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빈, 피살 34시간전 월간조선과 최후의 인터뷰

「6일전쟁의 영웅」에서 「평화의 순교자」로 변한 고라빈 수상을 기자가 인터뷰 하기 위해 텔 아비브시내 국방부 건물 2층의 장관 집무실 로 들어선 것은 그가 피격되기 34시간 전이었다.

지난 3일 오후 1시30분(현지시각) 기자는 중동 평화협상의 공동주역인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이 라빈 수상과 요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과 교차하면서 그의 방에 들어갔다. 국방장관직을 겸하고 있는 라빈 수상은 책상 뒤에서 일어나 기자를 만났다. 책상 앞에 딱딱한 의자가 준비돼 있었다. 작은 방엔 소파도 없었다. 예루살렘에 있는 수상 집무 실은 더 수수하다고 한다.

책상을 사이에 두고 정좌하여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라빈 수상은 참모총장이던 66년에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고 판문점과 휴전선도 방문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때 벌써 한국이 위대한 경제발전의 초입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작년에 갔을 때 정작 눈으로 보니 그 드라마틱한 발전상 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는 한국을 「공업대국」이라 표현해가면서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라빈 수상은 또 작년 12월의 공식 방한이후 한국과 이스라엘 사이의 교류가 경제뿐 아니라 외교 군사분야로까지 확대되고 있는데 대해 즐겁게 이야기했다.

북한이 이란과 협력하여 장거리 미사일을 만들고 있는데 대화가 미치자 『북한은 우리의 적인 이란을 도울 작정을 하고 있는 세계 유일의 국가이자 극단 적 공산전체주의 정권』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한때 북한의 대중동 미사일 수출을 막으려고 막후 접촉을 시도했던 라빈 수상은 『몇번 만나보니 터무니없는 조건을 내세워 중단했다 』고 실토했다.

화제가 테러에 이르자 라빈 수상의 억양이 높아졌다. 지난 10월말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인 이슬라믹 지하드의 지도자 파티 샤카키는 지중해의 몰타에서 총격을 받고 암살됐다. 이스라엘 특수요원의 관련설에 대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확인도 부인도 하지 않고 있다.
라빈 수상은 병ʼn?죽였는지는 아마도 미래의 역사가 알려줄 것 』이라면서 『이스라엘인을 죽이고 있는 테러 조직의 지휘자가 없어진 데 대해 애도는 표하지 않겠다』고 했다.

기자는 올해 초 라빈 수상이 지하드 조직을 지칭, 『우리는 당신들을 추적하여 제거할 것이며 국경이 결코 보호막이 되지는 않을 것』이 라고 경고했던 점을 상기시키면서 『이것은 주권침해가 아니냐』고 따졌다 . 라빈 수상은 『우리는 그들의 테러수법 그대로 보복할 뿐』이라고 답했다 . 라빈 수상은 또 『이슬람 원리주의는 국제테러의 하부 조직이며 그 배후 엔 이란이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난 10월30일 각의(각의)에서 암몬 루빈스타인 교육부 장관이 『요사이 ( 유태인의) 반정부 시위 현장에 폭력사태가 빈발하고 있으니 총을 들고 오는 것을 금지시키자』는 제안을 했었다. 이스라엘에선 민간인들도 자위수단으로서 총기와 탄약을 휴대할 수 있게 돼 있다. 라빈 수상은 교육부 장관의 제안을 「실천성이 없다」고 묵살했는데 결국 우려했던 상황이 현실로 돼버린 것이다.

인터뷰 하루 전날인 2일 저녁에 텔아비브 근교의 기갑부대 기념관 야외극장에선 전사자 추모행사가 있었다. 구경 간 기자는 거기서 라빈 수상 및 에젤 와이즈만 대통령과 같은 구획 의 청중석에 앉아 있었다. 수상과 대통령이 입장하고 퇴장해도 다른 청중은 별로 관심이 없었고 특별한 경호도 없었다. 기자는 라빈 수상과 만나려고 선물과 자료가 든 작은 가방 3개를 갖고 국방부 청사로 들어갔는데 그 선물을 수상에게 전달할 때까지 한 번도 수색을 당하지 않았다.

지난 10월28일에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경제회의장에선 라빈 수상이 연설할 때 청중석에서 반평화 단체 유태인 7명이 일어나서 야유를 보냈다. 그때 라빈 수상은 그들을 가리키면서 『저자들이야말로 인종차별주의자요 ,평화의 파괴자』라고 맞고함을 치기도 했었다.

라빈 수상과 인터뷰하기 이틀 전에 만났던 국방부 해외 담당 차 장 구티 몰 예비역 준장에게 기자는 『이스라엘에선 숱한 테러가 있었는데 장관급 등 요인의 암살이 없었던 비결은 무엇이냐』고 물었었다. 몰 차장은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은 요인들을 특정하여 표적으로 삼지 않는 전통이 있다』고 대 답했다. 결국 믿었던 동족에 의한 테러였기 때문에 더욱 속수무책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라빈 수상이 인터뷰 도중 딱 한 번 웃은 적이 있다. 『작년 김영삼 대통령 과 만났을 때 그분이 「나는 30 몇 년만에 처음으로 민간인으로서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기에 「나는 참모총장 출신으로서 처음으로 수상이 된 사람이다」고 자랑했습니다』고 말할 때였다.

지난 77년 수상직을 그만 둔 것은, 주미대사 시절 부인 리아 여사가 미국에서 갖고 있었던 은행계좌를 귀국한 뒤에도 폐쇄시키지 않고 2천 달러의 잔고를 유지했다는 폭로기사 때문이었다. 부정이 아니라 사무착오였는데도 라빈 수상은 아내의 책임까지 떠안고 사임했다. 이때 받았던 국민들의 동정이 5년 뒤 그가 다시 수상이 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라빈 수상은 기자에게 『우리는 다음 선거 때부터는 정부가 선거자금을 다 대는 대신에 정당은 일체의 기부금을 받지 못하도록 법을 바꾸었다 』고 자랑하듯 말했다.

『평화가 오면 중동지역도 동아시아처럼 경제적 번영을 이루게 될 것』이라면서 평화정착 이후의 비전을 경제에 두고 있음을 강조할 때 라 빈 수상은 꿈꾸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기자가 분청사기 접시를 선물로 전하자 라빈 수상은 책상 위에서 다섯 겹의 포장을 일일이 직접 뜯어 벌여놓고 고마워했다. 기자는 「예루살렘의 스카이라인」이란 사진책을 한 권 답례로 받았다.

한 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끝내면서 기자는 『다시 한국에서 뵙게 되기를 바란다』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 길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탄 택시 기사로부터 라빈 수상의 죽음을 전해들은 것이 5일 저녁 6시였다.

<1995년 11월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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