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우 그 인간과 정치 - 가신이란 말은 인격모독(1)

崔炯佑, 그 인간과 정치

이틀 동안 계속된 질문공세에 대해 崔의원은 순진함과 노회함으로, 때론 투박하면서도 기민하게 방어함으로써 그에 대한 世評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었다. 崔의원은 『정치란 사람장사이기 때문에 나는 점방(자택)문을 항상 열어 놓는다』고 했다. 그는 또 『지식 있는 사람들은 계산을 많이 하다가 계산착오를 일으켜 정치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는 늘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의리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려왔다』고도 했다. PK정치세력을 대표하는 崔炯佑 의원은 TK세의 金潤煥 의원에 대한 각별한 호의를 표시함으로써 영남 정치세의 재결합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했다.

<1995년 6월 월간조선>

『人生 본전이 어려워』

화창한 햇볕이 쏟아지는 「어린이날」이었다. 오전 10시 김포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한 시간도 못되어 울산 공항에 도착했다. 두 대의 차량은 우리 취재진 일행을 울산군에서 울산시로 편입된 동해안의 외딴 횟집으로 데려갔다. 『안녕하슈』, 마음 좋은 시골노인이 안면 있는 친구를 부르듯 崔炯佑 의원은 그 특유의 순진한 웃음을 보이며 문 밖에서 손을 높이 치켜 세우고 우리를 맞이하였다. 崔의원의 등 뒤로 푸른 바다가 마음껏 펼쳐져 있었다. 崔의원은 부산의 지역구로 올 때면 항상 서생면 위양리(渭陽里) 생가로 와서 잠을 잔다. 『아들 속옷 빨래를 다른 여자가 하면 안된다』며 아직도 손수 집안 일을 챙기는 老母 곁에 있기 위해서이다. 작년에 형 대신 老母를 모시며 이곳에서 과수원을 하던 동생이 경운기 사고로 목숨을 잃은 뒤로는 더욱 자주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崔의원은 흰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인생을 본전으로 산다는 게 참 어렵습니다. 50세가 넘으면 인생의 질이 나지요. 한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로서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최소한의 의무는 부모 다음에 죽어야 하는 것과 자녀를 결혼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작년에 제 동생이 과수원 밭갈이를 하다 경운기 사고로 그만 저 세상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고 순간에 경운기의 손잡이만 작동할 수 있었더라면 동생이 죽지는 않았을 겁니다. 경운기의 기어 레버의 위치가 자동차처럼 바로 손 닿는 데 있질 않고 앞쪽으로 멀리 있는 게 잘못입니다. 경운기 전복사고도 옛날과 다름없이 왕왕 일어나고 있습니다. 경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 농약 등 농민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여러 요인들이 많습니다.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그런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토플러를 만난 얘기

―일전에 미국에 가서 「제3의 물결」, 「권력이동」 등을 써 정보화 시대의 미래를 예측한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를 만나셨다는데요. 무슨 조언이라도 받으셨습니까.

『토플러는 21세기에 살아 남으려면 대기업의 대량생산방식으론 불가능하다고 합디다. 다품종 소량생산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해요. 옷도 적어도 한 달에 한번 바꿔야지 계절별로 만들다간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요즘 여성들이 공장을 잘 경영하고 있다고 해요. 여성들의 감각이 좋고 애사심도 남성들보다 낫다고 합니다. 남성의 근육지배에서 벗어나 여성의 부드러움으로 세상이 지배되고 있습니다. 우리도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여성에 대한 배려가 필수적입니다. 남성들이 감당 못하는 일을 여자들이 더 잘하고 있어요. 우리의 유휴여성인력들을 더욱 많이 공직이나 기업에서 흡수해야 합니다. 저는 내무장관 시절 광명에 여성시장을, 대구 남구청에 여성청장을 임명했었지요. 또 여성동장 25명을 임명했었는데 남자보다 훨씬 나았어요. 여성동장이 집을 방문해 벨을 누르면 「누구 엄마」라며 그냥 친숙해지는 겁니다. 지역화합이나 행정서비스에 좋은 효과를 봅니다』 崔의원은 『선거 운동원으로 여성들을 써보면 배신이 없고 성실하게 일해 남자보다 낫다』고도 했다.

그는 토플러에게서 들은 교육 이야기를 신나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IBM의 사내교육이 하버드대학의 교육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 국방대학의 교육내용이 일반대학들보다 좋다고 해요. 토플러는 「기존의 학교는 앞으로 없어진다」라고 합디다. 정보고속도로망과 인공위성으로 집에서 보턴만 누르면 최고급 강사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빨리 해야 합니다』

―학교와 가정, 직장을 잇는 일종의 「토탈교육」을 강조하시는 것 같은데.

『토플러는 여행과 만남을 통해서 공부한다고 합디다. 그가 나를 만난 이유는 한국의 실정을 정확히 알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토플러는 책을 쓰기 위해 5년 동안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에서 근로자로 일을 하였답니다』

―崔의원은 서예도 하시고 한학을 한 집안에서 자라셨습니다. 세계화를 위해선 한문교육을 의무화하고 이를 통해 동양철학에 담긴 孝정신과 인성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어릴 때 유교집안에서 엄하게 자랐습니다. 조부께서는 한의사를 하셨는데 문집을 내실 정도로 한학에 조예가 깊으셨죠. 삼촌도 문집을 내셨구요. 자고 일어나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대화 소리 아니면 책 읽는 소리가 들렸죠. 한자는 동양정치와 문화의 바탕입니다. 뿌리를 저버릴 필요는 없지요. 붓글씨는 어릴 때부터 배웠는데 그때는 배우기 싫어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정치규제에 묶여 지낼 때였어요. 당대의 명필 여초 김응현 선생을 찾아갔더니 「정치인이 제일 오래 배운 것은 6개월이다」시며 나를 한달 반 정도이겠거니 생각하셨는데 나는 6년간을 배웠습니다. 먹을 갈 때도 눈을 감고 자기를 정돈합니다. 늙어 사는 준비이기도 하지요. 세상의 오락이란 두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붓글씨만은 한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붓글씨를 쓸 때 언제 기분이 제일 좋습니까.

『병풍 한 필을 쓰고 나면 코에 피가 터집니다. 또 글이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옛날 선비들이 기분이 좋을 때면 기생치마에 일필휘지했다고 하지 않아요. 붓글씨를 배울 때는 5·17직후인데 「관선 비서」를 데리고 다녔습니다. 마포서 정보과 李형사라는 사람인데 아직도 거기에 있습니다. 아내가 장사를 할 때였는데 잡비로 하루 만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자장면 값이 9백9십원이었습니다. 李형사한테 밥을 사주기도 했지요. 그런데 장사가 잘 안되어 용돈이 5천원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아내가 일하러 나가고 나는 집을 지켰는데 한번은 연탄을 갈아 넣을 줄 몰라 불이 꺼져 버렸어요. 번개탄으로 불을 지피는데 갑자기 부시식거리며 불꽃이 타올라 꼭 터지는 줄로만 알고 도망을 쳤지요(하하). 연탄을 하루 세 번 갈았습니다. 연탄을 크게 하면 두 번으로 될 것 같아 다음에 정치를 할 때는 이것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잘 안됐습니다. 국회의원직을 마치고 나니 호주머니에 단돈 5만원밖에 남아 있질 않더군요. 연금 당시에는 담배 필 돈도 없어 형사들이 담배를 반쯤 피다 던져 놓은 걸 가져다 피곤 했습니다. 남들이 들으면 거짓말이라 생각하지요』

『정치는 사람장사』

―崔의원의 경력을 보면 옷공장, 음식점도 하시면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의 정서를 많이 아시는 것같습니다. 요즘도 사람이 찾아오면 다 만나 주십니까.

『우리 집은 아침, 저녁으로 문을 열어 놓습니다. 길을 가다가 앵벌이를 만나도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니 반 관상장이가 되었습니다. 부시 당시 美대통령이 걸프전 후 한참 인기 있을 때 미국서 한 번 만나 보았는데 재선은 안되겠다는 느낌이 딱 들더군요.
정치인은 세 가지 부류가 있습니다.
첫째 말이 많은 사람인데 이 사람은 배신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말할 때 먼 눈 보는 사람이 있지요. 이런 사람은 밥이나 술을 먹여주어야 일합니다.
세 번째는 고개를 숙인 사람입니다. 포섭하기는 어려우나 일단 사귀고 나면 진국입니다.

사람을 많이 만남으로써 밑바닥의 진솔한 얘기를 듣지요. 내무부 장관시절 일선 공무원과 만날 때는 군수나 시장은 오지 말게 합니다. 윗사람이 오면 입에 있는 말을 하지 가슴에 있는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죠. 한번은 서울시경의 서장 부인들을 불렀어요. 모두들 아무 얘기가 없길래 내가 먼저 얘기를 했지요. 「남편들이 장관 성질이 더러우니 절대 얘기 말라 그러지요?」 그랬더니 모두 하하 웃으며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며 그때부터 진솔한 얘기들이 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분들 첫 마디가 「우리가 어디 사람입니까」였어요. 남편들이 한 달에 한 번 집에 들어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 평균 몇 명이나 만나십니까.

『의례적이 아니라 진짜 대화하며 만나는 사람은 50명쯤 됩니다.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되는 것은 별로 없지요. 그래도 소화는 해야 합니다. 짜증스럽지요. 팔자소관으로 돌립니다. 그러나, 제 인생관은 이렇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을 벌자는 것입니다. 정치하는 사람은 사람 장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시간 없으실텐데 시간을 빼앗아 미안합니다」 하면 「오늘 제가 큰 장사했습니다」 그러지요』

―崔장관께서 취직시켜 준 사람이 몇 명쯤 됩니까.

『개인적으로 취직시켜 주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취직도 역시 공식적으로 부탁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수백명은 안됩니까.

『그건 착각입니다. 내무장관 때 하루는 집 앞에서 경찰차 사이렌 소리가 왱왱 나길래 나가보니 과거에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이 취직이 안되었다고 삭발하고 온 것이었어요. 그걸 경비 보던 사람들이 스님들이 쳐들어 온 줄 알고 연락을 해서 그리 되었던 것입니다. 또 한번은 사모님들이 찾아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남편이 金대통령과 민주화 투쟁을 할 때는 가정부로 살았어도 부끄럽지 않았다. 이제 주위 친지와 이웃들이 모두 우리 남편이 취직된 줄로 알고 있다. 자식들 보기 민망해 거짓 출근도 하고 가정부를 해도 멀리 가서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참 가슴이 아팠습니다』

―지금 만나는 기자들이 대개 30대일텐데 요즘 젊은 기자들은 어떻습니까.

『시대에 대한 생각들이 좀 깊어져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개방적입니다』

―2년 전엔 언론의 폭로 보도 때문에 민자당 사무총장에서 물러나셨는데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크게 얘기하자면 가십의 언론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언론에 유감 있다

―우리 언론이 崔의원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한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비틀거나 과장해서 보도한다고 보십니까.

『언론이 정치인 개인의 프라이버시 문제는 기록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문제면 모르지만요』

―언론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만 공인들은 모든 것이 공개되어서 국민에게 검증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프라이버시를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라고 주장합니다만.

『도덕적으로 하자가 없는 프라이버시에 대해서는 보호가 있어야지요. 내무장관 시절 세금비리 사건의 축소·은폐 시비가 있었는데 나는 태어나 땅 한 평 사서 팔아 본 적이 없어 등록세가 뭔지 취득세가 뭔지 사실상 몰랐어요. 그리고 장관 되기 전에는 세금은 세무서가 다 거두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은폐·축소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본인이 아니라고 진실되게 말하는데 그것을 왜곡되게 기록하는 것을 볼 때는 매우 답답합니다』

―崔의원은 58대 내무장관으로 1년 2일 재임하셨는데 역대 내무장관의 평균 임기가 9개월인 점을 감안하면 그래도 오래 하신 편입니다.

『내가 장수 12위이지요. 모든 길이 로마로 간다고 내무부 장관이 안 걸리는 일이 없어요』

―재임시 제일 골치 아픈 사건은 무엇이었습니까.

『세무비리 사건이었죠. 조계사 경찰투입도 그렇고. 그 당시 경찰을 투입하지 않았으면 아마 큰 사고가 났을 겁니다. 4층 서의현(徐義玄) 원장 측에서 30∼40명이 무기도 가지고 있는데다가 범종추 측에서는 올라가기 위해 철책을 산소용접기로 녹이고 위에서는 휘발유를 붓는다는 보고를 받고 내무장관으로서 그냥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만일 안 막었어도 어차피 「최형우가 서원장을 돕기 위해 그랬다」고 했을 겁니다』

―그 후 경찰투입에 대해 불교측에 찾아가셔서 유감과 사과의 뜻을 밝히셨는데 그건 본의가 아니었습니까.

『본의가 아니라기보다는 내무장관으로서 수습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해인사의 혜암스님과 통도사의 월하스님을 찾았습니다. 혜암스님은 처음엔 인사를 안 받아요. 그래 「큰 스님, 벌레 같은 사람을 뭐라고 갋(갉)습니까」 그러니 돌아서서 대화를 하였습니다』

―국가공권력은 사실 종교보다 위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단체가 법률을 위반하였을 때는 종교의 법이 아니라 세상의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崔의원 스스로 정당한 공권력의 투입이라고 주장한다면 승려를 찾아가 사과를 해선 안되지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자면 한이 없고 나는 대통령을 모시는 내무장관의 입장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우리 공무원을 다시 보게 됐다

―지난 大選 때 金泳三 후보는 불교계 표를 상당히 신경 써 부산, 경남 지역에선 徐義玄 원장의 힘을 많이 빌렸다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徐원장에게 미안하지는 않으신지요.

『개인적으로 종교문제는 자체에서 모두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徐원장이나 그 분들은 어릴 때부터 불교계에 들어와 혼신을 다 바쳤습니다. 속인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라고 하는데 徐원장의 승적문제는 잘 되었으면 합니다』

―그 뒤에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내무장관을 해보시니 그 전 바깥에서 생각하던 공무원과 실제 공무원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본 공무원과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36년간의 정치생활 중에서 30년을 야당인으로 지냈습니다. 늘 쫓기고 감시당하는 입장에서 공무원을 좋게 볼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내가 斜視로 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봉에도 불구하고 공무원들은 그래도 조직과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가장 강합니다. 우리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던 세 개의 기둥은 재벌과 공무원, 근로자였습니다. 공무원을 평가해 주어야 합니다. 싱가포르에서는 장관이 월 3천만원, 하급 공무원이 최하 3백만원 정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무원의 도적질이 없지요』

―내무장관 시절 보고를 짧게 하고 회의시간을 30분으로 하는 등 형식을 중요시하는 관료주의를 타파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신 것 같은데 특별한 동기라도 있으십니까.

『공무원들이 무엇보다도 버려야 할 것이 관료주의입니다. 관료주의는 곧 권위주의입니다. 권위주의는 자연히 민원에 소홀합니다. 그래서 권위주의의 바람을 빼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장관이 보고를 얼마나 많이 받겠습니까. 보고서가 한 장이 넘으면 볼 시간이 없습니다. 다섯 여섯장을 보면 이건 보고가 아니라 작문입니다. 소신 없는 아첨입니다. 과거군사정권 때는 매달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호텔이나 여관에 방을 잡고 밤샘을 했습니다. 「보고서는 한 장이다. 한장으로 보고하라. 한 장 이상이면 보지도 않겠다」라고 했지요. 보고서를 한 장으로 줄였더니 경찰청의 행정요원 1천2백명을 민생치안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회의시간이 30분도 길다 하여 서서 하는 지경입니다』

―무엇을 한 내무장관으로 기억되시길 원하십니까.

『하급직원들에게 「이런 장관도 있었다」라는 기억이 남았으면 합니다. 출근할 때는 반드시 일반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처음엔 쇼라 했을지 모르나 물러날 때까지 계속 그랬다면 그건 쇼는 아닌 거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이를 통해 말단 직원들과 악수하면서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또 출근을 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어떤 과나 들어가서 악수를 나누었지요. 그러니 나중에는 친밀감이 생겨나 「장관님, 저는 열두 번째 악수입니다」, 「저는 일곱 번째입니다」라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권력이란 것도 순간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을 망각하면 결국 인생마저 망치는 것이지요』

공무원 반발 잠재운 뒤 행정조직 개편

―행정조직 개편을 크게 하셨는데요. 특히 부산지역의 확대, 대구지역의 확대, 97년까지 울산의 광역시 승격, 그리고 시군통합 등이 주된 것이었습니다. 도농(都農)통폐합으로 불리는 이번 행정조직 개편은 최근 이삼십 년내로는 최대인 것 같습니다. 왜 개편을 하셨습니까.

『건국 이래 최대의 개편이었지요. 참모들에게 제일 민원이 많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행정구역 문제였습니다. 9천4백여 건이 넘었습니다. 이 문제는 상호간의 이해관계가 걸려 있어 모두 덮어 두었더라구요. 그래서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기 전에 해야겠다는 역사적 절박감을 느낀 것입니다. 1차적으로 35개의 都農통합을 하니 1년 예산절감액이 7천억에 달했습니다. 부산의 경우 땅이 없어 발전을 못하고 부산광역시로의 편입 이전의 동부 5개면은 돈이 없어 개발을 못했습니다. 행정구역이란 무엇입니까. 주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것 아닙니까. 행정구역 개편이 내무장관으로서의 책무라고 느꼈습니다.

일본 자치성 장관의 초청으로 일본에 가 보았는데 백명 인구 단위의 자치단체가 있었습니다. 못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고베시는 16년에 걸쳐 뒷산을 깎아 섬을 만들었습니다. 고베에는 컨테이너 선석이 25개 있습니다. 부산은 7개뿐입니다. 얼마 전엔 부산에 선석이 없어 배가 외항에 들어오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역작업을 하는 데 싱가포르는 5시간, 일본은 하루 걸리는데 우리는 5일에서 15일이 걸립니다. 이래서야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세계 속의 한국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울산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대한민국 공산품 전생산량의 11%가 나옵니다. 수출이 전체의 12%입니다. 6백 70여개의 공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남도청이 있는 창원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립니다. 김포공항에서 태국까지 가는 시간이 5시간,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시간이 9시간 걸립니다.

경기도의 남북분할을 주장했습니다. 통일에 대비하여 북부 경기지역을 개발하자는 것 외에도 경기도 북부에서 수원으로 가려면 서울을 지나야 하기 때문에 또 하루가 걸립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세계적으로 행정조직이 우리 같이 도― 시·군― 읍·면 3개의 계층으로 이루어진 나라는 없습니다. 이 중 한계층을 없애면 예산이 얼마나 절감되 겠습니까』

―행정조직 개편은 당초 崔장관의 구상보다 축소되었습니다. 경기도 분할이 되지 않았고 울산광역시건도 보류가 되었고 부산광역시도 당초보다 축소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당시 민자당내 정치 이해관계에 따른 저항 때문이었습니까.
『지역 이기주의와 공무원의 자리 문제가 걸림돌이었죠』

―내무공무원들의 반발은 없었습까.

『잠재웠다 봐야죠(웃음)』

―행정개편에 대해 참모 역할을 하신 분이 있었을 텐데요.

『저는 모르는 점이 많고 그래서 사람을 만납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합니다. 그ㅓ게 바로 아는 것입니다. 모른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이 아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지요. 그래 많은 사람들에게 물은 결과의 아이디어로 이걸 해야겠다는 생각이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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