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부 한의 바톤 터치
민중의 한과 한풀이 방식
―정치적인 면보다 인간적인 면에서 고독하셨을 것 같은데요.
『친구들도 나를 만나기 꺼리고 나도 친구들 입장을 생각해서 만나는 것을 피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고독했지요. 하지만 내 신앙과 인생관으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내가 나이에 비해 젊고 비교적 건강한 것도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친하게 지내시는 친구분들은 누구십니까.
『사회 여기저기에 약간 있습니다』
―金총재께서는 판소리에 조예가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창을 잘하시지요.
『창을 감상할 줄은 압니다. 북은 장단을 맞출 정도이고요. 나는 판소리를 우리 민족이 만든 최고의 예술로 생각합니다. 판소리 12마당 중 지금 다섯 마당이 남아 잇습니다. 춘향전, 흥부전, 심청전, 토끼전 그리고 적벽가. 이 판소리는 훌륭한 원작자가 쓴 것이 아니라 장바닥에서 광대와 장군들이 만든 민중의 작품입니다. 이번에 남원 광한루에 가서 「춘향전을 한국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하는데 이 말만큼 잘못된 게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남녀간의 슬픈 사랑을 얘기했지만 춘향전은 그 이상입니다. 춘향전은 우리 밑바닥 민중의 작품입니다. 춘향은 매를 맞으면서 「나도 한 지아비를 섬길 권리가 있다」라고 사또의 인권유린을 질타하면서 여권(女權)과 인권을 외쳤습니다. 춘향과 이도령의 첫날밤을 묘사한 장면을 보십시오.
유교윤리에 주술같이 묶여 있던 민중들의 내면에 자리잡은 자유연애의 욕구가 잘 나타나지요. 그리고 춘향전은 좌절된 소망을 안고 몸부림치는 민중의 한을 담고 있습니다. 춘향이를 보십시오. 좌절된 사랑을 회복하고자 갖은 투쟁과 노력을 다 합니다. 사또의 권위와 박해에 저항합니다. 감옥에서 점장이를 불러 점도 쳐보고, 방자를 시켜 서占?있는 이도령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보복이 없습니다. 춘향이의 한은 이도령을 만남으로써 풀렸습니다. 변사또에게 보복해서 한을 풀지 않았습니다. 기생의 딸인 춘향이는 이도령과 결혼할 수 없는 신분이었는데도 사랑을 이뤘습니다. 여기에는 민중의 신분상승욕구와 평등에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지요. 학정에 대한 원망과 저항도 소극적이지만 나타나 있습니다 이것이 로미오와 줄리엣과 어떻게 비교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세익스피어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고 그의 고향은 관광 명소로서 사람이 들끓습니다. 한 도시가 세익스피어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춘향과 이도령의 사연을 담고 있는 남원은 국민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의 위대한 자산을 우리가 안 알아준 것입니다』
서편제 감상평
―영화 서편제를 보시고 민중의 한을 잘 표현했다고 칭찬하셨지요.
『서편제 마지막 대목에서 어린아이가 송화의 지팡이를 잡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시 득음의 경지를 찾아 나서지만 당대에 한을 못 풀면 다음 세대에 「바톤 터치」를 해서라도 한을 풀겠다는 송화의 끈질긴 의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장면이 압권이었습니다. 바로 이 민중의 한과 한풀이 방식이 우리가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원천입니다. 밭 팔고 소 팔아서 자식 가르치는 7천만 민족의 교육열, 어떠한 경우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민중의 저력에는 한이 뿌리깊이 흐르고 있습니다. 서편제는 전체가 한을 주조로 담고 있습니다. 귀중한 누까지 바쳐서 판소리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한의 몸부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은 보복이 아닙니다. 토끼는 용궁에 끌려갔다가 간신히 살아 돌아왔지만 뭍에 와서 거북이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습니다. 흥부는 돈이 없어 매품을 팔고, 형수의 밥주걱에 뺨을 맞았지만 부자가 되자 형과 재산을 나눠가졌습니다. 심청이는 왕후가 되고도 한에 맺혀 있었지만 아버지가 눈을 뜨는 것을 보고 한을 풀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특성은 한과 멋과 신명입니다』
신명나는 민주주의가 국민성에 맞아… 처벌과 지시만으론 개혁이 불가능하다
―정이 있어야 신명이 나는 건데 과거 지향적 사정으로 신명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신명은 우리 국민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수평적 사고를 갖고 있어서 억압적인 지시를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국민들에게 우리가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설득하고 잘 됐을 때 뭐가 그들의 몫으로 돌아가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가 앞장을 서야 신명이 일어납니다. 신명나는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 우리 민족도 신명만 나면 얼마든지 큰 일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독일식의 규격화된 관리방식은 우리에게 안 맞는다는게 점차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멋도 그렇습니다. 우리 한국사람의 멋은 무엇에도 묶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가운데 나름대로의 규범이 있습니다. 또 특에 묶여 있으면서도 틀을 초월한 자유의 세계를 추구합니다. 규범과 자유가 세계를 추구합니다 규범과 자유가 변증법적으로 역동적으로 통합된 게 한국의 멋입니다. 저는 이 한국의 멋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원효와 황진이를 꼽고 싶습니다. 원효는 계율을 무시하고 요석공주와 동침을 하고 자유분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민중의 바다에 들어가 고락을 같이 하며 민중과 살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파계승이고 어떻게 보면 자기 절제에 성공한 성인 같은 승려입니다. 어느 쪽에도 안 묶였습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유학을 가다가 밤에 달콤하게 마신 물이 해골바가지의 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정말 멋있는 남자였습니다. 황진이는 마음에 있는 사람이면 과감히 접근했습니다. 마음에 없으면 천금을 주어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시·서·음악에 능했는데 박연폭포와 더불어 송도 삼절이라 일컬어졌습니다. 그녀는 생불이라고 알려진 지족선사를 파계시켜 그 위선을 벗기는가 하면 서화담을 유혹하다 이루어지지 않자 사제지간을 맺는 멋진 전환도 보여줍니다』
―통일논의도 신바람나게 하는 방법을 개발하셔야겠습니다.
『통일논의를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시키고, 통일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겁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왜 지금 통일을 서둘러야 하느냐, 통일은 이제는 가능하냐, 그리고 통일이 되면 어떻게 좋아지느냐를 명쾌히 알려주는 것이 신바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오늘 월간조선과의 대담이 이러한 일에 있어서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60년대 70년대에 우리가 그런 대로 성공한 것도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라고 국민의 신바람을 일으켰기에 상당한 성과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막상 근대화가 이뤄지고 보니까 「이건 다 잘 사는 게 아니라, 몇몇 사람들만 잘 사는 것이구나」하고 많은 국민들이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신바람이 사라진 거지요』
―6·29선언 전의 민주화 투쟁 때의 사진을 보면 데모하러 나온 시민들의 얼굴이 하나 같이 환합니다. 그때도 참 신바람이 일었구나 싶습니다. 『고통스러워도 그때는 모이면 서로 웃었지요. 「내가 참 의미 있는 일을 한다. 우리는 앞으로는 좋아질 것이고 나도 그 혜택을 입을 것이다」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대학 나온 젊은이들이 편한 삶을 포기하고 노동판에 들어가고 한 것도 소명의식과 함게 신바람이 났으니까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존경하는 인물은 누구입니까.
『국민의 편에 서서 자기를 희생하면서 싸우고 노력한 분은 누구든 존경합니다. 예를 들면 원효와 정봉준과 서재필입니다』
―원효대사의 사상과 인간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단점은 인물을 키우지 못했다는 겁니다. 우리 역사는 미국보다 20배 이상 깁니다. 그러나 과연 미국 사람들의 마음에 우뚝 서 있는 인물보다 많은 인물을 우리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나 반성해 봐야 합니다. 저는 원효가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봉준 장군은 당시의 상황에 가장 정확한 반봉건·반제국주의의 투쟁을 벌였습니다. 서재필 박사는 조선왕조 말엽의 가장 뛰어난 민주주의 지도자이자 교사였습니다.
민주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기록되길
- 金泳三 대통령의 개혁을 평해주시죠.
『역사를 돌아보면 우리는 자기의 본질을 지키려는 보수성에서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개혁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장보고, 묘청, 만적, 신돈, 정도전, 조광조, 정여립, 광해군, 최수운, 전봉준, 홍경래, 김옥균 등 개혁을 하려던 사람들은 다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친일세력이 군, 경찰, 사법계, 문화계, 학계를 장악하면서 개혁을 어렵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확고한 뜻과 방향을 세워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가운데 국민이 동참하는 개혁으로 가야 합니다. 개혁의 목표가 개혁이 성공했을 때 오는 대가를 알려주고 지도층이 앞장서야만 개혁은 성공할 겁니다. 김대통령의 개혁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金총재께서는 역사에 자신이 어떻게 기록되기를 원하십니까.
『40년간 처음부터 정성과 노력을 다해 민주주의와 국민의 복리를 지키려고 노력했고, 그 목표를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한눈 팔지 않고 매진했다. 선택을 강요받을 때는 목숨을 내놓고 국민을 택했다. 그래서 민주발전에 약간의 기여를 했고 후세 사람들의 삶에 참고가 됐다.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장시간 정말 고맙습니다.
『저보다도 인터뷰하신 분이 더 수고가 많았어요. 잘 정리해 주세요』
인터뷰 後記
5人의 영웅
기자(趙甲濟)가 金大中씨를 인터뷰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였다. 좋은 인터뷰는 공격적인 질문과 적극적인 방어로 이어지는 팽팽한 문답식인 경우가 많다. 기자는 金大中씨의 대북관계·통일방안에 드리워진 의문점을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질문 설계를 했으나 초장부터 화살은 빗나갔다. 金大中씨가 의문점으로 남아 있던 몇 가지 부분에 대해서 분명한 입장을 밝혀버렸기 때문이다. 金大中씨를 코너로 몰고 항복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고 오히려 설득당하고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이번 인터뷰가 성공적이었다는 자평(自評)을 했다. 무엇보다도 크게 달라진 金大中씨를 발견했고 그런 모습을 소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70을 앞둔 나이에서의 변신은 전보다 훨씬 솔직하고 명쾌해졌다. 이념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제―자유민주주의 정치 노선임을 분명히 했다. 한국 현대사와 전임 대통령들을 보는 눈도 객관적이고 따스해져 있었고 金日成과 북한에 대한 평가는 현실적이고 냉엄했다. 그의 설득력은 이런 분명한 입장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늘 표를 의식하던 현역 정치인의 입장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것이 그를 훨씬 자유롭게, 또 정직하게 만든 것 같았다.
후세의 역사는 해방후 한국 현대사의 주역으로서 다섯 영웅들을 기록할 것이다.
건국의 아버지 李承晩,
근대화 혁명가 朴正熙,
총성과 함성 속에서 권좌에 올랐으나 평화롭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던 全斗煥 ,
총구의 권력이 아닌 말과 명분의 힘으로써 대통령이 된 첫 직업정치인 金泳三,
그리고 대통령이 되는 데는 실패했으나 죽음을 무릅쓴 민주화의 길을 간 金大中이
5人의 영웅들이다. 朴正熙·全斗煥의 종속변수였던 崔圭夏·盧泰愚,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윤보선(尹潽善)·장면(張勉)은 자신의 시대를 스스로 열어나간 다섯 사람들과는 같은 반열에 낄 수 없다.
金大中씨가 정권을 잡지 못했으면서도 네 대통령과 동급의 대우를 받는 것은, 그가 대변해 왔으며 지금도 대표하고 있는, 8백만 표로 상징되는 거대한 집단 때문이다. 이 집단은 호남인, 블루칼러, 젊은 층에 걸쳐 있고 흔히 소외계층으로 불렸다. 이념적으로는 중도·우파가 다수였으나 소수의 좌파 세력이 끼여 있어 북한의 대남 전략에 한 표적으로 노출되었고 우익세력으로부터는 주된 공격점이 되기도 하였다. 金大中씨의 민주화 투쟁은 소외집단의 한과 열망을 주된 추진력으로 삼았으므로 정치적(또는 정권적) 성격이 강했던 金泳三씨의 그것과는 달리 사회적·역사적(또는 인권적) 경향이 두드러졌다.
金大中씨는 대통령이 되는 데 실패하면 남는 것이 별로 많지 않는 게임을 했고, 金大中씨는 정권획득에 실패해도 5人의 영웅에 낄 만한 것을 성취했다. 그 성취란 우리 역사에서 소외되고 눌려왔던 한 집단의 정치적 발언권을 강화함으로써 그들을 역사 만들기에 동참시킨 노력을 말한다. 『金대통령이 기록될 역사의 페이지와 내가 기록될 페이지는 다르다』고 말한 그의 여유와 자신감은 『나는 무엇이 되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로 평가 받겠다』던 그의 평소 소신에 근거하고 있다.
정계는 떠났지만 정치는 안 떠나
金大中씨의 얼굴은 고독·고뇌, 그리고 무서운 노력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金泳三씨가 대권문제로 고민했다면 金大中씨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뇌했고 고독했으며 오직 노력으로써 그 난관을 돌파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정계 은퇴 후에도 그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음을 이번 인터뷰에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8백만 표를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은 죽기 전에는 숙명적으로 정치를 그만둘 수 없다. 金大中씨는정계를 떠난 것이지 정치를 떠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는 『趙부장이 기사를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듯 나도 인터뷰나 강연 등을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金大中씨는 정계은퇴 후 종전과는 다른 스타일의 정치를 하고 있는 바 그 방향은 국민들에게 통일에의 비전을 제시하고 교육하며 설득하는 일인 것 같다. 일부에선 金씨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통일」을 이용한다는 비판을 하고 있으나 金大中씨가 20여년 동안 오해와 의혹의 시선을 무릅쓰고 일관되게 자신의 통일론을 보완·수정·발전시켜온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통일론에 지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유일한 현존 정치인이 金大中씨다. 그가 말하는 통일론에서 체감이 느껴지는 고뇌와 노력이 거기에 실려 있기 때문이리라.
金大中씨의 가장 큰 변화는 북한과 金日성과 사회주의에 대한 확실한 평가이다. 金泳三대통령은 金日成에 대한 평가를 유보하고 있지만, 金大中씨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金大中씨가 과거에 애매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좌파세력의 표를 의식했던 때문이 아닌가 보여진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그는 이념적으로 어중간한 태도가 득표보다는 감표요인으로 더크게 작용한다는 것을 실감한 듯하다. 유럽에서 바라 본 북한의 한심한 실상이 그의 생각을 더욱 굳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새 金大中은 보수화 된 金大中이다.
金泳三의 실패만이 金大中을 부를 수 있다
金大中씨를 다시 정치의 전면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국민도 역사도 아니다. 金泳三 대통령의 실패만이 金大中씨를 정계로 복귀시킬 수 있다. 金大中씨는 「통일대통령 지망설」에 대해선 『남북연합제 하의 대통령은 실권이 없는 사회자에 불과하고 그것도 교대로 할텐데…』라면서 일소에 붙였다. 『金泳三대통령의 개혁이 성공하여 양金배제론의 허구를 입증해주었으면 한다』고도 했다. 그렇게 말하는 金大中씨의 표정은 진실되어 보였으나 그래서 金泳三대통령이 실패할 경우의 대비책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정치의 속성과 金大中씨의 인감됨을 모르는 이다.
金泳三 대통령 또한 金大中씨를 의식하는 듯한 몇가지 행동을 보였다. 너무나 서둘러 발표토록 한 호남고속전철 계획이나 한일 양국간에 새로운 외교분쟁을 부를지도 모를 金大中납치사건 조사에 대한 정부의 협조지시 등. 양金씨의 대결이 金泳三씨의 대통령당선으로 종막을 고했다고 보기엔 아직 이르다. 金泳三대통령이 하기에 따라서는 또 한번의 라운드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金대통령의 성공은 金大中씨의 지지기반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얻는 것을 뜻하며 실패는 자신의 지지기반인 보수·안정희구세력의 지지를 상실하는 것을 뜻한다. 金大中씨는 앞으로 이 보수·안정 세력에 대해서 새로운 이미지를 심으려고 애 쓸 것이며, 金泳三대통령이 실패할 때 이탈될 이 세력의 지지를 자신에게로 유도하려는 사전 포석을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통해서 두드러진 金大中씨의 보수화 제스처는 그런 포석의 첫 사인이 아닐까?
1995년의 의미
金大中씨가 정계로 돌아오면 한국의 정치기상도는 본질적인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金씨가 金대통령의 지지기반이던 중산층을 포섭하려는 이념과 정책을 들고 나온다면 대통령의 입지는 좁혀질 것이고, 金씨가 종전처럼 호남과 소외계층을 지지기반으로 삼는다면 불안해진 비호남권 중산층은 다시 金泳三 지지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金大中씨의 정계복귀 타이밍은 1995년 이전에 치러져야 하는 시·도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큰 도의 도지사는 연간 수조원의 예산과 수만의 공무원을 관리한다. 이런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국회의원 몇 석을 얻는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국정에의 영향력 확보와 대권고지로 가는 교두보의 구축을 의미한다.
金大中씨의 지방자치에 거는 집념과 비전은 무서울 정도였다. 『지방자치를 실시한 뒤 대통령선거를 하면 자신 있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金大中씨는 최근 1995년의 의미를 「남북연합의 원년」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金日成도 1995년을 「통일의 해」로 목표 설정한 바 있다. 金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을 띤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북한의 핵개발 및 대남전략이 이 해에 합쳐져서 소용돌이칠 때, 金大中씨까지 정계에 복귀한다면 국가적으로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될 것이다. 金泳三―金大中의 세기적 대결에서 누가 최후의 승자가 될 것이냐 하는 것은 호기심의 수준이지만 두 사람의 경쟁관계가 국가를 융성시키는 쪽으로 작용할 것인가 아니면 국가적 위기를 초래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북한과 치열한 이념대결을 벌이고 있는 4천만 국민들에겐 사활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정치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당대의 정치적 주제를 선택하는 일이다. 대원군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급변하는 시점에서 외교와 안보를 무시하고 권력투쟁과 쇄국정책에 치중함으로써 식민지화의 길을 열고 말았다. 19세기 말처럼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질서가 재편되고 있는 시점에서, 또 북한의 2천만 동포를 끌어안아 부양해야 할 시기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정치지도자가 나라바깥으로 눈을 돌리지 않고 국내적인, 소승적인, 권력 투쟁적인 주제를 설정하여 국가의 내출혈을 지속시킨다면 우리의 전임 대통령들과 기성세대가 이룩한 20세기 세계사의 찬란한 성과인 근대화와 민주화의 금자탑은 무너지고 역사의 파괴자로 기록될 것이다. 우리 시대의 주제가를 흘러간 옛노래로 할 것인지 행진곡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金대통령뿐 아니라 金大中씨도 고뇌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리·金演光>
김대중의 거대한 비전 그 혼신의 토로(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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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7-11, 15: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