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변 핵 시설공사 자재 책임자였다(2)

영변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참여

-그러한 낭비에 대해 지적하는 사람은 없는가.

『국민들도 대부분 이러한 비생산적인 지출 상황을 알고 있다. 그러나 속으로 불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놓고 문제 삼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1980년대 이후 북한 경제가 곤경에 빠지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비생산적인 투자가 중요한 원인이다. 그것은 김정일에게 권력을 이양하게 되기까지의 정치환경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김정일 김영주(김일성의 동생) 김평일은 경쟁관계에 있었다. 그들은 김일성에게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우상화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경쟁적인 우상화 놀음에 과도한 비용이 지출되었던 것이다. 북한에서 최고인민위원회는 형식상 최고의 주권기관이다. 그러나 이들이 예산을 세워 놓아도 김정일이 별장이나 주체사상탑, 개선문 등을 건설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예정이 없는 지출이 생기는 경우가 빈번히 일어난다. 전문가들이 빙빙 돌려 이 점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 누구도 견제세력은 될 수 없다』

-북한에 있을 때 영변의 핵 시설 건설에 참여했다는데….

『1983년부터 나는 사회안전부 제3공병국의 자재상사 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3공병국은 군인들을 동원, 영변 핵 시설 건설·태천 수력발전소 언제공사·평양∼남포간 복선철길 부설공사·평남 안주 탄좌 개발사업을 맡아 했는데 나는 거기에 필요한 자재공급을 책임지고 있었다. 여러 가지 건설사업이 서로 겹치기 때문에 「주석예비물자」라고 해서 특별히 관리하는 부분이 있었다. 당이나 국가의 주요 건설목표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영변의 (연구용)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들어가는 자재도 「주석예비물자」였다. 그때는 보통 시멘트가 아닌 부례산에서 나온 시멘트를 썼다. 부례산에 있는 공장에서 특별히 생산된 것이었다』

-부례산 시멘트는 특수한가?

『자강도 부례산 지역에서 생산되는 데 고 강도에 방수성이 뛰어나다』

이 대목에서 崔씨는 아주 중요한 증언을 했다. 지금 영변 핵 연구 시설에는 3만kw짜리 연구용 원자로가 87년에 완공된 이후 가동중이고 20만kw짜리(추정) 대형 연구로와 재처리시설로 추정되는 길쭉한 건물이 건설 중에 있다. 미국은 첩보위성 사진을 분석, 이 길쭉한 건물이 연구로에서 배출되는 사용 후 핵연료에서 원자탄의 원료물질인 플루토늄을 분리해내는 재처리시설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미국 측은 최근에 들어서는 ?사찰과 함께 이 재처리시설의 철거를 주장하기 시작함으로써 이 시설은 세계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북한은 그것이 핵 재처리시설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시험용 핵 재처리시설 가동 중?

최(崔)씨는 1983∼98년 사이 영변 핵 시설 건설부서인 사회 안전부의 자재부서 책임자(사장이 공석인 자재상사 부사장)로 있을 때 『재처리시설이 건설중임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83년엔 영변 핵 시설 공사장에 가본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재처리시설이란 말이 적힌 문서로써 확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상부에서는 어떤 시설인지 알아야 자재공급에 완급을 기할 수 있으므로 적諍?핵 재처리시설이 건설중이라는 정도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으로는 소규모 재처리시험시설의 가동이 끝나고 본격적인 재처리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한 단계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아직 그 본 공장이 가동되고 있지 않다고들 하는데 나의 감(感)으로는 이미 가도에 들어가 플루토늄이 어느 정도 생산되지 않았나 합니다』

崔씨는 또 『사회안전부는 시멘트·철근 등 핵 시설의 자재만 공급했고 내부설비는 북한의 원자력 위원회가 군수품 조달기관을 통해 공산권 국가에서 수입했다』고 말했다. 그는 『영변 핵 시설에서 원자탄이 나올 것이라는 얘기는 거의 공공연하게 전해졌다』면서 『그러나 북한이 핵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면 그 시설을 발전용으로 돌릴 수 있는 준비도 해놓았다』고 말했다.

-「핵 재처리시설」이란 말을 혹시 한국에 온 뒤에 듣고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그 시설이 「재처리시설이었구나」하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플루토늄을 만들어내는 재처리시설은 원자폭탄제조를 위해 필수적인 시설인데 내가 왜 모르겠는가. 다만 관계자들은 「원자폭탄」이라고 말하지 않고 「결정적인 무기」라고 했으며 「핵 재처리시설」이란 말은 83년부터 확실히 들었다』

-영변시설의 보안은 누가 맡아서 하나?

『사회안전부이다』

-그 극비시설에 어떻게 갈 수 있었나?

『나는 자재책임자로 부임한 뒤 자재공급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한 번 가 보았다. 물론 연구소 등 주요시설에는 들어갈 수 없었고 사무실에서 이야기하고 돌아왔다』
북한이 영변에서 건설중인 20만kw 원자로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판단이 엇갈리고 있다. 핵무기 개발용으로는 너무 크고 이미 3만kw짜리 핵무기 개발용 연구로가 가동 중이기 때문에 20만kw 짜리의 용도에 대해서는 원자탄 양산체제라는 분석과 발전용이라는 분석이 대립하고 있다.

崔씨의 말대로 라면 20만kw급 연구로는 상황에 따라 핵무기용이나 발전용으로 쓸 수 있도록 계획된 것이란 얘기가 된다. 崔씨는 『영변 핵 시설에는 지하시설이 돼 있다』고 했다. 한국의 정보기관에서는 이 지하에 소규모 재처리 시험시설이 있고, 이를 통해 이미 소량의 플루토늄이 분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고 있는데 崔씨는 지하시설의 성격에 관해서는 『모르겠다』고 했다. 崔씨는 또 『영변 핵 시설 공사에 투입된 사회안전부 소속 인력(현역군인)은 현지 제대시켜 보안을 위해 대부분 이 시설에서 근무하게 함으로써 바깥으로 정보가 새나가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고 했다.

비밀 핵 개발 기도할지도

崔씨는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나서게 된 것은 1980년 무렵이며, 1970년대 朴대통령에 의한 핵무기개발 시도에 자극을 받은 것도 중요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崔씨의 이런 얘기는 북한 핵 시설 건설에 참여한 사람의 직접 증언이란 점에서 인공위성 사진에 의한 간접 첩보수집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최근 북한이 핵 사찰을 받아들인 점은 핵무기 개발의지가 포기를 의미하는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야 겠다는 데서 그런 변화를 보인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으나 핵 사찰을 받으면서 비밀장소에서 별도로 핵 개발을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비밀 핵 개발을 준비하는 시간을 벌기 위한 장난으로 볼 수도 있다』

-북한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되면 군사력에 호소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데.

『개인적인 견해이긴 하지만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북한은 무력도발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외적인 형편으로 보아 무력도발은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 강경대(姜慶大)군 사건으로 한국 사회가 시끄러워도 한국 사회가 무너지리라고 보는 북한 정치인은 없을 것이다. 북한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핵심계층의 기득권 방어의식도 그렇게 되기 힘든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닌가.

『물론 그들에게도 체제가 무너지면 죽는다는 생각이 있다. 북한에 있을 때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이 있다. 만일 북한 체제가 갑자기 무너져 남쪽으로 통일이 되면 내 입장은 곤란한 지경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든 간에 사회안전부에 근무했고 노동당 최고계층에 있었기 때문에 「공산치하에서 한 자리 해먹은 놈」 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북한 사회의 계층간 갈등이 있는가.

『북한 사회구조상 권위주의적 행정으로 인한 갈등이 많다. 개인 차이가 있겠지만 증오심이나 반발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기관에 의한 고문은 없다』

-주민들이 김일성에 대한 존경심만큼은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통치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김일성이 어떤 수단을 쓰든 간에 그 말많은 북한 사람들의 입을 다 막아놓고 있으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일성은 북한 사람들의 「자주의식」에 대한 강한 집념을 이용해 이러한 환경을 조성해왔다. 동양에서도 한국인들의 자존심은 유별나다. 가족이나 마을, 지역 위주의 감정이 강하다. 이러한 심리를 정치에 이용하여 「주체」를 만들었다. 우리의 민족성인 자주의식을 김일성 우상화에 교묘히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미묘한 것은 주장하는 바와 행동이 다르다는 것이다. 자주의식을 강조해 놓고도 자신은 제일 먼저 외제 자동차를 타고 다닌다』

개혁은 경제분야서 군부로

-국민들은 그러한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차는 물론이고 텔레비전이나 냉장고도 다 외화로 사야 하는데도 그것은 주체와는 별개의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교육돼 있다. 그러나 북한에서 김일성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다. 항일운동해서 나라를 찾아줬고 토지개혁을 해 국민위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국가를 지도하는 당을 창건하고 미국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한다. 사회주의를 개조했고 세금제도와 사회복지 제도도 완전히 이루었다고 한다. 다 그 사람이 했다고 하는데 누가 감히 나쁘다고 하겠는가. 북한주민들은 김일성의 얼굴을 보면 눈물을 흘리며 만세를 부르게 된다. 그것은 다 이러한 광적인 선전의 결과다』

-한국에도 「주사파」가 있는데 북한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보는가.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난 일은 없지만 그 어린 학생들이 생각하고 느낀 것을 그대로 표현한 것을 가지고 공산주의자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그렇게 하는 것은 이 사회내부에 적만 많이 만드는 결과가 된다. 남한에도 부의 불균등한 분배 등 여러 가지 사회악이 있지 않은가. 이에 대한 불만을 표시하는 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학생들 중에는 북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고 하나 절대다수는 그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된다. 남한의 학생 가지고는 절대로 진정한 공사주의자를 만들 수가 없다』

崔씨는 김일성을 진정한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과거에도 그렇다고 생각해 보는 일은 없다고 한다. 물론 그는 김일성이 지난 40년간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요구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그의 정책에 반영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김일성의 우상숭배를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는 그 일부조차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현 상황에서 북한주민들이 김일성에 대해 회의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김정일이 권력을 잡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될 것이다』

-김정일이 정권을 잡게 되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테크너크랫을 동원해 국민을 잘 살게 해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개혁과 개방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때 김정일이 소련에서 스탈린을 격하했던 방식으로 아버지를 격하할 수 있을까.

『그 정도의 격하운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김일성 사후, 완전히 무시는 못해도 약간은 비난을 할 수도 있으리라고 본다. 격하의 정도, 즉 「김정일이 김일성을 어떤 내용으로 얼마만큼 비판할 수 있는가」가 북한 정치의 장래와 김정일의 운명을 예견하는 데 핵심적인 요인일 것이다. 등소평이 모택동을 비난하는 정도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완전폐쇄와 보수경향은 아버지가 잘못한 것이다」라고 말하게 되면 꽉 닫혀 있는 문이 열리게 될 테니 김정일은 당장 영웅이 될 것이다』

-김정일이 잘만 하면 후계체제를 별 어려움 없이 끌어나갈 수 있다고 보는가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북한 정치인들의 머리 속에는 김일성 밑에서 권력을 행사한다는 의식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김정일의 실무능력과 영도방법, 통솔력 등은 아직도 제한적이다』

군부 돌아서면 끝장

-군부 내에 김정일에 대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가.

『상당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이미 분할작업을 했고 결국에 가서는 김정일에 복종할 세력만 남길 것이다. 김일성이 갑자기 죽지 않는다면 세습체제를 완벽하게 다질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한계가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발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리라고 보는가.

『경제분야에서 시발돼 군부 중간층으로 이어져 군부 고위층까지 번질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군부만 돌아서면 끝이다. 그 점은 남북한 사회가 다 마찬가지다』

崔씨는 인민무력부, 국가보위부(한국의 안기부에 해당), 사회안전부(한국의 경찰에 해당) 등 권력기관 사이의 상호감시체제가 철저하여 군부쿠데타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국가 보위부 안에는 사회안전부 주재실이 파견 나가 사회안전부로 보고를 하고, 사회안전부에는 국가보위부 주재실이 들어앉아 상호감시를 한다는 것이다. 인민무력부에 대한 감시는 더욱 철저하다. 인민무력부 총정치국이 군부를 감시하는데 이 기관은 노동당 조직부의 직접 지시를 받는다. 김정일은 노동당 조직부장과 선전·선동부장을 겸직하고 있으므로 그는 조직부를 통해서 군을 감시하고 있다.

조직부에선 당 책임 지도원들을 인민무력부 안에 파견해 놓고 있다. 책임지도원은 군부의 각급 기관·부대별로 지도원들을 파견하여 총정치국과는 별도로 군 간부들을 감시한다. 총 정치국 내의 통보부란 조직은 당 책임지도원을 거치지 않고 당 조직부로 직접 보고하며, 조직부는 당 책임 지도원을 통한 보고와 상호 비교한다. 당 비서국 비준대상 간부인 상좌이상 군 간부들에 대한 감시기관의 동향보고는 매일 중앙당 조직부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북한에 있을 때도 김일성에 대해 회의를 가졌는가.

『북한에서도 강하게 느꼈다. 우리 어머니가 김일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회에서는 김일성을 찬양하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겉으로라도 찬양하게 된다』

-그러나 김일성을 보면 순간 열렬하게 찬양하게 되는 것은 사실 아닌가.

『그 순간은 안 그럴 수가 없다.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정도로 환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잠재의식 속에 있을 뿐 아니라 동료들과의 경쟁 때문에 눈치도 보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김일성에 대해 회의를 갖지만 다른 창구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지금 김일성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은 원천적으로 폭력에 대한 공포심에서 나오는 것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존경심을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층 계급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맹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한 것일지도 모른다. 반면 상층부일수록 맹목적인 광신자는 적다. 가식이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김일성이나 김정일은 그들 앞에서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진심에서 우러나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점을 다 헤아리고 있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고 봐야 된다』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세가 불리해지면 김일성 부자에게서 등을 돌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남북통합이 어떤 방향으로 될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쉽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의 공감대를 넓혀가며 포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몰면 품안에 든 새를 놓치는 꼴이 된다』

-이들과 연결할 수 있는 방법은.

『비밀창구를 뚫어 이들에게 힘을 주어야 한다. 외국에서 북한사람들을 만나면 처음엔 곁을 주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접근하기 힘들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력해서 미세한 부분이라도 접촉범위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가야 한다』

崔씨는 『김일성 사후의 전환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게 될 군부 속에 파이프라인을 뚫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혼란기에 한국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고 했다.

-북한에 경제적인 원조를 해주는 방법도 있는데.

『아마 그쪽에서 받지 않을 것이다.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북한이 최고라고 해왔는데, 경제원조를 받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영향이 적은 부분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들의 체면을 세우는 데는 바터 무역도 좋은 방법이다. 1차 상품에서는 북한도 교역할 수 있는 자원이 많다. 崔씨가 망명해옴에 따라 북한의 외화벌이 사업실태와 사회안전부의 내막이 자세히 밝혀졌다. 북한은 1971년부터 노동자 주도하에 공장·기업소·학교·군부대 등 각급 단체별로 목표액을 할당, 외화벌이 사업을 시키고 있다.

주민통제, 점차 약화되고 있다

이런 목적으로 설립된 외화벌이 무역회사는 1백50개 이상이다. 인민무력부·노동당·사회안전부도 산하에 이런 무역회사를 두어 직영하고 있다. 1개 군단별로 1개 대대(1천여 명)를 「군인 외화벌이 돌격대」로 편성, 외화벌이 작업에 동원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방과 후 폐품수집, 토끼 기르기를 통한 외화벌이 사업에 바쁘다. 최(崔)씨가 사장으로 있었던 대양무역 회사는 노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부가 직영하는 해외사업부서로서 간부부 부부장 김일산이 통제하고 있었다. 이 회사는 공장장·경영인 양성기관인 인민경제대학, 당간부 양성기관인 고급당학교, 외교관 및 무역담당요원 양성기관인 국제관계대학의 운영에 필요한 외화를 조달하고, 89년 7월 평양축전을 기해 건립된 경제센터(일종의 무역진흥공사) 건설자금 2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기 위해 설립되었다.

崔씨는 88년 2월 아프리카 자이레에 출장, 코발트의 거래를 추진했으나 실패하였고 김일산 부부장이 지시한 가짜 미국달러(50만 달러 어치) 구입공작도 진척되지 않아 귀국하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한국으로 망명하였다고 한다. 북한의 해외무역회사는 경직된 관료적 통제하에 있어 시장기능에 기민하게 적응하지 못함으로 외화벌이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으며 밀수행위로써 달러를 벌어보려다가 자주 적발되고 있다. 崔씨가 밝힌 사회안전부의 구성은 의외로 방대한 것이었다. 치안·사찰 담당이 3만, 공병요원 5만, 87년 3월 인민무력부에서 소속변경 돼 사회안전부 공병국에 배치된 5만 병력 등 총 13만 명이란 것이다.

사회안전부장은 백학림 대장(74세)인데 직접적인 통제는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직할하는 사회안전부 정치국이 맡고 있다고 한다. 안전부는 일반 주민들에 대한 경찰·감시기능과 함께 김일성·김정일 별장의 건설, 주요 정부기관의 건설, 핵 시설공사 등 비밀작업도 맡고 있다. 崔씨는 『사회안전부는 철저하게 노동당의 통제를 받는 하수기관으로서 안전부장의 권력은 중앙당의 과장 정도일 것이다』고 했다. 그는 또『아무리 폐쇄된 사회라 하더라도 알 만한 것은 다 알려지게 돼 있다』면서 주민들에 대한 통제력이 점차 약화되고 있다고 한다.

예컨대 옛날에는 생활에 대한 불평·불만을 사석에서 털어놓아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는데, 이제는 김일성 부자에 대한 험담이 아니면 거의 처벌도, 비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 『부패의 규모는 남한이 크겠지만 부패의 범위는 북한이 더 심할 것이다』고 했다. 崔씨는 1986년11월의 김일성사망설 소동에 대해서는 북한에 있으면서도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일성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그런 표현을 아무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북쪽에서도 그 문제로써 남한을 공공연히 비난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고 했다. 그는 남한에 와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서 북한이 김일성의 죽음을 걸고 심리전을 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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