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에선 人脈이 중요
―역사 리듬으로 파악한다면 지금 우리는 어느 리듬에 해당합니까.
『과거의 큰 역사 흐름은 인도·중국이 문화의 중심으로, 문화가 한반도와 일본을 향해 동쪽으로 움직였으나, 오늘날은 서구의 과학기술을 접목한 공정기술(工程技術)문화의 파도가 일본에서 일어나 서쪽과 남쪽의 한국, 대만, 중국, 동남아로 흐르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분단된 상태니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도, 한국은 통합을 하겠지요. 그러나 통일이 당장 안되면 남쪽만이라도 전략적으로 창의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그리고 미국의 사이에 있으니 창의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우리는 먹히는 나라가 되고, 창의력이 있다면 4대 강국에 모두 필요한 촉매 역할의 나라가 되어 중앙의 위치를 점유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스위스처럼 인력 개발이 가장 중요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스위스란 나라를 유심히 보십시오. 독일어, 불어, 이탈리아어, 로만스어 등 4개 언어를 공식어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한자문화권의 한복판에 있는 우리가 한글만 쓰겠다며 고치 속에 들어 있는 누에 모양으로 움츠리고 있다면 제2의 임진왜란, 제2의 한일합방은 또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사의 리듬으로 보면 과거의 우리는 반도에 있으면서도 대륙화를 꿈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앙집권화한 권력으로 대륙화를 한 것이 우리 선조였다면 1945년 분단 이후 한국은 대륙과 강제적으로 단절됨으로써 「강제화된 해양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제화된 해양화 50여년 만에 한국은 5천년 역사상 가장 국력이 강한 시기를 만났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우리는 해양화의 길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옳은 말입니다. 해양화, 국제화로 더 뻗쳐나가야지요. 서양문명, 서양과학기술과의 연결을 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젠 대륙과도 연결되었으니 중국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거 일본어를 이해하던 층이 노령화로 줄어들고 있는데 일어를 이해할 수 있는 후세를 키워야 합니다. 대륙과 이어지게 되었다고 해서 해양화를 멈추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한중국교 정상화 이전부터 한중경제지식교류회를 시작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자양(趙子陽)의 오른 팔이고 한 때 주용기(朱鎔基) 부총리를 부하로 거느렸던 중국개발원 원장 마홍(馬洪)씨가 나오고 우리 쪽에선 南悳祐 金正濂씨 등이 참여爛求? 이 모임의 목적은 일본의 전 외상 오오키타 사부로(大來佐武郞)가 십몇년 전에 일중경제지식교류회를 한 것과 비슷합니다. 오오키타 사부로가 일중경제지식교류회를 한 것은 중국을 알기 위해서였고 중국에서도 일본을 모르니까 적극 참여했습니다. 한중경제지식교류회도 마찬가지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오오키타 사부로가 죽었지만 일본은 일중경제지식교류회를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의 관리, 기업체 간부, 연구소 사람들이 일중경제지식교류회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뭐든지 길게 봅니다. 동양문화에서는 인맥 형성을 중요시합니다. 인맥은 자꾸 만나고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형성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노털」들이 무슨 한중경제지식교류회를 하느냐 하겠지만 그게 아닙니다. 처음 한중경제지식교류회를 했을 땐 우리 외무부에서도 오고 관심을 기울였지만 한두 해 지나자 무관심해졌습니다.
이래서 무슨 인맥이 형성되겠습니까. 꾸준히 밀고 나가야 합니다. 한중경제지식교류회의 주된 관심은 중국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어떤 과정을 밟으며 자본주의 경제로 전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금융, 세제, 무역, 농업, 사고방식의 변화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경제라는 것은 좁게 봐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10여년 정도 중국 지식인을 만나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단순히 사전적인 어의(語義)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 참뜻이 뭔가를 알아듣게 됩니다. 중국은 중국대로 한국에 대해 공부하게 되니 서로에게 도움이 됩니다. 하나씩 하나씩 이런 자료와 인맥을 주워모아 놓으면 이것이 우리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 됩니다. 바로 이런 준비가 21세기를 앞둔 지금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의 「근육」 키우는 데 전력해야
―우리가 해양화를 더 추진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주변 상황은 냉전이라는 얼음이 녹는 유동적인, 헐렁한 시기라고 봅니다. 이런 때에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지금은 아주 큰 찬스입니다. 이럴 때는 경제의 힘, 경제의 근육을 튼튼하게 키워야 합니다』
―경제의 힘을 키워야 한다면 고성장을 계속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얼음이 다시 얼면 동아시아는 틀림없이 중국, 일본을 주축으로 러시아와 미국이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역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최소 10여 년간은 희생을 치르더라도 고속성장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토오(三戶)가 쓴 「가족의 논리 : 일본적 경영」이라는 책에도 나와 있듯이 명치유신 이후의 일본은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희생을 치르면서 경제의 기반을 닦았기 때문에 오늘의 일본이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이 끝나 미군이 점령군으로 올 때까지 「노동법」이 없었습니다. 「치안유지법」과 「공장법」만으로 노동자를 허술하게 보호했을 뿐입니다. 일본 노동자는 희생을 당한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은 전쟁을 치른 것이고 또 오늘의 경제대국이 된 것입니다. 지난 6공 때 한국의 임금은 신생공업국 중에서 가장 많이 올라 싱가포르를 능가했습니다. 너무 빨리 성장의 결과를 나눠 먹자고 해서는 「나라의 기름기」가 생기지 않습니다』
―희생이라는 것은 구체적을 봉급생활자의 임금을 동결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대응하는 임금인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장을 나눠먹는 노동생산성보다 높은 임금인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희생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지요.
『희생이라는 것은 결국 자세를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기득권, 경영인 그리고 노동자를 포함하는 각계각층의 자세. 우리의 생활자세가 풀려 있는 것 같습니다. 외국에서 생활해 보면 그런 것을 금방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 기업인들도 엔조이(enjoy)를 합니다만 규제가 있는 엔조이를 합니다. 노동자들도 할 것은 하고 놉니다. 일본의 노동생산성이 최고로 높았던 것은 잔업(殘業)을 많이 했을 때라고 합니다. 기본 봉급은 적었지만 잔업에 대해 수당을 줌으로써 부족한 임금을 채워주었으니 결국은 잔업수당은 인센티브(incentive)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요즘 어떻습歐? 오후 4시30분만 되면 책상정리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고도 월급 안올려준다고 하고 있고요』
―한국이 고도 경제성장을 한 이유중의 하나는 효율을 중시하는 군사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이 문화가 기업문화에 연결되었기에 고도 성장이 가능했다는 의견인데 문민정부가 들어선 후 군사문화를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군사문화의 좋은 점까지 같이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일본은 전쟁에 졌지만 전쟁을 통해 군사문화적인 기율과 조직력을 몸에 익혔기 때문에 전후 일본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일본의 기율과 조직력은 남아 잇습니다. 아침 7시30분쯤 일본의 도로를 달리다가 주유소에 들어가 보면 전 직원이 조례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임이 앞에 나서서 오늘 할 일이 무엇이라고 지시한 후 「반성(反省)」이라고 명령하면 전날 잘못한 것을 반성합니다』
군사문화 좋은 점은 계승해야
―그런 관점에서라면 한국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6·25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군을 경험했고 위기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악착같이 일했지요.
『그렇죠. 그런 정신이 풀리니까 문제라는 것입니다. 명치유신 이후 2차대전 때까지의 일본을 조직한 것이 호주제를 명시한 「민법(가족법)」이었습니다. 가부장제를 뒷받침하는 민법은 본관과 본적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일본은 명치산업혁명을 치르면서도 가족제도의 붕괴를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명치산업혁명기의 일본은 아이들을 대도시 공장에 보내 일을 시키더라도 따로 숙소를 마련해주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 기숙사를 만들어 기거시키는 제도를 택했습니다. 공장 계약기간이 끝나면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한 것이지요. 이런 발상은 「산업화를 겪으면서 구라파는 가족제도의 붕괴를 경험했으나 일본은 인구의 이동을 억제해 가족제도를 붕괴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문화적인 배경이 있었기에 일본은 1937년 「국민총동원법」을 만들어 국민을 가족처럼 움직이게 하는 행정지도(行政指導)와 산업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인은 전쟁에 지고나서도 이런 조직과 정신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습니다. 맥아더가 일본 점령 후 일본 국민을 동원하던 내무성을 없애버리고 明治민법을 고쳐서 모든 사람을 평등화해 버리자 민법의 이 정신을 기업문화로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가족제도처럼 오야(親)회사 (母회사라는 뜻), 자(子)회사, 손자(孫子)회사란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회사의 존속성을 가문의 명예처럼 중시하여, 단기적인 이익의 극대화보다는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것을 중시하는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을 경계로 일본 엘리트의 주류가 기업으로 갔겠군요.
『그렇죠. 이부카 마사루, 세지마류조 등 사무라이라고 할 수 있는 군출신 엘리트들도 기업으로 많이 갔습니다』
―전후의 일본 기업은 가족적인 성격과 군대적인 성격을 같이 가진 것이군요.
『그렇지요』
―우리가 군에 가면 겪는 것이 인간적인 수모, 배고픔, 육체적 고통 등입니다. 이런 고생을 겪다가 인간적으로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 오기가 생기고 용기도 생깁니다. 이런 훈련과정이 있었기에 우리 세일즈 맨들이 세계의 오지를 누비면서 장사하게 되었고 또 그것으로 인해 경제성장도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요. 얼마 전에 일본 NHK 텔레비전을 보니까 아직도 일본 사람들은 여름방학에 아이들을 절에 보내 수련하게 하더군요. 절도와 인내와 기율을 중시하는 정신이 살아 있다는 것은 일본의 장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육은 권위다
―우리의 성장과정에 군사문화를 잘 이용해야지 단절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사회기강, 기율 및 조직력이 경제발전에 필수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젊은이가 군에 간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인적 훈련과정입니다. 군사문화의 좋은 점은 중시해야지 무조건 무시하면 큰일입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정부가 행정지도를 통해 산업정책을 하면서 기업에 간섭하는 것을 없앴습니다. 행정지도를 미국이 반대하니 민간에 내려보내던 공문서를 없앴으나 「아마쿠다리(天下り)」라는 방법으로 눈에 안보이게 여전히 간여하고 있습니다. 「아마쿠다리」는 우리말로는 「낙하산 인사」쯤 되는 것으로 관료를 지낸 사람이 민간기업에 고위간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부에서 눈치만 주어도 민간기업은 협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방자치제를 택하고 있지만 지방조직에 대한 일본 중앙정부의 행정지도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표면상으론 선거를 통해 현(縣) 지사를 뽑지만 당선된 현지사는 대개 중앙행정부서의 엘리트 관료를 부지사 등으로 임명하기 때문에 지방정부는 중앙정부에 협조적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문화적 배경과 유교적 전통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서구적인 민주주의를 모방하려고 하는데 서구 민주주의에는 서구인 나름의 역사적배경이 있습니다. 개인의 인권에 뿌리를 둔 것이 서구의 문화라면 우리는 집체성(集體性)을 가진, 어른을 모시는 문화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런 차이점을 간과하고 무조건 서구 민주주의를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교육문제만 하더라도, 우리의 대한 교수들은 직선으로 총장을 선출하면 민주주의를 하는 것으로 아는데 민주주의의 본산인 미국과 영국 어디에도 총장을 선거로 뽑는 대학은 없습니다. 총장을 선거로 뽑으면 어떻게 총장과 교수의 권위가 세워지겠습니까. 영국과 미국에서는 「교육이라는 것은 권위다」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의 식당에서 교수들이 식사하는 곳은 학생들이 밥 먹는 곳보다 1m 정도 높은 것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할 데는 안하고 민주주의 안 할 데는 하고…』
―우리나라의 지도자나 지식인이 과거를 대하거나, 싫어하는 것을 대하는 태도는 중국이나 일본의 지도자, 지식인과 다른 것 같습니다. 우리의 지도자와 지식인은 슬롯머신이 문제가 되자 슬롯머신을 없애라 했습니다. 중앙박물관과 총독관저도 없애라고 했습니다. 청산·단절이란 용어로 과거를 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국인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과거의 것을 잊게 하데요. 『중국 「좌전(左傳)」에, 진나라의 왕자인 중이(重耳)가 귀양가서 천하를 주유하다 돌아와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을 치려고 하자, 곁에 있던 한 현인(賢人)이 「저 사람으로부터 이제 충성을 받으면 되지 않느냐. 저 사람을 한 풀이로 죽이면 이 나라를 끌고 나갈 근거가 없어진다」라고 해서 그 말을 따랐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중국은 그릇이 큰데 우리는 작은 것 같습니다』
대원군과 金泳三
―얼마 전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金泳三 대통령의 개혁을 비판하면서
『사람 몸에도 더러운 것을 처리하는 오줌통이 있고 똥통이 있다. 이런 것이 있어야 몸이 잘 돌아간다. 마찬가지로 슬롯머신도 있고 술집도 있어서 더러운 것을 처리해 줘야 사회가 잘 돌아가는 것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일반 국민들은 포용력이 있는데, 지식인들은 도그마에 집착해서 폐쇄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요. 단세포적으로 반응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앞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이 기회를 잘 살리면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못 살리면 종속적인 지위로 떨어지는, 결과의 진폭이 큰 기로에 서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판단을 잘 한 경우가 있고 못한 경우가 있습니다. 김유신(金庾信)의 삼국통일은 당나라와 일본의 힘을 잘 빌려 통일을 한 경우이고, 이성계(李成桂)가 최영의 요동정벌 명령을 물리치고 위화도 회군을 한 것도 국제정세를 제대로 본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임진왜란은 일본을 오판함으로써 침략을 당한 것이었고, 인조가 청나라에 반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가 병자호란을 당한 것은 국제관계를 잘못 판단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재미있는 것이 대원군의 경우입니다. 대원군은 지금의 金泳三 대통령처럼 사정과 개혁은 잘 했으나 쇄국을 택함으로써 기회를 놓쳐버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李承晩 대통령은 일찌감치 국제정세를 읽고 자유진영편에 줄서기르 했는데 이는 잘한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과거의 이런 경우와 비견되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전략적으로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아까 일본의 경우를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자신의 가치관을 갖고 개방해야 합니다』
한국은 동북아의 총무역할 해야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까.
『보수적인 가치관을 가슴에 품고 언어의 장벽을 없애면서 국제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문을 꼭 닫고 우리끼리 깨끗하게 산다고 주장하면 누가 알아줍니까. 경제성장을 2∼3%로 떨어뜨려 가면서 깨끗하게 살자고 하다 10여 년이 지나면 누가 그것을 알아줍니까. 이북이 왜 지금 천대받고 있습니까. 경제력이 없기 때문 아닙니까. 중국이 지금 한국을 존경의 눈으로 보는 것도 경제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10여 년은 계속 고속성장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젊은이들은 일본 것도, 미국 것도, 중국 것도 볼 수 있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익혀야 합니다』
―한일합방 이전까진 중국이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고, 이어서 일본이 영향을 끼쳤고, 해방과 분단이후엔 미국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으나 장래엔 중국이 가장 큰 영향을 끼칠 나라도 다시 등장하겠지요. 앞으로의 동아시아는 일본과 중국이 주축이 되지 않겠습니까.
『예. 그래서 동북아 협력관계가 중요합니다. 이데올로기 장벽이 무너지는 이 시기는 환(環)동해지역이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며 우리가 이 지역을 리드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중국은 저절로 나서게 되겠지만 우리보다 경제력이 12배나 큰 일본은 과거의 행정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양 세력을 모아주고 미국을 끌어들이는 총무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