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레바논에서

바알백 유적은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다.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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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紀行: 1만년 동안 33개 문명을 만든 나라!

-깊고,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 이탈리아 보다도 더 큰 로마 유적이 있고, 이슬람 대제국의 수도 시절에 지은 最大의 모스크, 그리고 이슬람 원리주의자 수만 명이 학살된 피의 현장을 찾아갔다.


레바논 바알백 유적

지난 3월23일 기자는 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시리아 다마스커스 공항에 내렸다. 한국과 아직 수교하지 않은 시리아이지만 입국비자를 얻는 데는 많ㅇ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에미레이트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에서 두바이?까지는 약9시간30분이 걸린다. 중동의 허브공항인 두바이에서 비행기를 타고 아라비아 반도 위를 북상하여 다마스커스에 도착하는 데 2시간 반. 우리는 곧장 버스편으로 한 시간을 달려 시리아-레바논 국경을 넘었다.
국경에서 출국-입국수속을 밟는 데 1시간.
작년의 이스라엘-헤즈블라 전투 때 폭격을 맞아 구멍이 생긴 도로를 달려 바알백 유적에 도착했다.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한 이곳엔 서기 1세기부터 약200년에 걸쳐 지은 로마 시절의 神殿(신전) 건물이 있었다. 지금은 거대한 石柱와 건물의 잔해로 남아 있다. 이 신전의 배경이 되는 레바논 산맥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中東이라면 자동적으로 사막을 연상하기 때문에 '눈 덮인 산'이 이상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레바논과 요르단은 고지대이므로 겨울에 눈이 내린다. 바알백 유적은 우선 그 규모가 엄청나다. 로마의 본거지인 이탈리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크기이다.
바알백 유적은 레바논의 옥토인 베카 분지에 있다. 이 지역에는 해양무역에 능했던 페니키아인이 살면서 바알神을 섬겼다.
서기 전 47년에 시저는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기원 전 60년부터 시작된 주피터 신정 공사엔 10만 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네로 황제 시절인 기원 후 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으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在位 서기 138-161년) 시절에 확장되었다.
로마는 식민지에서 건물을 지을 때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로마의 위력을 과시하여 통치를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 규모에 신경을 썼었다. 여기 쓰인 석재중엔 돌 하나가 1000t(20X4.3m)이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돌을 어떻게 옮겨왔는지 수수께끼이다.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바알神 숭배가 계속되었다. 로마 황제는 이 건물들을 성당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在位 서기 527~565년)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도록 강제했다. 다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한다면서 神殿을 일부 파괴하고 가장 큰 기둥들은 콘스탄티노풀(이스탄불)로 싣고가서 짓고 있던 聖소피아 성당에 쓰도록 했다.
이곳의 중심인 주피터 神殿엔 원래 54개의 기둥이 있었다. 여러 번의 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 남은 것은 6개뿐이다. 이 기둥의 높이는 30m이고 지름이 2.2m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다. 1898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의 윌리엄 카이저 2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으로부터 발굴허가를 얻어 7년간 작업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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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 바알백 유적은 레바논의 옥토인 베카 분지에 있다. 배경이 되는 2000m급 산 꼭대기엔 4월초까지 눈이 덮여 있다. 이 지역에는 해양무역에 능했던 페니키아인이 살면서 바알神을 섬겼다.

사진2 : 서기 전 47년에 시저는 이곳을 로마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멀리 보이는 기둥은 주피터 신전의 잔해이다. 기원 전 60년부터 시작된 공사엔 10만 명의 노예들이 동원되었다. 네로 황제 시절인 기원 후 60년경에 거의 완성되었으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在位 서기 138-161년) 시절에 확장되었다.

사진3 : 로마는 식민지에서 건물을 지을 때 점령지역 주민들에게 로마의 위력을 과시하여 통치를 쉽게 하려는 의도가 있어 규모에 신경을 썼었다. 여기 쓰인 석재중엔 돌 하나가 1000t(20X4.3m)이나 되는 것도 있다. 이런 돌을 어떻게 옮겨왔는지 수수께끼이다.

사진4 :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도 이 지역에서는 바알神 숭배가 계속되었다. 로마 황제는 이 건물들을 성당으로 개조하기도 했다.

사진5 : 東로마제국의 전성기를 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在位 서기 527~565년)는 이 지역의 주민들이 기독교 세례를 받도록 강제했다. 다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하게 한다면서 神殿을 일부 파괴하고 가장 큰 기둥들은 콘스탄티노풀(이스탄불)로 싣고가서 짓고 있던 聖소피아 성당에 쓰도록 했다(아래 기사 참조).

사진6 : 이곳의 중심인 주피터 神殿엔 원래 54개의 기둥이 있었다. 여러 번의 지진으로 무너지고 지금 남은 것은 6개뿐이다. 이 기둥의 높이는 30m이고 지름이 2.2m로서 고대 세계에서 가장 크다. 1898년 이곳을 방문한 독일의 윌리엄 카이저 2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으로부터 발굴허가를 얻어 7년간 작업했다. 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이 패망한 뒤로는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발굴했다.

시리아 개황: 복잡하고 다양

시리아는 복잡하고 다양한 나라이다. 단일민족, 단일언어의 한국인들은 시리아에서 배울 점이 많을 것이다. 다양성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민주주의의 기초이니까. 권위주의 정부하의 시리아가 활기 차고 자유분방하게 보이는 것도 역사적 배경에서 유래한 인종적 종교적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리아는 우선 5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스라엘, 레바논, 요르단, 터키, 이라크. 공식언어는 아랍어이지만 아람어, 쿠르드어, 아르메니아어, 시르카시안어, 그리고 프랑스어가 쓰이고 있다.
인종구성도 복잡하다. 아랍인이 90%이지만 쿠르드족, 아르메니안 등 타민족이 약10%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순니파 이슬람 신도가 74%, 시아파, 알라위파, 두르제파 등이 15%, 기독교인이 10%, 유태교인도 있다.
시리아의 면적은 한반도보다 약간 작은 18만5180평방킬로미터이다. 국토의 약25%는 경작이 가능하다. 인구는 북한보다 약간 적은 1888만 명. 여기엔 이라크 난민 60만, 팔레스타인 난민 30만 명이 포함된다. 평균수명은 남자가 69세, 여자는 71.7세이다. 문맹률은 23%.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은 약4000달러이다. 연간 2.9% 경제성장률을 보이지만 실업률이 12.5%이다. 시리아를 여행해보니 할 일 없이 오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외환보유고는 55억 달러. 최근 外貨를 유로貨로 바꾸고 있다. 시리아에서는 하루 40만 배럴의 기름이 나온다. 23만 배럴을 국내에서 소비하고 나머지는 수출한다. 시리아의 기름 소비량은 한국의 약10분의 1이다.
국민소득의 분포를 보면 농업과 석유가 거의 절반이다. 노동인구의 분포는 농업 26%, 공업 14%, 서비스업 60%이다. 70억 달러어치를 수출하고 66억 달러어치를 수입한다. 군사비 지출은 국민소득의 약6%이고 복무기한은 30개월. 인터넷 사용자는 110만 명, 휴대전화기가 약313만 대이다.
시리아에서 가장 높은 헤르몬산은 2814m이다. 겨울에는 다마스커스에서 눈발이 날릴 때도 있다. 인구는 거의가 지중해 연안에 몰려 산다.


1만 년간 33개 문명을 만든 요람


약1만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시리아는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민족과 문화의 요람이었다. 사막 한가운데 있는 古都 파밀리아에서 산 '시리아의 문명'이란 책의 첫 문장이 나를 압도했다. '시리아는 33개 문명의 산파이다'. 시리아 유적의 특징은 크다는 점이다. 시리아와 레바논을 포함한 터키 남부-이라크-이스라엘-나일강 유역을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 부른다. 가장 먼저 무역, 농업이 발달했던 이 지중해 연안은 인류 문명의 초창기부터 富와 기술과 문화를 쌓아왔다. 거대한 건조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정신적, 물질적 바탕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尙美會(02-734-1245) 여행단을 안내한 여성 가이드 라미스씨는 '로마에 가보고 놀랐다. 우리 시리아의 로마 시대 유적보다 초라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 1주일 시리아를 여행하고 나니 이 말이 헛된 자랑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약8000년간 인간이 계속해서 거주했다고 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로 꼽히는 다마스커스를 떠나 버스 편으로 北上을 시작했다. 전형적인 시리아 풍경이 나타났다. 시멘트색 不毛의 산과 나란히 돌밭과 관목이 번갈아 나타나는 황량한 들판이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새 비옥한 푸른 색 평야가 전개되고 순해 보이는 야산들이 나온다. 수평적, 수직적으로 변화가 빠른 것이 레반트(Levant: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 요르단 지역을 이르는 유럽의 용어) 지역의 특징이다. 역사만큼이나 地理 변화가 급하다. 들판에 나서니 바람이 세게 불었다. 달리는 버스가 흔들리고 소나무들이 아예 옆으로 70도쯤 기울어져 자라고 있었다.
오늘의 목표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城을 방문하는 것이다. 크락 드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와 살라딘의 城. 크락 드 슈발리에는 프랑스어로 ‘騎士의 城’이란 뜻이다. 십자군 전쟁 때 탄생한 聖요한 騎士團이 만들고 지켜냈던 中世의 城인데 보존상태가 거의 완벽하다. 1272년 제9차 십자군 지휘자 영국의 에드워드 1세는 이 성을 보고는 감탄하여 이를 모델로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방에 성을 만들었다. 전설적인 영국의 정보장교 ‘아라비아의 로렌스’ 대령은 이 성을 보고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이라고 평했다. 19세기의 유명한 스위스 탐험가 요한 루드빅 부르크왈트도 '내가 본 중세 건물중 최고 걸작이다'라고 했다. 크락 드 슈발리에와 살라딘 城이 세트로 묶여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크락 드 슈발리에는 슐츠(Patricia Schultz)라는 여행가가 쓴 '죽기 전에 보아야 할 1000 곳'에도 올라 있다.

요한 기사단

이 성은 터키의 남부 도시 안티옥에서 베이루트와 지중해로 나가는 통로를 감제할 수 있는 650m 산 꼭대기에 만들어졌다. 멀리서 바라보면 거대한 전함 같다. 버스는 산비탈을 따라 생긴 오랜 마을들 사이를 지나는 좁은 도로를 따라 올라가 성문 앞에 섰다. 주위의 평야, 호수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전략적 요충지인 크락 드 슈발리에 주변에서는 기원 전 3000년 경부터 수많은 전투가 이어져 왔다. 바로 이곳에 처음 성을 쌓은 이는 이슬람 지배하 알레포(다마스커스에 이은 시리아 제2의 도시)의 領主로서 1031년이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을 이끈 프랑스 툴루스 영주 레이몽 4세가 이 성을 점령했다. 1144년에 城의 관리는 聖요한 기사단으로 넘어갔다. 요한 기사단은 템플 기사단, 투톤 기사단과 함께 중세 유럽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존재이다. 요한 기사단은 기독교 성직자들이 모여서 예루살렘 지역의 구급의료단으로 출발했다가 기사단으로 바뀐 경우이다. 동양의 僧兵과 비슷한 조직이다. 騎士 겸 神父라고 할까?
기독교 신념으로 무장한 騎士집단이므로 전투력이 막강했다. 요한 기사단은 나중에 이곳에서 밀려나자 지중해 로도스 섬으로 옮겨가 주인이 되었다. 16세기 초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기를 연 슐레이만 大帝의 20만 군대가 이 섬을 강습했다. 요한 기사단은 불과 8000명의 병력으로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맞서 거의 대등하게 싸웠다. 요한 기사단의 영웅적 싸움은 슐레이만 대제를 감동시켰다. 그들은 결국 명예로운 撤軍에 합의하여 지중해의 또 다른 섬 말타로 옮겨갔다. 요한 기사단은 40여년 뒤 다시 이곳을 쳐들어온 오스만 투르크의 10만 大軍을 물리쳤다. 복수전에서 요한 기사단은 거의 100 대 1의 衆寡不敵(중과부적) 상태에서 싸워 이긴 것이다.
나는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요한 기사단을 다룬 ‘로도스섬 공방記’(시오노 나나미) 같은 책을 읽으면서 도대체 어떤 집단이기에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싸울 수 있었는가 궁금했다. 로도스와 말타에서 보여준 그들의 축성 기술이 승리의 요인이었는데 그 기술이 꽃핀 곳이 바로 이 성이었다. 요한 기사단은 18세기말 말타를 나폴레옹 군대에 넘겨주고 로마로 옮겼다. 그들은 말타 기사단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다. 유엔에 오버저버로 가입하여 70여개국과 國交를 맺고 있다. 영토는 없어도 準국가 대접을 받는다. 이는 유럽 나라들이 요한 기사단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한 덕분이다. 요사이는 본연의 의료봉사 활동에 종사하고 있다. 11세기 예루살렘에서 요사이의 앰뷸런스 제도를 처음 만든 것이 요한 기사단이고 우리 눈에 익은 앰뷸런스의 로고와 복장이 바로 요한 기사단의 그것이다.

맘루크에 함락되다

크락 드 슈발리에 城을 인수한 요한 기사단은 이 성을 보수, 확장하여 예루살렘 부근에서 가장 큰 城으로 만들었다. 城의 외벽을 새로 쌓았는데 두께가 3m였다. 성벽을 따라 일곱 개의 탑을 올렸다. 그 두께는 10m이다. 보통 때 이 성에서는 50~60명의 요한 기사단 소속 기사들이 약2000명의 보병을 지휘했다. 돌산 같은 성 안으로 들어가 보면 층층이, 겹겹이 쌓인 요새속에서 하나의 소도시가 전개된다. 마굿간(2천 마리 수용), 우물, 해자, 교회, 회의실, 식당, 곡식 창고(길이가 120m나 된다), 비밀통로, 빵 굽는 곳, 그리고 맨 꼭대기에 사령관실이 있다. 사령관 자리에 앉아 벽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이 성을 둘러싼 수많은 공방전의 함성과 비명과 砲聲과 화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도 이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1188년 그는 잡은 프랑스 영주를 문앞으로 끌고 와서 항복을 권유하도록 했다. 이 영주는 아랍 말로 “항복하라”고 소리치고 프랑스 말로는 “항전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城이 이슬람 군대에 넘어간 것은 1271년 4월8일이었다. 이집트 맘루크(투르크 계통의 傭兵인데 나중에 이집트의 정권을 빼앗고 왕조를 만들었다) 왕조의 창시자 바이바르 왕이 이끄는 군대가 요한 기사단을 속인 것이다. 트리폴리(리비아에 있는 도시가 아님)의 십자군 영주가 기사단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편지를 쓴 것처럼 위조하여 이를 성밖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크락 드 슈발리에 城을 함락시킨 바이바르는 이집트와 近東을 400년 가까이 지배한 맘루크 王朝의 창시자이다. 그는 지금 러시아 남부의 초원지대에 살던 騎馬용사였다. 몽골군이 그를 잡아 노예로 팔았다. 그를 산 시리아 하마의 이슬람 領主는 바이바르의 용모에 겁이 나서 그를 맘루크 용병단에 다시 팔아넘겼다. 바이바르는 장신이고 금발이었으며 눈에 흰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이집트 일대를 지배하던 이슬람의 아유비드 왕 아윱의 호위병이 되었다.
맘루크 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한 바이바르는 1250년에 프랑스의 루이 4세가 이끈 제7차 십자군을 무찔렀다. 바이바르가 지휘한 맘루크 군대는 1260년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자루트에서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는 결전을 벌여 승리했다.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보낸 無敵의 몽골 기마군단을 전멸시킴으로써 中東의 이슬람 문명권을 지켜낸 것이다.
이 전투 직후 그는 이집트 왕 쿠투즈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어 맘루크 왕조를 열었다. 자신의 절친한 친구 악타이를 쿠투즈가 죽인 데 대한 의리의 복수였다는 설이 있다. 그의 여생은 십자군과의 전쟁으로 소모되었다. 그때 십자군은 몽골군과 연합하여 맘루크에 대항하려고 했다. 바이바르는 이 시도를 무산시켰다. 그는 지금의 리비아 등 北아프리카를 원정하고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역참제를 발전시켜 다마스커스에서 카이로까지 4일만에 우편배달이 이뤄지도록 했다. 행정과 건설의 達人이기도 했던 그는 회고록까지 남겼다. 역사상 드문 매력적 인물이다. 물론 기독교 세계에서는 聖地를 파괴한 惡人으로 여겨졌다.
13세기 몽골군대의 침략을 저지한 나라는 일본, 월남, 그리고 바이바르의 맘루크뿐이다. 이 세 군대의 공통점은 몽골-투르크계통이란 점이다. 몽골군은 몽골계통에는 약했다. 서로 약점과 장점을 잘 알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일까?


사진1 : 외벽과 내벽 사이에 나 있는 해자


사진2 :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과 함께 성벽 앞에서.


사진3 : 성안에서 만난 시리아 학생들. 시리아 여인들은 미인으로 유명하다.


사진4 : 성벽 망루에서 내려다 본 경치.


사진5 : 매달려 있는 듯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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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라딘 城砦


시리아의 항구도시 라타키아에서 내륙으로 45km 들어간 절벽 위에 살라딘의 성채로 불리는 성터가 있다. 해발 400m 산위에 있는 이 성으로 가려면 마이크로 버스에 갈아타 벼랑길을 달려야 한다. 우리 여행단이 탄 작은 버스가 워낙 낡아 과연 브레이크가 들을까 걱정하는 사이 城門 앞에 도착했다. 성은 양쪽이 절벽인데 한쪽 절벽은 계곡을 더 깊게 파서 건너편 언덕과 절단해버리고 그 위에 영도다리 같은 다리를 걸어놓아 언제든지 다리를 들어올리면 접근로를 끊을 수 있게 했다.


사진1 : 성벽과 언덕 사이 계곡을 잘라서 격리시킨 자리에는 오레리스크 같은 기둥이 남았다. 십자군은 꼭대기에 다리를 걸쳐놓고 침입군이 들어올 때는 이를 들어올려 접근을 막았다.


사진2 : 살라딘 성은 비잔틴, 십자군, 이슬람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이 성터는 길이 700m, 너비 120m의 대규모이다. 3천년 전 페니키아인들의 성으로부터 출발했다. 10세기경 이 성은 비잔틴 군대의 차지였다. 12세기 이 城은 십자군 손에 넘어갔다. 비잔틴과 십자군이 만든 城이지만 이슬람이 점령한 뒤 손질을 했다. 여러 군대의 축성기술이 다 전시되어 있다.
이 성은 견고하게 보이지만 이틀만에 떨어졌다. 쿠르드族 출신의 이슬람 영웅 살라딘이 돌 투척기로 맹공을 하니 성벽이 무너진 것이다. 이때 쏜 돌포탄이 보존되어 있다. 한 개가 300kg이 넘는다.
서양의 城과 일본의 城은 구조가 비슷하다. 문을 여러 겹으로 만들고 통로를 직각으로 두어 침입군이 들어왔을 때 매복과 기습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사령관실 옆엔 비밀통로를 두어 탈출할 수 있게 한다. 일본과 서양이 축성 기술을 교환한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이겨야겠다는 일념으로 궁리하니 공통된 설계가 나타난 것이다. 일본과 서양은 기사와 무사 계급이 집권을 오래 했으므로 군사문화가 국가의 분위기를 주도했다는 공통점도 있다.
살라딘 성채에는 여러 곳에 우물이 있었고 저수창고도 있었다. 5000t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깊이 6m짜리 지하 저수지는 지금도 축축하다. 이 성을 점령했던 살라딘은 아유비 왕조를 만든 사람인데 아주 너그러웠다고 한다. 敗者가 된 십자군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고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는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전성시대를 연 슐레이만 大帝도 그런 사람이었다. 살라딘과 많이 싸웠던 영국왕 사자왕 리처드는 수천명의 이슬람 군대 포로를 학살한 적이 있다. 이 리처드 사자왕이 병을 앓자 살라딘이 의사와 의약품을 보내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수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성터를 한가롭게 걸어다니니 萬感이 교차했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여기서 죽어나갔을까? 중동은 왜 전쟁, 암살, 자살, 내전, 쿠데타가 많은가? 이런 저런 상상을 하면서 피, 땀, 눈물이 서린 돌덩어리 사이를 헤매고 다니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사진3 : 망루에서 바라본 주위 풍경은 숲이고 계곡이며 절벽이다.


사진4 : 절벽 위에 건설된 성터를 한가롭게 거닐면 원혼이 된 병사들의 함성과 비명이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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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미아의 중앙大路


시리아의 경치는 다양하다. 사막, 비옥한 평원, 돌밭, 회색의 야산, 눈덮인 高山, 지중해, 그리고 호수들. 尙美會 여행단은 지중해변 항구도시 라타키아에서 하루를 묵고 다시 北進하면서 평야지대로 들어갔다. 두 산맥 사이로 비옥한 녹색의 카피트가 펼쳐졌다. 오론테스 강의 유역이기도 한 이 알가이브 평원은 한때 코끼리가 살았다고 한다. 이집트왕이 코끼리를 잡기 위해서 이곳으로 원정을 온 적도 있다. 로마와 싸워서 패배한 뒤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은 여기로 망명을 와서 시리아 사람들에게 코끼리를 전투에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放牧場으로도 안성마춤인 이곳에 아파미아라는 거대한 유적이 있다.
아파미아(Apamea)는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로서 대왕의 死後 이 지역을 통치했던 셀레쿠스의 페르샤 부인 이름이다. 셀레쿠스는 유능한 행정가이고 외교관이었다. 시리아에는 그가 건설한 고대도시가 많다. 아파미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셀레쿠스는 지금의 터키 안티옥을 수도로 하여 시리아 일대, 소아시아, 페르샤, 그리고 인도의 일부를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안티옥이라 이름 지은 것을 비롯하여, 어머니 이름을 따서 라타키아라고 붙이기도 했다. 그의 아내 아파미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샤 王女인 록사나와 결혼한 관례를 따라서 얻은 여자였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언을 받아들여 외국여자와 결혼할 것을 부하들에게 권했다.


사진1 : 아파미아의 중앙大路는 약2km. 오른쪽 石柱 뒤는 상점가였고 그 뒤에는 목욕탕, 극장 등이 있었다.


사진2 : 로마시대의 건축물이지만 그 양식은 그리스식 등 여러 가지이다. 일종의 古代건축박물관이다. 발굴된 도시는 극히 일부이다.

교통의 요충지인데다가 생산성이 높은 분지에 있던 아파미아엔 5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다. 아파미아의 황금기는 로마시대였다. 기원 전 64년에 이 도시는 로마의 폼페이 장군에게 점령당하고 셀레쿠스 왕국은 망했다. 서기 2세기에 이 도시는 큰 지진을 당하여 많이 부서졌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아파미아는 이 지진 뒤 재건되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유적은 주로 이 재건된 부분이다.
전성기에 아파미아의 인구는 약50만 명이었다고 한다. 당시 세계 유수의 도시였다. 이 규모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이 石柱가 전봇대처럼 나란히 서 있는 중심 大路이다. 로마 도시엔 항상 이 남북방향의 중앙대로가 있다. ‘직선도로’ 라는 뜻의 카르도라고 불리는데 너비가 약30m나 된다. 돌이 깔린 이 도로의 한쪽은 상점가였다. 남북방향의 중앙도로를 십자가 식으로 가로지르는 동서방향의 大路는 좀 짧다. 발굴된 이 아파미아의 카르도는 길이가 약2km이다. 石柱를 따라 걷다가 보면 기원 전 2세기, 즉 로마의 전성기로 돌아간 듯하다. 주변의 풍요로운 녹색 평원, 그 멀리 병풍 같은 산맥들이 유장하게 넘실댄다. 과연 50만 명을 수용할 수 있었겠구나 하는 감이 온다.
시저가 죽은 뒤 클레오파트라의 애인이 된 안토니우스는 아르메니아 원정을 마친 뒤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에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이 도시를 방문했다고 한다. 50년 전만 해도 아파미아는 언덕뿐이었다. 1930년대 이후 벨기에 발굴팀이 이곳을 파헤쳐 누워 있는 기둥을 올려 세우는 등 복원작업을 벌이고 있다. 발굴된 부분은 50만 도시의 일부이다.
서기 2세기에 황금기를 보낸 아파미아는 그 뒤 비잔틴 제국 치하로 들어갔다가 6, 7세기엔 페르샤의 침략을 받았고, 7세기 말 시리아가 이슬람화되면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 도시의 건축물은 그리스와 로마식이 大宗을 이룬다. 카르도를 따라 세워진 600개의 기둥은 거대 서양 건축양식을 다양하게 대변하고 있다. 건축박물관인 셈이다. 시리아 사람들은 특히 외국인들에게 친절하다. 다만 유적지엔 사진첩을 파는 사람들이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사진3 : 여행단의 일원인 嚴相益 변호사가 돌기둥 사이에서 명상중이다. 한가하게 유적지를 걷다가 보면 모든 존재하는 것에 대한 외경심과 애정을 갖게 된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사진4 : 5000년 전에 그러했듯이 양떼들이 풀을 뜯는다.


사진5 : 직선도로의 중앙지점. 아파미아는 아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발굴이 더 진전되면 오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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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인구가 많은 알레포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 시리아는 지중해와 동양(페르샤, 인도, 중앙아시아, 중국), 즉 동과 서, 이집트-아라비아와 그리스 터키, 즉과 남과 북의 십자로상에 있었다. 이 십자로를 따라 민족과 문화가 오고가면서 충돌, 융합하였다. 그리하여 시리아를 요람으로 하여 33개 문명이 꽃을 피웠다. 문명은 피었지만 사람들은 죽어나갔다. 수많은 전쟁, 정복, 반란, 흥망이 연출된 무대였다.


사진 : 알레포의 8000년 역사가 그려낸 드라마를 지켜본 언덕 위 城砦(성채).

시리아의 남북 2대 도시는 남쪽의 다마스커스와 북쪽의 알레포이다. 거리는 서울-부산과 비슷한 350km이다. 두 도시는 ‘중단 없이 거주한 세계에서 가장 오랜 도시’라는 타이틀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이다. 대략 8000년의 역사이다. 다마스커스를 출발하여 북상한, 尙美會 여행단을 태운 버스는 이틀만에 드디어 알레포로 들어갔다. 인구 약300만 명인 이 도시는 3800년 전 기록에 이미 동서, 남북무역으로 번성한 상업도시였다. 알레포는 기독교 인구가 약30%나 된다. 20세기초 터키에서 추방된 아르메니아 등 기독교도들이 이 도시로 피란 왔기 때문이다. 소련 제국이 붕괴된 이후엔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쪽으로부터 상인들이 옛날처럼 이 도시를 오고가면서 장사를 하고 있다.
시리아와 신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과 서의 極端이었다. 동의 신라에서 출발한 실크 로드와 스텝 루트의 한 줄기가 지중해의 東岸인 시리아에서 끝난다. 이 무역로를 따라 신라와 시리아 사이에 물건과 사람이 오고갔음을 실증하는 것이 경주 皇南大塚(98호분)의 南墳에서 출토된 11점의 로만 글라스, 즉 유리잔들이다. 일본의 유명한 유리공예가 요시미즈 쓰네오(由水常雄)는 이 로만 글라스를 분석하고는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한 395년부터 西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 멸망하는 476년 사이에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 지었다.
이 사이 시리아는 東로마제국(나중에 비잔틴 제국이라 불린다) 治下에 있었다. 요시미즈씨는 신라와 로마 사이에 초원의 길을 따라서 문화와 인간의 교류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시리아産 로만 글라스는 그 교류의 한 가지 물증일 뿐이다. 경주 계림로에서 출토한 黃金寶劍(황금보검)은 로마 영내이던 지금의 불가리아(당시는 트라키아)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요시미즈씨는 ‘로마文化王國新羅’라는 책도 썼다.
東로마 치하 시리아의 유리잔이 신라에 오게 된 경로는 시리아-黑海北岸-몽골초원-중국 북부-경주였다. 신라 출신인 한국인들이 비행기 편으로 대강 그 초원의 길 위를 날아와 지금 알레포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사진 : 알레포 성안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접근로는 아랍 예술 전시장이기도 하다. 수많은 정복자들이 이 길을 따라 성안으로 들어가거나 성앞에서 죽었다.

주인이 수십 번 바뀐 알레포

알레포에 대한 역사 기록은 3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오른다. 바빌론의 함무라비왕과 알레포왕이 협정을 맺어 20여개의 작은 왕국을 관할했다는 기록이 있다. 알레포는 아모르족의 왕국 얌카드의 수도였다. 예수 탄생 전 19세기 지금의 터키 지방에서 번성한 히타이족이 남하하여 알레포를 점령한다. 남쪽으로부터 이집트의 침략도 있었다. 서기 전 1200년 전엔 해양민족의 공격을 받았고, 아람왕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가 서기 전 854년부터는 아시리아 치하가 되었다. 그 뒤 알레포는 아람족, 아시리아, 칼데아족, 다시 아람족, 페르샤의 지배를 받다가 서기 33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이끄는 군대에 점령됨으로써 그리스-로마문화권으로 들어간다.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뒤 알레포를 포함한 시리아와 터키, 페르샤 일대는 후계자의 한 명인 셀레쿠스 장군이 다스리게 되었다. 셀레쿠스 제국의 수도는 지금의 터키 도시 안티옥이었다. 시리아는 셀레쿠스와 이집트를 인수한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 프톨레미 제국 사이 쟁탈전의 무대가 되었다. 로마가 기원 전 1세기에 시리아를 점령하고 관할권이 기원 후 4세기부터 東로마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시리아는 기독교 문명도 흡수한다.
시리아 남쪽 아라비아 반도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은 가장 먼저 다마스커스와 알레포를 비롯한 시리아를 정복한다. 서기 636년의 일이었다.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한 움마야드 왕조가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으로 팽창하게 된다. 90년 뒤 압바시드 왕조가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10세기에 일시적으로 알레포는 비잔틴 제국 군대의 공격을 받아 점령되기도 했다. 이 무렵 대지진이 알레포를 파괴했다. 1124년 십자군이 알레포를 포위했으나 점령하지는 못했다. 알레포는 살라딘이 창건한, 이집트에 본부를 둔 아유비 왕조의 치하로 들어갔다.


사진 : 이 성채를 수백년간 점거하고 관리했던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紋章. 맘루크는 투르크 용병집단인데 모시던 왕을 몰아내고 왕조를 세워 중동 지역을 통치했다.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합시다'

13세기 초 몽골에서 일어난 징기스칸이란 대폭풍은 1260년 알레포를 덮친다. 이집트에서 달려온 맘루크(투르크 노예용병) 기병은 몽골기마군단을 이스라엘의 아인 잘루트에서 격파하고 알레포를 수복했다. 아유비 왕조는 맘루크 왕조로 교체되고 1516년 오스만 투르크에 망할 때까지 약 260년간 알레포 등 시리아를 통치했다. 그 사이 알레포는 또 한번 몽골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다. 1400년 티무르의 기마군단이 알레포를 3일만에 점령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그들은 기술자들만 골라 그들의 수도 사마라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소재)로 끌고 갔다. 티무르는 징기스칸의 후예를 자칭했다. 그의 치하에 티무르 제국은 중앙아시아, 이란, 인도북부,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일대를 점령하거나 공격했다. 中世 역사상 가장 큰 파괴와 학살을 자행했다.
동서남북 문명의 십자로에 있었던 알레포는 이런 전쟁과 지진속에서도 불사조처럼 일어났다. 무역의 힘이었다. 돈의 유혹이었다. 15세기엔 베니스 상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왔다. 1919년 알레포는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해방되자마자 곧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받기 시작했다. 오스만 시절 알레포엔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베니스가 영사관을 따로 둘 정도로 중동의 가장 중요한 무역중심지였다.
이상의 드라마를 지켜본 것이 알레포 중심부 언덕 위에 세워진 알레포 성이었다. 알레포는 다마스커스 및 보스라와 함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다. 도시의 역사만큼 긴 것이 이 성이다. 636년 아랍군대가 계교를 써서 이 성을 비잔틴 군대로부터 탈취한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성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 성은 33m 높이의 원추형 언덕 위에 건설되었기 때문에 더 높아 보인다. 너비 32m, 깊이 22m의 해자가 패여 있다. 해자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높이는 55m이다. 이 성으로 들어가는 계단식 입구는 아랍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여러 가지 조각품으로 장식되었다. 성안엔 궁전터, 모스크, 저수지, 감옥 등 많은 부대시설이 있다.


사진 :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하세요'라고 쓴 선전문을 들고 있는 알레포 시장 상인. 이런 商魂이 戰亂과 지진속에서도 이 도시를 유지한 힘이었다.


8000년에 걸친 알레포의 도시 생명력을 짐작케 해주는 것은 성 바로 바깥에 있는 수크라고 불리는 시장이다. 카피트, 면직물들을 많이 판다. 한국 관광객들이 벌써 길을 내어놓았다. 한 상점에선 한글로 “시어머니를 위해 선물합시다”란 푯말을 내어놓았다. 상인들의 이런 힘이 바로 이 도시를 戰禍와 지진 속에서 지탱해왔을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國富論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우리가 오늘 저녁식사를 즐기고 있는 것은 정육점과 빵 만드는 사람들의 好意 덕분이 아니라 그들의 이기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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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그러움을 배운다

한반도에서 오랫동안 1민족1국가1국어의 전통을 이어온 한국인들은 인종적, 종교적, 언어적 多元性과 복잡성에 대한 이해가 생래적으로 부족하다. 그런 한국인들에겐 시리아와 같은 복잡다기한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는 것이 민주국가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좋은 공부가 될 것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리아의 땅은 옛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지만 주인은 수십 번 바뀌었다. 오늘날 주인은 이슬람을 믿는 아랍족이지만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투르크족, 맘루크족, 그리스인, 로마인, 아람인, 아시리아인, 페니키아인들이 한때의 주인들이었다.
말이 다르고 얼굴이 다르고 생각도 다른 이들과 함께 섞여 산다는 것은 다름에 대한 이해와 관용을 키운다. 한국인이 머리는 좋지만 너그럽지 못하다는 평을 듣는 것도 다름을 체험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19세기말 개화기 때 한국을 여행했던 서양인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묘사가 있다. 조선팔도 어디를 가든지 아이들과 어른들이 異國人을 신기해하면서 쫄쫄 따라다니고 문틈으로 들여다본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주인이 가장 크게 바뀐 것은 西로마가 멸망한 5세기였다. 로마의 멸망은 유럽 지배층의 교체를 의미했다. 로마 그리스인들이 지배하던 古代 세계가 무너지면서 게르만족이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했다. 롬바르드족은 북이탈리아, 고트족은 스페인, 프랑크족은 프랑스, 앵글로-색슨족은 영국, 바이킹족은 스칸디나비아, 기타 여러 게르만 부족은 독일의 지배세력이 되었다. 물론 게르만족의 인구는 피지배 민족보다 훨씬 적었다.
지배층은 인구가 적어도 권력을 잡았으므로 자신들의 언어, 풍습, 종교, 제도를 피지배 민족에게 강제할 수 있다. 나라의 모습이 지배층을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5세기에 유럽의 주인이 된 게르만족은 그 뒤 1600년 동안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문예부흥을 하고, 종교개혁을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고, 산업혁명을 하고, 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유럽의 파생국가인 미국,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도 기본적으론 게르만족이 주도하는 나라이다.
게르만족은 체질이 강건하고 지능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 하지만 이들이 기독교가 아니라 이슬람화되었더라면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을지 의문이 든다.


사진 : 苦行 수도사 시몬이 기둥 위에서 살면서 도를 닦았다는 그 기둥은 순례객들이 뜯어가는 바람에 난쟁이가 되었다.


苦行 수도사 시몬 이야기


유럽을 여행해보면 이슬람이 700년간 지배했던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서기 5~11세기 사이 약600년간 지어진 건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콜로세움이나 聖베드로 사원 등 유명한 건축물은 거의가 이 600년 시기 이전이나 이후에 세워졌다. 이 600년을 흔히 中世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로마가 무너진 후유증이 그렇게 길었다. 600년간 그리스 로마 문명은 잊혀졌다. 기독교가 로마문명을 대체하는 중심적 권위로 자리 잡았으나 로마의 법치와 토목기술은 맥이 끊어졌다. 이 시기 기독교의 가장 큰 역할은 게르만족을 기독교화 한 일이다.
이 600년 사이 그리스, 로마 문명의 전통을 이어간 것은 콘스탄티노풀을 수도로 삼은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 제국과 이슬람 세계였다. 이 시기 기독교 교회 건물로서 가장 유명한 것은 지금 이스탄불에 있는 聖소피아이다. 6세기 중엽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건축한 이 건물은 유럽에서 문예부흥이 일어나기까지 약1000년간 최고 최대의 기독교 건축물이었다.
시리아 알레포市에서 약 한 시간 거리의 야산 위에 아주 귀중한 초기 기독교 교회터가 있다. 콸라트 사만이란 곳인데, 여기에 거대한 5세기말 교회 유적이 있다. 시리아를 통치하던 비잔틴 제국 시절인 서기 490년에 14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한 이 교회는 당시 세계최대규모였다. 교회당 한 곳과 순례자용 세 棟의 건물터가 잘 남아 있다. 이 교회는 시몬이란 수도사 덕분에 세워졌다.
시몬은 양치기의 아들로 서기 392년에 났다. 그는 어릴 때 수도원에 들어갔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더 엄격한 생활을 원했던 것이다. 시몬은 동굴을 찾아가 그 안에서 苦行하면서 修道했다. 그에 대한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사람들이 싫었다. 3m 돌기둥을 세우고 그는 기둥 위에서 사람을 피해가면서 살았다. 사람들이 더 몰려왔다. 그는 기둥을 더 높였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40년 동안 기둥위에서 살았는데 마지막 기둥 높이는 18m였다.
시몬의 이름은 유럽의 기독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에서, 프랑스에서 순례객들이 몰려왔다. 동유럽에서는 시몬을 본떠서 기둥 위에서 修道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東歐의 날씨가 너무 추운 탓에 실패했다.
시몬은 기둥 위에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아래 모인 순례객들과는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는 여자들에겐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머니한테도 입을 떼지 않았다. 서기 459년에 죽었다. 시몬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지금의 터키 땅 안티옥에 묻혔다. 그가 기둥 위에서 수도하던 곳에 거대한 교회가 섰다. 시몬이 수도했다는 기둥은 순례객들이 기념으로 떼어가는 바람에 밑만 겨우 남아 있다.
교회의 正面은 로마네스크식인데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일품이다. 터키의 안티옥쪽으로 퍼져간 대평원이 멀리 보인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 세력이 접근하자 이 교회를 요새로 만들어 저항했다. 퀄라트는 아랍어로 요새란 뜻이다. 이곳은 서기 1017년 이슬람 군대에 넘어갔고 그 후로는 교회로 쓰이지 않았다.


사진 : 서기 5세기말에 완성된 이 교회당 건물은 당시 세계최대규모였다.

위성TV용 접시의 숲

우리가 묵었던 알레포의 한 고층 호텔에서 아침에 일어나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거대한 회색 시가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아파트와 단독주택 할 것 없이 지붕마다 위성TV 수신용 접시들이 密林을 이루고 있었다. 아파트도 통합 수신 시스템이 없는 듯 각호마다 따로 접시를 두고 있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시리아 정부에 비판적인 미국의 CNN, 영국의 BBC도 마음대로 볼 수 있다.
시리아는 이란과 함께 중동의 대표적인 親北反美국가이다. 북한으로부터 미사일 등 무기를 사들이고 있다. 시리아는 인접국인 레바논의 정치에 개입하고 테러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몇년 전 사망한 아사드 대통령의 절대권력은 아들에게 넘어갔다. 여러 가지 점에서 북한과 비교된다.
그러나 시리아에서 며칠만 있으면 이 나라를 북한과 비교하는 것은 모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북한 평양의 屋上에 위성TV용 접시의 숲이 있는가? 다마스커스 시장과 같은 시끌벅적한 시장이 있는가? 일반 국민들이 명랑하고 친절한가? 외국인 투자가 허용되는가?
시리아의 거리는 자동차 홍수이다. 그 30%가 한국 자동차라고 한다. 굶는 사람이 없다. 공개적으로 정부를 비판하지 않는 한 감옥에 가지 않는다. 요사이 시리아를 찾는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졌다. 이 나라는 북한 하고만 수교하고 있다. 한국 공관이 없어 한국 여행객들이 시리아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면 인접한 레바논 대사관으로 사람을 보내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와야 출국할 수 있다. 시리아 사람들의 인상이 참 좋다. 특히 외국인들에 대해서 친절하다. 사회주의 색채가 강한 독재국가임엔 틀림이 없으나 김정일式의 인간말살형 독재는 아니다. 시리아는 북한과 친하다가 북한에 비교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아사드가 김일성을 만나고 난 뒤부터 개인숭배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도 그랬다고 한다. 여러 나라를 망친 것이 김일성이다.

대학살의 현장에서

우리 尙美會 여행단이 아침에 알레포를 떠나 고속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약 세 시간 달려가는 목표지는 하마市이다. 인구가 약40만 명인 이 도시는 1982년에 있었던 무슬림 형제단의 무장봉기와 유혈진압으로 유명하다. 舊約성경에서 ‘가난 왕국의 수도’라고 쓰여진 하마는 기원 전 10세기 무렵인 다윗과 솔로몬 시절 이스라엘과 교류했다. 이 도시는 저항의 도시이다. 아시리아에 의하여 점령을 당하자 하마 사람들은 다마스커스 사람들과 손 잡고 봉기하여 그들을 몰아냈다가 130년 뒤 아시리아 군대의 보복을 당해 도시가 파괴되었다.


사진 : 피바람이 휘몰아쳤던 하마의 오론테스 강가엔 거대한 水車가 구경꺼리가 되고 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하마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검은 베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많았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뿌리를 내릴 만한 토양이 있는 도시이다.
1982년 시리아는 곤경에 처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을 침공한 이스라엘과 대결하고 있었다.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일어난 공중전에선 이스라엘 전투기를 한 대 격추시키고 시리아 전투기는 80여대가 격추되었다. 터키는 시리아가 터키내 쿠르드족의 반란을 사주한다고 군 동원령을 내려 위협하고 있었다.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은 무슬림 聖戰派에 의하여 암살당했다.
이런 시기에 시리아내에서 이슬람원리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테러가 격화되었다. 그들은 공무원과 아사드를 배출한 알라위파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때 처음으로 목베기 숫법이 나왔다. 1979년 6월 형제단은 알레포에서 사관생도들을 공격하여 83명을 죽였다. 1980년 8월부터 11월까지 다마스커스에선 자동차 폭탄 테러로 수백 명이 죽었다.
이들의 목표는 아사드 대통령이었다. 1980년 6월26일 다마스커스를 방문한 말리 대통령 환영만찬이 벌어지고 있었다. 무슬림 형제단이 잠입하여 아사드를 향해 기관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아사드는 발밑으로 굴러오는 수류탄을 발로 차냈다. 경호원 한 사람이 다른 수류탄 위로 몸을 날려 대통령을 보호하고 爆死했다.
아사드의 보복은 빨랐다. 감옥에 있던 수백명의 형제단원들을 불러내 처형했다. 형제단에 가입하는 것만으로도 사형에 처하는 법을 공포했다.
1982년 2월 무슬림 형제단은 원리주의적인 순니파가 많이 사는 古都 하마의 중심부를 장악하고 전국적인 봉기를 선동했다. 하마를 해방구로 선포했다. 아사드는 군부대를 투입하여 강경진압에 나섰다. 형제단에 대해서 최후통첩을 하고 일반 시민들도 도시를 떠나지 않으면 반란군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다. 2월2일 진압군은 전투기와 탱크까지 동원하여 하마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심부의 골목이 좁아 탱크가 진입하지 못하자 폭격하여 길을 텄다.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의 비참


2주간 계속된 시가전으로 쌍방에서 1만 명 이상이 죽었다. 그 뒤 팔레스타인 지역과 이라크에서 유행이 된 自爆테러가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 하마 중심부에 있었던 옛 궁전과 모스크도 사라졌다. 진압군은 하마 시내를 뒤지고 다니면서 부상자들까지 찾아내 확인사살했다.
이 무자비한 봉기와 진압은 그러나 시리아에서 원리주의자들의 반란을 근절시키는 효과를 보았다. 아사드의 진압은 많은 시리아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다. 형제단은 테러숫법이 너무 잔혹했기 때문에 민심을 잃었다. 내가 만난 한 시리아 여성은 “서방세계는 아사드에 대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 사건 뒤 ‘하마의 교훈’이란 말이 유행했다.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아사드가 하마에서 했던 식으로 하는 것이란 뜻이었다.
하마 도심부로 들어서니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실업률이 12%라는 증거이다. 시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장 안쓰러웠던 것이 할 일 없이, 유령처럼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시리아 사람들은 키가 날씬하게 크고 얼굴이 길다. 중동에서 가장 잘 생긴 민족이라는 평을 듣는다. 그런 사람들이 無爲徒食하고 있다. 인간에게 할 일이 없다는 것만큼 기막힌 일은 없을 것이다. 이탈리아가 부럽지 않은 유적으로 가지고도 시리아는 관광을 통해서 연간 10억 달러도 벌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하마에 들린 것은 노리아스라는 水車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하마를 지나는 오론테스 강물을 끌어올리는 이 장치는 지름이 20~30m나 된다. 서기 5세기부터 가동했다고 한다. 지금은 관광거리이다. 움직이지 않는 水車 너머 언덕 위엔 호텔이 서 있다. 시가전에서 죽은 반란군을 집단 매장한 땅 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오랜 역사와 문화적 축적으로써 중동의 지식인 사회를 이끌었던 시리아는 한때 중동을 풍미했던 汎아랍주의 바트당을 만들어냈다. 1947년에 창당한 바트당은 汎아랍주의-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하면서 공산주의와 이슬람 원리주의를 반대했다. 시리아의 바트당은 중동의 여러 나라에 지부를 두었다. 집권에 성공한 것은 시리아와 이라크이다.
작년에 처형된 이라크의 후세인도 물론 바트당 출신이다. 이라크를 점령한 미군은 이라크 군대와 함께 바트당을 해산해버렸다. 이것이 권력의 공백을 초래하여 이라크의 시아파-순니파 내전을 통제불능사태로 몰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바트당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무자비한 탄압과 反美정책으로 미국을 괴롭혔지만 동시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억제했다. 이라크가 종교내전으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차라리 후세인을 그냥 두는 것이 나을 뻔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아랍사람들과 이슬람 문화는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운영해본 경험이 日淺하다. 이슬람은 교리상 종교공동체를 강조하므로 종교와 계급의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국민국가와는 맞지 않는 면이 너무나 많다. 그 점에서 이슬람 원리주의와 공산당식 계급투쟁을 다 같이 거부하는 바트당은 상당히 진보적이다.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은 바트당이나 아사드와 후세인의 그런 역할을 看過하는 경향이 강했다. 중동을 지배해본 경험이 있는 영국 사람들은 비교적 정확한 시각을 갖고 있지만 세계를 움직일 힘이 없다.




사진 : 2주간의 시가전으로 수만 명이 희생되어 묻힌 곳엔 고층건물이 올라갔다.

시리아에 대한 오해


외국 여행을 할 때 그 나라의 역사를 개략적이라도 알아야 눈에 보이는 오늘의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역사지식은 그 나라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좌표와 방향 등 시각의 틀을 제공한다. 필자는 尙美會 여행단과 함께 여행할 때 주로 버스 안에서 그런 설명을 하는 일을 맡는다.
시리아에 와서 여행을 해보면 많이 오해했구나 하는 부분이 보인다. 한국인은 시리아를 주로 성경, 이스라엘, 미국의 시각에서 보아 왔다. 그런 시리아는 反기독교, 親北, 독재, 테러지원국가이다. 그런 면이 있지만 과연 '惡의 축'이라고 불릴 정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여행이 좋은 것은 잘못된 선입관을 바꿔주는 일이 종종 있다는 점이다.


사진 : 시리아의 두번째 도시 알레포의 호텔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옥상은 온통 위성TV수신용 접시이다. CNN, BBC 등 시리아에 비판적인 언론도 시청할 수 있다. 시리아는 독재국가이지만 북한과 비교할 나라가 아니다. '惡의 축'이라고 부르는 것도 무리이다.

시리아의 지난 100년 역사만 알아도 언론에서 얻은 선입관이 달라질 수 있다. 시리아(오늘의 레바논 포함)와 팔레스타인(오늘의 이스라엘) 지역은 1516년부터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진 1914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독일 편에 섰다.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중동에서 몰아내기 위하여 아랍민족주의 세력을 지원했다. 영국의 정보장교 T.E.로렌스가 아랍 추장들을 설득하겨 反투르크 독립전쟁을 일으키도록 하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국이 지원하는 아랍 군대는 파이잘 부족장의 지휘하에 투르크領 시리아를 점령하고 1918년에 정부를 세웠다. 파이잘은 大시리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이때 大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뿐 아니라 레바논과 이스라엘 땅을 포함했다.
1차 세계大戰 이후 국제연맹은 戰後 처리 차원에서 시리아에 대한 위임통치를 프랑스에 맡겼다. 프랑스는 아랍세력이 세운 파이잘을 쫓아내버리고 레바논을 大시리아에서 떼내어 다른 나라로 만들려 했다. 레바논에는 기독교인들이 많았다. 이들이 프랑스를 설득하여 분리 독립하려고 했다. 이에 반발한 시리아인들이 봉기하자 프랑스는 다마스커스를 폭격하는 등 강경 진압했다. 프랑스 위임통치 기관은 또 시리아의 알렉산드리타市를 터키에게 떼어주는 공작도 했다.
1940년 프랑스 본국이 독일군에 항복한 뒤 시리아는 비시 정부(나치 독일이 프랑스의 남부지방에 설치한 괴뢰정부) 통치하로 넘어갔다. 1941년 6월 이후엔 영국군과 자유프랑스군이 지배하게 되었다. 레바논에서는 기독교인과 이슬람인들이 인구비율에 따라 권력을 나눠갖는 합의를 하여 독립국가를 만드는 준비에 들어갔다. 1943년에 합의된 것은 대통령은 기독교인, 수상은 순니파 이슬람, 군대는 기독교, 의회 의석은 기독교가 6 이슬람이 5의 비율로 하기로 했다.
시리아와 레바논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물러난 1946년에 독립을 선언했다. 시리아에서는 독립 후 여러 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이 되면 시리아의 권력은 군대안의 바트당원들에게 넘어갔다. 바트당은 1947년 기독교도인 교사 마이클 아프크에 의해 創黨되었다. 汎아랍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 바트당 세력은 시리아와 이라크로 확산되면서 아랍통일국가를 만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사진 : 13세기에 십자군을 무찌른 이슬람 군대의 지휘자 살라딘은 쿠르드족 출신인데 시리아의 영웅이다. 다마스커스 도심부의 동상.

민족주의파 장교단을 대표하는 나세르가 쿠데타로 親英派 왕을 내어쫓고 이집트에서 집권한 직후인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종의 국가연합식 통일아랍공화국(United Arab Republic)을 결성했다. 이집트는 그러나 시리아를 북부의 속주처럼 대접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군인들이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뒤 시리아는 主權을 되찾았다. 다시 이에 불만을 품은 汎아랍바트당 세력이 반격한 것이 1963년의 쿠데타였다. 이를 계기로 공군 장성인 아사드가 바트당의 핵심멤버로 등장한다. 같은 해 이라크에서도 바트당 군인들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세 나라를 통일하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이라크에선 그해 11월에 바트당이 쿠데타로 失權했다.
시리아의 집권세력이 된 바트당은 사회주의 및 汎아랍정책을 밀고 나가는 과정에서 반발을 사고 黨이 분열되었다. 1966년 당내의 강경사회주의자들이 또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이때는 아사드가 주모자였다. 이 바트당 정권은 두 가지 큰 패배를 맛보았다.

주변국들에게 뜯어먹힌 나라

1967년 6월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요르단과 연합하여 對이스라엘戰에 참전했던 시리아는 골란 고원을 빼앗겼다. 1970년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국내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몰아내는 전쟁을 벌인다. 이때 시리아는 아라파트가 이끌던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을 지원했으나 이들은 쫓겨나고 말았다. 아사드는 시리아 정부의 팔레스타인 지원정책을 반대했었다. 그는 1970년 11월 무혈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그 이듬해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10월 사다트의 이집트가 이스라엘을 기습하여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아사드의 시리아군도 참전하였으나 이스라엘의 반격에 무너졌다. 일시 수복했던 골란고원을 내어주고 다마스커스까지 빼앗길 뻔했다. 이스라엘군은 다마스커스를 35km 앞둔 지점에서 휴전했다.
아사드는 2000년 6월10일에 죽을 때까지 30년간 철권통치를 했다. 그는 戰後 중동의 최장기 집권자였다. 아사드는 순니파가 압도적으로 많은 시리아에서 소수파인 시아파 중에서도 이단시되어왔던 알라위파 출신이다. 시리아에서 알라위파는 전체 인구의 11.5%에 지나지 않는다. 아사드는 군대, 관료, 정보기관에 알라위파 출신들을 많이 배치하여 권력을 공고히 했다. 알라위파는 오랫동안 탄압을 받아오다가 프랑스가 위임통치할 때 우대를 받았다. 아사드 정권을 알라위파 정권으로 여기는 시각도 있다. 그는 소외된 소수파에 대한 배려를 많이 했다. 원리주의자들의 도전에 대해서는 무자비하게 대응했다.
아사드에 대한 개인숭배는 시리아를 여행해보면 실감할 수 있다. 자리 좋은 언덕, 산꼭대기마다 오른 손을 든 아사드의 石像이 있다. 그의 생전시부터 있었던 이 석상은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大兄을 연상시킨다.
그는 생전에 아들인 바시르 알 아사드를 후계자로 지명해놓고 있었다. 바시르는 런던에서 안과의사로 일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34세였다. 당시 헌법은 40세 이상만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적혀 있었지만 하루아침에 개헌이 이뤄져 제한연령이 34세로 변경되었다.
시리아는 레바논내의 反이스라엘 헤즈블라군을 지원하고 레바논의 國政에 간섭하며, 최근에는 전 수상의 암살에 관여했다고 해서 국제적 압력을 많이 받고 있다. 암살사건 이후에는 레바논으로부터 철군했다. 시리아 입장에서 보면 레바논은 원래 시리아 땅인데 기독교인들이 프랑스를 구워삶아 분리독립해나간 나라이다. 따라서 레바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는 의식이 강하다. 사실 시리아는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스라엘에 의해 국토가 여기 저기 찢어지고 떼어먹힌 나라이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분쟁도 그렇지만 중동의 많은 문제는 이 지역을 400년간 지배했던 오스만 투르크가 무너지고 영국, 프랑스 세력이 일시 지배하다가 철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문명의 요람이었던 이곳이 지난 500년간 받은 역사적 수모가 오늘의 時事문제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사진 : 아기는 어딜 가나 가장 흐뭇한 구경꺼리이다. 항구도시 라타키아 호텔의 로비에서 만난 아기를 한국 관광객이 귀여워하고 있고 아기의 어머니는 자랑스럽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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草原과 사막, 말과 낙타


우리 尙美會 여행단 일행은 하마를 떠나 다시 南下했다. 시리아의 배꼽에 해당하는 古都 홈스에서 좌회전하여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 가면 이라크이다. 이라크와 국경을 맛대고 있는 시리아는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피해를 크게 보고 있다. 약60만 명의 난민들, 주로 순니파들이 內戰을 피해서 순니파가 많이 사는 시리아로 넘어왔다. 이들 중엔 부자도 많다. 이들이 다마스커스 일대에 부동산 투기를 하여 집값이 많이 올랐다. 시리아 인구 1800만명중 100만 명 이상이 이라크, 팔레스타인 난민들이다. 이 가난한 나라가 그 많은 난민들을 받아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 오아시스 도시 파밀리아의 城砦

길은 대평원을 달린다. 초원으로 변하더니 점점 나무와 풀이 줄어들면서 사막 분위기로 바뀐다. 양떼를 모는 베드윈, 텐트, 낙타가 자주 나타난다. 시리아 국토의 절반 가량이 이런 사막지대이다. 낙타는 사막의 배이다. 280kg의 짐을 싣고 천천히 걸어가면 하루에 시속 4km씩 10시간을 갈 수 있다. 짐은 싣지 않고 사람이 타고 여행하는 데는 시속 16km로 하루 200km나 간다. 굵은 눈썹과 닫을 수 있는 코가 모래먼지를 막아준다. 더위에 몸의 수분을 20%나 잃어도 견딘다. 사람은 물을 사흘만 먹지 않아도 죽지만 낙타는 10일까지 견딘다. 한꺼번에 물을 60리터나 마시고 몸안에 저장한다. 수컷은 몸무게가 평균 665kg이다.
세계 역사는 대체로 말(낙타)을 달린 민족과 배를 몬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지배했다. 말과 낙타를 일종의 탱크 같은 兵器로 이용한 유목민족 출신들이 17세기에 소총이 등장할 때까지 세계를 지배했다. 몽골, 투르크, 아랍민족이다. 16세기를 분기점으로 하여 배를 잘 모는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세력이 세계 도처에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하면서 大勢가 바뀐다. 세계사의 주도권이 기마민족에서 해양민족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그래도 19세기 세계 4大 제국중 3大 제국은 유목기마민족 출신이었다. 여진족이 세운 淸, 투르크족이 만든 오스만 투르크, 몽골족의 정복왕조 무갈제국(인도). 기마민족 출신이 아닌 것은 大英제국뿐이었다.


사진 : 서기 2세기에 지은 파밀리아의 神殿

기동성과 단순성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속도의 우월성을 확보해야 한다. 화살보다는 소총이 빠르고 기관총은 더 빠르고, 배보다는 비행기, 그리고 유도탄이다. 미국의 세계 경영은 기동성에서 나오고 기동성은 가장 빠른 航母戰團, 가장 빠른 전투기, 가장 멀리 가면서 정확한 미사일에서 나온다. 세상만사가 기동성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기마민족이요 해양민족이었다. 인생은 유한한 시간이므로 매사에서 속도가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말도 잘 타고 배도 잘 몬 사람이었다. 이슬람의 전성기 때 아랍사람들도 그러했다. 이슬람이란 신앙으로 무장한 아랍의 기마부대가 중앙아시아에서 스페인까지 휩쓸고 있을 때 인도양과 동지나해는 아랍상인들의 무대였다. 신라, 고려도 아랍상인들의 기항지였고 한반도 사정을 서양에 처음으로 전한 이들도 아랍인들이었다. 1970년대 중동건설 시장에 진출한 한국인들이 한때 30만 명이나 되었다. 지금도 두바이는 한국 건설회사가 만든 도시라는 말을 들을 정도이다. 아랍과 한국은 결코 멀기만 한 관계가 아니었다.
기동성((Speed)을 확보하려면 개인이든 군대이든 국가이든 가벼워야 한다. 가벼워지려면 삶이 단순해야 한다(Simplicity). 단순하게 살려면 그렇게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자부심(Self confidence)이 있어야 한다. 이 3S(Speed-Simplicity-Self confidence)가 기업의 성공 비결이라고 주장한 이가 GE의 전설적 경영자 잭 웰치였다.
중동 사막의 주인공 베드윈은 몽골고원의 유목민족처럼 이웃한 중국, 이란 등 도시문명을 부러워하지 않았다. 하늘과 초원을 벗 삼으면서 유유자적하다가 도시를 공격하여 문명인들이 만든 물건을 빼앗아와서 먹고사는 삶이 더 자유롭고 근사하다고 믿었다. 그런 자부심이 그들을 도시 및 농경문화에 동화시키지 않게 했다.
사막과 草原의 단순성, 삶의 단순성, 美的 감각의 단순성, 그리고 이슬람과 유태교, 기독교의 단순성은 서로 통한다. 神을 거추장스럽게 우상으로 형상화하지 않았다는 점이 최고의 단순성이다. 神을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파괴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神을 가진 사람은 강하다. 형상을 떠난 神이기에 어디든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슬람과 유태-기독교의 세계 전파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사막의 밤하늘을 인간이 바라볼 때 느끼는 절대자의 존재감, 인간과 神의 직접 소통, 이런 사막적 감수성 속에서 인류역사를 바꾼 3大 종교가 탄생한 것이다.


사진 : 과연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감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파밀리아 유적


사진 : 카메라를 갖다대어 보면 현재가 없고 古代뿐이다.

제노비아 여왕

버스는 사막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홈스에서 서쪽으로 달리는 이 길은 지중해와 이라크를 연결하는 隊商路이자 아시아 북방을 종단하는 실크로드의 서쪽 끝 부분이었다. 오늘의 목표는 이 東西 무역로의 거점이었던 오아시스 도시 팔미라(Palmyra. Palm=종려의 도시라는 뜻. 아랍어로는 타도몰이라 불린다)이다. 팔미라로 들어가니 사막이란 바다를 항해하다가 항구로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모래 산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나지막하게 발달한 숲의 섬이 신기루처럼 태양 아래서 잠들어 있었다.
서기 271년 로마 황제 아울렐리안은 우리가 왔던 경로를 거쳐 팔미라로 進軍했다. 터키 남부의 안티옥과 홈스에서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의 군대를 무찌른 로마 군대는 팔미라를 포위하고 관대한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자존심이 강한 제노비아는 이를 거부하고 페르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해 포위망을 빠져나와 동쪽 유파라테스 강으로 달리다가 로마 군에 붙들려 아울레리안 황제한테 끌려왔다. 그 뒤 전설이 된 제노비아의 운명에 대해선 異說이 많다. 황제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할 때 쇠사슬에 묶인 채 나타났고 그 뒤 로마 근교의 별장에서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로마로 압송도중 굶고는 자살했다는 설이 있다.
로마군은 팔미라를 약탈하고 주민들을 많이 죽였다. 철학자 롱기누스도 이때 죽었다. 273년 팔미라는 로마 주둔군 600명을 죽이고 또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이때부터 이 사막 도시는 亡兆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노비아는 팔미라를 거의 독립적으로 다스리던 오다이나트 왕의 부인이었다.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서기 130년에 팔미라를 방문하여 자유 도시로 선포하고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다. 서기 212년 칼라칼라 황제는 이 도시를 로마 식민지로 인정하고 주민들에겐 로마 시민권을 주는 등 우대했다. 팔미라 군대가 로마 군과 함께 페르샤와 싸운 데 대한 보상이었다. 동서 무역로에 놓인 이 도시는 오가는 隊商들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대상들이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기지였다.


사진 : 풍요를 상징하는 조각품


사진 : 로마 시절의 水道橋

사막의 밤

오다이나트는 야심가였다. 페르샤의 사산朝 군대를 격파한 뒤엔 왕을 자칭했다. 로마도 처음엔 이곳에 주둔하는 로마군대의 지휘권을 주는 등 그를 우대했다. 서기 267년 오다이나트 왕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제노비아가 실권을 잡고 아들을 허수아비 왕으로 내세웠다. 로마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진압군을 보내자 제노비아는 로마 군대를 맞아 싸웠다. 제노비아는 대단한 미인인데다가 전략가였다. 로마제국의 멸망사를 쓴 영국의 에드워드 기본은 “그녀는 미모에선 조상인 클레오파트라를 능가했고, 용기와 순결함에선 따를 여인이 없었다”고 극찬했다.
로마 군단을 격파한 제노비아는 내친 김에 로마領이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 전부를 점령하고 이집트로 침입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오아시스 도시를 큰 제국 수준으로 키운 제노비아를 로마가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팔미라 유적은 서기 2, 3세기 때 지은 도시 건축물의 잔해이다. 발굴된 면적은 수십만 평에 걸쳐 뻗어 있다. 로마 도시의 전형이다. 神殿, 大路, 극장, 목욕탕, 광장, 개선문, 상점가들이 발굴되어 재현되었다. 다 둘러보려면 종일 걸릴 것이다.
이 도시는 2세기의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특별히 보살펴주었다.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리비아 땅에서 태어난 페니키아 사람으로서 시리아 홈스의 神殿 司祭의 딸과 결혼하여 고향 땅인 시리아에 애착이 많았다.


사진 : 베드윈 텐트에서 코부즈를 굽는 아줌마

필자는 팔미라의 이곳 저곳을 거닐다가 10代 후반의 한국 젊은이 세 명을 만났다. 청년이 둘, 여자가 한 사람이었는데 요르단을 거쳐서 버스 편으로 팔미라까지 왔다는 것이었다. 시리아에서 만난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시리아의 매력은 관광객들이 밀려 오기 전의 순수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팔미라에는 돌탑을 만들어 유해를 안치했던 로마시대 유적들이 많다. 첨성대처럼 생긴 돌탑 하나에 가족 단위로 수십 명의 유해가 보존되었다. 이곳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두 살 정도의 아기를 안은 30代로 보이는 여인이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으라고 권했다. 한 장 찍는 데 5 달러를 요구했다. 자신의 아기를 돈벌이용으로 이용하는 商術 또한 상업도시의 수천년 전통을 이어가는 듯했다. 약4만 명이 살고 있는 팔미라 근방에는 공군기지가 있다. 전투기들이 유적을 표적으로 삼고서 저공비행을 하기도 한다.
저녁에는 베드윈 천막으로 들어가 그들의 춤과 노래를 구경했다. 천막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보았다. 장작불 위에 솥두껑을 엎어놓고 밀가루 반죽을 그 위에 얹으면 얇게 굽힌다. 코부즈라고 불리는 빵이다. 별 보이는 밤 코부즈를 굽어내는 베드윈 아줌마 옆에 자리하여 굽혀나오는 빵떡을 1달러씩 주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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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폭풍


7세기 초 아라비아의 사막에서 일어난 이슬람이 100년 사이 동서양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13세기 초 몽골 고원을 통일한 칭기즈칸이 50년만에 세계제국을 건설한 것과 비견되는 대폭발이다. 이 대폭발의 엔진은 몽골의 騎馬유목민족과 아라비아의 베드윈 騎馬(낙타)부대였다. 마호메드가 메카를 점령한 것이 서기 630년, 2년 뒤 그는 죽었지만 이슬람 세력은 ‘한 손에 코란, 다른 손에 칼’을 들고 北上, 東進, 西進한다.


사진 : 다마스커스의 재래 시장

641년에 시리아와 페르샤를 정복하고, 643년부터 北아프리카를 치고, 705년부터 7년간 중앙아시아를 복속시키고, 708년부터 7년간 지금의 파키스탄 푼잡 지방을 이슬람화했다. 北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은 지브랄탈 해협을 건너 스페인에 상륙하여 711년부터 4년간의 戰役으로 이를 점령한 뒤 프랑스로 쳐들어갔다. 727년엔 러시아 남부의 그루지아를 치고, 750년엔 지금의 카자크스탄 탈라스에서 고구려 출신 고선지 장군이 지휘한 唐軍과 결전하여 이겼다. 이때 製紙 기술자가 포로로 잡혀 그 기술이 아랍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다.
이슬람 세력은 페르샤에서 만든 우수한 선박으로 인도양, 남지나해로 진출했다. 인도, 인도지나, 말레이반도, 중국에까지 이슬람의 씨가 뿌려졌다. 육지와 바다에서 이슬람 세력은 無敵이었다. 이들은 통일신라기에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무역을 하고 신라를 최초로 서방에 소개했다.
미국을 제외하고 제1관광大國(관광수입 기준)인 스페인의 남부지방은 안달루시아라고 불린다. 이곳의 3大 도시는 코르도바, 세빌리아, 그라나다이다. 무어인(아랍과 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혼혈)이 主力인 우마야드 왕조(수도 다마스커스)의 이슬람 군대가 서기 710년에 이곳에 상륙했다. 그들은 불과 4년만에 이베리아 반도(스페인과 포르투갈) 전체를 점령하였다. 이슬람 세력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1492년에 그라나다에서 철수하여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700년이 넘게 계속된 이슬람의 스페인 경영은 찬란한 문화유적을 남겼다. 스페인이 이탈리아와 프랑스보다도 더 많은 관광수입을 올리는 이유도 이슬람 문명의 유적이 많기 때문이다.
 

사진 : 모스크의 정면

코르도바와 다마스커스


 이때 스페인을 경영한 이슬람 세력의 본부는 다마스커스를 수도로 삼아 90년간 이슬람 세계를 통치했던 움마야드 王朝였다. 요사이 순니파라고 불리는 종파가 중심인 움마야드 王朝는 동서양에 걸친 이슬람 대제국을 건설한 뒤 750년에 시아파가 중심인 압바시드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압바시드 王朝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겨 1258년 몽골군에 짓밟히기 전까지 약500년간 이슬람 세계에 군림했다.
 다마스커스의 움마야드 왕조는 망했지만 왕족의 일파는 스페인으로 피난 와서 코르도바를 수도로 삼고 통치를 계속했다. 당시 이슬람 문명은 과학, 문학, 군사 등 모든 면에서 중세 암흑기를 겪고 있었던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앞섰다. 이슬람은 또 기독교도나 유태인들을 박해하지도 않았다. 사실 유태교, 기독교, 이슬람은 한 뿌리에서 파생된 종교이다. 유태교는 아직도 메시아가 나오지 않았다고 하고 기독교는 예수가 메시아라고 하고 이슬람은 예수는 여러 선지자중의 한 사람일 뿐이고 마호메드가 마지막 선지자로서 왔다고 믿는 점에서 다르다.
 움마야드 왕조가 만든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메조키트)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은 안달루시아뿐 아니라 세계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물이다. 움마야다 왕조가 망할 때 코르도바로 피신해 와서 왕이 된 압둘 라만 1세는 코르도바를 유럽의 中世를 밝히는 등대로 만들었다.  
 코르도바에선 이슬람, 기독교, 유태교가 공존했다. 大모스크에선 세 종교가 함께 예배를 올렸다. 유태교의 시나고그, 카톨릭의 성당, 이슬람의 모스크를 다 겸하고 있는 예배당이었다.
  8~13세기의 약500년간 코르도바는 유럽의 빛이었다. 10세기에 코르도바엔 27개의 학교, 50개의 병원, 900개의 공중목욕탕, 6만300채의 고급 주택, 그리고 8만455개의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인구는 50만 명을 넘었다.
 코르도바는 13세기에 기독교 세력에 넘어갔다. 故地를 탈환한 기독교 세력도 코르도바에서 이슬람과 유태인을 그렇게 박해하지는 않았다(1492년까지). 大모스크도 부수지 않았다. 16세기 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했던 카를로스 5세 시절 가톨릭 세력이 大모스크 한 복판에다가 성당을 만들었다. 이 공사가 끝난 뒤 시찰 나온 카를로스 황제는 개탄했다고 한다. 그는 성당측 사람들에게 말했다.
 “당신들은 평범한 성당을 짓기 위해서 세계에서 여기밖에 없는 명물을 파괴했군요”


사진 : 모스크의 마당

같은 교회 안에서 이슬람, 기독교 공존


尙美會 여행단은 드디어 이슬람의 전성기 수도였던 다마스커스로 들어갔다. 우리는 움마야드 왕조의 작품인 大모스크로 직행했다. 다마스커스의 움마야드 大모스크는 이슬람 세계의 가장 중요한 건물이다. 가톨릭 세계에서 로마의 聖베드로 성당이 차지하는 위치라고 보면 된다. 서열에선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와 메디나 모스크에 다음 가지만 역사성에서는 따라올 건물이 없다.
이슬람 군대가 다마스커스에 들어온 636년 그들은 이 자리에 있던 기독교 교회당의 동쪽 반을 모스크로 사용했다. 이 교회당은 참수당한 세례요한의 목이란 것을 보존하고 있었다. 기독교인들에겐 서쪽에서 예배를 올릴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슬람은 이교도에게 改宗을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이슬람 신도를 일류시민으로 대우하여 특권을 주고, 개종하지 않은 유태인이나 기독교인을 2류시민으로 대우하였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겐 이슬람으로 改宗할 것을 강요했다. 100년 사이 이슬람이 세계 제국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이런 포용성이었다.
다마스커스에서 이슬람 신도들이 늘어나자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 황제는 ‘전무후무한 모스크’를 짓기고 결심한다. 1000명의 石工과 1만2000명의 노동력이 10년간 동원되었다. 이 모스크는 그 뒤 여러 차례의 지진과 화재를 견디어내었다. 보수는 있었지만 原型은 보존되었다. 몽골군대도 다마스커스를 약탈했으나 이 건물을 부수진 않았다. 너무 아름다우면 적이라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모양이다. 아름다움이 가진 카리스마이다.



사진 : 세례 요한의 목 무덤

이 모스크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마당 전면으로 모스크의 위용이 나타났다. 간결하고도 거대한 느낌이었다. 이슬람 대제국의 표상이자 모든 모스크의 어머니가 되는 위대한 건물 앞에서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신라통일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지어진 이 모스크는 아랍의 예술 감각이 총동원되었다. 아치, 모자이크, 코린트식 기둥, 미나렛(기도탑), 수도원.
마당은 150X100m의 규모였고 본당은 140X40m의 길쭉한 건물이다. 신발을 벗고, 여인들은 모스크에게 내어주는 검은 덧옷을 걸치고 들어갔다. 모스크는 사막의 텐트처럼 간소하다. 속은 텅 비어 있다. 여기 저기 신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예배를 올린다. 1300년짜리 모스크는 유물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 쉬는 생물이다. 모스크 중앙엔 세례요한의 목이 안치되었다는 큰 청색 보석함 같은 시설이 있었다. 물론 중동에는 세례 요한의 목을 보존하고 있다는 유적이 많아 眞僞는 알 수 없다.
모스크의 동쪽에는 마호메드의 외손자인 후세인의 무덤이 있다. 그는 이라크에서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 피살되었다. 마호메드의 사위 알리는 시아파의 조상이다. 순니파였던 움마야드 모스크로 이란의 시아파 신도들이 많이 오는 이유가 있다.
기도탑(미나렛)은 세 개인데 하나는 ‘예수의 기도탑’이라고 불린다. 예수가 최후 심판의 날에 나타날 곳이 여기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사진 : 모스크의 예배 풍경



기자는 이 大모스크를 바라보면서 스페인에서 감동했던 그라나다 알람브라 궁전과 코르도바의 大모스크를 떠올렸다. 이 세 건축물은 아마도 이슬람의 3대 건축물일 것이다. 이를 만든 움마야드 왕조의 교양과 안목과 기술은 그리스-로마-비잔틴의 전통과 연결된다. 7~8세기 이슬람이 동서양을 석권할 때 이들은 그리스-로마의 전통을 이어서 예술과 과학 기술도 발전시켰다. 이것이 코르도바나 나중의 십자군을 통해서 유럽에 전해졌고,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되었다. 유럽에선 5세기에 로마를 무너뜨린 게르만족이 기독교화되어가면서 그리스-로마를 잊고 있을 때 이슬람이 중동에서 그 전통을 이어갔던 것이다.
움마야드 왕조에 의해서 이슬람 치하로 들어간 시리아와 그 주변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를 포함한 서양문명의 오랜 요람이었고 문화적 축적이 엄청났다. 그런 토양에서 이슬람 문명이 자라난 것이다. 움마야드 왕조를 무너뜨린 압바시드 왕조는 수도를 바그다드로 옮겼다. 이슬람은 여기서 찬란했던 페르샤 문명과 접목되어 다시 한번 꽃을 피운다. 이란(페르샤) 사람들은 이슬람화된 뒤 유능한 테크노크라트가 되어 중동, 인도, 중앙아시아, 몽골제국의 구석구석에서 중용되었다.
시리아를 여행해보니 이 나라와 국민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품격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건축물, 음식, 옷차림, 상품, 태도 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런 품격이야말로 문화와 역사의 축적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리라. 다양한 민족, 종교, 제도가 8000년의 역사 속에서 충돌, 융합하면서 빚어낸 33개의 문명, 그 後光을 받은 나라이고 사람들이기에 촌스럽지 않고 어른스러운 것이다. 역사는 흉기가 아니라 교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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