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제조용 핵(核)재처리시설이 틀림없다』『박정희(朴正熙) 숭배자가 많다』『시위로 남한 무너진다고 보는 북한 정치인은 없다』
<1991년 7월 월간조선>
핵심계층, 기본군중, 불순계층북한을 여행한 사람들, 그리고 북한에 살다 온 사람들을 통해 들은 이야기만으로도 피상적이나마 북한 사회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이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북한의 특권층, 즉 그 사회를 지배하고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은 변화하는 국제정세와 남북한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최근에 한국으로 망명한 최상규(崔翔圭)씨(48.가명)는 북한 특권층의 생각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안전부에서 20년간 간부로 근무했고 金正日의 젊은 시절, 그와 어울려 다니기도 했던 이다.
1987년에 사회안전부 제2공병국 외화부장(상좌급)으로 근무 중 노동당에 소환된 그는 「북한노동당 간부부 직영 외화벌이 사업체」인 대양무역회사 사장으로서 아프리카에서 코발트·우라늄 등의 무역사업을 지휘하다가 지난 88년 5월 서유럽에서 방콕을 거쳐 서울로 왔다. 월간조선은, 북한 지배층의 심부(深部)에 관해 많은 정보를 가진 최(崔)씨와 최초의 본격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한국에 와서도 처음 1년 동안은 김일성에 대한 욕을 못했습니다. 누군가 듣고 밀고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너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어서…. 40년 동안 숭배만 했던 사람인데 밉다고 생각은 해도 표현이 잘 안되더군요』 그는 이제 「남북의 창」이나 「통일전망대」 같은 프로에서 북한 사람들이 꼿꼿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허허…」하고 웃게 된다?한다.
그의 아버지는 「노동자 신문사」 편집국장으로 간부 대우를 받았다. 당시만 해도 평양이란 곳이 뻔한 곳이어서 대부분의 간부 자식들끼리 몰려 다녔다. 그들 중에는 김정일을 비롯해 김일성의 육촌조카인 김명수(국가보위부 간부)·김명호(현재 사단장), 최현의 아들 최룡해(현재 중앙사로청위원장), 그리고 박성철·김일 등의 아들들이 있었다. 북한에서도 「달러」의 위력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다. 그는 외화를 주무르는 자리에 있었으므로 실제 자신의 위치보다 훨씬 더 높은 대우를 받았고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북한 특권층의 생리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소상한 사람이랄 수 있다.
-미네소타 변호사 위원회와 아시아 감시 위원회의 조사 결과를 실은 「북한의 인권」이라는 책을 보면, 북한에서는 주민들의 성분을 50여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성분 분류라기 보다는 기능분류일 것이다. 사회안전부에서 20년 근무했지만 주민들을 그런 방식으로 분류해본 일은 없다. 일반적으로 핵심계층, 기본 군중, 불순계층으로 분류한다. 핵심계층은 김일성과 빨치산 투쟁을 같이 한 사람과 그의 가족, 6·25전사자 가족, 김일성의 친족과 친한 가계 등으로 약 20∼25%정도다. 기본 군중은 해방 전후의 정치적 변화 속에서도 별 반응 없이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들로 전체의 약 50%, 주로 노동자 농민들이다. 그 나머지인 불순계층은, 친일파의 자녀분자, 지주자본가, 6·25때 미국 정보기관에 복무한 간첩의 가족, 일시적 후퇴시기 치안대 가담자, 월남한 사람들의 가족들이다. 불순계층에 대해서는 과거에는 제약이 심했으나 최근에는 많이 나아졌다. 「2∼3세대가 지났는데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느냐」는 생각들이 강하다』
독재대상 구역의 생활
-핵심계층이 그렇게 많은가.
『김일성은 「간부노선은 군중을 쟁취하는 노선」이라고 해서 핵심계층의 지도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핵심계층은 원래의 대상자에 살을 붙여 3∼4촌까지 모두 해당시킴으로써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핵심계층은 사회적으로 우대를 받는가.
『자신만 능력이 있으면 이들에게는 승진의 기회가 완전히 열려있다. 대학에도 갈 수 있고 박사학위를 딸 수도 있다. 그러나 당원이 되는 것은 꼭 핵심계층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불순계층이라도 본인만 잘하면 가능하다』
그러나 북한에서 계층간, 지역별 차별대우보다 더 심각한 인권유린의 현장은 바로 「통제구역」이다. 「독재대상구역이라고도 알려진 이 「통제구역」에 한 번 들어가게 되면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다. 「통제구역」은 주로 북쪽 산악지방에 집중되어 있는데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폐쇄관리소와 일단 개조되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관리소, 두 종류가 있다고 했다.
『국가보위부에 근무하던 한 여성이 하루아침에 감쪽같이 행방불명이 된 일이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를 수소문해 보았더니 함경북도 요덕에 있는 폐쇄관리소로 갔다는 것이다. 아는 사람의 공작으로 일단 다시 나올 수 있는 관리소로 나왔다가 3년 후 밖으로 나왔다. 그 여자가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곳에서는 씨앗을 주로 키워서 먹으라고 하는데, 농사를 해본 적이 없어 무척 고생을 했다고 한다. 소 한 마리를 여러 사람이 함께 사용하고 병원도 없으며, 전혀 생활보장이 안 된다고 한다』
최(崔)씨는 자신의 부인과 세 자녀가 이미 「통제구역」으로 끌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일반인이 아니라 당내 사정을 잘 아는 간부였기 때문이다. 그는 서울에 도착하던 날 김포공항에서 기자들 앞에 섰던 일을 제외하고 자신을 노출시켰던 일이 없다. 그것은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위해서다. 그들에게 더 이상의 불이익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그가 남편으로서, 또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사진을 찍는다거나 이름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신상옥 감독이 김정일과의 대화를 녹음해 온 것을 들어보면 김정일은 북한사회와 사회주의 체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뭔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상당히 답답해하는 것 같다. 그를 수구세력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혁·개방에 적극적인 사람으로 봐야 되는 것 아닌가.
『맞는 말이다. 김정일은 철저하게 그런 차원에서 파악해야 한다. 그의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김정일은 공식석상에서는 인민복을 입지만 대개는 점퍼 차림으로 다닌다. 남한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서 남한의 옷차림을 선호하게 된 것 같다. 키가 작아서 굽이 높은 구두를 외국에서 주문해서 신는다』
-북한에서 남한 텔레비전을 시청할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김정일의 집무실과 중앙당 기본부서-선전선동부나 조직지도부에 있는 사람들 정도다. 매우 제한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혀 남한 텔레비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사람들이고 밖에 나가서 자신이 본 것을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김정일의 파티, 그 심리분석
-신상옥씨 책을 보면 김정일은 파티에서 남한 유행가도 잘 부른다고 하던데 그 심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김정일은 「하숙생」 「신라의 달밤」 「동백아가씨」 등을 잘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흥미거리이자 오락으로 하는 일일뿐 이데올로기적으로 해석해야 할 문제는 아니다. 나도 「사랑의 배신자」를 자주 불렀다. 노래 못하고 춤 못 추면 그 파티에 참석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 파티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도 최고위층으로 일반적인 법의 적용범위를 초월해 있는 사람이다』
-하층계급에서는 생각도 못하는 일 아닌가.
『노래를 부르는 일은커녕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김정일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는 문화예술을 비롯한 모든 문제를 활용하면서 동시에 이해한다고 생각한다. 남쪽에서 어떤 주장을 해도 「웃기지 말아라. 너희들 주제에 우리보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우월감을 표시한다. 그 우월감의 이면에는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욕구가 깔려 있다.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절대권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인간 김정일을 평가한다면.
『키는 작지만 통은 큰 사람이다. 어떤 면에서는 포악하지만 다정한 면도 있고…. 그러나 그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데는 혼란스러운 점이 있다. 누이동생인 김경희는 매우 아끼면서도 이복동생인 성일과 평일은 아주 미워한다. 김일성 사후에 가족 내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 김정일은 정서적으로도 상당히 불안정해서 이 이야기하다가 도 다른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때가 많다. 산만하고 무질서한 느낌을 준다. 머리는 괜찮은 편이지만 공부는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사제간의 관계가 엄격해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질텐데 김일성의 아들을 제대로 가르칠 사람이 있겠는가』
김정일이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습에 나서면서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엄격해지기 시작했고 최(崔)씨와 만나는 일도 뜸해졌다. 김일성은 김정일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을 두고 준비작업을 해왔다고 한다. 그 과정은 몇 단계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고 崔씨는 말했다. 제 1단계는 김정일이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중앙위 선전부 책임지도원을 거쳐 부부장이 되기까지의 시기이다. 김일성은 김정일이 모든 계층과 접할 수 있도록 그에게 제한적이 자유를 주었다. 그 다음 단계는 김정일이 영화예술 사업에 주력하여 「꽃 파는 처녀」 등을 제작하며 한창 성장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일련의 선별작업이 이루어져 김일성 퇴진 후 김정일이 감당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가려내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비통신」보고 남한 사정 알아
1980년 6차 당대회가 열릴 즈음해서는 이 선별작업이 마무리되어 김정일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그와 완전히 격리되었다. 특히 오진우 등 노장세력과 김정일의 사업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이들 간에 명확한 한계점이 그어졌다.
-김일성은 남쪽이 잘 살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게 주장하는 근거는 어떠한 것인가.
『김일성은 남한이 미국과 일본의 식민지라도 생각한다. 기술이 있다 해도 그것은 예속된 기술일 뿐 민족적 개발 기술이 아니라고 본다. 외채를 지고 하는 일이라면 북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러나 막상 한국에 와 보니 그 주장은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데모가 심하게 일어나면 남한 정부가 붕괴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주사태 때는 약간 달랐다. 당시 일본의 NHK에서 광주사태를 계속 방영했는데 그때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줄 알았다. 방송을 보다가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 쳐내려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간을 좀 더 끌었더라면 문제가 복잡하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혼란스럽다 해도 그게 어디어제 오늘의 일인가. 아무도 남한 정부가 당장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1970년대 중반만 해도 잘하면 남한 정권을 무너뜨리고 통일할 수 있다는 기대로 있었지만 이제는 경제력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북한의 상층부 사람들이나 경제 전문가들은 오늘날 한국의 경제발전이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노력한 결과라고 보고 朴정권 시기를 매우 중요시한다』
-어떤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는가.
『북한에는 「비통신」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을 받아보는 간부들은 남한 정치에 관한 일은 대부분 알고 있다. 「비통신」은 남한의 방송이나 신문 내용을 아무런 가공 없이 그대로 담고 있다. 「비통신」을 받아보는 사람들은 비서국 비준대상, 간부 중 단위책임자까지 해당되는데 도당 책임비서까지는 받아보는 것으로 알고 있다. 1일 단위로 배달이 되고 다 본 뒤에는 다시 걷어간다. 주요 내용은 남한 신문의 톱 뉴스와 국제정치 문제 등이다』
박정희(朴正熙) 숭배자 있다
-전문가들이 朴正熙 시대의 경제정책에 대해 분석을 하기도 하는가.
『나름대로 분석을 해볼 수야 있겠지만 내놓고 한다는 것은 그 사회에서 목이 1백 개 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도 개인적으로 朴正熙 대통령을 좋아했다. 연설을 듣기도 했다』
-어떤 점에서 호감을 갖게 되었는가.
『우선 소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고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일회담이나 독도문제에 대한 견해 발표를 들어보면 입장이 명백했다. 민족적이라는 점에서 감정이 통했다. 청와대 도청사건 때 미국을 강렬히 비난하는 것을 보고는 일종의 자부심도 느꼈다. 그러나 미국에 대해 아무리 반발한다고 해도 미국을 완전히 적대시하는 발언을 하지는 못하는 것을 보고 약소국 대통령의 입장에 동정이 갔다. 박대통령이 암살 당했을 때 속으로 슬퍼한 북한 엘리트들도 많았을 것이다』
북한에서 「비통신」이나 라디오를 통해 남한 사정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전체의 2∼3%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바깥 사회에 대해 알고 있는 이 사람들이 북한의 개혁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그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나도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해봤지만 아직은 대답하기 어렵고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북한에 있다는 김일성 장수연구소는 규모가 어느 정도인가.
『장수연구소는 김일성 60돌을 기념해서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졌다. 봉화진료소를 중심으로 해서 적십자병원 전체가 다 연구소다. 실물실습은 봉화진료소의 지도하에 적십자 병원 전체에서 행해진다. 김일성과 같은 해에 났거나 연령 혈액형 체질 등이 비슷한 사람들은 건강하거나 병 들었거나에 관계없이 모두 실습대상이다. 그러나 생리적으로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고 식사조건이나 투약조건에 따라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가를 장기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김일성 별장에 있다 온 사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곳 근무자는 모두 여자라고 하던데….
『김일성의 별장은 한 두 곳이 아니다. 아직 한 번도 들르지 않은 곳도 많다. 일개 별장의 관리인이나 몇 개 지구를 관리하는 사람이 김일성의 별장이 어떻다고 말할 입장이 못된다. 60년대 김정일을 한참 따라다닐 때 그의 별장에 자주 놀러갔었다. 전국에서 뽑혀온 예쁜 여자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한 번도 김정일과 자지 못한 여자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별장도, 여자도 많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동생 경희, 평일도 별장들을 다 가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