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의 군대와 국민

이스라엘이 던지는 질문:『대한민국은 국가인가, 협회인가』
자주국방의 나라 이스라엘의 군대와 국민 下


이스라엘이 던지는 질문:『대한민국은 국가인가, 협회인가』

*부상자를 절대로 전장에 버려 두지 않는 나라, 포로·실종자에 대해서는 지구 끝까지라도 추적하는 나라, 강대국의 감시망 속에서도 核폭탄을 수백 개나 만들어낸 나라, 대령 봉급이 수상보다 많은 나라, 해외에서 核비밀을 폭로한 사람을 납치해 오라고 주장하는 언론을 가진 나라, 테러리스트와는 협상 없다는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 엔테베 특공작전을 감행한 나라, 그리하여 피로써 평화를 산 이스라엘. 그들은 국가와 국호까지 포기한 한국의 굴욕적 쌀 북송(北送)을 어떻게 볼까

애조 띤 유행가

예루살렘에 있는 히브류 大學으로 가는 차중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스라엘 유행가를 듣고 기자는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의 흘러간 옛 노래와 흡사한 멜로디와 창법(唱法)이었기 때문이다. 가사만 한국말로 바꾸면 누가 들어도 한이 서리고 애조 띤 뽕짝이었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우러나와 체질화된 「깊은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두 나라 대중가요임을 기자는 그 뒤에도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었다.

1950년대 우리 유행가에 6·25의 비극을 담은 것이 많았듯이 이스라엘 유행가엔 나치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을 소재로 한 가사가 많다. 「재와 먼지」(Ashes and Dust)란 제목의 앨범엔 「트레브린카 작은 역」이란 노래가 있는데 트레브린카 수용소로 끌려가는 유태인들을 상징화한 이런 가사가 있었다. 「때로는 인생여정이 5시간 45분 만에 끝나고, 때로는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계속된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를 연상시키는 곡이었다.

천성적으로 음악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유태인과 한국인은 닮았다. 유태인 출신의 음악天才들을 꼽으라면 지면(紙面)이 모자라지 이름이 모자라지는 않는다. 지난 4―5년 사이 러시아에서 살던 유태인 약 50만 명이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위해서 이민 왔다. 텔 아비브의 벤 구리온 공항에 내리는 러시아계 유태인들 중엔 바이얼린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바이얼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피아니스트로 봐야 한다』는 농담까지 생겼다.

히브류대학 트루만 연구소에서 만난 벤 아미 실로니(Ben Ami Shillony) 교수는 日本역사 전문가이다. 60代의 나이에 체구는 일본 사람같이 작고 웃는 표정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한 학자였다. 네 차례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다. 실로니 교수는 日本에서 교환교수로 일하는 사이 한국을 처음 찾았던 1982년의 감동을 이야기했다. 한국은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한국인은 日本人보다도 훨씬 마음 편한 상대였으며 유태인과 한국인 사이의 공통점이 너무나 많은 데 놀랐다고 한다(기자가 이스라엘에 와서 그런 공통점을 발견하고 놀란 것과 똑같은 체험을 한 셈이다).

허약한 상무(尙武)전통, 그러나 건국 과정에서 군사력 배양

1989년 11월 실로니 교수는 건국대학교에서 열린 「국민국가와 세계평화」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에서 한 논문을 발표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건네준 논문 복사본의 제목은 「유태인과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에서 나타난 국가와 평화의 중심적 역할」이었다. 그는 「두 민족은 늘 전사(戰士)보다도 학자를 더 존중하였고 물리적 허약성을 도덕성으로써 극복하는 능력을 가진 점에서도 닮았다」고 지적했다. 유태인과 한국인은 유럽이나 日本 등 대부분의 근대 국가와는 달리 「무사(武士)계급의 지배집단화」라는 전통을 갖지 않은 아주 특이한 민족이란 것이다.

군사적 전통이 취약한 두 민족은 그 때문에 나라를 잃었지만, 2차세계대전 이후 꼭같은 시기에 국가를 건설하고 지켜가는 과정에서 세계가 놀랄 만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평화를 지향하는 민족이 완강한 병사로 바뀐 것」은 물론 독립국가로서 생존하기 위한 결의의 결과였다. 실로니 교수는 「유태인과 한국인은 국가의 목표를 평화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일단 평화를 달성한 다음엔 군사조직은 약화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실로니 교수는 「한국인의 위대한 성취가 전선(戰線)이 아니라 공장에서 기록되었던 것처럼 이스라엘人의 위대한 성취도 하이테크산업, 대학, 그리고 음악당에서 이루어졌다」고 썼다.

『유태인의 첫 인사말은 히브류어(語)로서 「샬롬!」인데 「평화」를 의미합니다. 한국인의 「안녕하십니까」도 마찬가지로 평화에 대한 희망을 표현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가까운 장래에 우리 두 민족이 그 염원을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군대가 이스라엘을 만들어냈다

실로니 교수의 관찰은 형식면에선 맞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한국과 이스라엘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두 나라가 尙武정신이 부족했던 점에서는 같지만 건국 과정에서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과 자세는 달랐다. 이스라엘人은 건국前 영국의 통치下에서 이미 비밀군사조직을 만들어 아랍人들과 대적하면서 키부츠(집단농장)를 지키고 건국을 준비하다가 2차세계대전 뒤 全아랍국가를 상대로 한 독립전쟁에서 당시 인구의 1%가 전사하는 대가를 치른 다음 나라를 세웠다. 국가가 생기고 군대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국민군이 국가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국의 독립은 강대국의 선물이었고 군대조직도 미군(美軍)이 만들어주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국민 속에서 솟아났고 한국군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때도 국토방위의 주도권을 미군에게 내주었고 휴전 뒤 지금까지도 주한 미군의 지도하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다. 이스라엘 군대는 인구비(比)에서 아랍에 대하여 1대 30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여섯 차례의 전쟁에서 한 번도 외국 군대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한국군은 또 두 번의 쿠데타를 통해서 정권을 잡는 경험에 의해 지휘부가 국토방위보다는 국내 정치에 더 신경을 쓰는 체질로 변모하였다.

이스라엘은 과거의 나약성에 대한 처절한 반성 위에서 주체적 결단에 의하여 군대를 만들었다면 한국은 피동적이고 의존적인 심리기반을 가진 군대를 갖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군대를 대하는 양 국민의 자세에도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군의 대령 이상은 수상보다도 더 많은 월급을 받는다. 군인의 퇴직 후 연금(年金)은 일반공무원의 두 배이다. 군인이 전사했을 때 친척들을 인터뷰하여 그 사진을 보도하는 것은 금지돼 있다. 전사한 군인의 시체도 보도 금지. 군인이 전사한 그 작전의 타당성을 정치인이 비판하는 것도 금기 중의 하나다. 전사자의 가족에게 그 죽음이 헛된 것이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에서다.

모든 전사자가 전장에서 남긴 수필, 시, 편지는 유고집으로 편집돼 끊임없이 출판되고 있다. 1991년 4월의 공식발표에 따르면 이스라엘 건국 이후 1만7150명이 전사하고 5만6272명이 전상(戰傷)했다. 이들 가족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성골(聖骨)대우를 받는다. 전장에서 부상자는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후송시켜야 한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열 명을 희생하는 것도 감수하려는 자세이다.

조국은 포로를 잊지 못한다

이스라엘에서 출판되는 연감은 1982년 레바논 전쟁에서 포로가 된 공군항법사 론 아라드와 네 명의 실종자에 대한 구출 노력의 진행상황을 반드시 언급한다. 지난 해 5월21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시리아가 통제하고 있는 베카 계곡의 한 가옥을 급습하여 시어파(派) 테러조직의 간부인 무스타파 디라니를 납치, 헬리콥터로 싣고 와서 감옥에 집어넣었다. 디라니는 아라드를 데리고 있다가 30만 달러를 받고 이란 혁명수비대에 넘겨주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포로나 조국에 의해 결코 잊혀지지 않고 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6.25 휴전 후 북한이 납치해간 어부 400여명에 대한 한국 정부·언론·국민들의 무관심과 한 번 비교해 보라.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려는 의지력을 보일 때만이 협회나 기업과는 다른 특별한 공동체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럴 때만이 국가는 국민에게 충성을 요구할 수 있는 권위를 갖게 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들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장군들의 이름을 외고 있었다. 1982년 레바논 베카 계곡 상공에서 벌어진 시리아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87대(격추된 시리아공군기) 대 0(격추된 이스라엘 공군기 없음)의 스코어를 기록했던 공군사령관은 누구이며 1976년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은 누구이고 나치독일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납치해온 모사드의 간부는 누구라는 식으로 줄줄 외는 것이다.

이스라엘 공군에선 한때 조종사들을 상대로 「홀로코스트 퀴즈」문답을 실시하여 상을 주곤 했다. 어느 조종사가 유태인 대학살에 관하여 가장 정확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행사였다. 질문은 이런 식이다. 「트레브린카 수용소에서 몇 명이 학살되었지요」 「부켄발드 수용소에선?」 「리비아에 만들어진 수용소엔 몇 명이 수용돼 있었나요?」

특공작전의 철학

학살과 전쟁은 이스라엘人들에겐 악몽과 추억뿐만이 아니라 문화이고 생활 그 자체이며 항상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게 하는 각성제이다. 엔테베 작전의 특공대장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은 현장(우간다 엔테베공항)에서 인질 구출작전을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이 작전의 유일한 전사자가 지휘관이었다는 것은 장교들이 앞장을 서 장교사망률이 유달리 높은 이스라엘 군대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동생 빈야민 네탄야후는 야당인 리쿠드당(黨)의 당수로 있다. 그는 야당 당수로서가 아니라 「특공대장 요니의 동생」으로 더 유명하다. 엔테베작전을 감행한 것은 이스라엘이 지금까지도 지키고 있는 중요한 원칙 때문이었다. 그 원칙이란 테러리스트와는 어떤 협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군과 정보기관의 특공작전은 그 발상의 기발함과 행동의 대담성에 있어서 「다이하드」와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 이들 특공작전은 이스라엘식(式) 생존방식을 보여준다. 학살과 핍박의 희생양으로 오랫동안 경멸받던 나약한 유태인이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신생국가 이스라엘의 결의에 찬 행동, 또 그러한 과거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건너온 다리에 불을 질러버리는 모진 자기 다짐인 것이다. 그들은 국제법을 어기고 국제여론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특공작전도 사양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게 해야만 국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다. 600만 유태인이 학살될 때 당신네들은 어디에 있었는가』라고 쏘아붙이면서 『믿을 사람은 우리뿐』이라고 서로를 일깨우는 사람들이다.

애국심이 살아 있는 나라

기자는 10일간의 이스라엘 취재가 재미있고 마음 편한 체험이었다. 한국에선 아무런 감흥도 유발하지 못하는 단어가 돼버린 「애국심」이 이스라엘에선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란 말도 한국에선 일부 정치인과 위선자의 선동가들에 의해 그 의미가 크게 퇴색돼 버렸지만 이스라엘에선 입술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총구를 통해서, 자기 희생을 통해서 생동하는 가치로 구현되고 있었다. 국가 보위와 민족의 생존을 위해서 지도자·국민·군대가 똘똘 뭉쳐 머리와 가슴을 맞대고 열정을 불태우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자가 무엇보다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많은 동조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기자는 대한민국이 독립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국가가 아니라 협회에 가까운 조직이라는 의혹을 늘 가지고 있었다. 경제력에 있어서는 수십분의 1에 불과한 북한과 상대하면서도 외국 주둔군에 자신의 국방을 의존하고 있고 그러면서도 부끄러움이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 한국의 지도층. 그들과 만날 때마다 기자는 싸우다시피 해왔다.

『자주국방을 못하는 나라는 국가가 아니라 식민지이며 국민은 노예 근성을 갖게 된다』
이런 말에 동조자를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스라엘에서 나는 너무나 많은 동조자를 발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본 기자의 주장은 국수주의적인 주장도 탁견도 아닌 상식 중의 상식이었다. 주한 미군이 철수할까봐 전전긍긍해 하면서도 주한 미군의 범죄에는 과장과 선동으로써 대하는 분위기. 남의 희생을 이용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면서도 미군에 대하여 고마워하기는커녕 콤플렉스를 폭발시키는 우리 사회 일각의 병적인 분위기. 우리가 건강한 정신으로, 책임있는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주한 미군의 철수를 우리가 먼저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 왔던 기자는 이스라엘에 와서 비로소 그런 생각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국을 잊은 지 오래인 국회

이스라엘의 제일 가는 국방전문 대기자(大記者) 지브 시프씨의 충고-『외국군이 장기주둔하면 나라의 단합이 깨지고 국민의 정신력이 해이된다』는 말은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외국군 주둔의 정신적 폐해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계층은 서민대중이 아니라 사회의 지도층이다. 생활에 바쁜 서민들은 관념과 위선에 잘 유혹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의 국회는 조국을 잊은 지 오래이다. 북한 核문제 같은 민족의 사활(死活)이 걸린 사건을 해외토픽 보듯이 한다. 북핵(北核)문제에 대한 청문회도, 그 어떤 대북(對北)결의도 없었다. 국민세금이 40억 달러나 들어가게 돼 있는 對北경수로 지원에 대한 본격적인 검증도 없었다. 對北쌀지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회의 기원은 납세자의 권익보호에서 출발했다는 정치학의 원론도 모르고 있는 한국의 국회의원. 그들에게 안보(安保)문제는 인기가 없는 곡목(曲目)이다. 한국, 이스라엘과 같은 전쟁下의 국가에서 정치의 제1주제는 안보문제여야 하며 정치행위는 그것을 중심축으로 하여 전개되는 게 상식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은 안보(安保)란 본질적 국정(國政)문제를 미군에게 맡겨버린 뒤 정권, 당권, 당선 같은 원초적 권력게임에 집착하고 있다. 그 결과는 정치의 저차원화, 저질화이다.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이스라엘의 정치게임과 지역감정, 당파, 인맥, 권력에 눈치보기, 모함, 약점잡기 같은 키 워드로 상징되는 한국의 정치는 그 수준과 성실성에서 이미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에서 접하는 신문·방송·잡지·책들도 온통 안보를 제1주제로 삼고 있었다. 이스라엘-시리아 평화협상의 조건을 둘러싼 격론,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병사가 전사한 사건, 요르단 서안(西岸․West Bank)의 점령지에서 발생한 소요, 예루살렘의 아랍인 땅을 이스라엘 정부가 수용한 사건…. 텔 아비브의 서점에 갔더니 이자크 라빈 수상과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의 자서전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노벨 평화상도 공동으로 받고 집권 여당(노동당)의 2大 지주이기도 한 두 사람은 30여년간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다. 지금은 콤비가 되어 이스라엘과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요르단, 시리아와의 평화협상을 정력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두 사람의 회고록은 이스라엘 정치의 중요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재미있게 읽혔다. 우선 두 회고록의 내용이 전쟁, 건국, 외교, 테러, 核개발, 비밀공작(工作) 등을 중심으로 하고 있어 숨막히는 긴장감을 자아낸다. 라빈, 페레스 모두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쓰고 있다. 정치인이 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특히 시몬 페레스는 자신이 그 책임자로 일했던 核무기 비밀 개발에 대해서 한 장(章)을 떼내어 자세하게 쓰고 있다.

이스라엘은 1956년 이집트의 나세르에 의한 수에즈운하 국유화 사건 때 프랑스·영국과 합세하여 對 이집트 작전에 가담한 것을 기회로 삼아 프랑스와 비밀核개발 협정을 체결했다. 프랑스 기술의 도움으로 네게브사막에 재처리시설, 원자로 등 핵무기 개발 단지를 만든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인 벤 구리온 수상은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나 골다 메이어(뒤에 수상 역임) 등 반대자들도 만만치 않았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배짱

페레스는 회고록에서 이 核개발 과정을 설명하면서 한번도 「核무기 개발」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지만 그 대신 「核무장 선택권」이란 의미이지만 사실상 핵개발을 뜻하는 「뉴클리어 옵션」(Nuclear Option)이란 용어를 썼다. 페레스 외무장관은 이스라엘이 비밀核개발을 성공시키는 과정에서 돌파해야 했던 여러 난관들을 설명했다. 그 중의 하나. 페레스 당시 국방차관이 1959년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방문하고 있는데 벤 구리온 수상으로부터 남은 일정을 취소하고 급히 귀국하라는 연락이 왔다. 비상사태가 발생한 줄 알고 돌아오니 벤 구리온 수상, 골다 메이어 장관, 해외 정보기관인 모사드 책임자 하렐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상의 설명인즉, 소련의 첩보위성이 네게브 사막의 核시설 건설공사 현장을 촬영했고 이 사진을 갖고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이 지금 워싱턴으로 날아갔다는 것이다. 포스터 덜레스 美국무장관에게 그 사진을 들이대고서 미국과 소련이 힘을 합쳐서 이스라엘에 대해 核개발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넣으려 하는 것 같다는 정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특사를 미국으로 보내 간청을 해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페레스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우리가 미리 이실직고하면 약점을 잡히게 된다. 그냥 가만히 있자. 도대체 소련 첩보위성이 찍은 사진에 뭐가 나오나. 땅을 판 구멍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딱 잡아떼면 그만이다』

이런 취지의 설득이 통해서 이스라엘 정부는 김일성식으로 얼굴에 철판을 깔고서 核개발을 계속 추진해 지금은 核강대국이 되었다. 이스라엘은 이미 1960년代에 核폭탄 제조에 성공했고 지금은 약 400개의 탄두를 갖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운반할 장거리 미사일 제리코 1, 제리코 2호도 실전용으로 배치된 지 오래이다. 小國이 강대국의 감시망 속에서 비밀리에 核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은 核무기 개발에는 성공했으나 국제적인 압력으로 경제난에 봉착, 결국 核무기 제조는 보류하고 있는 인도를 비롯, 박정희의 좌절과 북한의 경우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이 유독 核무장에 성공한 것은 벤 구리온과 페레스 같은 배짱 있는 정치인의 리더십과 자주국방에 대한 정치권의 전면적(全面的)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한국처럼 미군에 국방을 의존하고 있었다면 核개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안보(安保)를 정치의 제1주제로 삼아야 정치수준 향상

1970년대 韓美국방장관 회담 때 럼스펠드 美국방장관은 서종철(徐鐘喆) 한국 국방장관에게, 『만약 한국이 핵개발을 시도한다면 미국은 한미 상호 방위조약의 폐기를 포함한 외교·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의 양국관계를 전면 재검토할 것이다』고 통보한 적이 있다. 박정희의 核개발 등 자주국방 의지에 대하여 미국 편에 서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이가 바로 김재규(金載圭) 당시 정보부장이었음은, 그의 항소이유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카터 행정부가, 자주국방 노선을 추진,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박정희에 대해서 한국內의 일부 재야 및 정치 세력을 조종하고 인권외교라는 위선적 명분론을 들고나와 코너로 몰았던 것도 이스라엘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시프 記者가 지적했듯이 외국 군대가 주둔하면 한국처럼 식민지 근성이 남아 있는 나라에선 외세에 조종되는 세력이 나타나게 된다. 조국에의 배신과 국론분열이 빈발하여 먼저 내부적으로 국가의지가 꺾여버리게 되는 것이다. 페레스가 보인 배짱은 국내적으로 단합된 주권국가만이 부릴 수 있는 오기이다.

페레스와 라빈의 회고록에는 서로를 비판하는 대목이 수십 군데나 된다. 엔테베 작전을 설명할 때 페레스는 라빈 수상이 테러리스트와 협상하려 했다고 꼬집었다. 라빈 수상은 국방장관이던 페레스는 자신이 지시를 하기 전에는 군사적 해결방안에 대해서 검토도 하고 있지 않더라고 폭로했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이순신(李舜臣)이 원균(元均)을 여러 번 비난하고 있는 것을 연상시킨다. 페레스와 라빈이 이런 글을 써놓고 어떻게 서로 얼굴을 대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그런데도 두 라이벌은 지금 환상의 콤비가 되어 평화협상을 주도하고 있다.

이스라엘 의회에서의 격렬한 토론은 우리 국회를 무색케 할 정도라고 한다. 그렇지만 安保라는 큰 테두리에 대해서는 이견과 감정을 접어두고 대승적으로 협조하는 것이 이스라엘 정치 풍토이기도 하다. 安保라는 큰 주제에 대한 합의만 있으면 아무리 정쟁이 치열해도 국기(國基)를 흔들지는 않는다.

국군엔 장군이 없다?

한국 정치의 저질화는 정치의 본질인 국가의 생존에 관련된 사안을 멀리한 당연한 귀결이다. 정치인의 크기는 그가 다루는 사안의 크기에 비례한다고 볼 때 安保를 정치의 주제로 끌어안지 않는 한 한국의 정치인들 중에선 「정치가」(Stateman)가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의 정치인들이 한국의 安保문제를 남의 나라 문제 보듯이 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 安保를 미국이 책임져 주겠지 하는 요행심과 의타심 때문이다. 한국군 지휘부도 마찬가지이다. 전시(戰時) 지휘권과 對北전략 정보를 장악하고 있는 주한(駐韓)미군사령관에게 전쟁수행의 임무를 맡겨놓고 그들은 자신의 직위를 즐기고 있다. 한국군 출신의 한 예비역 장성은 이렇게 털어놓았다.

『저는 한국군 중에서 장군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어요. 장군이 뭡니까. 전쟁에 관한 최고 수준의 전문가로서 깊은 군사 지식과 리더십을 배양해야 하고 눈만 뜨면 전쟁에 관해서 공부·훈련·대비하는 사람이 장군인데 그런 사람 없어요. 반면에 주한 미군의 지휘관들은 전문직업인으로서 스스로를 연마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특히 駐韓미군 사령관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한국을 방어하라는 것이므로 과연 그 임무를 수행할 만한 무기체제가 돼 있는지, 군의 사기는 충분한지 그야말로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니 한국과 미군 장성들끼리 만나 이야기하면 10분 이상 대화가 안돼요. 프로와 아마추어의 대좌 같다니까요』

기자도 직업상 한미 양국군의 간부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한국군 장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호기 또는 으스댐이다. 북한 인민군에 대한 과잉자신감까지도 감지된다. 그런 자신감에 걸맞는 전문지식과 군인의 자세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김영삼(金泳三) 정부의 출범 이후엔 그런 호기도 「주눅」으로 바뀌는 것 같다. 언론과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군인만큼 추한 모습은 달리 없다. 우리 군의 주적(主敵)은 분명 북한 인민군이다. 한국군은 불행히도 1대 1이 단독 결전으로써 인민군을 굴복시킨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부는 국방목표를 「적의 침략」에서 「외부의 군사적 위협」이라고 애매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김영삼 정부의 탈냉전 주장에 영합하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인민군에 대한 필승전략을 짜기도 힘이 부치는 판인데 통일 이후의 군사전략을 구상한다면서 日本을 가상적으로 설정한 문서가 공개되고, 전방위 방어 작전에 필요하다면서 사치스러운 무기체계를 도입하려는가 하면, 급기야는 좌파 수정주의적 사관(史觀)을 그대로 반영한 6․25 포스터까지 등장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에 나타난 한국군 지휘부의 이런 타락상은 대한민국이 또 다시 이씨조선(李氏朝鮮)의 문관(文官)우위문화(文化) 속의 문약한 국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키고 있다.

조국을 저주하는 사람들

김영삼 정부는 출범 이후 文民이란 왜색용어를 내세우면서 지난 50년간 한국인들이 피·땀·눈물로써 쌓아올렸던 역사·국가·군사전통을 약화시키는 행태를 보여 왔다. 김영삼 정부는 그들의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을 「내부의 적」이니 수구세력으로까지 표현하여 국가의 단합을 약화시키는가 하면(文民이란 말이 벌써 서민과 군인을 배제함으로써 분열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文民정부」는 마땅히 「국민정부」로 바뀌어야 한다) 「내부의 적」에 대해서는 가혹하고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비굴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한국인의 경의감을 건드렸다.

이번 6․27선거에서 보수·중산층이 결정적으로 돌아선 것은 金대통령의 정책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역사관과 국가관이 우리 현대사회의 성취와 국민의 자존심과 국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金대통령은 지난해 부친에게 인사하는 자리에서 『5천년 썩은 나라를 바로잡기가 참으로 힘들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국가와 역사의 대통(大統)을 이어가는 대통령이 자기 조상의 과거를 전면적으로 부정·비방하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金대통령의 정치적 대부(代父)인 고(故) 장택상(張澤相) 회고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한 번도 『조선사람이니까 안돼』식의 자학적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이승만에게 있어서 한국은 비판의 대상이 아닌, 무조건적인 헌신·충성·애정의 대상이었다는 의미이다. 金대통령의 말대로 5천년 동안 썩은 나라였다면 오늘날 GNP 세계 12위의 대한민국은 하늘에서 떨어졌단 말이 된다.
5천년 동안 썩었던 것은 위선적인 명분론으로 백성을 착취하고 국가의 야성을 거세함으로써 자주·자위·자립의지를 말살했던 지배층-양반, 즉 文民들이었다. 金대통령의 이른바 文民정부가 역사의 정체와 망국(亡國)을 가져왔던 그런 文民의 전통으로 이 나라를 회귀시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라는 게 6․27선거의 한 메시지일 것이다.

한국 현대사와 군사 文化, 그리고 이른바 수구세력에 대해서 가혹할 정도로 비판적인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서도 그런 태도를 견지했더라면 한국인의 정의감정은 이 정도로 반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의감이란 균형감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金대통령은 취임 직후 이인모(李仁模)노인을 보내주었다. 곧 북한으로부터 좋은 답장이 있을 것 같다고 기대했지만 납북어부가 아니라 核공갈이 날아왔다.

김영삼 정부는 그 核공갈에 대해 40억 달러짜리 경수로 지원으로 대응했다. 40억 달러를 바치고도 한국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보장도 확실하지 않는 가운데 이번엔 서둘러 쌀 15만t을 무조건 주기로 결정했다. 아무 대가도 없이 북한에 사람·쌀·돈을 주기만 하고 있다. 金대통령이 자선단체의 長이라면 그것도 괜찮은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북한의 남침으로 수백만의 국민을 잃은 적이 있고 지금도 재(再)남침 위협에 노출돼 있는 국가의 지도자가 공갈과 위협에 군사적으로 맞섬이 없이 금품을 주기만 한다면 그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라 조공이 된다.

쌀을 주면서 金대통령은 국가이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조건을 포기하였다. 국가(國歌)·국기·국호는 국가의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이 상징의 사용을 둘러싸고 전쟁과 외교관계 단절까지 일어나기도 한다. 북으로 보내는 쌀에 국호표시를 하지 않고 싣고 가는 배(배는 영토이다)에 국기를 안 달기로 합의해 준 것은 金대통령이 스스로 국가 지도자임을 포기한 것과 같다(1984년 수해 때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공개적으로 원산지 표시가 된 물자를 당당하게 보냈지 않았던가). 이로써 북한은, 남한이 국가가 아니라 조선인민공화국의 미수복 남반부 지역이라는 그들의 일관된 주장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金泳三 대통령이 대내적(對內的)으로는 한국 현대사(現代史)를 부정적으로 보고 대외적(對外的)으로 국가의 권위를 양보하고 있는 이 2중적 상황은 상호연관성 아래에 있다. 국가는 역사의 산물(産物)이다. 그릇된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잘못된 국가관을 파생시킨다. 자기 역사를 저주하는 사람은 조국도 가볍게 보게 돼 있다.

주석궁을 조준한 뒤 對北 협상에 임한다면…

이스라엘은 核강국이면서도 국방정책은 철저하게 재래식 무기 중심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군비증강 태세를 보면 核무기는 전혀 계산에 넣지 않고, 어떤 전쟁에서도 재래식 무기로써 결판을 낸다는 자세를 굳게 지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核을 믿고 부리는 태만 같은 게 없다. 安保란 2중, 3중의 안전장치라야 한다는 신념의 표현이리라. 기자는 이스라엘 북부지역 산정(山頂)에 있는 라파엘社의 미사일개발 본부를 방문했다. 라파엘사가 개발한 공대공(空對空)미사일 파이턴(Python)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서 미국 공군에 수출하고 있다. 이날 브리핑에서 기자의 흥미를 돋운 것은 공대지(空對地)미사일 포파이(Popeye)였다. 1985년부터 실전용으로 미국 공군에만 수출하고 있다.

이 미사일은 한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는 팬텀(F-4)이나 F-16에도 장착할 수 있다. 사정거리는 100km나 된다. 이것을 발사한 전투기는 뒤로 물러나 안전한 상공에서 텔레비전 모니터로 포파이를 목표물로 정확히 유도한다. 초속 300∼400m로 날아가는 이 미사일은 입력된 좌표와 사진을 쫓아간다. 예컨대 평양 주석궁의 사진을 입력시키고 2층 오른쪽 두 번째 창문을 표적으로 선정해 놓으면 정확히 그 창문을 때릴 수 있다고 하여 「창문의 정확도」(Accuracy of window)로 불리고 있었다.

『한국에도 팔 수 있는가』하고 물어 보았더니 『미국內 합작회사를 통해서 살 수도, 우리로부터 직접 살 수도 있다』는 대답이었다. 가격은 1개당 50만∼100만 달러라고 했다. 對北 쌀 지원 15만t의 시가가 약 2000억 원이라니 그 돈이면 수 백 개의 포파이를 살 수 있다는 계산이 생긴다. 포파이 미사일은 고급 표적(High valued strategic target)에 대해서 사용하는 전략 무기이다. 인민군사령부, 영변核시설, 주석궁, 金正日의 별장이나 숙소 같은 전략적 표적물에다가 이런 미사일을 조준시켜 놓는다면 對北협상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적 무기를 살 수 있을 만한 의지력을 한국의 국가지도부가 갖고 있느냐일 것이다. 북한의 스커드 미사일 공격을 막기 위한 방어용 패트리어트를 駐韓미군이 들여오는 것조차 북한을 자극한다는 궤변으로써(그것도 우리 외무장관까지 맞장구를 치고) 지지한 적이 있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과 언론인들은 남북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책임을 남측에 전가시키는 「블레임 코리아 퍼스트」(Blame Korea first), 즉 조국을 먼저 비난하고 보는 위선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對北관계에서 한국이 깡패에게 멱살 잡힌 사람처럼 질질 끌려 다니고 있는 근본적 이유는 국가 지도부가 의지력 싸움에서 북한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40억 달러 어치의 경수로 지원이나 2000억 원어치의 對北 쌀지원도 본질적으로는 그런 굴복에 따른 조공품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 돈으로 차라리 군비증강을 한 뒤에 북한에 대해서 『답답한 쪽은 너희들이니…』하고 덤덤하게 기다리는 것이 우리를 위해서도 북한을 위해서도 더 나은 정책이었을 것이다.

북한의 절박한 요구에 의해서, 그들이 고마운 심정으로 우리의 지원을 받아들일 때 북한 내부에 변화가 오는 것이지 전리품처럼 가져갈 때 체제강화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노예의 화법(話法)

남북대결에선 남한이 GNP 기준 세계 12위의 그 거대한 경제력을 군사력으로 변화시킬 때 북한의 굴복은 필지의 사실이 된다.「경제력→군사력」으로의 전환에는 국가 지도부의 의지와 국민의 희생정신이란 변환 스위치의 작동이 필요하다. 군비증강과 자주국방을 위한 부담을 국민된 당연한 도리로서 끌어안고 가려는 국민들은 많지만 북한의 억지와 국내의 좌익세력과 미국의 압력을 막아낼 수 있는 페레스-라빈과 같은 국가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제발 받아주세요』라는 자세로써 수십억 달러의 국민세금을 북한에게 갖다 바치는 신세가 된 것이 대한민국인 것이다.

페레스와 라빈, 그리고 기자가 만난 이스라엘 정치인과 군인들의 話法과 文法은 한국 정치인들의 그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金泳三 대통령이 자주 쓰는『우리는 북한을 흡수통일할 의지도 능력도 없다』는 말이나 金日成 사망 때의 토로인『정상회담이 무산되어 아쉽다』는 식의 어법(語法)은 그들의 사전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북한이 核개발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대응개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면 한국에선 철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데 이스라엘에선 상식이 되는 말이다. 한국국방장관은『북한의 핵시설에 대해서 엔테베 작전 같은 것도 연구하고 있다』고 발언했다가 정치·언론계로부터 집중포화를 맞았는데 이스라엘에선 행동으로써 보여주었다(1981년 이라크의 오시라크 원자로 폭격).

한국 식자층에선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을 하면 안된다』는 것이 아주 고매한 도덕성과 신중함의 표시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레이건 美대통령이 현직일 때 공개석상에서 소련에 대해서 『악의 제국(Evil Empire)』이란 표현을 사용한 뒤 군비증강으로 나가 결국 소련체제의 자체붕괴를 유도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安保문제와 관련한 한국 지도층의 話法은 독립국가 아닌 식민지 근성의 주눅 든 눈치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북한에 대한 엄정한 자세도, 치열한 대결자적 자세도, 미국에 대한 주권국가로서의 자주적 태도도 발견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話法을 구사하는 바람에 국민들은 정부를 불신하다가는 경멸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남북대결에 중립(中立)은 없다

오히려 북한이 이스라엘 지도부와 비슷한 수준의 話法으로써 남한을 갖고 놀려고 하고 있다. 지난해의 불바다 발언과『경제봉쇄를 하면 전쟁하겠다』는 취지의 공갈은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다. 한국의 엘리트들이 조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공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적 발상과 언어를 버리고 주인(主人)의 언어감각을 배워야 할 것이다.『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朴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도 이제 19년이나 된다. 민족중흥의 기수가 쓰러졌을 땐 침묵하던 이들이 민족의 원수가 죽자 애도하자고 나서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든 것은 지난 해이고 조문론을 주장한 정치인들이 야당의 지도층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1995년 한국의 오늘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조국을 저주하는 발언은 자유롭고 조국을 옹호하는 발언은 부자유(不自由)하다. 애국심과 국가주의는 냉소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이다. 그런 분위기는 언어를 통해서 확산된다. 北核문제로 북한의 위협이 고조된 바로 그 시기에 한국언론은 美-北회담을 北-美회담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朝鮮日報-月刊朝鮮, 서울신문, KBS 정도가「美北」을 견지하고 있다. 北核회담에 임하는 북한의 대표는 동정의 대상인 人民이 아니라 노동당 지배층이다. 우리 헌법 체계가 규정하고 있는 反국가단체의 간부들이다. 그들을 우리의 혈맹인 美國보다 앞자리에 놓는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예의도 아닐 뿐 아니라 교육상으로도 좋지 않다.

金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어떤 이념이나 우방보다도 민족이 더 중요하다」는 취지엔 맞는 표기법이다. 최근 일부 기자들은「한국-조선」으로 표기하자는 주장을 제기했다. 기자가 중립적 입장에 서서 남북한 양쪽을 등거리로 보겠다는 뜻이라면 그는 휴전선상에 집을 짓고 무국적을 먼저 선언해야 한다. 남북한 문제에서, 더구나 악마적 집단이자 민족의 원수인 북한노동당 지배체제를 상대하고 있는 남한에서 中立이란 있을 수 없다. 악과 선 사이에서 중립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고향이 없는 혼(魂)을 가진 지식인이라면 또 몰라도.


국가 지도부의 정보 오판은 재앙을 초래한다.

이스라엘에서 지금까지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그 우수한 정보기관들이 왜 1973년 10월 전쟁을 미리 감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는 기습을 성공시키기 위해 개전(開戰) 직전에 여러 번 기동훈련을 실시했다. 그때마다 이스라엘군은 비상을 걸었으나 훈련으로 밝혀졌다. 비상이 걸리면 예비군이 동원되고 산업활동이 큰 타격을 받는다. 이스라엘의 오판은 정보수집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해석의 잘못 때문이었다. 군정보기관은 여러 징조를 접하고서도 전쟁은 아니란 판단을 했으나 모사드는 전쟁임박이란 판단을 내렸다. 골다 메이어 수상과 엘라자르 참모총장 등 지휘부는 군정보기관의 판단을 받아들였다.

개전 이틀 전인 10월4일 군정보기관은 거의 결정적인 첩보를 수집했다. 이집트 최고사령부가 예하부대에 대해 라마단 금식을 중단하라고 지시한 통신문을 가로챘던 것이다. 이슬람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의식인 라마단 기간의 금식을 중단시키는 것은 비상사태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4일 밤엔 소련 수송기가 날아와서 시리아와 이집트에 있는 군사고문단 가족들을 철수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정보도 들어왔다. 그래도 이스라엘 정부는 이것이 전쟁을 의미한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전쟁 전야인 10월5일 오후 5시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非아랍 어느 나라의 통신을 감청, 이집트-시리아 양 전선에서 곧 기습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이 정보는 국가지도부로 보고되지 않았다. 6일 새벽 비로소 유럽에 급파된 모사드부장(部長)은 고급 정보요원으로부터 전쟁이 6일 오후 6시에 개시된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 개전은 6일 오후 1시55분이었다. 이스라엘 국가 지도부의 오판은 전사 2500명, 부상 7500명의 인명손실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10월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군사적 승리는 거두었으나 외교전선에선 수세에 몰려 결국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반환하게 된다. 6·25 때도 일선에 있던 국군정보부대는 전쟁을 정확히 예측했으나 육군본부와 경무대는 판단기능이 마비돼 있었다.

국가 지도부가 국가적 대사(大事)에서 오판을 하면 나라가 망할 수가 있다. 국가 지도부의 정보능력은 그 지도부의 총체적 직무능력을 가장 적절하게 드러낸다. 金泳三 정부의 정보능력은 北核위기 때 오판에 오판을 거듭했다. 1993년 초 기자가 만났던 안보·외교팀의 핵심인물들은 모두 북한이 미국의 압력에 연내(年內)로 굴복할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金泳三 청와대는 그들이 장기로 삼고 있는 국내정치 부문에서도 오판을 했다.

전쟁 위험성의 고조

6·27 선거 전야에 청와대 참모들은 정원식(鄭元植) 서울시장 후보가 「당선유력」이란 판단을 하고 있었다. 대통령도 그런 보고를 받았던 것 같다. 당시에 대부분의 여론조사기관은 조순(趙淳) 후보의 당선을 예상하고 있었다. 청와대의 오판은 친여(親與)성향의 조직이 한 非과학적인 여론조사를 선호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대통령에게 아무쪼록 좋은 소식을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갤럽은 1지역당 500명에 대한 전화 여론조사로서 15개 광역단체장 선거의 당선자를 득표율 3% 이내의 오차로 정확히 맞추었다. 갤럽의 수만 배나 되는 자원과 조직을 동원할 수 있는 청와대가 너무나 엄청난 오판을 했다는 것은 金대통령의 국정수행 능력에 본질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핵심적 사항이다.

6·27 선거 직후 金대통령은 일단 발표했다가 취소한 담화문을 통해서 지역감정이 여당 참패의 원인이라는 식의 분석을 했다. 이 분석도 선거 직전의 오판,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또다른 오판이었다. 지역감정은 한국인의 정치감각에 물이나 공기처럼 항상 있는 것이다. 그 지역감정을 6·27 선거처럼 폭발시킨 것이 진짜 선거 패인(敗因)인데, 그 뇌관은 金泳三 정부의 국정운영 실패와 보수층의 이반이었던 것이다. 국가 지도부의 의사결정이 정확하려면 그 주변에서 정확한 정보가 교류되어야 한다. 그것은 민주적인 리더십下에서만 가능하다. 나쁜 소식을 듣기 싫어하는 지도자와 아부에 능한 참모가 있는 지휘부에선 왜곡된 정보가 춤을 춘다.

문제는 金泳三 정부가 對北정보판단에 있어서도 6·27 선거 때처럼 오판을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불안감이다. 주한미군 정보부에선 북한의 재남침 위험성이 올해 겨울과 내년 겨울에 최고조에 달할 것이란 판단을 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50년간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쌓아올린 군사력이 2∼3년 뒤부터는 급격히 쇠퇴해 버리고 마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다가오고 있는데다가 金正日 자신도 개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전쟁에의 유혹을 강하게 느끼게 될 것이란 논리이다.

이런 정보에 접한 일부 한국 군인들의 반응은『또 미군이 무기 팔아먹으려 장난치는 것 아냐』라는 것이었다.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이런 발언은 국군 지휘부의 패배주의적 사고방식을 반영한다.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주권국가가 필요로 하지 않는 무기를 강압에 의해서 살 수 있으며, 그런 장난에 속아넘어가 쓸 데 없는 무기를 살 정도의 군대라면 국방 임무 자체를 회수해야 할 일이다.

金泳三 정부의 행태를 보면 남북관계는 전쟁으로부터 안전거리에 있다는 인상을 준다. 과연 그러한가를 자문(自問)해봐야 할 이유를 삼풍(三豊)백화점 붕괴사건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安保의식과 안전(安全)의식은 근본이 같다. 확률이 아주 낮은 미래의 사고가능성에 대비하여 돈과 시간을 쓸 것이냐 말 것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안보의 대상은 국가와 국민, 안전의 대상은 개개 인간이란 차이는 있지만 안보의식이 약한 나라에선 안전의식도 약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안보의식이나 안전의식은 인간의 생명에 대한 존중심과 직결된다.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곳에선 안보나 안전을 위한 투자는 낭비로 여기질 것이다. 자신의 생명만 귀중하고 남의 생명은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안보와 안전에 대한 투자는 어렵게 된다.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은 항상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보다는 낮기 때문에 안보와 안전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승산이 별로 없고 늘 욕을 먹게 돼 있다. 일부 민주계 및 야당 정치인들은 과거 정권이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여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과거정권이 그렇게 했기 때문에 북한이 남침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서울 포위 하의 결사항전은 가능한가?

이스라엘은 10년 뒤에나 현실로 나타날까 말까 한 이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과 핵개발 징조를 벌써 제1의 위협요인으로 받아들이고 외교·군사·정보 등 다방면의 대책을 수립, 실시하고 있다. 한국도 1980년대 초에 이미 북한의 핵개발 의도를 감지했으나, 일부 정치인들의 주장처럼 그 위협을 과장하기는커녕「미국이 알아서 해주겠지」하는 자세로 침묵해 버렸었다. 그때 일찍 손을 썼더라면 지금과 같은 對北 저자세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고 40억 달러의 지출도 필요 없게 되었을 것이다. 40억 달러는 安保의식 태만의 대가이기도 하다.

지난해 우리 군이 실시한 워게임(War Game) 결과에 의하면 인민군이 철원방면에 주공(主攻)을 놓고 기습 남침할 때 우리 군은 의정부까지 밀린다고 돼 있다. 개전 한 달 뒤에 미군의 증파로 반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개전 한 달 안에 한국군은 전사 약 10만, 부상 약 50만의 피해를 입을 것이란 계산도 나왔다고 한다. 한 주한미군 정보관계자는『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2차세계대전 때의 독일과 소련군 사이의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병력과 화기의 밀집도에 비추어 동부전선보다 더 심한 파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기자가 만난 한국-미군 군사전문가들은 거의가 북한이 또 전쟁을 걸어올 때는 화학무기까지 쓸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학무기를 쓸 배짱이 없으면 전쟁을 애초에 결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는 분석이었다. 對北군사정보 전문가인 P씨(예비역 장성)는『군사적인 계산만으로는 북한이 남침하더라도 이길 수가 없다』면서『다만 정치적인 변수가 하나 있다』고 했다.『북한이 기습남침할 경우 서울을 포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한강 이남으로 진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국군이 미군의 증파와 함께 반격을 개시하면 통일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군이 서울을 포위한 다음 휴전을 제의했을 때 남한 정부가 결사항전을 포기하고 이를 받아들인다면 인민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그럴 경우에 미군이 우리를 도울 명분도 상실됩니다』장군의 얘기가 사실이라면 남한의 유권자들은 그런 정부를 선출하지 않도록 눈을 비벼둘 필요가 있다. 한 여당 ㅇ국회의원은 『지금의 나라 분위기라면 북한의 휴전제의를 받아들일 것이다. 국민 모두가 자신이나 가족이 무사한 쪽으로 선택할 것이다』라고 했다.

기습남침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갈 경우 가장 먼저 백기를 들자고 주장하는 것은 권력기생적인 기득권층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많은 보수세력은 자유민주주의 가치관이 아니라 권력의 향방을 자신의 행동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좌익세력보다도 더한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자신의 영달과 가족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金正日치하도 괜찮다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런 기회주의 때문에 한국의 보수층은 소수의 좌익세력에 의하여 휘둘려지고 있으며 위선자들과 선동가들의 공세에 주눅이 들어있는 것이다.

중동(中東)의 탈(脫)냉전이 이스라엘 평화공세의 배경

이스라엘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점이 있다. 모두가 소신에 차 있어 語法이 단순명쾌하다. 「그런 면도 있지만…」식의 양시론·양비론적 話法은 없다. 그들은 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30초 질문에 답변은 30분이다. 그들의 대화에는 많은 교양이 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기자가 예루살렘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홀리데이 인 호텔 라운지에서 만난 외무부 정보센터의 분석관 엘리 아비단씨도 그러했다. 그는 한 시간 반 가량 기자를 앞에 놓고 설명이 아닌 웅변을 했다. 주위 사람들이 놀랄 정도의 큰 소리로 그랬다. 그는 이스라엘이 PLO, 요르단, 시리아와 평화협상을 감행할 수 있던 근본 이유를 中東지역의 탈냉전에서 찾았다. 소련의 붕괴 이후 시리아와 PLO는 가장 중요한 배후세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특히 시리아는 소련식 무기체제를 채택하여 소련의 부품공급에 의존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로 시리아의 무기체제는 지금의 북한처럼 고철화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확실한 對러시아 군사력우위를 확보, 그것을 바탕으로 삼아 공격적인 평화공세를 펼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6일전쟁 때 쟁취한 골란고원(高原)을 시리아에게 돌려주되 이곳을 비무장지대화하고, 더 나아가서 현재의 시리아 국경 너머에서도 비무장지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을 깔고서 평화협상에 임하고 있다. 이처럼 공격적인 요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의 강력한 군사력이다. 이스라엘이 1977년에 숙적인 이집트와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6일 전쟁에서 빼앗은 시나이반도를 반환했기 때문이다. 즉 병사들의 피로써 확보한 땅을 평화와 맞바꾼 것이다.

역사의 감동적 역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 그리고 요르단江의 서안(西岸)지역을 빼앗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이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지금 수상 라빈이었다. 라빈 수상은 지금 자신이 빼앗은 땅을 팔아 평화를 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감동적인 역전이다. 평화협상의 실무책임자인 페레스는 核무기 개발의 책임자이기도 했는데 이스라엘이 보유한 그 核무기가 또 과감한 평화공세의 뒷받침이 되고 있다. 對아랍투쟁에서 선봉에 섰던 라빈과 페레스가 평화를 부르짖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들은 오히려 안심하고 있다.

닉슨 대통령이 對중국 접근 등 과감한 데탕트 외교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화는 강경론자·현실주의자·보수주의자에 의하여 성취된다는 것은 역사의 중요한 가르침이다. 金泳三 대통령도 통일문제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기려면 먼저 확실한 반공(反共)과 보수의 입장에 서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고 북한당국의 환상을 깨뜨려야 할 것이다.

제2차 한국전쟁이 터진다면 그것은 북한의 기습에 의해서 비롯될 것이다. 기습은 항상 성공한다. 문제는 한국이 최초의 강타를 당하고도 회복할 것인지, 아니면 삼풍백화점처럼 그 길로 붕괴해 버리느냐 하는 것이다. 서울이 북한 방사포와 일제사격과 스커드미사일의 화학탄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을 때 우리 국민들은 과연 사생결단의 의지로써 결사항전(抗戰)을 결의할 수 있을까. 그만한 자기희생 정신이 과연 있는가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한다. 지금처럼 미국이 지켜주겠지, 安保는 공기처럼 공짜이다, 나와 가족만 무사하면 만사 OK이다 하는 식으로 대처할 때 한국군의 초기 패퇴는 후방의 붕괴-대한민국의 종언으로 이어질 것이다.

삼풍백화점 소유주의 형편없는 안전의식을 비난하지만, 수도권 1500만 인구를 북한의 장거리포와 스커드미사일 사정권 안에 인질처럼 노출시켜 놓고도 그 방어망 설치의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국가 지도부의 안보의식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북한에 대해 장거리포의 후진(後進)을 요구하고 듣지 않을 경우엔 예방폭격으로써 위협을 제거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스라엘 같았으면 아웅산 테러에 대한 보복으로 김일성 부자를 암살했을 것이고, 對北경수로·對北 쌀 지원 대신에 F-16편대를 보냈을 것이다.

대통령의 거듭남

불행 중 다행히도 하늘은 6·27선거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로써 우리에게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金泳三 대통령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윗王의 회개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모든 교만한 인간은 망한다」는 메시지임도 잘 알 것이다. 金대통령은 지난 2년 반 동안 자신이 과연 한국의 역사 앞에서 얼마나 겸허했던가를 성찰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6·27 선거에서 나타난 한국 사회 주류층의 反YS 성향은 바로 그들이 3년 전엔 金대통령을 만들어냈던 지지층이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할 때가 가장 무서운 것이다. 이 여론을 돌려놓는 유일한 방법은 金泳三 대통령 자신의 「거듭남」이다. 그것은 역사와 국가의 잘잘못을 한 덩어리로 끌어안는 결단이다. 민주계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지도자로 자신의 스케일을 키우는 것이다.

거듭남의 시작은 아들 김현철(金賢哲)씨의 국정개입을 차단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金賢哲씨의 국정개입은 단순한 부자(父子)간의 상담이나 건의 수준이 아니라 제도적 개입이 되고 있다. 정부 출범기에 金씨가 추천한 많은 인사들이 정부 내 요직에 들어감으로써 그들과 金씨 사이엔 자연스러운 유대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특수관계에 의하여 안기부의 정보는 金씨에게 흘러가고 있고 많은 요인들이 金씨를 찾아가 국정을 상담하고 있으며 金씨 또한 인사에 개입하고 있다.

대권(大權)을 쥔 사람의 아들에 의한, 이처럼 광범위한 국정개입은 한국 역사상 어느 왕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다. 공(公)과 사(私)를 구별하는 것을 공직자의 제1덕목으로 치고 있는 유교 정치 문화의 전통에 비추어도 이런 행태는 한국인 특유의 정의감정에 反하는 것이다.

金대통령이 아들에 의존하게 된 데는 민주계의 보좌가 충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그렇다면 金대통령은 민주계도 아들도 아닌 한국의 유능한 관료조직을 활용하면 된다. 전란의 잿더미 위에서 GNP 세계 12위의 경제력을 쌓아올린 한국의 관료 수준을 과소평가해선 안된다. 문제는 그 엄청난 인재(人材)의 풀(Pool)을 넓은 마음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의 여부일 뿐이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대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측근실세가 희생양으로 제물 바쳐지는 상황을 되풀이하였다. 朴대통령이 사라진 다음에 김종필(金鍾泌)씨가, 전두환(全斗煥) 정권이 물러나자 장세동(張世東)씨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청와대를 물러나자 박철언(朴哲彦)씨가 속죄양이 되었다. 金泳三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이런 악순환이 되풀이된다면 한국은 멕시코 수준의 정치를 하는 나라로 여겨질 것이다. 그런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바로 지금 金대통령이 결단해야 할 때인 것 같다.

극동(極東)과 극서(極西)의 악수

아쉘 나임 駐韓 이스라엘 대사에게 기자가 물은 적이 있다.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과 평화를 약속한 이후 오히려 진짜 위기를 맞게 되지 않을까요?』『그렇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인간이 늘 긴장 상태 하에 있어야 자신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천재(天才)는 고통 속에서 피어난 꽃이지요. 우리는 오늘이 항상 생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른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오늘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나임 대사의 이 말은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란 도전이 있었기에 남한 사람들은 태만하지 않고 항상 긴장하면서 자신의 정열을 불태운 것이 아닐까. 그래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둑 아래 사는 사람들처럼 하루하루를 맹렬하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자가 이스라엘에 가서 느낀 감정도 그런 것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전류처럼 통하는, 같은 주파수대의 감응이 있었다. 비슷한 과거뿐 아니라 비슷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시아 대륙의 極東과 極西는 멀지만 가까운 나라임에 틀림없었다.

이스라엘엔 입국하기도 어렵지만 출국하기란 더욱 어렵다. 벤구리온 공항에서 짐을 부치기 전에 실시하는 보안 검사를 시간 내에 마치려면 세 시간 전에 도착해야 한다. 그래서 보안검사를 하루 전에 받는 제도가 있을 정도이다. 보안요원이 승객과 일일이 일문일답을 하는데 대답을 잘못했다가는 짐을 다 풀어야 한다. 기자는 귀국행을 텔 아비브-프랑크푸르트(이스라엘 국영 엘 알 항공사 편)-서울(대한항공 편)로 잡았다. 엘 알 여객기의 기내지(機內紙) 첫 장엔 「여행자의 기도문」이 실려 있었다. 「…하늘을, 바다를, 육상을 여행하는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우리를 인도하는 사람들의 손길을 강하게 해주시고 그들의 마음을 다잡아주소서. 지금부터 영원히 당신만이 우리의 안식처이나이다. 아멘」

지중해를 종단하는 네 시간 반의 비행 끝에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안착(安着)하자 승객들은 조종사를 위해 박수를 쳤다. 엘 알 항공기는 공항 탑승구에 바로 붙지 않고 외딴 곳에 정지했다. 기관총을 탑재한 세 대의 장갑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의 국경 수비대였다. 장갑차의 엄호 아래 기자는 버스에 타고 공항 건물로 향했다. 6백만의 유태인을 학살했던 독일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그들에게 속죄하고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특공작전 약사(略史) - 아이히만 납치에서 엔테베 작전까지

● 1960년 5월 이스라엘 해외담당 첩보기관 모사드는 하렐 부장의 현지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납치, 국영항공회사 엘 알(EL AL)편으로 데리고 왔다. 유태인 학살의 한 주역(主役)인 前 나치 비밀경찰 간부 아이히만은 공개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5월31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스라엘 형법은 다른 범죄에 대해선 사형을 금지하고 있으나 유태인 학살 범죄만은 예외이다. 아이히만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사형된 유일한 인간이다.

● 이스라엘과 프랑스의 우호·협력관계는 1950년대에 시작되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은 알제리아 독립운동 조직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에 제공했다.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했다. 核무기의 비밀개발에도 두 나라는 협력했다. 이집트의 나세르에 대한 공동전선도 형성했다. 그러나 드골의 재집권 이후 알제리아가 독립해 버린 뒤 협력의 기반이 약화되었다. 1967년 6월 전쟁 전야 드골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이스라엘이 선제공격으로 대승하자 드골은 對이스라엘 무기 금수조치를 취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은 합동공작을 벌여 스위스가 만들고 있던 프랑스의 미라즈 전투기 설계도를 훔쳤다. 이것을 바탕으로 만든 전투기가 케피어(Kfir)이다.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 날 이스라엘군의 무기조달처는 특공대를 조직하여 프랑스의 쉘부르그 항구에 있던 미사일 발사함 5척을 공해상으로 빼돌려 1970년 새해 첫날에 이스라엘 하이파 항으로 몰고 왔다. 이 배들은 對이스라엘 금수조치에 의하여 주문국인 이스라엘로의 인도가 거부돼 있었다. 이스라엘은 노르웨이 석유회사가 구입하는 식으로 위장한 다음 특공대를 선원으로 변장시켜 승선시킨 뒤 배 5척을 소매치기한 것이다.

● 1969년 12월 이스라엘 공수부대의 특공대 66명은 세 대의 헬기에 나눠타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영토 내로 약 60km쯤 진입했다. 사막에 착륙한 그들은 소련제 P-12 레이다 기지를 습격, 2.5t 레이다를 해체하여 헬기에 싣고 돌아왔다. 소련정부는 최신무기가 이스라엘 손에 넘어간 데 화가 나서 이집트에 대한 최신 고급무기의 제공을 일시 중단했다.

● 1976년 7월 이스라엘 특공대는 네 대의 허큐리스 수송기에 나눠 타고 아프리카 깊숙이 날아갔다.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납치한 에어프랑스 여객기엔 2백46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고 그 중 77명이 이스라엘 시민이었다. 우간다의 엔테베 공六?6일째 억류돼 있던 이들 인질을 구출한 엔테베 작전은 기발한 착상(우간다의 독재자 이디 아민으로 변장한 이스라엘군인이 수송기에서 지프차를 타고 내리는 바람에 공항경비병들은 외국 순방중이던 아민이 귀국한 것으로 착각했다)과 대담한 공격, 그리고 최소의 인명손실로 하여 그 뒤에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완벽한 드라마였다.

● 1981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은 이라크가 핵무기 개발용으로 건설중이던 오시라크 원자로를 폭격했다. F-16, F-15 편대는 사우디 아라비아 상공으로 우회하여 이란쪽으로부터 공습을 단행하였다. 이라크 측에선 한동안 이란 공군기의 공습을 받은 것으로 착각했다.

● 1985년 10월1일 이스라엘 공군 F-15 편대는 튜니시아에 있는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본부 건물을 폭격, 75명이 죽었다. 공중급유를 받아 가면서 1천9백km를 날아와 폭격한 이스라엘 편대는 단 한 대의 손실도 없이 귀환했다. 이 폭격은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가 사이프러스에서 세 명의 이스라엘人을 죽인 데 대한 보복이었다.

● 1986년 10월 영국의 선데이 타임즈는 이스라엘의 비밀核개발에 참여했던 기술자 모르데차이 바누누의 증언을 게재하여 이스라엘이 이미 核무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모사드는 미인계를 써 바누누를 로마로 유인한 뒤 선박편으로 데리고 왔다. 바누누는 반역혐의로 재판에 넘어가 징역 18년을 선고받아 지금도 복역중이다. 변호인들은 바누누의 폭로를 反核양심선언으로 몰고가려고 했으나 이스라엘 언론이 납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바람에 성공하지 못했다. 유력 일간지 하아레츠의 칼럼은 「민주국가라 하더라도 그런 폭로를 한 인물은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바누누가 아직도 송환되지 않고 있는 상태라면 우리는 정부에 대해서 왜 그를 내버려 두고 있느냐고 추궁해야 한다」고 했다.

● 1988년 4월16일 이스라엘 특공대는 튜니시아의 해안에 상륙,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의 주요인물인 아부지하드를 그의 집에서 암살한 뒤 철수했다. 이스라엘 군은 이 작전을 지휘하기 위하여 전자전 통제기를 지중해 상공에 띄웠다. 당시 이스라엘군 참모차장 에후드바락(뒤에 총장)이 이 비행기에 타고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자 정보기는 특공대가 침투한 지역의 전화 및 무전시설을 마비시켜 특공대의 탈출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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