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거대한 비전 그 혼신의 토로(7)

제8부 통일을 위한 정치론

연합단계로 한 10년 끌면…

―우리는 7·4 공동성명에서 자주, 평화, 민족 대 단결의 통일 원칙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李厚  정보부장이 북한에 말렸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자주는 반미로, 민족 대단결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는 통일로 해석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이걸 싹 무시하고 기본적인 조건을 다시 마련한다면 하나는 평화, 다른 하나는 민주 통일이 되지 않을까요.

『자주라는 것이 거창한 원칙은 아닙니다. 미국과 협조하더라도 자주적인 것이 있고 끌려가는 것이 있습니다. 「자주는 곧 미군 철수」라는 등식은 과거의 경직된 북한의 해석이지요. 그걸 우리가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미군도 내가 필요하다고 해서 있으면 자주입니다. 독일과 일본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누가 독일과 일본이 자주국가가 아니라고 합니까. 자주냐 아니냐는 내 정신과 태도 여하에 있습니다. 북한을 경계해야지만 자신을 갖고 나가야 합니다. 사회주의가 다 붕괴되어 가는 세계사의 추세 속에서 북한이 얼마나 겁을 품고 있는지 짐작해 보십시오. 대한민국 안에 공산주의 지지자는 다 합쳐도 5%도 안될겁니다. 여야 의원 가운데 공산주의 지지자가 있습니까. 우리의 국력이 최소한 북한의 6∼7배 큽니다. 러시아 카자흐공화국에서는 북한 대사관 직원들이 한 집에 모여 살면서 낮에는 직접 나가 돈을 번다고 합니다. 카자흐공화국 대통령 고문으로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 북한 대사관 사람들에게 정부로부터 1만 달러를 빌려줬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이 남한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 것이 모두 다섯 차례입니다. 또한 KAL 858기 폭파 등 수많은 테러를 자행했습니다. 북한은 앞으로 남한과 대등하게 상대하기 위해 테러국가로서의 모습이나 막강한 군사력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잘 보셨습니다. 소련은 경제가 무너졌지만 핵무기로 미국과 양극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국민을 굶기면서도 한 군데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 공산주의 체제입니다. 북한이 군사적으로 남한에 승리할 가능성은 없지만 「너 죽고 나 죽자」고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쪽(너 죽고 나 죽자고 하는 북한의 마음)을 건드리면 북한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너 죽고 나 죽을 수 있는 능력이 의미가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최후의 수단을 쓰겠다는 사람에게는 퇴로를 열어줘야 합니다. 북한은 경제력이 빈약하니까 신무기를 개발하는 힘이 점차 약화될 것입니다. 북한은 지금도 기름이 없어 군사훈련을 못하고, 비행기도 띄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미국은 소련에게 퇴로를 열어주어서 이겻고 월남에 이를 열어주지 않아서 졌습니다』

―북한이 동반자살할 힘은 갖고 있다고 보시는 거군요.

『동반자살뿐만 아니지요. 장거리 스커드 미사일을 확보했으니 동경에도 한방 먹이고 갈 정도라고 봐야지요』

분단의 비극이 통일에 눈뜨게 해

―그런 점에서 완전 통일이 될 때까지 경제·문화교류는 웃는 낯으로 하더라도 안보에서는 한치의 양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양면 정책으로 나가면서 군사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끌고가야 합니다. 경제전쟁 시대에는 군비를 축소해야만 거기서 생긴 인적·물적 자원으로 우리 경제의 활력을 살릴 수 있습니다. 교류를 하면 아무래도 우리가 더 벌겠지만 북한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왔다갔다하면 적개심도 사라지고 자연 군사적 대치의 필요성이 줄어들 겁니다. 어른이 어린이를 이끌 듯이 북한을 개혁과 민주화의 방향으로 유도해야 합니다. 연합단계에서 서둘지 말고 한 10년 꾸준히 추진해 나가면 연방제로 가는 길이 열릴 수 있을 겁니다. 국민여론에 나타난 대로 북한을 경제적으로 발전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배가 부르면 웃고, 배가 고프면 화냅니다』

―남북한의 경제력이 다시 대등해지면 북쪽이 「먹히지 말아야겠다」고 움츠러들어 남북관계가 다시 긴장될 가능성도 있지 않겠습니까.

『공화국 연합체제 아래서 경제교류가 정착되고 시장경제가 발달하게 되면 북한은 남한이나 서방국가와의 경제관계를 끊고는 못살게 됩니다. 민주주의 세력이 커져나오기 때문입니다. 일단 시작만 하면 북한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길로 안 가고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한번 시작한 방향전환을 다시 역전시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툭하면 안보를 구실 삼아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는 냉전시대에나 가능했던 것입니다』

―金총재는 10년부터 독자적인 통일방안을 꾸준히 제시해왔습니다. 사실 金총재가 필생의 과업으로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통일을 추구해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그때는 통일논의를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통일문제에 매달리신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분단이 빛어낸 우리 사회의 비참함이 나의 민족적 양심을 건드린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우리나라가 외세에 의해 분단된 후 얼마나 참혹한 일을 많이 겪었습니까. 나는 서울로 출장을 왔다가 광화문의 여관에서 6·25를 맞았습니다. 서울을 사수한다고 하니까 그대로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광화문에 있는 처남의 장인 댁에서 며칠 신세를 졌습니다. 그때 러시아 영사관 뒷길에서 벌어진 인민재판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용공이라고 국민의 배척을 받을 때 피눈물이 났다

―처형장면을 보셨습니까.

『처형장면은 못봤습니다. 몇 사람이 「옳소 옳소」하더니 사형을 언도해서 끌고가더군요.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6·25 때 목포에서 인민군에 붙잡혀 옥살이를 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목포까지 걸어서 내려가는데 홍성쯤 가니까 벌써 목포에 인민군이 이미 진입했더군요. 전라도 도민증이 있으니까 내려가는 것은 문제가 안되고 다시 서울로 올라가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걸어 걸어 목포에 있는 제회사 겸 집에 가니까 목포의 집은 인민군에게 몰수당한 상태였습니다. 집 사람(첫 부인 차용애씨)은 그래서 해방 전에 일본 사람들이 파놓은 방공호 안에서 둘째(弘業씨)를 낳았습니다(50년 7월 29일). 집에 내려간지 이틀만에 정치보위부원들에 끌려 가서 내무서(경찰서)와 목포 형무소에 두달간 붙잡혀 있었습니다 9·28 수복 그날에 정치범 2백20여명 가운데 1백40여명이 학살당하고 80여명이 탈옥해 살아났는데 저도 그때 탈옥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공산주의 점령하에서의 비참함을 어떻게 다 설명하겠습니까. 李承晩 정부가 얼마나 무책임한 정부였습니까. 신성모 국방장관은 「전쟁이 나면 사흘이면 평양 가고 일주일이면 압록강 간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전쟁이 나자 사흘만에 서울이 떨어지고 정부 말만 믿던 죄 없는 백성들만 무더기로 희생되었습니다. 민족적 비극을 뼈져리게 맛보고,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양민학살을 보면서 「무책임한 정부는 안 된다. 민주주의를 해야 공산당을 이긴다」고 느꼈습니다. 공산주의를 이기는 통일을 하려면 민주주의를 해야 합니다. 전시 계엄령하의 부산에서 발행된 신문을 보십시오. 주먹만 한 활자로 정부를 비판했습니다. 그때는 예비군도 안기부도 없었고 국가보안법도 없었지만 체제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강력한 국민여론은 국민방위군 사건 주모자를 재심 끝에 처형하게 하고 국회가 거창사건을 조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방이건 거리건 자유롭게 비판하고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가 5공, 6공보다 훨씬 보장되었었습니다.

그래서 공산당과 대치하고 있었지만 국민들은 「너희들은 이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지만 우리는 자유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숨을 바쳐서 이를 지키겠다」고 마음 속에서 이렇게 부르짖엇던 것입니다. 그래서 치안이 끄떡없었고 공산당이 발을 못붙였던 겁니다. 「다시는 동족상잔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럴려면 공산당에 이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다. 이것만이 이기는 통일을 하는 길이다」 이런 생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도 金총재는 「북한의 고려연방제와 똑같은 주장을 한다」거나 「용공적」이라는 비난에서 벗어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내 뜻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거지요. 무엇보다 역대 정권이 일부러 나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 놓은 때문입니다. 나는 목숨을 걸고 독재와 싸웠고 민주주의를 사수해 왔는데 국민의 애해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을 당할 때는 정말 피눈물이 났습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던 金총재는 자신에 대한 집요한 용공음해를 얘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격앙된 목소리로 역대정권을 비판했다. 흥분된 그의 목소리는 가끔씩 떨려 나왔다) 『그래도 나는 「국민을 미워하거나 원망할 수는 없지 않느냐. 언젠가 국민이 나를 이해해 줄 것이다, 내 당대에 안되면 죽은 후에라도 바르게 평가받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하면서 마음을 달랬습니다. 과거에는 내가 무엇이 되겠다니까 오해와 모략이 끊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심 없이 오직 민족통일을 위해 내 평생을 바쳐 일할 생각입니다. 뭐가 되겠다는 생각은 다 버렸습니다』

―일부에서는 「金총재가 통일 대통령이 되려는 뜻을 갖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있습니다.

『아이구…. 내가 제시하는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을 보면 통일 대통령이 할 일이 없다는걸 저절로 알게 됩니다. 일단계의 국가연합이란 남북한 양 정부간의 협의기구에 불과합니다. 국가연합 단계에서 통일 대통령을 둘 이유도 없고 두더라도 대통령이 할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2단계인 연방제에 들어가서야 대통령이 필요한데 그때는 우리 세대가 다 지나가야 올 것입니다. 민족통일에 헌신하면 그게 최대의 보람이지요』

―「金총재가 통일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정치다. 통일보다 더 큰 정치적 이슈가 없지 않느냐. 金총재가 결코 정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趙부장께서 글을 쓰는 것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정치행위입니다. 모든 게 정치와 관계가 있지요. 하지만 내가 무엇이 되기 위해 통일문제를 다루는 것과 시심을 버리고 오직 국민과 민족을 위해 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지요』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도 정치적인 영향력을 갖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향력은 물론 행사해야지요. 그래서 이렇게 인터뷰도 하고 글도 쓰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방식으로만 영향력을 발휘할 겁니다. 필요하면 통일정책과 관련해 정부에 건의서도 내고 참고적으로 의견을 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내가 정치일선에 나서 정책을 좌우할 필요는 없는 걸로 생각합니다』

―용산의 미군기지를 옮기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잘한 결정이지요. 미 8군 사령부가 한강 이북에 남아 있는 것과 남쪽으로 옮기는 것은 큰 차이가 납니다. 어차피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 있다면 억지로라도 북쪽에 붙들어놔야합니다. 그래야만 자기들 안전을 위해서도 한강 북방의 안전에 전력할 것 아닙니까. 수도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 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제9부 정계복귀 가능성에 대해

과거 역사 논쟁은 삼가야

―새 정부에 들어서 현대사의 정통성 시비를 포함한 역사논쟁이 한창입니다. 임정요인의 유해봉환을 계기로 문민정부는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었다고 하면서 이전 정권의 정통성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해방 이후 50년의 한국 현대사를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조선왕조에서 당쟁하듯이 흑백주의나 극단론으로 흘러 논쟁을 위한 논쟁이 돼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을 건국하면서 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고 명시했습니다. 역대 정부가 통치과정에 오점을 남겼지만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속 이은 겁니다 정통성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보다 우리 대한민국의 오점은 친일세력을 숙청하지 못했고 민주주의를 확립하지 못한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정통성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다만 이를 훼손시킨 반민족·반민주의 현실을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정통성은 남한과 북한 어느쪽에 있다고 보십니까.

『남한에 정통성이 있는 거지요. 우선 우리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과 법통을 계승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독재가 여러 차례 출현해지만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큰 틀 속에서 정치가 이뤄졌습니다. 북한은 金日成이 개인숭배를 통해 국민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왔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한국 외교의 「신 한국책략」

―요즈음 진행되는 역사논쟁을 어떻게 보십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친 흑백론과 결백주의를 고쳐야 합니다. 세상에는 완전한 흑도 백도 없습니다. 중국서 들여온 성(姓)을 가지고 우리만큼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북쪽 끝에서 온 사람하고 남쪽 끝에서 온 사람이 만나도 성이 같으면 본관부터 따지고, 항렬이 높은 사람이 당장 반말입니다. 정작 성을 만든 중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습니다. 묘를 쓰고 위패를 모시는 것도 기껏해야 조선 중기 이후에 주자가례를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다시 풍수를 따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에 적자와 서자를 가리고 평민의 과거를 막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도 없는 이 제도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게 했습니까.

주자학을 글자 그래도 따르다 보니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지요. 같은 유학인데도 양명학을 허용하지 않았잖습니까. 그리고 고유종교인 샤머니즘은 미신으로 전락했습니다. 동학같은 위대한 종교도 사교로 몰려 싹이 잘렸습니다. 천주교를 탄압해 만명의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자기중심의 메마른 정치풍토는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배타적인 당파싸움으로 이백년 동안 같은 민족끼리 피로 피를 씻게 했습니다. 우리 민족이 자기의 본질을 수호하는 데 뛰어나고 교육과 지식을 숭상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합니다. 이 점은 세계에 그 유례가 없이 뛰어났습니다. 반면에 흑백주의에 빠지고 개혁을 싫어한 단점도 재조명해야 합니다』

―북한이 미국이나 일본의 기술 자본과 연결돼 우리와 경쟁적인 위치로 뛰어오를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우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될 텐데요.

『그것도 전혀 있을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일본이 자국의 이익에 반하면서 우리와 소원해질 정책을 택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발전하는 속도보다 더 빠를 수밖에 없는 기반을 우리는 확립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발전을 위해서는 남한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통일과 관련해서 한국 외교가 4대 강국 속에서 취해야 할 「한국책략」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하겠다는 민족적 자각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둘째는 주변4대국과 다시 한번 관계를 발전시켜서 그들이 우리의 안전과 통일에 협력하도록 고도의 민족적 외교역량을 발휘해야 합니다.
셋째는 미국과의 전통적 협력관계를 정치·경제·군사 면에서 유지강화하고 일·중·러에 대해서 우리에게 유리한 작용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이제 소국 콤플렉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남한만으로도 세계 1백80개의 나라 중 20위 이내의 대국이며 경제는 15위입니다. 남북한 합치면 12∼13위의 대국입니다. 한반도는 특수한 지정학적 위치입니다. 우리가 약할 때는 강대국 파워게임의 재물이었지만 통일대국이 되면 주변 강대국을 잘 조정해서 주도권을 쥘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동북아 4강이 아닌 5강의 시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신한국책략」입니다』

세 번 대권 도전했으면 됐지…

―8월13일 강연에서 「경제적으로 발전한 것에 힘입어 이제 북한에 당당해졌다」고 평가했습니다. 이제 경제개발 우선론자들의 공을 인정해야하지 않을까요.

『朴대통령이 우리 국민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자신감을 심어준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는 민주정부가 맡아서 했으면 더 잘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면 정부 때 내가 민주당 대변인이었습니다. 朴대통령이 추진한 1차5개년 경제개발계획은 민주당이 이미 만들어 놨던 안입니다. 민주정부가 끌고 왔으면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 부자와 가난한 사람의 격차, 대기업과 중소기업간의 불균형, 지역격차가 이렇게 크게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성장을 이루기는 했지만 성장과정에 분배를 왜곡시켰습니다. 결코 작은 잘못이 아닙니다. 민주당이 경부고속전철 건설을 반대하니까 여당에서는 「고속도로 건설에 반대했을 때의 창피를 당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盧대통령도 내가 고속전철 건설을 반대하자 「고속도로 놓을 때 반대했죠. 어떻게 됐나 보십시오. 고속전철 놓는 걸 반대하면 똑같은 꼴을 당합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盧대통령에게 「우리가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한 이유를 모르시죠」라고 말하면서 내가 쭉 설명을 해 줬습니다. 「우리가 그때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건설을 좋다. 그러나 순서가 잘못됐다. 먼저 국도를 전부 포장해 물동량이 전국에 걸쳐 자유롭게 흐르게 해야한다. 그러고도 지나치게 몰린 구역이 있을 때 거기서부터 고속도로를 놓자고 했다」 「국도포장률이 40%가 안되는 상태에서 서울과 부산간에 고속도로를 놓으니 모든 물동량이 경부축에만 몰리고 지역 불균형을 초래했다. 그리고 부산 울산 등 영남지역도 공해와 교통난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지 않았느냐. 그때 우리가 예견한 대로 된 것이다」 그랬더니 盧대통령이 아무 말이 없더군요. 그래서 「고속전철보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먼저 뚫고, 경부 고속도로를 하나 더 만드시오」라고 얘기 했습니다. 경제는 총량이 아무리 늘어나도 배분이 잘못되고 지역 불균형·교통·공해 문제 등 부작용이 유발되면 건전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부고속전철을 놓으면 지역 불균형이 더욱 심화될 겁니다』

金泳三이 역사에 기록될 페이지와 나의 페이지는 다르다

―공과 과를 뭉뚱거려 종합적으로 판단해도 경제 개발론자들이 잘못했다고 보십니까.

『공과가 다 있는데, 저는 과쪽이 더 컸다고 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격유착에 의한 부패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金東吉 의원은 「양김 낚시론」을 얘기했다가 최근에는 「DJ가 정치를 재개해 YS의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는 글을 썼더군요.

『정계은퇴 후 그 양반으로부터 낚싯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 엉뚱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 번 도전해서 실패했으면 된 거지 더 미련을 가질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金東吉 의원에게 간접적으로 「그런 소리하지 말고 낚싯대나 하나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정치인은 국가나 민족이 부르면 언제나 나서는것이지, 영원히 안하겠다고 누구도 장담을 못하는 것 아닙니까.

『국민이 나를 부를 일이 올 걸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대통령이 잘해서 「양김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얘기를 불식시켜 주길 바랍니다. 30년 라이벌인데 왜 김대통령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없겠습니까. 하지만 김대통령이 역사에 기록될 페이지와 내가 기록될 페이지는 다릅니다. 김대통령이 잘 돼도 내게 손해가 없습니다. 대선에서 패배한 뒤 괴롭기도 했지만 김대통령에게 쓸 데 없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심정도 있어서 영국으로 떠났던 것입니다. 국민이 나를 다시 정치일선으로 부를 일이 없을 겁니다. 내 나이가 몇입니까. 좋은 사람을 육성해야지요』

―영국 갔다 오셔서 김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하셨습니까.

『아직 못했습니다』

―金총재가 꾸준히 주장해온 금융실명제를 김대통령이 전격적으로 실시했는데요.

『주돈식 정무수석에게 「잘했다」 「성공하길 바란다」고 축하해줬습니다. 김대통령 정부가 가장 잘한 일로 나는 군대 내의 파벌주의자들을 숙청한 일과 금융실명제 실시를 꼽고 싶습니다. 다만 실명제를 실시하더라도 경제는 색시 다루듯 곱게 다뤄야 합니다. 실명제 결정은 아주 잘 내렸습니다.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금융실명제에 영향 받을실 일은 없습니까.

『전혀 영향이 없습니다. 다소간의 재산을 모두 평화재단에 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재산이라고 해야 60년대에 사놓은 땅이 전부고, 이게 30억∼40억 원이 됩니다. 전 재산을 재단에 낼 생각입니다. 그리고 기타 재산도 전부 재단으로 내서 깨끗하게 쓸 생각입니다 이 땅을 지금가지 갖고 있는 사연이 참 재미있어요. 집사람이 65년엔가 영등포역 앞에 있는 땅을 천 몇백 만원에 샀습니다. 인수할 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67년 선거때 팔려다 못팔고, 대통령 선거 때 다시 팔려고 했는데 누가 사려고 나서겠습니까. 그 뒤 유신이 선포되고 감옥 들락거리고 하다보니 팔 기회가 없어서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부근에 백화점이 들어서고 해서 비싼 땅이 된거지요. 제가 이 정도 재산 가진 것은 순전히 군사정권의 감시와 박해의 덕입니다. 내가 군사정권의 덕볼 때도 있으니 참 재미있어요』

―정신과 의사인 白尙昌씨가 대선을 앞두고 「2김(金) 1(鄭)」의 심리를 분석하면서 金총재에 대해서는 「고독해 보인다. 나눌 수 없는 절대고독을 갖고 있다. 쓸쓸할 때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분석이 안 맞는데요. 정권의 박해와 국민의 오해 속에 살았지만 내가 걸어온 길에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죽었다 다시 살아서 또 한번 이 길을 가라해도 갈 겁니다. 양심에 따라 국민의 뜻과 역사를 쫓으며 살면 고독이 있을 수 없습니다. 힘겨운 삶에 긍지를 느끼게 됩니다. 여기 옆에 權魯甲 최고위원도 있지만 동교동계 하는 게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모릅니다. 감옥 안간 사람이 없지만 대부분 꿋꿋이 내 곁을 지켰습니다. 물론 몇몇 사람은 다른 길을 갔지요. 내 비서 보좌관을 지낸 사람들이 지금 20여명이나 국회에 진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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