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부 주사파가 反통일세력
―얘기가 너무 딱딱해졌습니다. 영국에 계실 때 얘기와 근황을 좀 여쭤보겠습니다. 대학 강의는 언제부터 하십니까.
『9월 8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강의를 했고, 그 뒤에 연세대, 성균관대, 중앙대 네 군데서 강의를 합니다. 영국에 갔다오니 어떤 대학에서는 「석좌교수」를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평생 공부를 하고도 대학교수를 못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내가 교수 중의 상교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느냐」며 사양했습니다. 이제부터 제 직업은 특별강사입니다』
영국에서 마음 편했다
―영국 계시면서 「너무 오래 있으면 귀국하기 싫어지겠다」고 하셨는데 그곳에선 마음이 편하셨던 모양이지요.
『참 편히 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너무도 잘 해줬어요. 내가 살던 아파트단지의 입구 집에 「김 랏지(Kim Lodge)' 그러니까 우리말로 」김씨의 집「이라고 이름까지 붙여주고, 떠날 때 교수회의 평생회원 자격을 줬습니다.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었고요』
―유럽 여러 지역을 방문하신 걸로 아는데 어디어디 다니셨습니까.
『우선 신세진 데를 다 찾아다녔습니다. 저를 여러 가지로 도와준 영국에 본부가 있는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을 찾았지요. 본부 직원을 다 데리고 나가 식사도 같이 하고 제 글씨도 하나 기증하고, 기부도 좀 했습니다. 제 구명운동을 위해 미국·한국가지 찾아왔던 엠네스티의 벨기에 여인 도지가 공부하고 있는 학교로 찾아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세계 교회협의회(WCC), 사회주의 인터내셔널도 방문했습니다』
―동방정책을 펼친 빌리 브란트 전 독인 수상에게는 아주 특별한 감정을 갖고 게시죠. 그 분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으로 있으면서 80년에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총회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을 냈지 않습니까.
『그럼요. 브란트 수상은 내가 일생에서 만난 가장 좋은 선배이자 친구입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받는 사이였습니다. 이번에 브란트 수상의 묘소를 참배했습니다. 정말 감회가 새롭더군요. 다른 유럽 친구도 많이 만났습니다. 오스트리아 수상을 지낸 브루노 크라스키는 제가 옥중에 있을 때 자신의 인권상을 준 사람입니다. 독일에서는 대통령 물망에 있는 프레드릭 겐셔와 사이가 좋고, 현재 독일 대통령이 봐이츠 체커씨는 제가 무척 존경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우리 집을 두 번이나 방문했고, 80년에 제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는 동경에 와서 구명운동을 벌엿습니다. 지난번에 만났을 때 놀란건 여비서가 차를 들고 들어오니까 벌떡 일어서서 차판을 받아 들고 와서 탁자에 놓더군요. 그게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더군요』
―한국 현대정치사 집필은 얼마나 진척됐습니까.
『쓰다 보니까 너무 걸리는 게 많아서 일단 중지한 상태입니다』
―회고록을 먼저 쓰시고 나중에 현대정치사를 쓰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회고록도 아직은 걸리는 게 많아요』
―그동안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메모를 쭉 해두셨습니까.
『그게 아쉽습니다. 워낙 주변에서 감시의 눈이 번득이니까…. 수색이 두려워서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의 수첩은 간직하고 있습니다. 기록을 남겨두는 게 너무 불안했습니다. 80년에 전남대생 정동년씨는 우리 집에 와서 방명록에 이름 석자 써 놓은 것 때문에 결국 광주사태의 주동자로 몰려 죽을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문을 받고…』
「너 죽고 나 죽자」가 무섭다
인터뷰에 배석했던 權魯甲 최고의원은 「기록을 남겨서는 안 되는 동교동 살이」의 어려움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첩을 갖고 다니지 않는 게 우리 동교동 비서들의 철칙입니다. 저는 지금도 약속을 기록해 두는 수첩이 없습니다. 언제 안기부에 끌려갈지 모르는데 만나는 사람의 이름과 시간·장소가 적힌 걸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건 이 사람 잡아 가라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주 접촉하는 사람들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모두 외우고 다니다 보니 그 쪽으로는 기억력이 비상하게 발달했습니다』
―탈냉전 시대에는 더 이상 국부를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나눠 투입할 수 없다는 金총재의 말씀은 「군사력과 경제력의 배분이 한 국가의 흥망을 좌우했다」는 폴 케네디의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강대국의 흥망」은 다 읽으셨습니까. 굉장이 두꺼운 책인데.
『세밀히 보지는 못하고 중요한 부분들을 골라서 거의 다 읽었습니다』
―「군사력과 경제력의 정적배분」이 라는 폴 케네디의 시각을 빌리자면 북한은 군사력에 너무 큰 비중을 둬서 경제도 같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반면 朴正熙 대통령은 선(先) 경제건설 후(後) 군사건설 전략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잘 보셨습니다. 북한은 처음부터 지나치게 중공업에 집착했지요. 북한의 영화제작 스튜디오는 헐리우드보다 크고 좋은데 만드는 영화는 1년에 4∼5편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경제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없는 것이지요. 이건 공산국가의 공통점입니다. 최근 구(舊)동독 지역의 어떤 외국인 경영의 전자공장을 가보았습니다. 여기서는 지금 8백명의 노동자가 일하고 있는데 공산정권 때 무려 9천명을 썼습니다. 이러니 경제가 될 턱이 없지요』
―저도 신상옥 최은희 부부가 북한에서 녹음해온 金日成의 육성 이야기를 들으면서 金正日이 그런 불평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金正日이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인상이 들었습니까』
―합리적인 인간형이라기보다는 예술적이라는 인상이었습니다. 논리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한계를 훤히 내려다 보면서 고민하는 햄릿 같기도 하고 네로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다루는 데 있어서 저는 대화나 협상보다 압력이 더 효과적이지 않나 �榻�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핵을 포기시키는 데 있어 군사·경제 제재조치를 하겠다는 무기로 북한을 코너에 몰아붙이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코너에 모니까 NPT를 탈퇴하고 「너 죽고 나 죽자」로 나오는 것입니다.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유엔 동시가입, 교차승인, 남한체제 인정 등은 엄청난 양보입니다. 그런데 일본하고 수교하려니까 미국이 막지…. 실제적인 제재를 가했던 것입니다. 남한하고 경제협력하려니까 또 미국이 막지…. 망할 바에는 사생결단하자는 결심으로 NPT 탈퇴선언을 한 거지요. 우리들이 동네에서 싸움을 하더라도 「너 죽고 나 죽자」고 머리를 들이박는 사람은 피해야 합니다. 같이 죽자는 북한 강경세력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는 안됩니다. 북한의 온건세력이 힘을 발휘할 근거를 우리가 마련해줘야지요.
지금 金日成의 최고 관심은 서방과 타협해서 안정 속에서 자식에게 정권을 넘겨주고 싶은 것입니다. 느슨하지만 일단 통일의 틀 속에 북한을 밀어넣고 경제개발의 맛을 알게 해야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사람한테 「그래 같이 죽자」고 맞받아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를 말하는데 군사적 제제는 큰일납니다. 남북이 다 같이 파멸하고 지구상에 생존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경제제재를 추구해 봤자 줄 것이 없는데 뭘 가지고 제재합니까? 유일하게 얼마간의 경제지원을 하고 있는 중국이 동조해서 지원을 끊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중국은 우리가 일괄타결하면 그것을 지지합니다. 그런데도 북이 수용 안하면 그때는 UN의 경제제재에 동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일괄타결을 제안해서 북이 들으면 듣는 대로 좋고 안들으면 중국을 우리 편에 끌어들여 북한을 굴복케 할 만전의 대책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中産層은 북한교류 지지한다』
―그렇지만 남쪽의 안정 희구세력 또는 보수세력들은 북한에 대한 정보를 접하면서 「북한은 곧 망할 것이다. 나라도 아닌 개인 우상숭배의 종교국가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북한을 키워서 대등하게 1대 1의 연합을 한다는 통일방안에 대해 「뭐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우리 쪽의 중산층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에 대한 증거가 있습니까. 최근에 정부기관인 민족통일연구원이 실시한 여론조사의 결과가 있습니다. 교류협력에 의한 통일방안을 83%가 지지하고 무력통일은 1.5%만이 지지하고 있습니다. 통일비용부담을 64%가 찬성하고 있습니다. 84%가 북한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고 73%가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국민은 저의 생각과 아무 차이도 없습니다. 중산층이 북한과의 교류를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金총재께서 앞으로 하시려는 일을 「통일로 가는 길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이 길로 가자고 국민을 설득하는 작업」으로 보면 되겠죠.
『8월 13일에 강연을 하고 나니 많은 분들이 좋다고 해요. 하지만 제일 좋아하는 분들은, 통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을 다물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부드러운 소리를 하면 사상까지 의심하는 분위기였잖습니까. 이런 분들은 「우리가 할 말을 대신 잘 해줬다. 그동안 입을 열기 어려웠는데 앞으로 말하기 쉽겠다」고 좋아하더군요. 그 자리에 온 통일원 관계자들도 「이제 우리도 일하기 편하게 되었다」고 하더란 말을 들었습니다. 저의 할 일은 통일에 대한 연구와 건의입니다. 통일에 대한 기본 정책은 국민이 정하고 실천은 정부가 하는 것입니다』
―정치를 떠나시니까 오히려 속 시원히 말하실 수 있고, 언론자유를 마음대로 누리시게 됐군요.
『그래요. 제가 정치를 하고 있었으면 이번에 한 말을 다 못했을 겁니다. 이제 정치를 떠났으니까 당의 입장, 선거 때의 표의 향방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니까 어느 정도 속에 있는대로 양심껏 말한 거지요. 국민들이 이제 나한테 국가를 생각하는 소신있는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정치얘기는 원하지 않을 거예요. 독일을 돌아보면서 때때로 하나님이 이번에 나를 낙선시킨 것은 통일에 대한 올바른 발언을 하는 일에 나를 쓰시려고 한 것 같다고 절실히 느꼈습니다. 국민적 토론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소화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적 역량이 부족하면 국민의 능력을 키워주는 게 정치지도자의 임무입니다』
―국민들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정교한 통일방안이 없어 통일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통일은 어자피 국력의 차이로 이뤄질 것이다. 최종적인 단계는 북한이 우리에게 흡수 통합돼 통일로 이어질 것이다」라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흡수통일 방안을 추진해 흡수 통일하면 동서독 같은 결과가 옵니다. 그리고 국민도 그걸 언치 않는다는 것은 아까 제시한 여론 조사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80% 이상의 국민들이 북한을 도와주면서 북한과 협력해서 점진적 통일을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국민은 결코 흡수 통일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북한 지령이 나와 무슨 상관 있나
―저는 우리나라 내부의 반통일 세력이 있는데 그게 주사파 金日成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주사파가 통일을 얘기하면 나머지 반공세력들이 긴장해 합리적인 통일논의에까지 귀를 막아버리게 됩니다. 북한의 논리를 그대로 대변하는 金日成주의자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국민과 같이 하지 않는 용공통일론은 절대 안된다. 국민이 거부하는 그런 세력은 통일을 원치 않는 세력에게 절대적 구실을 준다」고 저는 경고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에 돌출적으로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면 말렸습니다. 「당신이 가면 돌아온 뒤에 당신은 구속되고 주변에 많은 희생자가 생긴다. 그리고 통일은 오히려 크게 후퇴하게 된다. 통일은 개인의 돌출행동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민과 같이 가야 이뤄진다」고 했습니다 저는 주사파라고 떠드는 사람들의 행동이 통일을 저해하고 통일 분위기를 결정적으로 냉각시켰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대선에서 전국연합과 정책연합을 하셨습니다. 전국연합에는 주사파가 주도하는 운동권 단체들이 가입해 있지 않습니까.
『전국연합의 주류는 주사파가 아닙니다. 그들과 우리가 손잡은 것은 필요한 부분에 관한 정책협정이지, 정권공유의 협정은 아닙니다. 그러나 선거에 큰 악영향을 미치고 보니 결과적으로는 마이너스가 됐습니다. 당시에도 그쪽에서는 공동 기자회견을 하자고 했는데 개별발표 형식을 취했습니다. 민주당의 선거전술상의 실패입니다. 그런데 정부와 민자당은 이걸 용공음해에 악용했습니다. 민자당은 용서할 수 없는 부도덕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북한이 남조선노동당 관계자들에게 암호지령을 내린 것은 암호문 해독으로 확인됐습니다.
『그건 안기부에서 주장하는 것이지요. 김낙중씨도 그런 암호문을 받거나 해독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지령을 북한이 내렸다고 하더라도 그게 저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를 지지했던 재야는 온건 재야그룹이었습니다. 그걸 용공세력이라고 하니…. 선거 때 민자당은 북한이 대남방송으로 金大中을 지지하도록 지령을 내렸다고 주장했습니다. 대선이 끝난 뒤에 민주당 남궁진 의원이 이 문제에 대해 국무총리와 안기부장에게 사실을 규명하라고 질의를 했습니다. 「북한이 그런 대남방송을 한 적이 없다」는 정부측 서면답변을 우리가 지금 갖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짓을 해도 되는 겁니까. 그런데 지금 정부는 「체제 내의 혁명」을 주장하는 가장 과격한 세력과 얼마나 접근하고 있습니까. 그걸 지금 문제 삼자는 건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더 이상 악용해서는 안되겠다는 겁니다. 국내문제에 용공시비를 너무 악용해 왔습니다. 이렇게 「공산주의는 무섭다」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고 공포심을 심어놓으니까 국민들이 「공산당은 전능한 힘을 가진 단체구나」라고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정부 주장대로 그렇게 공산당이 대단하다면 왜 소련은 망했고 북한은 왜 저렇게 비참하게 휘청거리는 것입니까』
용공시비를 너무 악용
―전국연합과의 정책연합을 시도해 金총재께서 오해의 소지를 자초하신 점도 있지 않습니까.
『전국 연합 사람들은 지명수배자도 아니고 온건 재야가 중심이 돼 있었습니다. 더 과격한 사람들은 재야 다른 정치세력에 몰려 있었습니다. 그러니 재야 중에서도 제일 온건세력을 골라서 손잡은 겁니다. 그걸 그렇게 용공으로 몰아붙이니 그런 사람들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선거만 하면 「김대중이는 사상이 의심스럽다. 용공이다」라고 몰아붙이고 선거가 끝나기만 하면 「우리는 그의 사상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국회에 나와서 증언하고,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이렇게 되풀이하는 정치풍토가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돼야 합니까』
―金총재께서는 전국 연합이 재야 가운데 온건하다고 하지만 북한의 노선을 그대로 추종하는 주사파가 포함 돼 있지 않습니까.
『이미 말한 대로 우리는 서로 집단적으로 찬성된 부분의 정책연합을 한 것뿐입니다. 이 정책연합의 내용에는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했습니다. 정책연합을 하면서도 주사파에 대한 반대는 분명히 했습니다.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는 제가 변함없이 견지해온 노선입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예스」라고 해야 할 때는 「예스」라고, 「노」라고 말해야 할 때는 분명히 「노」라고 했습니다. 姜慶大군 치사정국 때 재야 운동권은 정권타도를 외쳤습니다. 그러나 저는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정권을 바꾸는 것에는 반대한다」고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북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망하고 우리는 잘 돼야 한다」는 통일론은 바라서도 안되고 이미 말한 대로 무력대결의 위험까지 초래합니다』
한민통과의 관계
―金총재께서 운동권 학생들을 설득하면서 한 마음고생은 정말 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金총재를 둘러싼 의혹을 벗기기 위해서라도 한민통 사건은 꼭 짚어야 하겠습니다. 10월유신 선포 직후 미국과 일본에서 한민통 결성을 추진한 것이 정권의 비위를 건드려 김대중 납치사건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결국 80년에도 한민통문제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 대법원에서도 한민통을 반국가 단체로 판단했으며, 한민통에 참여한 배동호 곽동의씨 등 일부 인사들은 북의 지령을 받아 조총련 외곽세력으로 활동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일본은 공산당과 사회당을 법적으로 허용하는 국가입니다. 우리가 갖는 절박한 경계심이 없습니다. 한민통에 관여했던 사람들 가운데는 사실 조금 사상이 의심스러운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뭐가 있으면 친북세력으로 몰아붙이는 과거 정권에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민단과 조총련이 한 집 건너 뒤섞여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속을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하지만 저는 미국에서 한민통을 결성하면서 「대한민국 절대지지」, 「선 민주화 후 통일」을 원칙으로 못 박았습니다. 해외에서는 낭만적으로 통일로 달려가기 쉬워 이를 경계한 것입니다. 망명정부를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지만 그 자리에서 취소시켜 버렸습니다. 당시 회의는 공개적으로 진행됐습니다. 문제될 만한 언행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일본에서 한민통 결성을 준비하면서는 조건을 하나 덧붙여 「조총련과 선을 긋는다」는 세 번째 원칙을 추가했습니다. 수용 못하면 나는 안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고 참석한 사람들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래서 한민통을 해보자고 논의하다가 납치됐습니다. 만들지도 못했습니다.
80년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하는데 이바라기현에서 조총련 의장을 하다가 전향한 분이 군 검찰관측의 증인으로 나왔습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한민통 내 자기의 첩자로부터 보고를 받았다며 제게 유리한 증언을 했습니다. 정말 제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저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당시 한민통 활동의 전제로 내세운 조건과 말을 그대로 증언했습니다. 모든 의혹은 풀렸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납치되어 돌아온 뒤 일본에서 한민통이 결성되고 저를 의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그래서 이태영 선생과 김녹영 의원을 통해 「의장을 맡을 수 없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이것도 군사재판에서 두 분이 분명히 그렇다고 증언했습니다』
―사람을 통해서 의장 사퇴의사를 전할 게 아니라 한민통과 관계가 없다는 공개 성명서를 낼 수는 없었습니까.
『朴正熙 정권이 한민통을 용공세력으로 몰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납치된 뒤 이 사람들이 나를 구출하겠다고 물불 안가리고 뛰어다니는데 인간적인 의리가 있지 매몰차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리고 저에게 사형이 구형되었을 때 미국 정부는 내정간섭의 부담이 있는 데도 「김대중에 대한 범법 주장은 조작된 것(farfetched)」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신군부가 내세운 혐의의 허구성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김대중의 거대한 비전 그 혼신의 토로(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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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7-11, 1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