같이 李厚洛 증언을 토대로 김대중 납치 사건(필자 吳効鎭)을 실었다. 국가안전기획부가 인쇄소를 압박, 두 잡지의 발행을 저지한 것이 정치문제가 되어 폭발적으로 팔렸다. 월간조선은 인쇄부수 40만 부를 넘겼다.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한국잡지사상 최고의 기록이다(당시 출판국장은 安鍾益, 월간조선 부장은 劉正顯).

민주화 시절에 정의로운 일을 한다는 사명감과 특종을 할 때마다 책이 많이 팔리는 시장의 논리, 여기에 신동아를 의식한 경쟁심리가 결합되어 월간조선은 정권이 설정한 언론자유의 금지선을 야금야금 넘어가면서 안기부를 상대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다가 다치기도 하였다. 잡지가 인쇄에 들어가기 직전 안기부가 기사 내용을 파악, 인쇄기를 멈추게 하고 기사를 들어내거나 고치도록 하는 일이 거의 月例 행사였다. 국장, 부장이 기사 문제로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가 하면 나는 1986년 2월에 쓴 ‘한국 내 美 CIA'로 해서 이른바 筆禍(필화)를 만났다. 워커 미국 대사가 張世東 안기부장에게 조직이 노출되었다고 항의, 南山으로 연행되어 鄭亨根 수사단장으로부터 밤샘 조사를 받은 뒤 사표를 썼다(4개월 뒤 복직).

월간조선과 신동아의 특종경쟁이 민주화의 熱病에 걸린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 판매부수 急增으로 직결되는 이런 과정에서 기자들의 野性을 지켜준 분들이 있다. 李興雨, 安鍾益, 金大中, 曺秉喆, 崔靑林, 崔埈明, 林伯 출판국장, 許鉥, 劉正顯 부장, 편집의 최종 책임을 졌던 申東澔 주필, 尹胄永 고문, 方相勳 부사장, 그리고 꼭대기에서 내려다 보고 계셨던 方又榮 사장이다. 기자들과 부장은 정권의 보도지침을 무시하고 쓴 폭로성 기사를 지키려 하고 국장은 기자들의 이런 의욕을 통제하면서 경영진을 설득, 자극적인 폭로 기사가 가득 실린 잡지를 내어서 경쟁지인 신동아를 이기려 하는 과정에서 늘 ‘기분 좋은 내부 갈등’이 이어졌다.

1988년 2월호에 나는 ‘정부 위의 정부’ 국가안전기획부를 심층취재하였다. 안기부가 칼자루를 잡고 언론이 칼날을 잡던 시절이 끝났음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의 진전으로 언론의 자유가 滿開하면서 종합지의 시대는 저물 것 같았다. 이젠 쓸 수 없는 聖域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1988년 총선거에 의한 與小野大 정국 속에서 이뤄진 5공 청문회가 월간조선과 신동아에는 또 다른 돌파구가 되어 부수 감소의 속도를 늦추어주었다.

1989년 6월호 월간조선에 내가 쓴 “6·29 선언, 全斗煥 작품이다”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87년의 6월 사태가 파국으로 치닫고 있을 때 당시 민정당 대통령 후보이던 盧泰愚 씨가 野圈이 요구하던 직선제와 김대중 사면 등을 받아들여 6·29 민주화 선언을 했다.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도박이었다. 이 선언으로 민심이 反轉, 그해 12월 선거에서 노태우 대통령이 등장하였고 한국은 流血사태 없이 평화적 민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6·29 선언은 노태우 후보가 전두환 대통령과 상의 없이 고독한 결단을 내린 것으로 포장되고 미화되었다.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이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자산으로 치부되었다. 월간조선 기사는 이 통설에 찬물을 끼얹는 내용이었다. 6·29 선언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먼저 발상, 노태우 후보가 받아들이게 하고 자신은 뒤로 빠졌다는 기사였다. 盧 후보가 처음엔 전두환의 제안을 거부하였다가 설득 당하였다는 ‘치명적 폭로’도 들어 있었다.

이 기사는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전두환 전 대통령은 5공 비리의 책임을 지고 백담사에 가 있었다. 기사의 副題가 ‘전씨 측근들의 폭탄증언’이었으므로 6공에 대한 5공의 반격으로 인식되었다. 사람 좋은 朴世直 안기부장은 직접 나를 찾아와 發說者를 알아보려고 하였다. 기사가 정치적 파문을 일으키고, 월간조선은 서점에서 잘 팔리고, 회사에서 특종상까지 받았으니 나는 기분이 좋았다. 2006년에 6공의 실세였던 朴哲彦 씨가 ‘바른 역사를 위한 증언’이란 회고록을 냈다. 월간조선 특종이 盧 대통령을 화나게 하여 方又榮 사장을 어렵게 만든 이야기가 다섯 페이지에 걸쳐 있었다.

<1989년 5월22일. 청와대 서재에서 (월간조선 기사 문제로) 대통령과 홍성철 비서실장, 그리고 내가 긴급히 회동했다. 노 대통령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중략). 대통령은 하소연하듯이 “전 대통령은 이 길이 자신이 살 길이 아니겠느냐는 시각에서 그 같은 선언을 생각했고, 나는 구국의 일념으로 나를 버린다는 마음가짐이었으니 큰 차이가 있다”고 하면서···.

5월23일 오전 11시15분. 청와대 서재에서 노 대통령, 홍성철 실장, 최창윤 정무수석과 내가 모인 가운데 월간조선 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홍 실장은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이 사과 서한을 각하에게 올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며 대통령의 노기를 달래 보려고 했다. 노 대통령은 굳은 얼굴로 “이러한 모욕을 받고 어떻게 대통령을 계속하는가? 지금 심정으로는 대통령을 그만두고 민·형사 소송을 걸어 배상금으로 500억~1000억 원 정도를 받아다 무주택 국민아파트나 지어주고 싶다”며 언짢게 대꾸하였다.>

대통령의 꾸중을 들은 참모들은 박세직 안기부장과 崔秉烈 공보처 장관을 불러 다시 회의를 한 뒤 조선일보에 요구할 사안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요구 사안 중에는 방우영 사장이 월간조선 부장과 조갑제 기자에게 엄중 경고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었다는데 나는 그런 경고는커녕 특종상만 받았다. 방우영 사장이 마음고생을 했으리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았을 뿐이다. 方 사장은 농담으로도 “왜 그런 글을 써가지고...”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6·29 선언’엔 후일담이 있다. 월간조선 1992년 1월호는 ‘全斗煥의 육성증언’을 100여 페이지에 걸쳐서 특집으로 실었다. 5공 청와대의 史官 역할을 하였던 金聲翊 공보비서관이 기록한 ‘6·29 선언’에 대한 全 당시 대통령의 결정적 술회가 생생하게 소개되었다. 당시 편집장이었던 나는 崔靑林 출판국장과 함께 方相勳 부사장에게만 보고하고 보안을 위하여 가짜 표지와 가짜 목차를 만들어 인쇄소로 보냈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진짜와 바꿔치웠다.

안기부에선 책이 인쇄에 걸린 날 오후에 상황을 파악, 나를 찾았다. 전화를 받지 않고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그날 밤을 코리아나 호텔에서 보내면서 인쇄를 독려하였다. 책만 나오면 그 뒷일은 방우영 사장께서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전두환 육성 증언'이 실린 1, 2월호는 오랜만에 20만부씩 찍었다.

그렇다면 6·29는 누구 작품인가? 퇴임 후의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 취재한 것까지 종합하여 판단하면 역사를 바꾼 이 결정은 전두환 기획, 노태우 감독 및 주연으로 정리된다. 선언에 따른 부담을 져야 하였고, 선언 내용의 실천을 책임졌던 노태우의 몫이 더 크지 않을까?

방우영 회장은 월간조선이 큰 특종을 할 때마다 함께 기뻐하고 격려해주셨다. 특종의 환희를 처음 맛본 신참 기자처럼 순수했다. 李秉喆 회장이 人材제일의 社是로 삼성을 일으켰던 것처럼 방우영 회장은 記者제일 정신으로 조선일보를 키웠다(그가 키운 좋은 기자들이 조선일보를 키웠다고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특종의 설렘이 식는 순간 기자의 생명도 끝나는데 방우영 회장의 특종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기록을 위하여 밝혀두는 것은, 내가 월간조선 편집장으로 일하였던 12년 동안 조선일보 발행인이나 편집인이 월간조선에 실리게 되어 있던 기사를 빼도록 지시한 적은 열 번이 안 되는데 전부가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다는 점이다. 이만하면 편집의 자유는 만끽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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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自由韓國 2016-05-09 오후 5:14

    월간조선이 월간지 중에서는 가장 신뢰도 가고 재미가 있습니다..X동아도 있지만 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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