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3만 번씩, 4년을 염불해도 풀리지 않는 恨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58)/ “저를 고문한 사람을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응어리가 恨이 되어 더 굳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알리바이 뒷받침 증언을 배척, 사형확정

항소심에서 가장 주목되었던 것은 사건이 난 날(2월6일) 한증탕 창고에서 최재만 씨 등과 같이 있었다는 강신성 씨의 증언이었다. 강 씨는 경찰에서 신문을 받을 때 2월6일 최 씨 등 3명이 오후 6시에 나갔다가 오후 11시에 돌아왔다고 진술했었다(범행시간은 이날 오후 10~11시 사이 추정). 최 씨 등의 알리바이 주장을 깨는 진술이었다. 그러나 경찰에서 강 씨는 최 씨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나 했다. “그들이 돌아와서 옷을 갈아입은 사실이 있나요”라는 경찰관의 질문에 대해 “모두 저희 집에 올 때 입은 옷 그대로 다음날(2월7일) 외출하였고 옷을 바꾸어 입은 사실이 없습니다”고 했던 것이다.

범행 현장 상황으로 보아 범인의 신발이나 옷에는 피가 많이 묻어 있었을 것이고, 더구나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잠바가 버려져 있었으므로 강 씨의 증언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이었지만 변호인들은 이 중요성을 집어내지 못했던 것 같다.
최재만 씨의 형 최재방 씨는 항소심 시작 직전에 떠돌이 생활을 하는 강신성 씨를 찾아냈다. “우선 저에게 솔직히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동생이 과연 무고한지 답답해 죽겠으니 진실을 말씀해주세요”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강신성 씨는 “사건 이후 경찰관들이 날 데리고 다니면서 용돈도 주고 했는데…”라면서 머뭇거리더니 “양담배 피운 그날에는 최 씨 일행은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다”고 말하더란 것이다. 양담배 피운 날이란 것은, 2월6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날 최 씨가 강 씨에게, 전날 훔친 켄트 담배를 준 것이다(경찰조사에서 확인).

강 씨는 최재방 씨의 부탁을 받고 1981년 12월초 항소심 법정에 나와 최재만 씨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하는 증언을 했다. 검사가 반대신문에서 집요하게 다그치자 강 씨는 어물어물하기도 했지만, 증언대를 내려오면서도 “어쨌든 양담배 피운 날은, 최 씨가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고 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강 씨의 증언을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배척했다. 즉, 1981년 12월18일 최 씨 등의 항소를 기각, 1심의 선고를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세 피고인은 상고했으나 1982년 4월13일 대법원은 상고도 기각, 최 씨는 사형 확정수가 되고 말았다.

“이태성은 고문으로 病死” 주장

서울구치소에서 최 씨는 불교를 믿고 있었다. 원래 독실한 불교도였다. 여기서 16년간 죄수들을 상대로 교화사업을 벌여온 박삼중 스님을 만나게 됐다. 박 스님은 최 씨처럼 범행 자체를 부인하는 사형수는 처음이었다. 박 스님은 최 씨의 무죄주장에 대해 냉정하게 대처하려고 공범인 권혁구 씨와 이태성 씨를 찾아 나섰다. 대전교도소에 있는 권 씨도 무고함을 호소했다. 이씨는 1983년 5월 청주교도소에서 수감 중 형집행정지로 일반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病死했음이 밝혀졌다. 이 씨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최 씨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사람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영등포구치소에 있을 때부터 아예 병실에 수용되어 있었습니다”고 말했다.

박 스님은 차츰 최 씨의 무죄에 확신을 갖게 됐다. 박 스님이 다리를 놓아 서울지방변호사협회가 최 씨의 구명운동에 나서게 됐다. 서울변협이 지명한 김태형 변호사가 1983년 12월13일 최 씨에 대한 재심청구서를 수원지법에 냈다. 1984년 1월11일에는 서울변협의 이름으로 법무부 장관에게 사형집행의 보류를 건의하는 청원서를 냈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두 사람이 박 스님을 찾아와 최 씨는 무고하다고 열을 올리고 갔다. 두 사람은 최 씨와 같은 감방에 있다가 출소한 사람이었다.

최 씨의 누나와 형은 소형 녹음기를 가슴에 품고, 은행여직원 표 양과 순대국집 주인 이 씨와 대화를 하여 두 사람으로부터 “그날 눈에 멍이 들었거나 안대를 한 청년은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녹음하여 재심청구의 한 자료로 법원에 제출했다. 최 씨의 누나에 따르면 사건 나기 며칠 전부터 최 씨는 눈을 다쳐 안대를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이 사실은 필자가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권혁구 씨에게 물어서도 확인했다).
그러나 수원지법 제2형사부(재판장 이영규)는 1984년 9월17일 “원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객관적 우위성이 있는 증거가 새로 발견됐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로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변호사, 판사들의 불성실에 흥분

김 변호사는 9월22일 서울고법에 즉시 항고장을 냈다. 이 항고장에서 김 변호사는 수원지법 판사들의 성실하지 못함을 이렇게 지적했다.

“…변호인이 제출한 증거들은 전부가 본건 살인사건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것들이므로 성실한 법관으로서는 이를 충분히 조사 검토하여 본 사건의 기초를 뒤엎을 수 있는가 없는가를 판정하는 것이 법관의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이들 증거를 조사도 하지 않고 막연히 범죄 사실의 기초를 뒤엎을 수 없다고 추정한 것은, 본건이 사형선고를 받은 사건이라는 점에서 비추어볼 때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인 피고인의 생명에 관한 문제를 소홀히 다룬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재심개시 결정을 내리기 전 최소한 새 증거에 대한 조사 정도는 했어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지적이었다.
나는 이 김 변호사의 비판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재심의 문을 그토록 좁게 만들어놓고, 고문한 수사관이나 위증자가 유죄확정 판결을 받아야 한다는 거의 실현가능성이 없는 조건을 고수하면서, 거의 기계적으로 기각 결정을 내리는 한국의 사법부는 좀더 따뜻한 인간애로써 인간의 문제를 바라보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 항고사건은 아직 계류 중이다. 박삼중 스님은 요즈음도 담당 판사, 변호사를 만나러 동분서주하고 있다. 2년 전 법무차관을 만나 최 씨의 집행보류를 호소할 때 차관이 “무슨 反證(반증)이라도 있느냐”고 하자 박 스님은 “그가 진범이라면 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고 했다고 한다. 박 스님도 재심에는 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듯하다. “최 씨가 살 수 있는 길은 진범이 잡히는 길뿐이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1986년 3월에 경주 당구장 살인사건의 진범 3명이 부산에서 잡혀 그 사건으로 누명 썼던 전직 경찰관의 이야기가 신문에 크게 실리자 박 스님은 부랴부랴 부산으로 내려가 담당 경찰과 검사를 만나 부탁을 했다.
“범인들이 3명이고, 주로 경인지방에서 활동했으며, 수법도 비슷한 것 같으니 혹시 시흥군 농협분소 사건에 관계한 것이 아닌지 조사 좀 해주십시오.”
언제 처형될지도 모르는 생활 속에서도 최 씨는 “내년 봄에는 바깥세상에서 가족과 함께 나들이를 갈 수 있을 것이다”고, 면회 온 아내를 되려 위로할 정도로, 어떤 확신을 갖고 살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985년 10월 박삼중 스님은 조계종 전종정이며 한국의 禪(선)을 대표하는 이서옹 스님을 모시고 서울구치소를 찾아갔다. 박 스님은 최 씨에게, “여기 부처님이 오셨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궁금한 말씀을 여쭤보라”고 했다.
최 씨는 五體投地(오체투지)를 한 뒤 말하기를, “제가 하루에 3만 번씩 염불을 4년 동안 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있습니다. 저를 고문한 사람을 아무리 용서하려고 해도 응어리가 恨이 되어 더 굳어집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이서옹 스님은 답하기를, “그들을 부처님으로 보라. 너를 괴롭힌 사람의 본원은 부처이니라. 이 세상에 드러난 현상만 보니 증오를 하게 되는데, 앞으로는 그 사람의 본원을 보도록 노력해라. 그러면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최재만 씨가 집행장에 선다면 또 어떤 유언을 하게 될까? 최 씨에게도 별도의 神判(신판)이 있어야 할 것인가? 그 하느님의 법정에서 피고인석에 앉을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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