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聖地 아헨 성당 이야기

맨 처음 유럽을 통일했던 샬레마뉴 大帝가 묻힌 聖堂(성당)이다.
아헨(Aachen)은 독일의 서쪽 끝에 있으면서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경한 도시이다. 인구는 약25만 명이다. 아헨 工大는 학생이 약3만 명이다. 다른 대학까지 합치면 약5만 명이 학생이다. 작은 도시이지만 역사와 문화의 무게는 엄청 크다. 아헨은 독일사람들에겐 정신적 고향이 되는 몇 도시 중 하나이다. 이 도시의 역사적인 意義는 프랑크 왕국의 샬레마뉴 大帝에서 온다. 샬레마뉴 大帝는 영어로는 찰스, 독일어로는 칼 大帝로 불린다. 서기 768년에 왕이 되어 서기 814년에 죽었고, 아헨 성당에 묻혔다.

이 기간 그는 지금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오스트리아, 스위스, 독일의 서쪽, 이탈리아 북쪽을 통일했다. 프랑크 왕국이라 불렸다. 西로마가 망한 5세기 이후 처음으로 통일제국이 西유럽에 나타난 것이다. 그의 손자代에 와서 프랑크 왕국은 다시 분열되지만 통일된 유럽의 꿈을 심어준 사람이다.
수년 전 유럽공동체(EU)가 유로라는 공통적인 통화를 쓰고 출입국을 자유롭게 하기 시작한 이후 샬레마뉴 大帝는 유럽공동체의 이상을 맨 처음 구현했던 인물로 재평가 받는다. 아헨市는 샬레마뉴 賞을 만들어 유럽통합에 기여한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 지스카르 데스텡 전 프랑스 대통령, 지금은 故人이 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이 상을 받았다.

아헨이란 말의 語源은 라틴어의 Aquis로서 물, 목욕이라는 뜻이다. 로마가 이곳을 지배할 때 온천이 발견되었다. 지금도 수온이 섭씨 70도를 넘는다. 로마 사람들은 목욕을 즐겼다. 독일인들도 그러하다. 1981년에 서울 올림픽을 결정했던 독일 남부의 바덴 바덴이 대표적인 溫泉鄕이다. 샬레마뉴 大帝도 목욕을 좋아했다. 그는 주로 겨울에 아헨에 머물기 시작했다. 자연히 궁정 건물이 들어서고 首都처럼 되었다. 샬레마뉴가 성당의 건축을 명령한 것은 서기 792년이다. 805년에 성당 건물이 거의 완성되어 로마교황 레오3세에 의해서 聖母 마리아에게 獻堂(헌당)되었다.
이 성당은 둥근 천장 위에 돔 같은 8각형의 둥근 지붕이 솟아 있다. 알프스 북쪽에서는 수백년 동안 이 성당이 가장 컸다고 한다. 천장과 지붕은 벽돌로 되어 있다. 천장과 지붕이 벽에 너무 무거운 힘을 주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벽 안에 쇠로 만든 일종의 닻을 여러 개 달아 무게를 분산시키는 방식을 도입했다.
샬레마뉴 大帝는 서기 800년에 로마로 가서 교황 레오 3세로부터 ‘西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를 받았다. 5세기에 서로마가 망한 이후 황제라는 칭호가 처음으로 쓰여졌다(샬레마뉴 大帝는 그런 호칭을 쓰지 않았으나 그는 나중에 나타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첫번째 황제로 간주된다). 힘이 빠진 교황은 샬레마뉴 大帝에게 황제의 권위를 부여하고 그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지금의 터키 수도 이스탄불은 당시 콘스탄티노플로 불리면서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의 수도가 되어 있었다. 기독교계가 동서로 분열되어 대립하던 시절이었다.

독일어로 황제의 성당(Kaiserdom)이라고 불리는 아헨성당은 크기도 하지만 오래된 멋과 권위가 넘친다. 유럽에서 서기 800년 전후 하여 만들어진 성당, 시청 같은 건축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기는 암흑기로 불리던 中世였다. 로마제국을 무너뜨린 야만의 게르만족은 곧 기독교인이 되지만 로마의 문명은 잊어버렸다. 로마가 자랑하던 토목 건축 기술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5~11세기의 중세 건축물은 이렇다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스페인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그라나다, 코르도바, 세빌리아, 톨레도 등지에 거대한 건축물을 세웠을 뿐이다. 때는 전쟁과 파괴의 시절이었다. 이 시절, 기독교 신부들과 유태인들이 겨우 글을 알고 그리스-로마 문명의 불씨를 지켜갔다.
아헨 성당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강력한 王權이 뒷받침하니 로마의 전통을 이은 건축물이 탄생한 것이다. 샬레마뉴 大帝는 정복사업을 펴면서도 민중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열심이었다. 그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많이 썼다. 중세 유럽에는 서민들을 위한 교육기관이 없었다.
서기 936년부터 1531년까지 이 성당은 30명의 독일왕과 12명의 여왕이 대관식을 올리는 聖地가 되었다. 독일왕은 神聖로마제국의 황제를 겸했다. 신성로마제국은 독일을 중심으로 한 느슨한 연방국가였다. 여러 제후들이 선거를 통해서 황제 겸 독일왕을 뽑았다.
샬레마뉴 대제는 서기 814년에 죽자 이 성당에 묻혔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오토 3세는 서기 1000년에 샬레마뉴의 관을 열게 했다. 그때까지도 大帝의 屍身(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오토 3세는 샬레마뉴의 이빨 하나를 뽑아 내고 棺을 다시 닫았다. 샬레마뉴의 蔭德(음덕)을 보려는 생각이었다. 1165년 이번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 1세가 샬레마뉴의 시신을 발굴하여 그를 聖人으로 만들고 새로운 관으로 옮겼다. 샬레마뉴의 聖殿으로 불리는 이 관은 1215년에 완성되었다. 호화를 극한 금세공으로 만든 집 모양의 관이 이 성당 안에 있다.
聖人으로 만들 권한은 교황만이 가졌다. 바바로사 황제는 교황의 간섭을 받기 싫어했다. 오로지 권력의 힘으로 교황청의 公認 없이 샬레마뉴를 聖人으로 조작한 셈이다. 棺의 표면에는 예수, 교황, 제자, 샬레마뉴, 聖母 마리아 등이 새겨져 있다. 예수를 중심으로 그린 구도가 아니라 샬레마뉴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아헨성당은 중세에 중부 유럽의 가장 중요한 巡禮聖地가 되었다. 1496년에 약14만 명이 이 성당을 다녀갔다. 나치 시절이던 1937년에도 약80만 명이 참배했다. 특히 헝가리 사람들이 많이 참배한다. 샬레마뉴가 지었던 궁정터에는 지금 14세기에 세운 아름다운 市廳舍가 있다. 아헨 성당의 보물은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것으로 꼽힌다. 여기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들이 선물을 많이 한 덕분이다. 1349년 이후 7년에 한번씩 공개하는 4대 보물이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의 외투, 세례요한의 옷, 아기 예수의 襁褓(강보)와 허리를 두르는 옷. 과연 眞品인가 하는 의문을 굳이 가질 필요가 있을까? 종교로 과학을 누르고 과학으로 종교를 해체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1978년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제도를 만들었을 때 맨 처음 12개를 지정했다. 3개가 유럽에 있었다. 그중 하나가 아헨 성당이었다. 게르만족의 정신, 神聖로마제국의 권위, 유럽공동체의 이상이 스며 있는 건물이란 점에서 특별히 優待(우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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