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의 양심이자 安心 아르파드 괸츠 대통령 인터뷰
(월간조선 1996년 8월호에서 발췌)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흘린 피가 있었기에 평화적인 체제 전환이 가능했다』
1956년 민중 봉기에 연루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6년간을 감옥에서 보내면서 번역 문학가가 되었던 괸츠 대통령은 『헝가리의 자유화는 공산당內 개혁파와 민주세력이 원탁에 앉아 이룩한 작품이다』고 강조하면서 『과거 단죄』같은 것은 실없는 짓이라고 못박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대통령
1996년 6월 25일 오전 7시50분 기자 일행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있는 국회의사당 빌딩에 도착했다. 19세기末에 다뉴브 강변에 건축된 이 건물은 영국의 국회의사당을 닮은 네오 고딕式 건물이다. 길이가 268m, 높이가 96m나 되며 옥상엔 88명에 이르는 헝가리 역대 지도자들(주로 王)의 조각상이 있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라고 불리는 이 의사당의 한 모퉁이에 아르파드 괸츠 대통령의 집무실이 있다. 내각책임제에 대통령 중심제를 가미한 권력구조를 그대로 반영한 사무실 배치이다. 괸츠 대통령은 與野가 첨예하게 대립하면 같은 건물 안에 있는 국회의 지도자들을 집무실로 불러 들여 타협을 종용한다고 한다.
간단한 보안검사를 거친 뒤 기자 일행이 대통령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로 걸어가니 한 수수한 老人이 배가 불룩한 가방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버튼을 누르고 우리 일행<이명원(李明元) 사진 기자와 통역 김지령(金志寧)씨>을 보고 먼저 타라고 했다. 함께 타고나서 보니 낯이 익은 人物이었다. 그가 괸츠 대통령이었다. 전에도 몇 번 통역으로 만난 적이 있다는 金志寧씨에게 괸츠 대통령은 선물꾸러미를 가리키면서 『그건 폭탄이 아니겠지요』라고 농담했다. 金씨가 헝가리語로 『저는 테러리스트가 아닙니다』라고 했더니 괸츠 대통령은 『나도 평생 테러 한 번 못해 봤다』고 응수하여 승강기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74세인 괸츠 대통령은 평생을 反共 민주화투쟁에 투척해온 사람이지만 폭탄이나 테러 같은 단어와는 너무 멀리 있었다.
위대한 용서
기자는 괸츠 대통령과 마주 앉아 인터뷰를 시작할 때 첫말을 어떻게 꺼낼까 고민하던 중 인터뷰 전날 책방에 들렀다가 구한 괸츠 대통령이 쓴 단편집 「귀향」(Homecoming and other stories)을 떠올렸다. 이 책의 서문에는 괸츠 대통령을 비롯한 헝가리 지성인들이 견디어 내고 드디어 극복해낸 공산독재시절 이야기가 압축돼 있었다.
괸츠 대통령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의 한 주역으로 기소돼 종신형을 선고받았던 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헝가리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 정권과 함께 헝가리를 이끌고 있다. 이 나라에서는 소련의 붉은 군대와 협력하여 3천 명을 죽이고 20만 명을 외국으로 내몬 前 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처벌 주장 같은 것은 들리지 않고 있다. 괸츠 대통령이 소설집의 서문에서도 썼듯이 그는 지금 「살인마들에게 죽을 때까지도 한 마디 악담을 하지 않았던」 친구의 길을 걷고 있는 셈이다. 소련군은 부다페스트의 민중봉기를 진압한 뒤 이 봉기를 지휘했던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임레 나지를 루마니아로 잡아가서 비밀리에 처형했다. 그 후임자 야노스 카다르는 누가 봐도 매국노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카다르는 이런 기대를 배신(?)했다. 그는 1961년에 『우리에게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편이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화합정책을 추진하여 괸츠 같은 민중봉기 투옥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공산당의 후신이 재집권
그는 1968년부터는 사회주의적 경제체제를 시장경제로 변화시키는 개혁을 요란하지 않게 조용히 진행했다. 국제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소련의 정책을 추종하여 국내의 경제적 자유화에 따른 大兄의 의심을 중화시켜 갔다.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가 소련의 외교정책에 정면 반대하는 민족주의적 독자 노선을 요란하게 추진하면서 국내적으로는 폐쇄적 정책을 써 사회주의 계획 경제를 더욱 강화해간 것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간 것이 헝가리였다. 이 상반된 정책의 결과는 1989년에 나타났다.
경제자유화를 추진했던 헝가리는 평화적으로 공산정치 체제를 해체한 뒤 순조로운 체제 전환을 마치고 있는 상태인 데 반해 루마니아는 유혈혁명으로써 공산체제를 뒤엎었으나 체제 전환은 더디고 1인 전제의 후유증은 아직 심각하다. 이것은 경제라는 하부구조의 발전과 성숙이 정치라는 상부구조의 민주화를 불러오고야 만다는 역사발전의 일반원칙을 재확인시켜 주는 교훈이라고 하겠다. 한국도 헝가리와 비슷한 길을 걸어 왔음은 물론이다.
헝가리는 1972년부터 외국인 투자에 의한 합작기업을 허용했다. 國營공장끼리의 경쟁도 촉진시켜 적자가 누적된 기업에 대한 파산선고 제도를 도입하기까지 했다. 카다르의 이런 경제개방 정책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보다도 20년이나 빠른 것이었다. 공산당內 개혁과 그로스는 1987년에 총리, 한 해 뒤에는 은퇴한 카다르의 뒤를 이어 당서기장에 취임 하자마자 공산당을 민주화의 길로 끌어갔다. 포즈가이, 니에레스 같은 급진 개혁파들을 복귀시키고 당명(黨名)을 헝가리 사회당으로 바꾸었다.
1989년 10월에는 공산당의 독점적 위치를 포기하여 다음해 3월 자유총선거가 실시되는 길을 열었다. 이 선거에서 민주투쟁세력인 헝가리 民主포럼이 정권을 잡았다. 국회의 간접선거에서는 괸츠氏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4년 뒤인 1994년 5월 총선거에서는 공산당의 후신인 사회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 재기했다. 국민통합의 상징인 괸츠 대통령은 1995년 사회당 지배下의 국회에서도 재선되었다. 사회당은 집권 후 EU 및 NATO가입을 계속 추진하고 있어 공산당 시절로의 회귀는 기우(杞憂)이다.
-헝가리는 1989년에 동구권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한국과 수교하였습니다. 그 동안 많은 한국기업들이 헝가리에 진출하였습니다. 한국과 헝가리의 경제협력 관계를 평가해 주시고 바람직한 미래의 양국관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두 나라간의 경제 협력 관계는 요즘 들어서 헝가리에 대한 한국기업측의 활발한 투자에 의하여 개선되고 있습니다. 삼성그룹이 합작투자로써 텔레비전 공장을 운영하고 있고, 한화그룹이 은행과 라면공장을 설립했으며 대우는 최근에 MGM 베아링 공장을 인수하였습니다. 한국기업들이 유럽 진출의 중요 거점으로서 헝가리와 폴란드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들의 역동적인 경영방식에 신선한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점이 헝가리 경제에 좋은 영향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헝가리 민중봉기는 기나긴 체제 개혁의 기폭제였다』
-1956년의 헝가리 봉기는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全세계 앞에 고발한 위대한 의거였습니다. 저도 당시에 비록 국민학교 학생이었지만 헝가리 의거를 통해서 처음으로 反共교육을 받게 되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도 1950∼53년의 한국전쟁을 딛고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하였습니다. 이러한 두 나라의 경험과 업적에 대하여 평가해 주십시오.
『1956년 6월 폴란드의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의 봉기가 있었습니다. 스탈린 死後 스탈린에 대한 격하운동도 진행되었습니다. 이런 배경하에서 1956년 10월에 일어난 헝가리 혁명은 소련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결코 좌절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헝가리를 만들어낸 체제 변화의 시작이자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을 방문했을 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발전한 경제력과 높은 수준의 민주화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그런 발전상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상상력을 북돋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국의 민주화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고 남은 과제는 경제의 민주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이 발전하는 시기에 있어서 한국이 이 지역의 강력한 모터 역할을 계속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올해는 헝가리 反共봉기 4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사건이 동구 공산주의의 최종 붕괴에 미친 영향을 설명해 주십시오.
『우리는 그때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요구를 했습니다. 공산주의를 개혁하라고 한 게 아니라 폐지하라고 했으니까요. 우리는 세계의 모든 형제들에게 공산주의의 폐단을 고발했던 것입니다. 1989년 헝가리 공산주의의 붕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노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보기보다는 1956년의 봉기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당시 헝가리에서는 북한 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1인 독재에 충성하도록 길들여진 그들은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 무장군인으로 돌변할 정도였습니다. 북한은 그 유학생들을 소환한 뒤에는 다시 보내지 않았어요』
-그런 유혈(流血)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헝가리에서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자유화되는 과정에서 옛 공산당 간부들을 처단하지도 않았고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화해와 용서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헝가리의 개혁은 지난 5∼6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1956년을 출발점으로 하여 공산당 치하에서도 꾸준히 진행되었기 때문에 공산당을 나쁜 사람들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들은 단죄되어야 할 죄를 저질렀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1989년 자유화(정권 이양을 뜻함-기자注)의 발상이 공산당內 개혁파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헝가리에서 공산주의의 종언과 민주정권의 탄생은 공산당內 개혁파와 시민민주운동 세력이 함께 원탁에 앉아 협상으로 만들어 낸 것입니다. 최후의 공산당 정권은 결코 악질이 아니었습니다. 공산당內에서도 토론 문화가 존재했고 국회를 존중하여 상당한 수준의 민주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카다르는 화해를 가져왔다』
-1956년 민중봉기가 진압된 뒤 장기집권했던 카다르 前 서기장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그는 혁명이 가져온 혼란을 수습하고 분열된 국론을 화해시켜 정치수(囚)를 사면시키는 등의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시대에는 공산당內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黨內의 개혁(민주화 운동을 의미-기자注) 운동은 네메트 미클로시와 포즈가이 임네 같은 인물이 등장하면서 시동이 걸렸습니다. 카다르는 개혁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12년만에 처음 이루어진 완전한 올림픽이었습니다. 우리는 「손에 손 잡고 벽을 넘어서」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여 이념을 초월한 올림픽을 성공시켰습니다. 그 1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서울올림픽이 동구 공산주의의 붕괴에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보십니까.
『서울올림픽은 정치성이 배제된 최초의 올림픽이었고,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공산주의 체제의 개방에도 일정한 기여를 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남북한 사이는 아직도 개방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헝가리는 어떤 나라가 되려고 합니까.
『우리는 지금 세계의 경제권에 편입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유럽공동체(EU)에의 가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헝가리는 오랫동안 평화를 사랑하고 지켜온 국가로서 유럽內의 사태에 있어서 중재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헝가리는 유럽의 안보·정치·경제를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근면한 한국 국민들은 지금 크게 성공하고 있으며 미래에도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 두 나라는 지금 협력이 잘 되고 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과도 다시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 헝가리에서 본 괸츠 대통령-사람들은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종신형 받고 6년간 투옥
헝가리 공화국 대통령인 아르파드 괸츠 박사는 1922년 2월10일 부다페스트에서 출생하였다. 1944년 파즈마니 괴테르 대학교(現 부다페스트 ELTE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면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당시는 법학부를 졸업하면 변호사 자격과 박사학위를 동시에 취득하였다. 그는 학교 졸업 후 1945년까지 국립토지신용평가원에서 변호사로 근무하였다. 괸츠 대통령은 그의 정치활동을 독립 소지주당에서 시작했다.
당사무국의 비서와 당 청년 조직의 부다페스트 지부장을 겸임했다. 1947년부터 1년간 주간지인 「세대」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1948년 3월17일, 헝가리 공산당이 창당되면서 독립 소지주당 내의 견해차로 괸츠 대통령은 실직하였으며,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용접공과 배관공으로 일했다. 1951년부터 1956년까지는 토질(土質)관리 전문가와 농업엔지니어로 일했다. 괸츠 대통령은 1952년부터 괴될뢰 농업과학대학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4년의 全 과정을 이수하였으나 졸업장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가 농대를 졸업하던 1956년에 反共 민중혁명이 일어났고, 그는 이 혁명에 가담한 이유로 투옥되었으며, 석방 후에는 학교로부터 제명당했기 때문이다.
1957년 혁명처리 재판에서 괸츠 대통령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비보 이스트반의 국가전복 음모에 연루되어 제2피고인으로서 재판 받았으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인민민주주의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시도」였다. 그는 6년 이상을 복역했다. 괸츠 대통령은 1963년 엠네스티의 도움을 받아 석방되었다. 당시 같이 복역했던 동료들도 대부분 1963년을 전후로 해서 모두 석방되었다. 이 시기는 헝가리에 있어서 정치적 화해와 타협의 기간이었다.
1956년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일조했던 카다르의 공산당 정부는 혁명에 관한 한 늘 국민들에게 부담을 갖고 있었다. 특히 혁명시기 국민적 화합과 단결의 상징이었던 나지 총리를 교수형에 처하는 등 봉기를 反혁명으로 규정한 공산정부에 대해서 대다수 국민들은 냉소와 회의로 일관했다. 이러한 국민적 감정을 무마하는 것이 공산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혁명 후 공산정부가 정치문제보다는 경제문제 해결에 더욱 치중한 이유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분야에서 국민적 화합조치들이 강구되었으며, 정치범들의 석방도 이러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치범들의 경우 완전한 의미에서의 사면복권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정치범들은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상당한 공민권 제약이 가해졌다.
예를 들어 혁명처리 재판에서 형을 선고받고 후에 무기로 감형되어 7년간 복역했던 포너이 예뇌 「56년 정치범 위원회」위원장은 1989년까지 여권을 발급 받지 못하였고, 운전면허 시험에도 응시할 수 없었다. 그는 현재 헝가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재야단체의 위원장이다. 괸츠 대통령은 석방된 후 1963년부터 기술계통 전문 번역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감옥에 있는 동안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는데, 석방될 당시에는 이미 전문적인 번역가의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고 한다. 1965년부터는 문학작품의 번역가와 프리랜서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3년 그는 그가 이룩한 영문학 번역 분야의 업적으로 헝가리에서 「요제프 아틸라상」을, 1989년에는 휘틀랜드(Wheatland)상을 수상했다. 괸츠 대통령은 1974년 몇 편의 희곡들과 「신의 아들」이라는 장편 소설을 출판하였다. 1980년에는 단편 모음집을 내었다. 그는 1백여 작품을 번역했는데 주로 미국과 영국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90년부터 정치인 여론조사에서 1위 지속
괸츠 대통령은 1981년부터 1989년까지 헝가리 작가협회 번역분과위원회의 위원장을 지냈으며, 헝가리 작가협회 회장도 역임했다. 1990년 봄에 치러진 첫 번째 자유총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90년 5월2일 국회의장이 되었는데, 이것은 동시에 헝가리 공화국의 (과도)대통령직을 수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1990년 8월3일 그는 국회에서 정식으로 헝가리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5월에 치러진 선거에서 다시 한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괸츠 대통령은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과 더불어 文人 출신의 대통령으로서 동유럽 변혁기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특히 그는 국민들로부터의 광범위한 대중적인 지지를 잃지 않고 있는데, 舊사회주의 체제를 변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동유럽의 정치 지도자들이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리 각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매우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舊소련의 고르바초프 등의 경우를 생각하면 확실히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지도자임에는 틀림없다. 지난 4월15일 헝가리의 최대 일간지인 「민족의 자유」紙가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의하면, 同紙가 헝가리의 정치인들에 대한 여론조사를 시작한 1990년 이래로 실시된 全 여론조사에서 괸츠 대통령이 계속해서 1위에 랭크되었다.
헝가리 국민들은 대통령을 「할아버지」또는 「큰 아저씨」등으로 부른다. 원칙적으로 헝가리의 대통령은 국내 문제에는 간여하지 않는다. 외교와 국방문제에 있어서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 하지만 국회 내에서도 국회 의원들과 토론하며 조정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지난 봄 회기에서 소수민족법 문제가 논의의 쟁점이었을 당시 야당인 독립소지주당의 극우적 태도에 대해, 당수인 토르잔 요제프를 초청하여 『소수민족의 입장도 고려해 줄 것』을 간곡히 당부하는 등 쟁점부분에 대한 해결사 역할도 하고 있다. 지난 6월17일, 1956년 혁명 당시의 총리 나지 처형 38주기를 맞이하여 「순교자들의 광장」에서 행해진 그의 동상 제막식에서 대통령은 눈물을 훔치면서 다음과 같은 弔時를 읽었다.
『영원히 잊지 못할 친구를 이제야 영원히 잊지 않도록 이곳에 동상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친구여 오랫동안 힘들었습니다. 이제는 편히 쉬소서』
괸츠 대통령은 1946년 사무원이며 산업노동자였던 마리아 주잔나 괸테르와 결혼했으며, 슬하에 두 아들과 두 딸, 7명의 손자를 두고 있다. 괸츠 대통령은 독서광이다. 아직도 여가시간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발간된 소설과 문학작품들을 읽으며 작품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취미는 음악. 대통령은 영어와 이탈리아語를 구사한다. <金志寧 부다페스트大 현대사 박사과정>
헝가리와 괸츠 대통령 이야기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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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4-18, 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