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폼페이-아말피-시실리 紀行 사진

이탈리아 유적 및 풍경 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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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 山頂 마을 몰라의 골목에서 발견한 MADE IN KOREA!(조갑제 사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 한국에서 교과서로 알았던 역사와 현지에서 알게 되는 역사가 달라 혼란에 빠진다. 이탈리아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두 文明-로마와 르네상스의 고향이지만 현재의 이탈리아라는 국민국가는 1861년에 반도가 통일되면서 建國(건국)되었으니 매우 젊다.

서기 5세기에 西로마가 무너진 후 19세기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 반도는 한 국가나 왕조 아래로 통합된 적이 없다. 여러 王國과 公國(공국)과 도시국가, 그리고 교황 직할령 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상이 프랑스, 독일, 스페인, 비잔틴, 아랍, 노르만 등 외세의 침략과 개입을 불렀다.

이탈리아가 통일되기 전에 이 반도에서 가장 큰 나라는 나폴리 王國이었다. 로마 남쪽의 반도와 시실리를 다스린 나라였다. 이 왕국의 수도는 초기엔 시실리의 팔레르모, 나중엔 나폴리였다. 11세기 이후 '시실리 왕국', '두 개의 시실리 왕국', '나폴리 왕국' 등으로 불렸다.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는 고대 문명이 꽃핀 그리스, 이집트, 중동, 지중해와 인접하여 늘 유럽 文明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지중해의 진주' 같은 시실리는여러 번 다양한 민족과 文明이 거쳐가고 섞이고 쌓인 곳이다. 시실리 여행을 하면 장대하고 풍요로운 자연을 배경으로 명멸해갔던 여러 민족이 남긴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에 경탄하면서 역사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갖게 된다.

기원 전 8세기부터 그리스 사람들이 시실리에 건너와 동쪽의 시라쿠사 등 도시국가를 만들었다. 아프리카 北岸(북안,지금의 튀니지)에 살던 카르타고 人들도 몰려 와 서쪽에 정착하였다. 시실리의 州都(주도)인 팔레르모는 카르타고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였다. 카르타고-로마의 결전인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실리는 로마 지배로 넘어갔다. 시실리는 지금이나 그때나 농산물과 수산물 생산량이 많았다. 5세기부터 西로마 제국이 무너지는 틈을 타서 라인강 동쪽에 살던 게르만족이 침범한다. 게르만족의 선두 주자 반달족, 고트족이 이 섬을 점령하고 약탈하더니 6세기엔 지금의 이스탄불(당시는 콘스탄티노풀)에 수도를 둔 東로마제국(비잔틴)이 시실리를 기독교 권으로 탈환하였다. 9세기 초부터는 중동을 석권한 사라센(이슬람 세력) 군대가 아프리카로부터 이 섬을 공략하기 시작, 827년엔 팔레르모를, 878년엔 시라쿠사를, 902년엔 타오르미나를 함락시켜 全島(전도)를 이슬람화한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유대인과 기독교인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고 상공업을 장려, 시실리는 中世(중세)암흑기에도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11세기부터 바이킹의 후예들인 노르만 인들의 시실리 공략이 시작된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를 통합한 왕국을 처음 만든 이들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서 원정 온 노르만 전사들이었다. 노르만인들은 9세기 말부터 노르망디에 정착한 바이킹족의 후예들이었다. 바이킹족은 지금의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에 살던 미개한 게르만族으로 약 300년간 유럽의 全域(전역)을 습격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등지에 정복왕조를 세웠다. 몽골-투르크족이 기마군단을 앞세워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 중앙아시아, 中東에서 여러 나라를 만들고 부수고 하였던 것과 비견된다. 바이킹족은 뛰어난 항해술을 이용하였고 몽골-투르크족은 기마군단을 앞세운 점이 다르다. 기동성이 이들 정복민족의 힘의 원천이었다. 이들은 싸움도 잘 했지만 소수가 다수를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통치, 행정술이 뛰어났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公은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상륙, 해스팅스 결전에서 잉글랜드 군을 격파, 영국(잉글랜드, 아일란드 등)을 정복하고 王이 된다. 노르만 세력은 그 후 수백 년간 英佛(영불)에 걸친 영토를 갖게 되는데, 100년 전쟁을 통하여 정리된다. 노르만의 영국정복 이전에도 영국은 덴마크의 카누트 대왕에 의하여 통일된 적이 있다. 11세기 초 카누트 大王은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영국에 걸친 바이킹 대제국을 세웠으나 오래 가지는 못하였다.

노르만의 영국정복은 그 후 영국의 운명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유럽 문명권에서 멀어진 北海 국가에서 탈피, 유럽 文明의 일원이 되고, 佛語의 영향을 많이 받은 영어가 만들어지고 좋은 제도가 뿌리를 내려 富國强兵(부국강병)의 길을 걷는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랜드가 100% 바이킹 국가라면 핀란드는 30%, 영국은 50% 바이킹 국가라고 부를 만하다.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 바이킹족은 이곳에서 프랑스의 고급문명과 기독교를 받아들여 실력을 기른 다음 2차 원정에 나선다. 영국 정복은 설명한 대로이고, 거의 같은 시기에 오트빌 家門(가문)의 노르만 戰士(전사)집단이 나폴리 이남의 이탈리아 반도와 시실리를 점령한다. 이들을 이끈 루제로 1세가 교황으로부터 시실리王 및 캄파니아(이탈리아 남부)公으로 公認(공인)된 것은 1130년이었다. 루제로(영어로는 로저) 2세(서기1095~1154)는 정복과 행정을 결합시켜 시실리 왕국을 유럽에서 가장 번영하는 나라로 만들었다. 바이킹 사람들이 그렇듯이 노르만 지배세력도 여러 종교, 민족,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한 바탕에서 실력 위주의 개방적이고, 실용적이며, 관용적인 통치를 했다. 이슬람과 기독교도들이 공존하고 아랍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과 유대인들까지 시실리 왕국에선 큰 차별을 받지 않고 살 수 있었다.

노르만의 루제로 1세가 팔레르모를 점령한 1072년부터 프랑스 안주家가 시실리 왕국의 통치권을 장악한 1268년까지의 약200년간은 노르만 王朝(그 피를 이어받은 독일의 스와비아 왕조 시절도 포함)의 시실리 지배 기간이다. 당시 유럽의 가장 역동적인 문명국가는 프랑스와 시실리 왕국이었다.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는 스페인의 코르도바와 함께 유럽에서 가장 국제적인 도시였다. 나중엔 노르만의 영국이 중심국가로 떠오르지만 12세기 당시엔 아직 변방이었다. 유럽에서 가장 미개하였던 바이킹족이 소수로서 다수를 다스리면서 가장 찬란한 기독교 文明을 건설한 것은 세계사의 한 기적이다. 10세기까지만 해도 바이킹족은 원시종교를 믿고 부족장이 죽으면 殉葬(순장)을 했다.

시실리의 노르만 왕조에는 다섯 명의 名君(명군)이 있었다. 루제로 1, 2세, 굴레모 1, 2세, 그리고 페데리코 황제. '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의 지중해 세계'(한길사)에서 노르만인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시실리를 탈환한 이후 취한 점령 정책을 감동적으로 서술하였다.

<(노르만 정복왕) 루제로는 패배자가 된 아랍 유력자들과 그 가족을 죽이지도 않았고 노예로 삼지도 않았다. 남이탈리아 내륙지방에 땅을 주고 농장주로서 살게 했다. 아랍인 병사들을 노르만-시실리 군에 편입하였다. 아랍의 학자도, 상인도, 기술자도 농장경영자도 남았다. 서로 다른 신을 믿는 사람들이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며 共生(공생)하는 사회가 실현된 것이다. 노르만 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랫동안 사라센 해적에게 피해를 본 남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유럽의 북쪽 끝에서 온 노르만 사람들에게는 이슬람교도에 대한 원한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아랍인 지리학자 이드리시는 이 시기의 팔레르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팔레르모만큼 장대하고 화려한 건축물이 가득 찬 도시는 없고, 팔레르모의 정원만큼 아름다운 경관도 없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사라진 여러 민족과 종교와 문명의 융합을 보여주는 건축물이 시실리엔 많다. 팔레르모 근교에 있는 몽레알레 대성당은 노르만 왕조의 굴레모 2세가 만든 것인데, 노르만-비잔틴-아랍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몽레알레 대성당은 13세기 말에 단기간에 세워진 것인데, 굴레모 2세가 적극적으로 후원한 덕분에 공사기간이 단축되었다. 굴레모 2세는 라틴어, 아랍어 등에도 능통하였고, 인문적 교양이 풍부한 온후, 관용, 경건한 성품의 왕이었다.

이 성당 건축엔 정치적 고려가 있었다. 교황권과 왕권이 격돌하는 중세였다. 교황권의 대리자인 팔레르모 대주교는 굴레모 왕을 견제하고 있었다. 대주교가 관리하는 팔레르모 대성당도 대단한 건물인데, 왕이 나서서 같은 권역 안에 또 다시 대성당을 지은 데는, 대주교의 권한을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몽레알레 대성당 벽면엔 6340 평방 미터에 걸쳐 비잔틴 풍의, 성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모자이크 그림이 장식되어 있다. 천지창조에서부터 베드로의 십자가刑까지 수많은 에피소드를 그린 것이다. 중세 때는 일반 신도가 성경을 읽을 수 없었으므로 신부가 이 그림들을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을 것이다. 성당을 '돌에 새긴 성경'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 성당에서 실감할 수 있다. 굴레모 2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棺을 이 성당에 모셔 권위를 더했다.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조는 150여년 만에 代가 끊어지고, 政略(정략) 혼인 관계에 의하여 1190년 독일 스와비아 왕조의 하인리히 6세가 시실리 왕이 된다. 노르만 왕조의 마지막 왕은 굴레모 2세(영어론 윌리엄 2세)인데, 아들이 없어 고모 코스탄자(할아버지 루체로 2세의 딸)를 후계자로 지명한다. 코스탄자는 독일 스와비아 왕조 출신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바바로사의 장남 하인리히와 결혼하고, 바바로사가 죽자 하인리히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하인리히 6세) 및 시실리 왕으로 등극했다. 코스탄자는 아들을 낳는데, 그가 중세 유럽의 名君 중 한 사람인 페데리코 2세(영어로는 프레데릭, 독일어로는 프리드리히 2세)이다.

하인리히 6세는 독일에 체류중 시실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왔다가 1197년에 병으로 급사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및 지금의 프랑스 동부와 헝가리 등지를 관할지역으로 삼았던 신성로마제국은 중앙집권화된 적이 없었다. 느슨한 제후국 연합체였다. 이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프랑스 계몽사상가 볼테르는 '신성하지도, 로마답지도, 제국같지도 않다'고 조롱한 바 있다.

11~12세기 신성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과 늘 갈등하였다. 교황은 유럽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종교적 수장인데, 세속 권력 면에서도 首長(수장) 노릇을 하기를 원하였다. 반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의 정신적 지도력을 인정하면서도 관할지 교회에 대한 통치권, 특히 인사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당시 교회, 수도회 등 유럽 全域(전역)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던 교황 지휘하의 가톨릭 조직은 단순한 종교집단이 아니었다. 주교들은 영주처럼 땅을 소유하고 사법권 및 군대를 보유한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교황에 복종할 뿐 세속권력으로부터는 독립성을 유지하려 했다.
초기의 神聖로마제국 황제는 교황과 주교들을 멋대로 교체할 힘이 있었지만 11세기에 들어서면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난다. 교회 입장에선 세속 권력이 성직자들을 임명하는 한 부패를 청산할 수 없다고 믿었다. 황제가 자격 없는 자들을 돈을 받고 주교 등 성직자로 임명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황제 입장에선 막대한 재산을 관리하는 고위 聖職(성직)에 측근들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래야 자기 派(파) 사람들을 교회 기관에 취직시킬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의 가장 큰 행정조직은 가톨릭 교회였고, 일자리도 가장 많았다. 주교 임명권은 수많은 일자리를 만드는 인사권을 잡는 것을 뜻했다.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이 문제에서만은 타협이 어려웠다.

1059년 교황측은 종교회의를 열고, 교회법에다가 추기경 회의가 교황을 선출하도록 규정하여 황제의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게 하였다. 이렇게 뽑힌 교황은 황제의 측근이 아니라 가톨릭 세계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교황 측은 같은 해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대결할 수 있는 장치를 더 만든다. 루제로 지스카드가 지휘하는 노르만 戰士 집단이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한 것을 公認(공인)해주는 대신 그들로부터 교황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았다. 프로 戰士집단인 노르만 기사단의 뒷받침으로 황제의 독일군과 대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1073년 개혁정신에 불타는 그레고리우스 7세가 새 교황이 되었다. 1075년 그는 드디어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상대로 대결을 선언한다. 종교회의를 소집, 세속권력, 즉 황제가 주교를 임명하는 것을 금지시킨 것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하인리히 4세와 그 추종자를 파문하겠다고 경고하였다. 황제가 거부하자 교황은 황제를 파문하고, 황제에 대한 영주들의 충성서약이 무효라고 선언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南독일의 親교황측 영주들이 들고 일어나, 파문이 해제되지 않으면 황제를 폐위시키겠다고 결의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일단 전략상 후퇴를 결심하였다. 1077년 그는 눈 덮인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 교황이 묵고 있던 北이탈리아의 카노사 城(성)에 도착했다. 이때의 모습을 그레고리우스 7세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그는 아무런 敵意(적의)도 불손한 마음을 보이지 않고서, 자진하여 수 명의 종들을 데리고 내가 묵고 있던 카노사에 왔다. 그는 왕의 복장을 다 벗고는 3일간 성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울면서 再考(재고)를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파문을 해제하고 그를 교황에 복직시켰다. 카노사의 굴욕이라고 알려진 이 에피소드는 황제권에 대한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지만 그 후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보복에 나선다. 그에 반기를 들었던 영주들을 처단하고 독일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한 것은 1080년이었다. 그는 독일에 있는 교회 성직자 회의를 소집,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폐위를 결의하게 하고, 이듬해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그레고리우스를 쫓아내고 北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을 재확인하기 위한 원정이었다. 3년간 이탈리아에선 교황군과 황제군이 死鬪(사투)를 벌였다. 황제군은 1084년에 수개월간 로마를 점령, 교황을 추방하였다. 이때 남쪽에서 노르만 援軍(원군)이 도착, 황제군은 로마에서 물러났다. 로마를 점령한 노르만군은 시내를 약탈하였다. 로마 사람들은 화가 나서 그레고리우스 교황을 미워하게 되었다. 노르만군이 물러나자 교황도 더 머물 수가 없게 되어 노르만이 지배하던 살레르노로 피신, 다음해(1085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하인리히 4세도 勝者(승자)가 아니었다. 친교황측 영주들이 독일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후임 교황들은 이들을 지원하였다. 황제는 이탈리아에서 얻은 성과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1106년 그는 파문 당한 상태에서 사망하였다.

1122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교황과 황제측이 타협했다. 독일에서 성직자 선출은 교회법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다만, 황제나 황제의 대리인이 선출시 참석,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황제와 교황의 대결에서 일단 승리한 쪽은 교황이었다. 황제의 성직자 임명권을 제한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역대 황제들은 교황과 대립, 이탈리아 문제에 개입하느라고 정작 본거지인 독일 내부의 통치는 소홀히 하였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영국에선 중앙집권적 왕권이 강화되어 가는데도 독일은 여러 도시와 공국으로 분열되어 통일국가를 만들지 못하였다. 그런 사정은 이탈리아도 마찬가지였다. 독일과 이탈리아가 유럽에서 정치적 후진국이 되는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탈리아 통일을 기도한 이가 페데리코 2세이다. 이탈리아 통일은 교황과 교황 직할령을 정리하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다. 페데리코와 교황은 정면충돌 코스로 달리지 않을 수 없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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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노토의 바로크식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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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근방 해안엔 10세기 무렵 해양도시였던 아말피가 있다. 피사, 제노바, 베니스와 함께 4대 해양 公國이었다. 지금 이탈리아 해군 깃발은 이 네 도시국가의 紋章(문장)을 합성한 것이다. 아말피는 절벽면을 수평 공간처럼 활용하여 도시를 건설하고 미로를 만들어 사라센 해적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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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나폴리 근교의 폼페이는 기원 후 1세기에 베수비오스 火山이 폭발, 묻혀 있다가 발굴되었다. 사진은 당시의 재판소 건물이다. 이 도시에서 가장 큰 公共건물이다. 로마의 유산이 法治인데, 法의 권위를 상징하는 큰 건물을 지어 주민들을 심리적으로 다스렸음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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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활화산 에트나의 頂上부근이다. 흘러내린 용암이 굳은 바위 넘어 눈 덮인 꼭대기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다(趙甲濟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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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州島 팔레르모 근교에 12세기 시실리 王國(나폴리 남쪽도 통치)을 다스리던 노르만(바이킹 후손) 왕이 건설한 '몽레알레' 대성당과 수도원의 회랑이다. 노르만-아랍 혼합 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회랑과 정원은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연상시킨다. 이 성당과 수도원을 지을 때 아랍 기술자들을 썼기에 건물 양식과 구조에 아랍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 왕조는 아랍이 다스리던 시실리를 빼앗았지만 아랍, 유대인, 그리스인들을 차별하지 않고 信敎의 자유도 허용, 중세 유럽의 가장 번성하는 나라를 만들었다. 몽레알레 성당 안엔 6000평방 미터의 壁面(벽면)에 성경 이야기를 모자이크로 장식하였다. 성당을 흔히 '돌에 새긴 성경'이라 부르는 것은, 중세에 평신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성당의 벽화를 교육 자료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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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랑의 기둥인데, 기둥에 붙여두었던 금박이 뜯겨 나간 흔적이 있다. 기둥 머리의 조각이 다 다르고 정교하다. 이런 회랑은 수도사들의 산책로로 이용되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의 특징 


로마인, 마케도니아인, 게르만족, 아랍족, 몽골족, 투르크족, 마자르족, 불가르족, 바이킹족, 영국인, 포르투갈인, 스페인人, 네덜란드인, 프랑스인의 공통점은 여러 국가를 만들고, 여러 국가를 무너뜨리고, 여러 국가를 植民地化하였다는 점이다. 이들은 尙武(상무)정신과 정복욕이 강하고,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군사기술이 있었다. 세계사의 지배민족이라고 부를 만하다. 지배민족을 대별하면 몽골-투르크-흉노-아랍족과 같은 유목민족, 바이킹-영국인과 같은 해양세력, 그리고 그리스-로마 같은 잘 조직된 문명세력으로 나뉜다. 유목민족은 騎馬(기마)군단, 해양세력은 항해술이 우수한 군사력의 핵심이었다.

 

정복 전쟁엔 능하지만 통치엔 무능한 세력이 있는가 하면 정복에도, 통치에도 유능한 세력이 있다. 싸움도 잘 하고 다스리는 데도 유능한 민족은 장기간 계속되는 나라와 제도를 만들었다. 현재의 국가 수준을 기준으로 하면 바이킹, 게르만족, 영국인들의 정복과 통치가 성공적이었다는 평을 받는다. 특히 바이킹과 노르만(프랑스에 정착한 바이킹)이 점령하고 세운 나라들의 목록은 호화찬란하다.

 

1. 바이킹이 세운 나라 또는 王朝: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 키에프 러시아.

2. 노르만이 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 영국, 아일랜드, 시실리 왕국, 핀란드.

3. 노르만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지: 미국의 루이지애나, 뉴올린즈, 캐나다 퀘벡 주 등.

 

넓은 의미의 게르만족에 드는 바이킹과 노르만족이 세우거나, 정복하여 발전시킨 나라들은 거의가 과거나 지금 一流국가들이다.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영국, 아이슬란드, 과거의 시실리 왕국. 키에프 러시아는 지금 러시아의 母胎(모태)이고, 노르만이 정복한 영국은 미국, 호주, 뉴질랜드를 개척하였다. 바이킹族은 가히 一流(일류)국가의 産母(산모)라고 부를 만하다. 9세기까지는 유럽의 가장 후진된 종족이었던 이들이 세계의 지배민족으로 변신한 과정은 신비하기까지 하다.

 

9세기부터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에 정착하기 시작한 바이킹족은 프랑스 왕으로부터 자치권을 얻어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다. 이들은 주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서 온 바이킹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의 先進문물을 수용하면서도 戰士(전사)집단의 용맹성을 유지, 곧 영국, 이탈리아 원정에 나선다. 노르만족의 성격에 대하여 11세기 베네딕트 수도사이자 역사학자인 제오프리 말라테라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꾀가 많고, 정복과 통치를 위하여는 자신들의 전통을 버린다. 모든 것을 모방하고, 상반된 성격인 베풀기와 탐욕을 겸한다. 두목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하여 많이 베푼다. 노르만족은 아부에 능하고, 어릴 때부터 웅변가들이며, 법으로 엄격히 다스리지 않으면 통제가 잘 안 된다. 말과 무기, 사냥을 좋아하고, 추위나 배고픔을 잘 견딘다.>

 

노르만족은 적응력이 뛰어났다. 전통이나 관습의 구속을 받지 않고 필요에 따라 행동하였다. 어느 지역을 정복하면 재주 있는 현지인들을 채용하고, 좋은 여자를 골라 결혼도 했다. 노르만 지도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른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았으며 교회의 書記(서기)를 채용하여 자신을 돕도록 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네는 소녀 시절에 본 노르만 왕자 보헤몽(안티옥 공국의 건설자)에 대하여 이런 기록을 남겼다.

 

<로마 땅에선 볼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가장 키가 큰 비잔틴 사람보다도 한 단위가 더 컸다. 허리는 가늘고 어깨는 넓었으며 깊은 가슴과 강력한 팔을 가졌다. 너무 야위지도, 너무 살이 찌지도 않았다. 균형 있는 몸이었다. 그의 몸은 희고, 얼굴은 붉은 점이 있었다. 머리카락은 황색이었으나 다른 야만인처럼 허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귀까지만 오도록 잘랐다. 수염은 면도칼로 잘라 분필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 그의 푸른 눈은 높은 품격과 기상을 보여주었다.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무섭기도 하였다. 용기와 열정이 몸과 마음에 녹아 있었지만 전쟁을 좋아하는 기질이었다. 그는 위트가 있고 재주가 많아 곤란한 상황에서 늘 벗어나곤 하였다. 대화를 할 때 그는 정보가 많아 보였고, 그의 답은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런 체격과 그런 성격은 황제 이외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였다. 고매함과 행운, 그리고 다른 타고난 성격에서도 그러하였다.>

 

바이킹과 노르만족을 묘사할 때 자주 등장하는 게 큰 체격과 용기, 명예욕, 그리고 실용적 정신과 적응력이다. 고고학자들의 遺骨(유골) 조사에 따르면 바이킹 남자의 평균 키는 약174, 여자는 158cm였다고 한다. 중세 유럽인들 중 가장 큰 키였다.

 

역사에서 바이킹과 노르만은 여러 얼굴을 갖고 활동한다. 해적, 장사꾼, 傭兵(용병), 정복자, 통치자, 영주, 농부, 이민자, 탐험가, 식민지 개척자. 다양한 역을 해낼 만큼 타고 난 능력과 적응력이 강하였다는 뜻이다. 바이킹이 남긴 碑文(비문)과 詩(시)를 종합하면 바이킹을 원정과 정복의 길로 몰아간 가장 큰 심리적 동기는 명예와 탐욕(일확천금의 꿈)이었다. 바이킹과 노르만인들에 대한 옛날 기록을 읽어보면 이들이 영웅적인 人間像과 人生觀을 갖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런 성격은 과대망상으로 흐르기 쉬운데, 바이킹-노르만족은 다른 편으론 實利를 매우 중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인간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재주를 가졌다. 바이킹과 노르만은 새로운 지역을 점령하면 商工業을 진흥하고, 개방-관용-實用의 통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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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입구의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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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시라쿠사의 성당. 그리스 시대부터 신전, 성당 등으로 2500년간 계속 사용되고 있는 종교건물이다. 여러 양식의 건축 기법이 섞여 있다.

기원 전 480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물리친 시라쿠사 왕의 명령에 따라 아테네 신을 모시는 도리아式 神殿(신전)이 교회 자리에 세워졌다. 기원 전 415년 펠로포네소스 전쟁 때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편에 선 시라쿠사를 공격하였다가 패전한다. 기원 전 398년 플라톤이 시라쿠사를 방문, 이상향이라고 칭찬했다. 사도 바울은 로마로 선교 여행을 할 때 시라쿠사에 도착, 처음으로 기독교를 시실리에 소개한다. 기독교 공인후 그리스 신전은 교회 건물로 개조된다. 시실리는 로마 멸망 후 반달, 고트족의 공격을 받다가 東로마제국, 즉 비잔틴의 지배로 넘어갔다. 서기 878년 아랍이 시라쿠사를 점령, 이 교회 건물을 모스크로 改造하였다.  
1085년 노르만 족의 루제로가 아랍세력을 몰아내고 시라쿠사를 수복한 뒤 모스크를 성당으로 바꾸었다. 성당의 관할권은 로마 교황으로 넘어갔다. 노르만族은, 성당을 확장, 木造지붕을 올리고, 모자이크를 붙였다. 1693년 대지진 때 많이 부서졌다. 正面을 바로크 양식으로 바
꾸었다. 2500년간 중단 없이 그리스 신전, 기독교 교회로 사용된, 역사의 숨결이 멈추지 않았던 건물이다.    

일본인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 멸망 후 지중해 세계'라는 책(한길사)에서
시라쿠사 성당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시라쿠사 대성당은 기독교 교회로 돌아간 뒤에도 아랍 색채가 전혀 보이지 않고, 교회가 되기 전에 古代 신전이었던 前歷이 지금도 압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시라쿠사는 기독교 세계가 되든 이슬람에 굴복하든 상관 없이 고대 그리스를 줄곧 질질 끌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 든다. 고대 그리스 조각처럼 쓸데없는 요소를 모두 제거한 뒤에 흐르는 고요함과 편안함으로 가득 차 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밖에 없는데도 더 없는 풍요로움을 느끼게 한다. 이런 느낌의 서재를 갖고싶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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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골목에서 바라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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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 도미니크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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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의 환상적 해안 풍경. 뒤로 보이는 산은 에트나 화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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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古都 아그리젠토(Agrigento)의 '신전의 계곡'에 있는 그리스의 神殿이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시실리를 거쳐간 수많은 지배 민족들은 指紋(지문)처럼 자신들의 유적을 남겼다. 그런 다양성이 이곳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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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신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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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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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아그리젠토의 그리스 성벽인데, 나중엔 무덤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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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나폴리 왕국 시절인 18세기 말에 지은 카세르타 왕궁.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크다. 1600개의 방이 있고, 200만 입방미터의 체적을 가진 18세기 유럽에서 지어진 최대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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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왕국의 카세르타 왕궁 정면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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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기다리는 식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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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의 中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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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한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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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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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라구사. 전형적인 山頂 도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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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메모: 바이킹과 노르만의 세계

8세기부터 약 300년 간 계속된 바이킹의 유럽 약탈 시대에 프랑스 북부에 노르망디 公國(공국)이 탄생하였다. 스칸디나비아(지금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 살던 바이킹 족은 게르만 족의 일파인데 용맹한 戰士(전사) 집단으로서 항해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다. 이들은 프랑스의 세느 강 주변을 약탈하다가 지금의 노르망디 지역에 정착한다. ‘노르망디’는 북쪽에서 온 사람들의 땅이란 뜻이다. 서기 911년에 족장 롤로는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노르망디 公國(공국)을 인정을 받았다. 바이킹은 프랑스에서 살면서 현지어를 습득하고 현지인들과 결혼하면서 문명화되었다. 이곳엔 바이킹, 앵글로 색슨 족, 프랑크 족 등 여러 종족들이 살면서 通婚(통혼), 混血(혼혈)하였다. 노르만 족은 바이킹 족의 정복, 탐험 기질을 이어갔다.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公은 영국으로 쳐들어가 해스팅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을 무찌르고 지금의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점령하였다. 오늘의 영국은 노르만 족이 건설한 제도를 이어받아 발전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는 정복왕이라 불리게 된 윌리엄 1세의 32대 후손이다.

노르만 족에 의하여 영국이 정복됨으로써 세계사가 바뀐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은 先住民(선주민)인 앵글로-색슨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왕가 및 귀족들의 先祖(선조)가 된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영어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계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 바이킹 족이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北歐(북구)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 노르만의 침공은 영국에 대한 마지막 침공이었다. 그 전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당해오던 영국은 그 이후는 침략하는 나라로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망디의 領有權(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중엔 프랑스의 王座(왕좌)까지 탐하게 된다. 14~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전쟁의 서막이 열리는 것이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과 거의 같은 시기 노르망디의 오트빌 家門(가문)의 戰士들이 지금의 이탈리아 남쪽과 시실리 정복에 나선다. 이탈리아 남부 지방을 점령해가면서 아랍 세력이 지배하던 시실리에 상륙한 노르만 족이 팔레르모에 입성한 것은 1072년이었다. 노르만의 영국 정복 6년 뒤였다. 1130년, 노르만 족의 루체로 2세는 교황에 의하여 시실리 왕 겸 캄파니아 지방(나폴리 주변)의 공작으로 책봉된다. 그는 영토 확장에 나서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아말피, 카푸아, 살레르노 등을 흡수하고, 한때는 말타, 아프리카 북부, 예루살렘 주변 지역까지 점령하였다.

노르만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다스린 약 200년 간 이곳은 유럽의 가장 번성한 문명국이 되었다. 노르만 지배층이 개방과 관용과 실용적 정책을 편 덕분이다. 시실리 왕국엔 노르만, 그리스, 아랍, 유대인들이 공존하면서 상공업과 농업, 그리고 문화와 예술 활동에 참여하였다. 노르만은 종교 차별을 하지 않았고 기술자들을 잘 대우하였다.

노르망디는 1204년 프랑스 왕의 통치로 넘어갔다가 14~15세기의 백년전쟁 때 영국군에 잠시 점령당한 적도 있다. 16세기 新舊敎(신구교) 사이의 종교 분쟁 때는 노르망디 사람들이 新敎로 개종하였다가 탄압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일제히 루터교로 개종, 유럽에서 가장 먼저 신교 국가로 변한다. 17세기 노르망디 출신들이 北美(북미) 지역으로 넘어가 지금의 캐나다와 미국에 방대한 지역을 확보하였다. 캐나다의 퀘벡, 미국의 루이지아나(뉴올리안스) 지역을 개척한 이들이 바이킹의 피를 이어 받은 프랑스인들이었다.

 바이킹-노르만 족은 몽골-투르크 족처럼 많은 나라를 부수고, 만들고, 키운 세계사의 대표적 지배민족이다. 바이킹 족이 만들거나 세운 나라들은 거의가 一流(일류)가 되었다. 시실리 왕국, 영국,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핀란드(바이킹에 의하여 정복), 덴마크, 스웨덴 등등. 캐나다와 미국에서도 이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도시나 시골은 삶의 질이 매우 높다. 일류국가 또는 일류문명 제조기라고 부를 만하다. ‘바이킹 = 一流’의 비결은 무엇인가? 바이킹 족이 10세기 무렵까지 유럽에서 가장 미개한 종족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原始(원시)신앙을 가졌으며, 심지어 殉葬(순장)까지 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하나의 기적이다. 

1. 체력이 좋고 용감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적 死生觀(사생관)을 가졌다.

2. 戰士 집단이면서도 의외로 사회가 민주적이고 평등하였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는 노르만 족이 시실리에 만든 것이다.

3. 전쟁기술에 못지않게 통치, 행정 기술이 뛰어났다. 異民族(이민족)을 다스릴 때는 개방, 관용, 실용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통합의 에너지를 동원, 주로 상공업과 건설에 썼다.

4. 해양적 탐험 정신과 이를 뒷받침하는 치밀한 계획 및 기술습득이 제2의 天性(천성)이 되었다.

 

 이하는 趙甲濟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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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이탈리아의 4大 해양도시 중 하나인 아말피(나폴리 근처)의 새벽. 사라센 해적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절벽을 깎아 도시를 짓고 미로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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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 유적. 나폴리, 폼페이, 아말피는 베수베오스 산을 중심으로 인접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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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의 해안 절벽 건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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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리船에서 본 시실리의 에트나 화산. 한라산처럼 이 섬의 중심이다. 높이 3300m. 60만 년 전에 생성된 매우 젊은 활화산으로 자주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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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산의 분화구

 에덴 동산 같은 타오르미나


 우리는 흔히 좋은 경치를 보면 “그림 같다”는 말을 한다. 내가 지난 3월 중순 시실리의동해안 도시 타오르미나의 그리스 극장 관람석에 서서 사방을 둘러 보았을 때 무심코 나온 말이기도 하다. 청명한 하늘, 정면엔 연기를 내뿜는 에트나 화산의 꼭대기(3300m)가 보였다. 왼쪽으로는 높이 200m의 해안 절벽 위에 만든 2700년 역사를 가진 도시 타오르미나, 그 뒤편엔 깎아지른 절벽 위에 쌓은 성벽과 ‘어금니’라는 뜻을 가진 해발 500m의 山頂 마을 카스텔몰라. 타오르미나에서 내려다 본 이오니아 海의 색감은 코발트 블루이다. 여러번 빤 청바지 색깔이다.

양쪽에 늘어선 상점들과 교회를 지나 약1.5km인, 타오르미나 중앙로를 걷다가 절벽 위에 조성한 작은 광장에 섰다. 낙차 약150m 아래 해안의 모래사장이 빛난다. 머리를 뒤로 돌리면 해발 500~600m의 돌산이 내려다 본다. 타오르미나는, 보는 이들의 뇌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映像(영상)을 남긴다. 화산, 바다, 해안, 절벽, 유적, 마을, 교회, 수도원, 城砦(성채), 하늘, 꽃밭이 어우러진 한 폭의 그림이다. 에덴 동산의 이미지이다. 尙美會 여행단은 수도원을 개조한 호텔에서 묵었다. 절벽 위였다. 수도사들이 조용하게 거닐었을 긴 복도와 정원의 하루는 너무 짧았다.

타오르미나를 유럽의 인기 관광지로 만든 이는 독일 화가 오토 겔렝과 文豪(문호) 괴테이다. 괴테는 ‘이탈리아 여행’에서 타오르미나의 경관을 격찬하였다. 베를린이 고향인 게렝은 나이 스무 살 때 시실리를 여행하다가 타오르미나에 매혹되어 겨울을 지내면서 이 도시의 환상적 모습을 화폭에 담아 가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전시하였다.

게렝의 그림을 본 유럽의 미술 평론가들은, “空想이 심하다”고 비판하였다. 겔렝은 “타오르미나를 가 보라. 만약 내가 과장을 하였다면 경비를 내가 물겠다”고 선언하였다.

타오르미나는 감수성이 좋은 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방랑벽이 있는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면서 그들의 인생을 바꿀 작품을 남겼다. 영국의 D.H. 로렌스와 미국의 트루먼 카포테는 ‘폰타나 베키아’라는, 17세기에 세워진 빌라에서 장기 투숙하면서 작품을 썼다. 로렌스는 Touch and Go (1920), The Lost Girl (1920), Arron's Rod (1922)을 완성했는데, The Lost Girl로 상금 100달러의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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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타오르미나에서 바라본 해발 500m의 山頂 도시 카스텔몰라. '어금니'란 뜻이다. 아랍 지배 시절 세운 도시를 노르만이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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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에 있는 그리스-로마 시절의 半圓(반원) 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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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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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타오르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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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상징 紋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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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르미나 시내 건물의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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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풍경엔 늘 에트나 산정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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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 타오르미나 근처의 해안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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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미나 근처의 山城(산성). 12세기 경, 노르만이 시실리를 점령하고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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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와 고대가 공존하는 시실리의 古都(고도) 시라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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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의 석회암 채석장. 그리스 시대부터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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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성당. 그리스 신전을 기초로 만든 성당인데, 내부가 단순하고 정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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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쿠사 근교 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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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의 바로크 식 건축물. 17세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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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토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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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구사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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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lla Romana del Casale라고 불리는 시실리의 로마 시대 대저택 건물 바닥에는 서기 3~4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그림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 지배층의 생활과 패션을 느낄 수 있다. 위의 모자이크는 생포한 코끼리를 배에 싣는 모습이다.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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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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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도 비키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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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족이 세운 시실리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 시내에 있는 '궁전 예배당'은 호화찬란하다. 노르만-아랍-비잔틴-그리스 식이 혼합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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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시내의 야외 카페, 尙美會(상미회) 여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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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 벽에는 베드로가 거꾸로 메달려 십자가 刑을 당하는 모자이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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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르모 근교에 몽레알레 성당을 지은 시실리 왕국의 노르만 왕(구글리엘모 2세)이 성당을 하나님께 봉헌하는 뜻을 담은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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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레알레 성당과 수도원의 아랍 풍 정원 및 회랑. 노르만-아랍-비잔틴 식이 혼합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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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실리의 음식점 정원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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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만을 지키는 노르만의 海城. 안에는 수백 명이 버틸 수 있을 만한 생활공간이 요새화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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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밀라노 대한항공기 창을 통해 내려다 본 알프사 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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