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 아비브 공항을 4일 새벽 5시50분(현지시간)에 출발한 루프트한자 여객기는 비행 4시간만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착륙했다. 귀국 비행편을 기다리며 종일 라인강변을 구경한 기자는 현지시간 4일 8시30분에 대한 항공기에 올랐다. 약 13시간만에 김포공항에 착륙, 바깥으로 나와 택시 를 탔더니 기사가 라빈총리 피살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가족이 아닌 사람의 죽음에 대하여 이때처럼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0·26사건 이후 처음이었다.
기자가 이자크 라빈 총리를 인터뷰한 것은 피격 34시간 전인 3일 오후 1시30분∼2시30분(현지시간) 사이였다. 인터뷰를 마치는 길로 귀국행에 올랐고, 프랑크푸르트를 이륙한 그 순간에도 라빈 총리는 산 사람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기자는 라빈총리의 녹음테이프를 리시버로 들으면서 대화를 정리했기 때문에 바리톤 음성의 느릿한 영어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을 때였다.
기자가 지난달 30일 이스라엘에 도착하여 맨 먼저 재미있게 읽은 기사는 이스라엘 교육부장관이 「요사이 반정부 시위현장에 총기를 휴대하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데 단속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라빈 총리에게 했고 라빈 총리는 「실천불가능」이란 이유로 건의를 묵살했다는 보도였다.
자위목적의 총기 총탄 휴대가 허용돼 있는 이스라엘에선 민간인들이 소총이나 기관단총을 메고 뒷호주머니엔 탄창을 쑤셔박은 채 예사로 돌아다니고 시위현장에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곤 하는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총기에 의한 사고는 거의 없었다. 이번 피살을 막기가 어려웠던 것은 동족에 의한 범행이었기 때문이다.
기자가 텔 아비브 국방장관실(그는 국방장관을 겸직중에 있었다)에 서 라빈 총리와 마주 앉아 맨 처음 주목한 것은 넥타이였다. 라빈총리가 회고록에서 「청년장교 시절엔 넥타이를 맬 줄 몰라 남이 매어준 매듭을 풀지 않고 계속 사용했고, 주미대사 시절엔 춤을 출 줄 몰라 만찬 때는 식은 땀을 흘렸다」고 실토한 대목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남보라색 넥타이를 맨 라빈 총리는 한국과의 협력관계, 중동평화협상과 경제발전 전망 을 이야기할 때는 신이 나는 듯했고, 테러에 대해서는 단호한 말투를 썼다.
작년 방한 이후 한국팬 돼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발전을 높이 평가했고, 김영삼 대통령의 친 이스라엘 정책에 감사를 표했으며, 한국의 경제력에 대해선 부러움을 나타냈다. 외교적 수사가 아니라, 그의 사위 아비 펠로소프 변호사(50)에 따르면 지난해의 방한 이후 진심으로 한국 팬이 돼 버렸다고 한다.
라빈총리는 유엔 50주년 기념식 행사에 갔다가 지난 10월25일 김대 통령과 재회하여 요담한 사실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라빈 총리는 한시간 동안의 인터뷰 내내 정좌한 채 한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계속해서 시선을 기자에게 고정시킨 채 답변에 응했다. 이스라엘로서는 중요한 나라인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 성의를 다 하려는 정성이 느껴질 정도였다.
잡기가 없고 검소한 라빈총리는 73세의 나이인데도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를 몸으로 때우는 사람이었다.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휴일 오후 (이스라엘은 금요일-토요일이 휴일)에도 본 기자를 만나고, 특히 한국에 서 온 고관이나 기업인들에겐 그 바쁜 일정에도 시간을 내려고 애쓴다는 것이다. 한국의 막강한 공업력과 이스라엘의 두뇌력을 결합하여 함께 세계시 장에 진출하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는 라빈총리는 국가를 위한 세일즈맨 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날도 라빈총리는 『코트라( KOTRA )가 여기에 사무실을 열었다』 『삼성그룹 부회장을 만났더니…』라고 이야기하면서 한국군이 이스라엘의 무기체제, 특히 정보수집 및 분석시스템을 도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의 뒷자리엔 고 이갈 알론 외무장관의 사진이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총리 사진보다 더 크게 걸려 있었다. 알론은 이스라엘 건국투쟁기의 특공부대 팔마하 대장이었고, 라빈은 그 직속 부하였다. 두 사람은 형제처럼 친했고 모세 다얀(3,4차 중동전쟁 때의 국방장관) 시몬 페레스 (현 총리)와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라빈과 페레스는 집권 노동당내의 숙적이면서도 평화협상에 있어서는 기가 막힌 협력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페레스의 비전과 라빈의 추진력이 결합됨으로써 팔레스타인과의 공존을 핵심으로 하는 중동평화협상이 가능하게 되었다.
1967년 6일전쟁 때 참모총장이던 라빈은 공군력에 의한 새벽 기습작 전으로 이집트 의 제공권을 말살한 뒤 기갑부대를 주력으로 삼아 전방위 로 돌진, 시나이반도, 골란고원, 요르단 서안, 가자지역,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라빈의 평화협상은 이 땅들을 돌려주는 대신에 평화를 보장받자는 것이다. 라빈총리는 인터뷰 동안 팔레스타인 과격파의 테러에 대해선 「눈에는 눈」 식으로 대처할 것이란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평화정착 이후 의 중동에 동아시아처럼 경제번영이 이룩될 것이란 꿈을 피력했다. 보수파의 반발을 누르기 위해서는 철저한 대테러정책을 취해야 했으나 한 과격 유태인의 광신적 증오를 누그러뜨릴 수는 없었다.
『어떤 인권상황도 홀로코스트와 비교해서는 안돼』
힌두교도인 간디가 이슬람교도와의 화해를 주장하다가 동족에게 살해된 것과 꼭같은 죽음을 라빈 총리가 맞은 셈이다. 죽음을 30여시간 앞 에 둔 라빈총리는 잘 늙은 할아버지 같은 따뜻하면서도 믿음직한 분위기를 풍겼다.
1948년의 독립전쟁 때 벌써 예루살렘 공방전을 지휘한 여단장이었고 그 뒤 47년간 참모총장, 주미대사, 1차총리, 국방장관, 2차총리 등 공직에만 종사하여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쳤고 최후로 목숨까지 바치기 위해 운명을 기다리고 있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는 리승만이나 박정희처럼 국가의 운명과 개인의 운명을 일치시키면서 새로운 시대를 연 20세기 의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될 것이다.
인터뷰 도중에 라빈총리가 강하게 반론한 대목이 있었다. 기자가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아우슈비츠에 비교해서 설명하니까 질문을 제지하더니 화가 난 듯 『어떤 나라의 인권상황도 홀로코스트(유태인 학살)와 비교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경고하는 것이었다. 헤어질 때 기자가 인사치레로 『한국에서 다시 뵙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더니 라빈총리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자는 라빈총리로부터 「예루살렘의 스카이라인」이란 사진책을 선물로 받았다. 라빈은 그 예루살렘의 산꼭대기, 홀로코스트 기념관 바로 옆에 있는 국립묘지의 두평 남짓한 조촐한 묘역에 묻혔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꽃보다는 작은 돌멩이를 석관 위에 놓는 것으로써 조의를 표했다.
<1995년 11월 조선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