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족 바이킹이 超一流 국가를 만든 비결

10세기까지도 殉葬을 하였던 야만의 바이킹은 일단 정복한 나라를 一流로 만드는 데도 선수였다. 바이킹은 중세 때 노르망디, 시실리, 영국을 一流로 만든 원리를 고향에 적용하였다. 그리하여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는 超一流국가가 되었다. 文明파괴자가 文明건설자로 극적인 전환을 한 세계사의 기적을 추적한다.



超一流국가


2011년 11월 유엔개발기구(UNDP)가 발표한 2010년 세계 '삶의 질' 국가별 순위에서 한국은 스위스, 프랑스, 덴마크 같은 서방 선진국들을 젖히고 169개국중 12등으로 수직상승하였다. '삶의 질'(Human Development Index) 평가는 교육수준, 평균수명, 국민소득(구매력 기준)을 합산하여 생활 수준을 채점하는 방식이다. 法治나 安保 같은 요소는 직접 반영되지 않는다. 아시아 국가로선 한국이 11위인 일본 다음이었다. 노르웨이가 올해도 1등이었다. 한국은 오스트리아,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싱가포르, 영국보다도 앞섰다. 작년보다 14등이나 올랐다. 이는 금융위기로 유럽 나라들이 곤란을 당하고 있는 데 비하여 한국이 빠르게 회복했고, 국민소득을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한 덕분인 듯하다. 구매력 기준 한국인의 1인당 소득은 2만9618 달러로 평가되었다.
한국이 높게 평가 받은 가장 큰 이유는 교육열이다. 국내에선 교육亡國論이 드세지만 외국에선 한국의 교육열을 부러워한다. 외국에선 공부를 안해서 걱정이고 한국에서 너무 많이 해서 문제가 생긴다. 구매력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8등인데, 삶의 질 랭킹은 12등이었다. 이는 한국이 소득수준에 비하여 교육과 의료가 좋다는 뜻이다. 북한은 통계부족으로 조사대상에 들지 못하였다.
삶의 질 순위에서 늘 上位에 오르는 나라는 바이킹을 조상으로 하는 스칸디나비아(핀란드는 바이킹 나라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인접, 같은 문화권에 포함) 5개 국가이다. 이번에도 1등에 노르웨이, 9위에 스웨덴, 16등에 핀란드, 17등에 아이슬란드, 19등에 덴마크가 올랐다. 20등 안에 5개국이 다 들어감으로써 超一流국가임을 다시 한번 實證한 것이다.
지난 8월 뉴스위크가 선정한 '이 나라에 태어나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나라 랭킹'에서도 北歐 4國이 10 등안에 들었다. 1등이 핀란드, 3등이 스웨덴, 6등이 노르웨이, 10등이 덴마크.


가는 곳마다 一流를 만들다


세계에서 1인당 資産(자산)보유액이 가장 많은 나라는 노르웨이이다. 행복도가 가장 높은 나라는 덴마크. 고급문서 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웨덴, 2등은 덴마크, 3등은 노르웨이, 6등은 핀란드. 국가경쟁력 순위는 덴마크가 5등, 스웨덴이 6등, 핀란드가 9등, 노르웨이가 11위. 공무원들의 청렴도는 덴마크가 세계 2위, 스웨덴이 4위, 핀란드가 6위, 노르웨이 11위. 남녀평등 지수는 1위가 아이슬란드, 2위 핀란드, 3위 노르웨이, 4위 스웨덴, 7위 덴마크. 민주주의 성숙도는 1위가 스웨덴, 2위 노르웨이, 3위 아이슬란드, 5위 덴마크, 6위 핀란드이다. 정치, 경제, 교육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北歐의 바이킹 국가들이 늘 10位圈에 든다.
스칸디나비아, 특히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미국에서도 사는 곳마다 좋은 환경을 만든다. 미국의 노르웨이 移民者들은 약460만 명으로 本國 인구와 같다. 본국 인구보다 많은 미국 이민자를 낸 나라는 아일란드뿐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주는 미네소타(16%), 노스 다코타(30%), 사우스 다코타(16%), 몬타나(12%), 위스콘신(9%)이다. 미국에서 만나는 백인 50명중 한 명은 노르웨이 사람이다. 이들은 주로 中北部 지방에 많이 산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 출신 이민자는 약1200만 명이다. 미네소타주는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32%, 독일계가 38%이다. 미네소타는 주민들의 건강상태가 52개주 중 1등이라고 한다. 범죄발생율은 52개주 중 14번째로 낮은 편이다. 미국에서 미네소타주 출신이라면 모범생으로 통한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많이 사는 노스 다코타는 범죄발생률이 52개주중 중 세번째로 낮아 안전한 곳이다. 사우스 다코타도 9등, 위스콘신이 8등, 몬타나주는 7등이다.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미국에 와서도 本國처럼 호수가 많고 추운 주에 모여 산다. 미네소타주는 별명이 '1만 개의 호수를 가진 땅'이다. 노르웨이 이민자들은 모여 살면서 문화적 전통을 이어가고 本國과 연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한국 입양아 2만4000명 받아

스칸디나비아 3국은 6.25 남침 전쟁 때 우리에게 의료지원을 해준 나라이고 국립의료원을 지어주었다. 그뿐이 아니다. 1953년부터 2008년 사이 이루어진 한국 어린이의 海外입양 중 미국으로 입양된 수는 총10만8222명으로 전체의 3분의 2를 구성하고 그 다음이 프랑스 1만1165명, 스웨덴 9297명, 덴마크 8702명, 노르웨이 6295명 순서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 다음으로 해외입양을 많이 수용하는 나라는 스웨덴이다. 세계 130개국에서 4만5000명을 입양하였는데, 인구 비율로 보면 세계 최대 입양국이다. 미국 내에서도 스칸디나비아系 미국인들이 해외 입양을 많이 받아들이는데, 미네소타주에는 1만5000-2만여 명의 한국아동이 입양되었다. 이 수치는 미네소타주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절반 수준에 달한다고 한다.
스칸디나비아 3國의 인구는 합쳐서 2000만 명 정도인데, 받아들인 한국 입양아들은 2만4300여 명이다. 노르웨이는 약400명의 탈북자들을 수용, 정착시켰다. 한국인으로선 머리가 숙여질 따름이다. 분단, 전쟁을 겪은 세계 最貧國이던 한국이 60여년만에 '삶의 질' 세계12위국으로 올라선 것은 세계사에 남을 만한 기적이다. 1000년 전에 유럽에서 가장 낙후되었던 바이킹族이 超一流국가를 건설한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文明의 늦둥이

야만과 文明의 한 척도는 높은 사람이 죽으면 노예나 종을 죽여 같이 묻는 殉葬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지증왕은 서기 502년에 殉葬을 금하는 명령을 내렸다. 바이킹은 유럽에서 가장 늦게까지 순장을 했다. 기독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것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殉葬풍습에 대한 기록을 남긴 이는 이븐 파들란이라는 아랍인이다. 그는 992년 볼가江邊(강변)에서 목격한 러시아 부족장의 장례식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당시의 러시아는 스웨덴 바이킹이 슬라브族을 정복하여 그 기초를 놓은 나라이다. 러시아란 國名도 '루스'라는 스웨덴 말에서 나왔다.
한 바이킹 部族長이 죽자 가족이 남녀 노예들(아마도 슬라브族이었을 것이다)을 모아놓고 "누가 따라 죽을래?"라고 묻는다. 한 여자 노예가 殉葬을 자원한다. 그때부터 다른 노예들은 이 여자를 감시한다. 생각이 바뀌어도 봐주지 않는다. 장례식까지 여인은 매일 술을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좋은 일을 기다리는 듯하다.
장례식 날, 사람들은 배를 강변에 끌어올려놓는다. '죽음의 천사'란 별명을 가진 비대한 여자가 장례식을 주재한다. 땅에 묻어두었던 부족장의 屍身(시신)을 다시 꺼내와 옷을 입힌다. 배에 천막을 치고 그 안으로 屍身을 가져가 安置(안치)한다. 마치 산 사람을 대하듯 먹을 것과 입을 것을 屍身 옆에 쌓아둔다.
사람들은 개와 닭을 잡아 고기를 배로 던진다. 따라 죽게 되어 있는 여인은 여기 저기 쳐진 천막을 돌아다니면서 부족장의 부하들(家長)과 性交를 한다. 그들은 "주인에게 이야기하라. 주인에 대한 사랑의 표시로서 이렇게 한다고"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여인을 배로 데리고 간다. 여인은 목걸이를 벗어 '죽음의 천사'에게 준다. 많은 사람들이 나무로 만든 방패를 들고 와서 여인을 에워싼다. 여인에게 술을 먹인다. 여인은 노래를 부른다. 통역자는 아랍인 이븐 파들란에게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방패를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여인의 비명을 구경꾼들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여섯 명의 남자가 배에 올라탄다. 여인을 부족장 屍身 옆에 눕힌다. 남자들이, 여인의 두 팔과 다리를 붙든다. '죽음의 천사'가 여인의 목을 끈으로 맨다. 두 남자가 끈을 당겨 질식시키는 순간 '죽음의 천사'는 굵은 칼로 여인의 갈비뼈 사이를 여러 번 찌른다. 부족장과 가장 가까운 친척이 와서 배에 불을 지른다. 사람들이 차례로 불쏘시개를 배에 던진다. 배가 불길에 휩싸인다.
이런 식의 殉葬이 사라진 것은 11세기 초 바이킹들 사이에 기독교가 확산되면서이다. 노예제도도 사라졌다. 기독교에 의한 文明化가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인 바이킹족이지만 16세기 초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맨 먼저 신교로 개종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사람들은 1530년대부터 루터교로 改宗, 유럽 新敎세력의 보루가 된다. 17세기 전반의 30년 종교전쟁 때 독일의 新敎徒를 구원한 것은 (프랑스의 후원을 받은) 스웨덴軍이었다.


바이킹 시대 300년의 드라마


인류역사상 몇 번인가, 민족적 에너지의 대폭발이 있었다. 이 대폭발은 대정복이나 큰 전쟁으로 이어졌다.
서기 전 4세기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大王이 페르샤, 중앙아시아, 인도를 원정하였다. 서기 4~6세기 지금 독일, 헝가리 등지에 살던 게르만族이 훈족의 침략을 받아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로마 문명권으로 밀려들었다. 로마가 무너지고 게르만族이 유럽의 주인공이 되었다. 비슷한 시기 몽골 고원에 살던 유목민족이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로 南下, 여러 나라를 무너뜨리고 여러 나라를 만든다.
서기 7~8세기 아라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이 中東, 이란,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北岸, 그리고 지중해를 넘어 스페인까지 점령하였다. 3개 대륙에 걸친 이슬람 문화권과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서기 8~11세기는 이른바 바이킹 시대. 스칸디나비아에 살고 있던 바이킹이 인구증가, 농지부족 사태에 직면 약탈에 나선다. 날렵하게 생긴 긴 배를 몰고 유럽을 공격, 정복, 정착해간다. 프랑스의 노르망디, 이탈리아 남부와 시실리, 시리아 해안 지대, 러시아의 母胎가 되는 키에프, 그리고 영국, 아일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점령하였다. 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족이 건설한 나라이다. 영국과 아일란드도 바이킹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11세기 후 영국 王家는 바이킹族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후손들이다.
서기 13세기. 몽골고원에서 일어난 징기즈칸과 후손들이 기마軍團을 앞세우고 前無後無한 대제국을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 건설하였다.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이 몽골계 帝國의 圈域이 되었다. 서기 15~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가기 시작하였다. 17세기. 네덜란드 사람들이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으면서 北美,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등지에 근거지를 남겼다. 18세기는 프랑스의 시대. 루이 14세가 70여 년간 집권하면서 유럽 최강의 富國이 된다. 19세기. 영국이 막강한 海軍力을 바탕으로 세계의 4분의 1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20세기엔 독일이 두번의 세계大戰을 일으키고 미국과 소련이 이 전쟁을 통하여 2大 강국으로 등장하였다가 미국의 一極체제로 종결된다. 21세기는 중국과 인도의 國力이 대폭발하는 세기가 될 것이다. 한국이 자유통일하면 남북한을 합쳐셔 7300만 인구(유럽에 놓으면 독일, 러시아 다음이 된다)를 갖게 됨으로 여기에 가세할 것이다.

롱십(Long Ship)

바이킹이 유럽으로 쳐들어갈 때나 그린란드와 北美대륙을 탐험할 때 사용한 배는 흔히 '롱십'(Long Ship)으로 불린다. 가늘고 긴 船體(선체)이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여러 박물관에서는 발굴된 배를 진열해놓고 있다. 가장 유명한 배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다. 오슬로 대학 부설 '바이킹 배 박물관'에 세 척의 롱십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오제베르크 高墳(고분)에서 발굴된 배가 가장 유명하다. 바이킹 배를 설명할 때 보여주는 사진은 거의 이 배를 찍은 것이다. 길이 22m, 너비와 높이가 각 5m인데 原型대로 거의 보존되어 있다. 이 배가 발견된 고분에선 20代와 60代의 여인 두개골도 나왔다.
지난 5월 이 박물관에 간 필자가 세어보니, 배의 양쪽엔 15개씩 모두 30개의 노 젓는 구멍이 나 있었다. 30명이 노를 저었다는 이야기이다. 최고 시속은 18km로 추정된다. 배는 참나무와 소나무로 지었다. 木材(목재)에 고래기름을 발랐다. 서기 800년 前後(전후)에 만들어진 배라고 한다. 여자 유골이 있었다고 하여 '여왕의 배'로 불린다. 바이킹 배는 앞뒤가 없다. 약탈을 한 뒤 서둘러 돌아와 배를 돌리지 않고 빨리 도망갈 수 있게 한 것이다.
두 여인 중 한 명은 다른 한 명을 위하여 殉葬(순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어느 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20代 여인의 염색체를 조사한 결과 이란人을 조상으로 둔 것으로 추정되었다. 금속 이쑤시개를 쓴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로 보아 상류층이었을 것이다. 60代 여인은 癌(암)으로 죽었는데 호르몬 분비 장애를 겪어 남자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한다. 이들이 매장된 연도는 서기 834년으로 추정되었다. 열네 마리의 말과 소 및 개들의 뼈들도 발굴되었다. 고크스타드에서 발굴된 배도 전시되어 있는데, 길이가 23.24m, 너비가 5.2m이다. 32명의 노 젓는 사람 등 40명이 정원이지만 70명까지 탈 수 있었다. 추정 최고속도는 시속 20km. 이 배의 복제판을 만들어 노르웨이의 베르겐에서 미국까지 항해한 적도 있다.


덴마크 바이킹의 영국 점령


1945년생인 필자 世代는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덴마크에 대하여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컸다. 지금도 달가스, 그룬트비히 같은 덴마크의 교육자와 농업운동가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덴마크가 19세기 후반에 프러시아에 敗戰(패전)한 후 어떻게 국민정신을 바로 세워 나라를 再建(재건)하였는가, 잘 사는 농촌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교사들이 열정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쳤다. 서울농대 柳達永(유달영) 교수 같은 분들이 덴마크 이야기를 책으로 써 소개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朴正熙 정부도 농촌 개발에 덴마크의 사례를 배우려 하였다.
그래서 덴마크는 농업국가, 평화로운 나라, 그러나 약한 나라로 알려졌지만, 유럽에서는 덴마크라고 하면 ‘무서운 바이킹의 나라’란 인상이 강하다. 8세기 말에서 11세기 말까지의 약 300년 간 유럽 기독교 문명권을 강타한 海洋민족 바이킹族의 중심은 덴마크에 살던 바이킹이었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탐험과 개척, 덴마크 바이킹은 전쟁, 스웨덴 바이킹은 장사를 主특기로 하였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아일란드, 영국을 침공하더니 아이슬란드, 그린란드를 개척하고 지금의 캐나다 동해안에까지 건너갔다.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발견한 이는 콜롬버스가 아니라 바이킹이란 주장은 이제 定說이다. 바이킹은 그러나 아메리카 대륙에서 정착하지 않고 철수하였다.
덴마크 바이킹은 대부대를 조직, 정복에 나섰다. 유럽의 현존 王家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덴마크 王家이다. 965년 덴마크의 해랄드王은 부하 바이킹들과 함께 原始(원시)신앙을 버리고 기독교로 改宗(개종), 통일왕국을 건설, 노르웨이,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자연히 동원력이 강해졌다. 그들은 잉글란드 정복에 注力하였다. 그 전 9세기 초부터 덴마크 바이킹들은 北海를 건너와 잉글란드를 공격하기 시작, 동부 지방을 점령하였다. 잉글란드 사람들도 이에 대응, 뭉치기 시작하였다. 알프레드 대왕이 나타나 덴마크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협상이 성립되었다. 잉글란드의 동부지방 통치권을 바이킹에게 주는 대신에 바이킹들은 잉글란드 왕에게 충성을 바치고 기독교로 改宗하기로 하였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노르망디 지역을 점령한 바이킹과 프랑스 왕 사이에 맺어진 약속과 같은 조건이었다. 덴마크 바이킹에게 주어진 公國(공국)은 데인로(Danelaw)라고 불려졌다.
알프레드가 죽은 뒤 잉글란드와 덴마크는 다시 전쟁으로 들어갔다. 10세기 전반 잉글란드는 바이킹들을 내몰고 失地(실지)를 수복하는 듯하였으나 덴마크 本國에서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덴마크의 스벤 왕(해랄드왕의 아들)은 北歐(북구)의 强者(강자)였다. 그는 1014년에 잉글란드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의 아들 카누트는 大王으로 불린다. 1017-1035년 사이 카누트 대왕은 지금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일부, 그리고 영국(잉글란드)으로 구성된 大帝國(대제국)을 다스린 사람이었다.


영국王家도 바이킹系


카누트 대왕과 그의 아들이 죽자 잉글란드를 다스리던 덴마크 바이킹은 잉글랜드의 王位를 알프레드王의 후손 에드워드에게 물려주었다. 에드워드가 후계자 없이 죽자 노르웨이의 해롤드 할드라다 왕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을 겸하고 싶어서 1066년 원정군을 보냈다. 도버 해협 건너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公國의 윌리엄公(그 또한 바이킹의 후손)도 왕이 되고싶어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란드에 상륙하였다. 영국 귀족을 대표한 색슨族 출신 해롤드는 먼저 노르웨이 원정군을 스탬포드 다리에서 맞아 전멸시키고 해롤드 王까지 죽였다. 잉글란드軍의 다음 상대는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군대였다. 해스팅스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노르망디의 윌리엄공이 이겼다. 잉글란드군은 강행군으로 너무 지쳐 있었다.
윌리엄公(영국왕으론 윌리엄 1세)의 영국 점령은 영국의 進路(진로)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영국의 새로운 귀족층이 되었다. 이들은 先住民(선주민)인 앵글로-색슨 귀족과 융합하여 오늘날 영국의 王家 및 귀족들의 先祖(선조)가 된다. 퀸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정복왕 1세의 32代 후손이다. 노르망디 사람들이 쓰던 프랑스어가 英語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치고 유럽 대륙의 로마-라틴系 문명이 영국에 많이 들어온다. 바이킹族이 영국과 유럽을 이어준 것이다. 이때부터 영국은 北歐를 벗어나 유럽 대륙을 활동무대로 삼게 된다. 노르망디의 영국침공은 영국에 대한 마지막 침공이었다. 대륙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당해오던 영국은 그 이후는 침략하는 나라로 바뀐다. 바이킹 지배자들이 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덕분이다. 윌리엄 1세와 후손들은 고향인 노르망디의 領有權(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중엔 프랑스의 왕자리까지 탐하게 된다. 14~15세기 프랑스-영국 사이 백년 전쟁의 불씨가 된 것이다.
덴마크는 잉글랜드를 잃고도 수백년간 스칸디나비아 반도 전체를 통치하였다. 16세기까지 약 800년간 北歐(북구)의 최강국은 덴마크였다. 코펜하겐의 덴마크 국립박물관에 가 보면 帝國(제국)이 아니면 모을 수 없는 미술품들이 많다. 스웨덴도 140년간 덴마크 지배를 받았다. 16세기 스웨덴은 덴마크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17세기엔 유럽의 새 강국으로 떠오른다.

一流의 DNA

노르웨이 사람들은 스웨덴 사람에 대하여 "돈은 셀 줄 아는데 친구는 셀 줄 모른다"고 비꼰다. 필자는 지난 5월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가서 쉐라톤 호텔에 묵은 적이 있다. 1층 화장실에 들렀더니 번호판 열쇠가 붙어 있었다. 프론트에 가서 물으니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투숙객에게만 화장실 사용을 허용하는 호텔은 처음 보았다. 공중화장실도 유료이다.
스웨덴 바이킹族은 장사꾼 기질을 살려 러시아, 黑海(흑해), 비잔틴 제국 등 동남쪽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볼가 강을 타고 내려가 黑海에 이르고, 지금의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두었던 비잔틴 제국과 交易(교역)하는가 하면 일부는 바그다드까지 진출, 아랍 사람들과 장사를 했다. 한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바이킹족으로 구성된 경호부대를 두었다. 스웨덴 사람들이 이때 발전시킨 도시가 키에프이다. 키에프(우크라이나 수도)를 중심으로 성장해 간 나라가 러시아. 러시아의 초기 지배층은 바이킹이었다. 러시아를 제국으로 발전시키는 데 토대를 놓은 이반 雷帝도 바이킹 왕족 루릭 家門의 모스크바 分系이다.
유럽을 여행하다가 보면 도처에서 바이킹의 역사를 만나게 된다. 스칸디나비아는 바이킹의 고향이었으니 그렇다 치고,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국, 아일란드, 시실리, 나폴리, 말타에까지 바이킹의 발자취를 보게 된다. 현재의 영국王家가 바이킹系이고, 런던 탑이 그 王家의 창시자 윌리엄 왕이 세운 것이며,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와 시실리의 유수한 건축물들이 바이킹의 후예인 노르만 정복시절의 작품이며, 아일란드의 더블린과 우크라이나 수도 키에프 또한 스웨덴系 바이킹이 키운 도시임을 알고 놀란다. 노르망디 해안 섬위에 지은 몽셍미셀 성당은 노라망디公 리샤르 1세가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수도원으로 지은 것이 증축된 경우이다.
12세기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문명을 자랑한 곳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영국, 그리고 시실리 왕국이었고, 세곳 모두 바이킹족의 후손인 노르만들(노르망디 거주자)의 통치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야성적인 민족의 피속에 一流의 DNA가 흐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 바이킹 출신들이 세운 나라가 지금은 超(초)일류국가로서 先進化 통계에서 늘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바이킹들은 싸움과 무역과 탐험이 特技(특기)였으나 일단 정착하면 정치와 행정을 잘하였다. 현지사정을 감안, 가장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관료제도와 통치방식을 채택하였다. 특히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다 아울러 공존공영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안정과 관용 속에서 자연히 문화와 예술도 꽃피었다.



시실리와 나폴리를 정복한 바이킹

1066년에 프랑스 노르망디를 다스리던 윌리엄公이 영국으로 쳐들어가 이를 정복, 오늘의 영국, 그 母胎(모태)를 만들던 무렵에 노르망디 출신의 또 다른 바이킹이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를 점령, 150년간 다스리면서 이 王國을 유럽에서 가장 발전한 나라(일부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근대적인 국가라고 부른다)로 만든 史實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노르망디에 살던 노르만인들은 戰士들이었으므로 유럽과 비잔틴 제국에서 傭兵(용병)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들끼리 정보망이 발달하였다. 좋은 일자리가 있으면 고향인 노르망디에 연락하여 동료들을 불러왔다. 바이킹들은 영웅적인 기질로 인해 용병에 만족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용병을 하다가 영주나 지도자가 되는 노르만인들이 생겼다. 그들중 하우트빌 家門(가문) 출신의 로저가 1071년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시실리를 정복하였다. 이 세력은 그 前後 이탈리아 반도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남부 이탈리아 여러 도시를 차례로 정복, 시실리와 함께 묶어 한 왕국으로 다스렸다. 이 왕국은 지중해의 말타와 지금의 트리폴리와 튀니시아 해안 등 아프리카 北岸(북안)의 몇 개 도시도 정복하였다. 노르만 세력의 꿈은 시실리를 근거지로 하여 이탈리아를 통일, 지중해 帝國(제국)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시실리 왕국은 왕조가 바뀌고 나폴리 왕국이 떨어져나가는 곡절을 겪지만 1861년의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유지된다.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에 가면 노르만 정복시절에 만들어진 城, 궁전, 교회들이 많다. 나폴리 해안의 델로보 城, 팔레르모의 노르만 궁전, 세팔루의 성당, 바리의 聖니콜라 교회, 몽레알의 두오모(성당) 등. 그 양식은 로마네스크이다. 로마네스크식은 로마제국이 망한 이후 全유럽에 퍼진 최초의 건축 양식이다. 半圓式(반원식) 아치, 큰 탑, 두꺼운 성벽, 대칭형, 단순한 디자인을 특징으로 한다. 이 양식은 12세기부터는 고딕식으로 바뀐다.
시실리 왕국의 지배층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출신이었으므로 프랑스에서 발달한 로마네스크 양식을 시실리와 이탈리아 남부에 도입, 현지의 비잔틴, 이슬람 양식에 접목시켰던 것이다. 노르만 문화 예술의 특징은, 北유럽의 전통을 로마, 비잔틴, 아랍문화와 결합시킴으로써 활기 있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너그러운 매력을 만든 점이라고 한다. 바이킹은 문명의 파괴자였지만 정착한 바이킹, 즉 노르만은 기독교로 개종, 文明의 건설자로 바뀐것이다.
노르만이 다스리던 시실리 王國은 다양한 문화, 종교, 언어가 뒤섞여 활기가 넘쳤다. 시실리는 문명의 교차로에 자리잡아 옛날부터 여러 문화가 混在(혼재)된 곳인데, 노르만 정복자들은 이런 地政學的인 조건에 잘 적응하였다. 이슬람, 기독교, 그리스 正敎(정교), 유태교가 공존하였다. 이탈리아인, 유태인, 아랍인, 그리스인, 게르만인, 노르만인들도 섞여 살았다. 노르만들은 백성들에게 자유를 많이 주었다. 종교적, 인종적 차별을 하지 않았다. 노르만들은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를 만들어 法治를 세우고 피지배층의 관습을 존중하면서 다양한 문화와 민족을 포용하였다. 王은 봉건영주들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직속 관료제도를 강화하였다. 안정과 관용 속에서 풍성한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시실리 王國이 유럽에서 등장한 최초의 근대 국가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다.
1112년부터 팔레르모가 시실리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지금은 마피아의 본거지로 악명을 떨치고 있지만, 당시엔 유럽에서 가장 활기 있는 도시였다. 노르만 정복 王朝는 여기서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고, 이들의 문화를 활용하였으므로 지배를 받는 이들도 압제를 받는다는 의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노르만 왕들은 수상 자리엔 노르만인이 앉지 못하게 하였다.
北極圈(북극권)에 가까운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해양민족이 아프리카와 가까운 시실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 피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이킹족의 인간적 사회적 우수성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이들은 수많은 전쟁과 무역을 통하여 실용적이고 개방적인 민족성을 갖게 되었으며, 사회구조가 평등하고, 公會(공회)와 法治를 중시하였다. 이런 특징은 성공한 인간, 조직, 국가의 공통점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議會는 바이킹 公會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議會(의회)는 바이킹이 만든 것이다.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아이슬란드를 점령한 다음 서기 930년에 알싱이란 의회를 열었다. 36명의 추장과 12개의 小公會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여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기 위하여 15일간의 會期(회기)를 가진 것이다. 사회를 본 사람은 법령을 기억하는 의무를 맡은 사람이었다. 한 독일사람은 이런 모임을 열어 문제를 해결하는 아이슬란드 사람들을 보고 "그들은 왕이 없으나 法이 있다"고 말하였다.
기독교가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王이 등장하기 전 바이킹 사회에서 왕은 立法權(입법권)이나 司法權(사법권)이 없었다. 그런 권한은 公會에 있었다. 공회는 자유민들의 회의체인데, 부락, 지역 단위로 있었다. 이런 공회는 연간 한두 번 열렸다. 공개적으로, 민주적인 토론이 이뤄졌다. 재판도 이 공회가 맡았다. 기소된 사람은 자유롭게 자신을 변호할 수 있었다.
바이킹 사회는 노예와 부족장이 있긴 했으나 자유민이 주축이었다. 바이킹 자유민은 당대의 유럽 사람들보다 훨씬 큰 자유를 누렸다. 바이킹 사회의 평등성에 기반을 둔 민주성, 민주성에 근거한 力動性(역동성)은 지금도 北歐에서 이어져 온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나라들이 보여주는 평등, 자유, 복지의 모델은 바이킹 사회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는 듯하다.
바이킹族은 가족애가 강하였다. 가족의 一員(일원)에 대한 모독은 가족 전체에 대한 것으로 간주되어 보복을 불렀다. 가족으로부터 추방당하는 것이 가장 가혹한 형벌이었다.
겨울이 길어 사람들은 집안에서 오랫동안 같이 살아야 했다. 바이킹들은 필요한 것을 집안에서 手工業的(수공업적)으로 만들었다. 집집마다 工具가 있고, 큰 집은 철공소를 운영하였다. 선박과 관련된 기술은 특정인의 專有物(전유물)이 아니었다.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긴 항해를 견디고 전투에서 이기기 위하여 그들은 비상한 '손재주'를 연마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튼튼하고 정밀한 게 특징이다. 이런 실용적 정신이 北歐의 경제와 문화를 관통하고 있다. 바이킹族은 항해, 무역, 전투가 特技(특기)였으므로 프랑스와 독일처럼 한가하게 철학을 논할 여유가 없었다. 관념적 명분이 아니라 구체적 實利추구가 이들의 행동철학이었다.


地上天國을 만든 Nordic Model(北歐모델)


스칸디나비아 3국이라고 하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만 들어간다. 핀란드가 빠진다. 노르딕 칸추리(Nordic Countries)라고 하면 3국 외에 핀란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파로에 섬이 들어간다. 이들 나라를 北歐(북구)라고도 부른다. 北歐 나라들은 國旗(국기)에 옆으로 누운 십자가를 공통적으로 쓴다.
인구는 스웨덴이 937만으로 가장 많다. 덴마크 550만, 핀란드 534만, 노르웨이 483만 명이다. 아이슬란드는 약32만 명, 그린란드는 5만6000명, 파로에는 4만9000명이다. 면적은 그린란드가 216만 평방킬로미터로서 호주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그린란드와 파로에는 덴마크 자치령이다. 北歐 4개국의 인구는 모두 2500만 명 정도이다.
종교는 新敎(신교)가 84%이다. 거의 모두가 루터교이다. 가톨릭은 1.25%로서 이슬람(2.58%)보다 적다. 北歐는 그러나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은 비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
EU(유럽연합)에 가입한 北歐 나라는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이다. 유로를 쓰는 나라는 핀란드뿐이다. NATO에 가입한 나라는 덴마크, 아이슬란드, 노르웨이이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는 왕국, 핀란드와 아이슬란드는 공화국이다. 노르웨이가 독립국이 된 것은 1905년, 스웨덴은 1523년, 아이슬란드는 1944년, 덴마크는 10세기경부터, 핀란드는 1917년이다.
北歐모델(Nordic Model)이란 말이 있다. 이 나라들이 개발하여 정착시킨 독특한 사회, 복지, 교육 제도를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혼합형태이다. 개인의 기본권 존중, 평등, 여성의 취업 장려, 경제활동 인구의 最多化(최다화), 貧富(빈부)격차의 최소화, 강력한 사회보장과 의료보험, 폭넓은 의무교육 제도, 낮은 범죄율, 높은 생활수준, 많은 세금, 높은 고급 문서 해독률, 민주주의의 성숙, 법치주의의 확립, 높은 노조 가입률(80% 이상), 社民黨의 장기집권을 공통점으로 한다. 이들 나라는 公共부문의 지출이 많지만 생산성은 높다.
실업수당이 덴마크는 받던 임금의 90%, 스웨덴은 80%이다. 독일은 60%. 국민총생산중의 세금은 스웨덴이 51%, 핀란드가 43%. 독일은 34%. 교육투자율도 높은데, 덴마크는 국내총생산의 7%, 스웨덴은 6.5%를 투자한다. 영국은 5.5%.
스웨덴 사람들의 80%는 매년 한 번 이상 직업훈련을 받는다. 유럽 평균의 두 배이다. 스웨덴과 핀란드는 국내총생산의 4%를 매년 연구개발 투자에 쓴다. 영국은 2% 이하. 덴마크는 風力발전으로 電力의 25%를 댄다. 경제와 복지 분야의 규제는 立法으로 하지 않고 利害 당사자간의 합의로 한다. 유럽에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 랭킹에선 1위가 덴마크, 4위가 아이슬란드, 5위가 노르웨이, 6위가 핀란드, 7위가 스웨덴이다. 노조의 힘이 세어도 기업 자유도가 높다.
덴마크는 해고가 자유로운 나라이다. 反복지 정책처럼 들리겠지만 해고가 자유로운 덕택으로 再취업률도 높다. 유럽에서 가장 실업률이 낮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柔軟안전성(Flexicurity)이다. Flexibility(유연성)와 Security(안정성)의 합성어로서 고용의 유연성을 통하여 직업의 안정성을 도모한다는 뜻이다. 덴마크의 실업률은 2%대로서 10%에 육박하는 西歐 나라들에 비교된다. 덴마크는 거의 매년 국민행복도가 세계1등으로 조사된다. 고용의 신축성과 공무원 사회의 투명성(세계에서 가장 덜 부패한 나라)이 만든 결과라고 한다.
바이킹이 세운 나라가 超一流 국가가 된 이유를 나름대로 정리해본다.
1. 민족적 자질이 우수하다. 체력이 좋고 IQ가 높다. 탐험가, 모험가, 지배민족의 체질을 타고 났다. 공동체의 권력구조가 비교적 평등하였다. 尙武(상무)정신과 商術, 그리고 행정력이 뛰어났다. 바이킹 시절에도 정복한 곳을 다 一流로 만들었다.
2. 기독교 문명을 맨 나중에 받아들였으나 종교개혁 때 改新敎로 개종, 산업화와 민주화에 유리한 정신적 風土를 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3. 바이킹의 海洋정신을 잃지 않았다. 무역, 탐험, 이민, 海運에 注力하고 진취적인 삶의 자세를 유지함으로써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평등정신에 기초한 사회 복지 제도를 만들었다.
4. 국가별 인구 규모가 500~900만 수준으로 관리하기가 좋다.
5. 地政學的인 戰略(전략)가치가 약하여 유럽 강대국으로부터 本土를 공격 받는 일이 적었다.





















덴마크의 햄릿성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해협은 가장 좁은 곳이 4km이다. 이 해협이 발틱海의 목구멍이다. 이곳을 장악하면 北歐와 독일 및 러시아가 이용하는 발틱海를 통제하게 된다. 15세기부터 해양강국 덴마크가 이곳에 크론보그 요새를 짓고 출입하는 선박으로부터 통과세를 받았다.
요새가 있는 마을 이름은 헬싱괴르인데 세익스피어가 쓴 '햄릿'의 무대이다. 관광객들은 크론보그성을 '햄릿城'이라고 통칭한다. 이 성은 바다로 돌출한 곳에 있어 더욱 장대하다. 세익스피어가 활동하던 16세기 이 城은 유럽에서 유명하였다. 덴마크 왕들은 이 성에서 여름을 보내기도 하였다. 헬싱괴르가 덴마크의 수도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세익스피어 사망 200주년을 기념하는 연극이 城의 정원에서 공연되었다. 그 뒤에도 '햄릿'이 여러 차례 공연되었다. 최근엔 로렌스 올리비에, 존 길거드, 크리스토퍼 프러머 같은 배우들이 등장하였다. 크론보그성은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럽을 대표하는 르네상스 시절의 城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론 덴마크가 발트해의 해상권을 장악하였던 황금기를 상징한다.
1423년 덴마크 에릭왕은 독일 북부의 한자 동맹 소속 상인들을 소집, 스웨덴-덴마크 해협을 통과하는 선박은 일단 헬싱괴르에 닻을 내리고 통과세를 내야 한다고 통보하였다. 당시 한자동맹 도시국가들은 北歐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하여 이 해협을 많이 이용하였다. 덴마크는 노르웨이와 스웨덴(핀란드 포함)를 속국으로 다스리고 있던 强國이었다. 1427년까지 크론보그 요새를 완성한 에릭은 여기에 砲臺를 설치하였다. 세금을 내기 위하여 정박하는 배와 선원들이 돈을 쓸 수 있도록 항구 마을도 개발하였다. 수많은 통과 선박이 19세기까지 거의 400년간 낸 세금은 덴마크를 먹여 살린 큰 財源이었다. 서기 1500년 이전엔 연간 1000척 정도가 이 해협을 통과하였다. 그 이후엔 5000척을 넘었다. 네덜란드 선박들이 많았다. 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덴마크와 스웨덴은 16~17세기에 여섯 차례 전쟁을 벌였다.


피바다 속에서 탄생한 나라 스웨덴


정치적 학살은 주로 반대세력에 겁을 주기 위하여 이뤄지지만 오히려 반발을 불러 낭패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엔 거대한 王宮(왕궁)이 평온한 바다를 내려다 본다.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는 왕궁중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단조롭고 육중하게 보이는 왕궁의 방이 600개가 넘는다. 이 왕궁 정문 앞은 '스톡홀름의 피바다'(Stockholm Bloodbath)라고 불리는 사건이 난 곳인데 기념물이 있다. 이곳이야말로 스웨덴이란 나라의 탄생지이다. 국가가 피바다 한가운데서 태어난 경우이다.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14세기 말부터 덴마크를 중심으로 연방국가를 만들어 살아왔다. 덴마크 王家가 지배자였다. 16세기 초 스웨덴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귀족들이 중심이었다.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는 두 차례 진압군을 보냈으나 스웨덴 反軍(반군)에 밀렸다. 세 번째 진압군은 프랑스, 독일, 스코틀랜드 傭兵(용병)들을 포함한 大軍이었다. 스텐 스투레가 지휘하는 스웨덴 반군은 連敗(연패)하였다. 스투레도 부상당한 뒤 죽었다. 스웨덴의 귀족회의는 덴마크 왕이 반란 책임자들에 대한 사면을 약속하면 다시 충성을 맹세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反軍은 스투레의 부인의 지휘하에 그 뒤에도 스톡홀름에서 抗戰(항전)을 계속하였다. 덴마크의 海軍이 나타나 바다와 육지에서 공격해 들어오자 스웨덴 反軍은 사면의 약속을 받고 항복하였다. 1520년 9월7일이었다. 11월1일 스웨덴의 대표자들은 크리스티안 2세에 충성을 다짐하였다. 덴마크 왕이 스웨덴 王位를 세습하는 데도 동의하였다.
11월4일 크리스티안 왕은 트롤레 대주교가 집전한 스웨덴 王位 즉위식을 올렸다. 즉위 축하 행사도 사흘간 벌어졌다. 7일 크리스티안 왕은 스웨덴의 지도자들을 궁정의 저녁 회의에 초청하였다. 다음 날 저녁, 덴마크 군인들이 亂入(난입), 스웨덴 지도자들을 끌고 나가 감금하였다. 9일 트롤레 대주교가 주재하는 위원회가 지도자들에게 死刑을 선고하기 시작하였다. 스웨덴 지도자들은 수년 전 덴마크 王家 편인 트롤레 대주교를 쫓아내려는 모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음모자 명단을 가지고 보복에 나선 것이다.
死刑선고를 받은 이들 가운데는 反軍을 지원한 귀족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바깥으로 끌려나가 참수되거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틀간 82명의 스웨덴 지도자들이 처형당했다. 크리스티안 왕은 反軍 지도자 스투레와 그의 어린 아들 무덤까지 파헤지고 屍身(시신)을 꺼내 불태우게 했다.
이때 처형된 에릭 요한슨의 아들 구스타프 바사는 학살 소식을 듣고는 스웨덴의 북쪽 달라르나 지방으로 피신, 백성들을 상대로 학살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반란군을 조직, 독립전쟁을 일으켜 덴마크 군대를 쳐부순다.


115년 사이 여섯 번 싸운 덴마크-스웨덴


구스타프 바사는 3년간의 독립전쟁 끝에 덴마크 군대를 무찌르고 1523년 6월24일 스톡홀름에 入城했다. 그 보름 전인 6월6일 그는 議會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달아난 트롤레 대주교 자리에 다른 사람을 임명, 교황의 허락을 간청하였으나 교황은 트롤레를 재임명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로써 비롯된 분쟁 끝에 바사 왕은 가톨릭을 버리고 루터교를 國敎로 택한다. 1525년엔 新約 성경을 번역, 출판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그리고 영국의 헨리 8세는 거의 동시에 가톨릭을 버렸다.
재미 있는 것은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를 몰아내고 王이 된 크리스티안 3세도 루터敎로 改宗하였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덴마크는 피비린내 나는 內戰을 벌인다. 이때 그리스티안 3세는 스웨덴의 바사 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바사는 한때의 敵國이었던 덴마크 왕을 위하여 군대를 보내 新敎軍을 도와 준다. 크리스티안 3세는 1521년 神聖로마제국 의회에 마르틴 루터가 나와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연설을 하는 것을 보고 감복한 사람이다. 王이 개종하면 국민들도 따라가야 한다. 이렇게 하여 덴마크, 노르웨이(덴마크 속국), 스웨덴(핀란드는 속국)이 비슷한 시기에 루터교를 國敎로 수용하였다. 스칸디나비아 4國이 상업활동과 민주주의를 권장하는 改新敎로 改宗한 것은 이 지역의 향후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덴마크는 1523년에 스웨덴의 독립을 허용한 뒤에도 失地(실지)를 회복, 스웨덴을 종속시키기 위하여 1563~1679년의 115년 사이에 여섯 번이나 전쟁을 하였다. 덴마크의 프레데릭 2세는 1559년에 즉위하자 덴마크-스웨덴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양쪽은 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자비한 살육을 거듭하였다. 덴마크는 많은 군비 지출로 부도가 날 지경이었다. 왕은 옥스라는 재정전문가에게 문제의 해결을 부탁하였다. 그는 헬싱괴르 앞 해협 통과세를 복잡하게 재조정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고 한다. 1629년에는 大火로 거의 全燒(전소)된 크론보그城을 再建하였다. 1657년 덴마크가 스웨덴을 공격하자 스웨덴은 반격에 나서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와 코펜하겐을 2년간 포위하기도 하였다. 덴마크는 결국 북구의 覇者 자리를 스웨덴에게 넘겨주고 만다.


스톡홀름의 명물 戰艦 바사 박물관


스웨덴 수도 스톡홀름에 아주 인기 있는 박물관이 있다. '바사 박물관'(VASAMUSEET)이다. 1628년 8월10일의 처녀항해 때 침몰한 戰艦(전함) '바사'를 1961년에 건져 복원,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이 구경하러 온다. 낙후되었던 스웨덴을 유럽의 强國(강국)으로 만든 구스타프 2세 아돌프 大王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진 이 전함은 상부가 너무 무거워 풍랑이 불자 뒤집어지면서 침몰하였다. 전함은 길이가 69m, 높이가 49m이다. 排水量 1200t에 64개의 대포를 실었고, 탑승 선원은 400명이 넘었다. 이 가운데 약 50명이 구조되었다. 침몰한 곳이 해안에 가깝고 얕은 바다 밑이어서 건져올릴 수 있었다. 1만4000개의 조각을 맞추어 복원한 戰艦이므로 원래의 材質(재질)에 원래의 모습이다. 전복 사고 후 구스타프 大王은 관련자를 문책하도록 지시, 조사가 시작되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관련자들의 과실이 발견되지 않았고, 설계자들은 '왕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책임을 轉嫁(전가)하였다. 사고원인은 '神의 뜻'으로 귀착되었다.
구스타프 아돌프 대왕은 전쟁의 天才(천재)였다. 나폴레옹과 클라우제비츠가 숭배한 장군-왕이었다. 구스타프는 기병, 보병, 포병, 보급부대를 유기적으로 통합하여 기동전을 펼쳤다. 기병과 보병도 대포를 쏠 수 있도록 훈련을 받았다. 兵科(병과)가 달라도 서로 도왔다. 戰史學者들은, 그를 '현대전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구스타프 大王은 열일곱 살에 王이 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英明(영명)한 인물이었다. 외국 사신을 접견할 때 그 사신의 나라 말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라틴어로 말하고 쓸 줄 알았다. 당시 스웨덴은 덴마크, 러시아, 폴란드와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모두 승리하였다.

유럽최강의 스웨덴 陸軍, 신교도를 지켜내다


1618년 독일을 무대로 한 30년 전쟁 때 그는 新敎徒(신교도) 편에서 참전하였다. 그가 이끄는 스웨덴 군대는 舊敎(구교) 편인 합스부르크 왕조(神聖로마제국)와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해갔다. 한때 뮌헨이 있는 바이에른 지방까지 진출하였다. 스웨덴 군은 당시 유럽 최강이었다. 잘 훈련된 스웨덴 보병의 사격은 명중률이 높았고 발사 시간이 빨랐다. 구스타프 대왕은 1632년 11월6일 독일에서 전투중 戰死하였다. 왕이 죽어도 스웨덴 軍은 승리하였다. 스웨덴 왕 가운데 大王 칭호는 그가 지금까지 유일하다. 죽었을 때 나이 38세, 在位는 21년이었다. 스웨덴은 독립한 지 100년 만에 유럽에서 러시아, 스페인 다음으로 면적이 큰 强國이 되었다. 발트해는 스웨덴의 호수가 되었다. 戰艦 바사호 앞에 서면 스웨덴 전성기의 영웅적인 기상을 느낄 수 있다.
스웨덴 군대가 신교도 편을 들지 않았으면 30년 종교전쟁은 舊敎徒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거의 패배한 신교도 세력을 구한 것이 스웨덴이었다. 한때 스웨덴 군대는 독일의 반을 점령하였다. 30년 종교전쟁에서 그들은 독일에서 1500개의 도시, 1만8000개의 마을, 2000개의 城을 파괴하였다.
30년 전쟁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독일,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 독립을 억압하려고 80년 전쟁을 벌였는데, 30년 전쟁의 종결 때 네덜란드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영국은 신교도 세력에 돈을 댔지만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종교 전쟁 이후 유럽에서 이 두 나라가 잘 나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은 이 전쟁이 가져온 황폐와 분열로부터 회복하는 데 200년이 걸렸다. 30년 전쟁 이후 유럽에선 종교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王을 수입한 노르웨이와 스웨덴


노르웨이는 1380년부터 1814년까지 덴마크와 연합국을 이뤘다. 덴마크는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는 바람에 1814년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주었다.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통치하였으나 큰 압박은 없었고 자치를 허용하였다. 노르웨이는 1905년 평화적으로 스웨덴과 분리, 독립한다. 이때 국민투표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王國을 선택하였다. 노르웨이는 오래 전에 王家의 맥이 단절된 상태였다. 그들은 王을 수입하기로 하였다. 덴마크의 왕자 칼을 모셔 와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바이킹 시절의 노르웨이 왕 이름인 하콘 7세라 칭하고 아들 올라브를 왕세자로 임명하였다. 지금 왕은 올라브의 아들인 하랄드 5세이다.
1810년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고 있을 때 스웨덴 왕은 칼 13세였다. 王世子가 죽어 후손이 끊어지자 귀족회의는 프랑스의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 장군을 왕세자로 추대하였다. 베르나도트 장군은 나폴레옹이 신임하는 부하였다. 元帥 계급을 가졌던 그는 함부르크 일대를 통치하는 총독으로 근무중 스웨덴의 왕세자로 영입되어 군의 참모총장도 겸했다. 스웨덴이 연합군 편에서 나폴레옹을 공격할 때는 이를 지휘하였다. 1818년 칼 13세가 죽자 베르나도트 장군이 스웨덴의 왕이 되어 칼 요한 14세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손들이 지금까지 王朝를 이어가고 있다. 유럽에선 이처럼 왕을 외국에서 수입하기도 하고 왕이 자신의 나라를 다른 나라 왕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 18세기까지 국가는 왕의 私物이었다.


침공당한 노르웨이를 돕지 않은 스웨덴


2차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은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점령해버렸다. 스웨덴은 중립을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노르웨이 침공 독일군의 領內 통과를 허용하였다. 스웨덴은 형제국인 노르웨이가 독일군의 공격을 받을 때 돕지 않고 사실상 독일군을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스웨덴에 대한 감정이 지금도 좋지 않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독일군에 점령당한 뒤에도 험준한 산악 지방을 이용, 저항하였다. 王과 정치인들은 영국으로 피신, 亡命정부를 세웠다. 이들은 소규모 해군과 공군을 만들어 영국군을 도왔다.
노르웨이는 지금이나 그때나 세계 최강의 海運國이다. 런던의 망명 노르웨이 정부는 400만t의 상선대, 2만5000명의 선원, 1000척의 선박을 연합국에 제공하였다. 大戰中 영국이 수입한 석유의 半은 노르웨이 상선들이 운반하였다. 전쟁중 노르웨이 선박의 반이 침몰, 2000명의 선원이 죽었다. 1945년 5월, 히틀러가 자살한 뒤 독일군이 항복하자 노르웨이에선 對獨협력자를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노르웨이는 死刑제도를 폐지한 나라였지만 보복처형은 계속되었다. 나라가 생존차원에서 싸울 때는 그렇게 평화를 사랑하는 노르웨이 같은 나라에서도 法治가 일시적으로 왜곡된다는 좋은 사례이다. 對獨협력자에 대한 처벌은 20년간 계속되어 1964년에 끝났다.
2차 대전이 시작되었을 때 유럽엔 20개국이 중립국이었으나 끝날 땐 스웨덴, 포르투갈, 스위스 세 나라만 中立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통일과정에서 한국이 韓美동맹을 파기하고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는 識者들이 지금부터 등장할 것이다. 스웨덴처럼 군사적 전통이 강한 나라도 나치 독일 앞에선 굴욕적으로 中立을 지켜야 하였다. 민주주의 국가만이 약한 나라의 중립을 존중한다. 러시아와 중국은 앞으로 200년이 지나도 西歐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어려울지 모른다. 상비군 200만 명을 유지하고, GDP의 10%를 국방비로 부담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中立 같은 '헛소리'는 하는 게 아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노르웨이를 이길 수 없는 中國


중국 정부는 최근 反체제인사 류샤오보(劉曉波)에게 2010년도 노벨평화상을 주기로 결정한 노르웨이에 압박을 시도하였으나 먹히지 않았다. 노벨의 유언에 따라 평화상 결정에 관한 全權은 노르웨이 노벨위원회가 갖고 있는데, 노르웨이 의회에서 선출된 5명의 위원은 후보자 선정에서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지구상에서 중국의 압박이 가장 먹히지 않는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노르웨이는 싸움꾼 덴마크와 장사꾼 스웨덴 사이에 끼여 氣(기)를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순박한 동생格이었다. 하늘이 이런 노르웨이에 축복을 내린 것은 20세기 후반이다. 1969년 北海의 노르웨이 水域(수역) 안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척박한 고향을 떠나 해적질을 하면서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던 나라, 本土 인구만한 이민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나라가 축복 받은 땅으로 변한 것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출 세계 5위, 가스수출 세계 3위이다. 國內총생산의 약 20%가 석유수입이다. 노르웨이는 석유수입금을 잘 관리한다. 석유수입을 국민年金기금화하였는데, 작년 11월 현재 4550억 달러이다. 아부다비 基金(기금)에 이어 세계 2위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1조 달러에 달하고 결국은 세계 최대의 基金이 될 것이다.
노르웨이 사람은 머리 좋고 체력 좋은 사람이 부지런하고 마음도 좋은 경우이다. 석유수입이 이 정도이면 서비스業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1, 2차 산업은 기피하게 되는데 노르웨이는 그렇지 않다. 노르웨이는 중국에 이어 세계 제2위의 海産物(해산물) 수출국이고, 세계 6위의 商船隊(상선대)를 갖고 있다. 잘 사는 민족이 가장 먼저 버리는 게 水産, 海運(해운)인데 노르웨이는 바다를 떠나지 않는다. 1000년 전의 바이킹 시절부터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이들의 海洋정신이다.
노르웨이는 깊은 계곡이 많아 전체 電力의 약 98%를 水力발전으로 충당한다. 그러니 석유를 많이 수출할 수 있는 것이다. 上場(상장)된 회사 주식의 약 30%를 국가가 보유한다. 석유, 통신, 은행, 알루미늄 산업은 國營(국영)이다.
의료비는 전액 무료이다. 出産휴가는 父母가 다 받는데 1년이다. 이 정도이면 놀고 먹자는 사람들이 많아 실업률이 높을 것 같지만 1~3%이다. 노르웨이는 1인당 GDP가 약 10만 달러로서 룩셈부르크에 이어 세계2위이지만 1인당 資産(자산) 보유액은 세계1위이다. 쉽게 말하면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란 뜻이다. 작년 초엔 인구가 두 배인 스웨덴보다 GDP가 많아졌다.
1인당 GDP뿐 아니라 삶의 질, 평화지수, 자유지수, 국가운영 성적 등 거의 모든 국제통계에서 노르웨이는 최상위권이다. 작년 미국의 폴린 폴리시誌(지)가 등수를 매긴 '성공-실패국가 랭킹'에서 노르웨이는 성공국가 1등이었다.
이런 노르웨이가 아직 국민皆兵制(개병제)를 유지한다. 상비군은 2만3000명, 동원가능 예비군까지 합치면 8만3000명이다. 복무기간은 6~12개월이다.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국이기도 하다.
노르웨이는 물가가 비싸다. 미국보다 약 30% 높다. 임금은 職種(직종)이나 남녀간 차이가 매우 작다. 청소부, 간호사, 정부 고위관리, 대학교수의 월급이 거의 같다. 2008년 세계를 휩쓴 금융위기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노르웨이이다. 인류역사가 만들어낸 最高의 선진국이 노르웨이인 셈이다. 이런 나라에 중국이 무슨 압력을 넣을 것인가? 세계에서 가장 人權(인권)을 존중하는 나라에 대하여 세계에서 가장 人權을 무시하는 나라가 무슨 압력을 넣는단 말인가? 노르웨이를 괴롭힐수록 국제사회에선 중국이 못난 나라로 비칠 것이다. 중국으로선 지는 게임이다.


노르웨이의 송네 피욜드


필자는 2006년 여름 미국 앨라스카에서 '트레시의 팔'(Tracy's Arm)이란 이름을 가진 피욜드(바다에서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강처럼 생긴 지형. 양쪽으로 절벽이 형성된 것이 특징이다)를 구경하면서 감탄을 연발하다가 곁에 있는 동료 관광객에게 "노르웨이의 피욜드와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물었다. 그는 "노르웨이가 한 수 위다"고 했다. 이보다 더한 壯觀(장관)이라면 반드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월 노르웨이를 여행하면서 유람선을 타고 송네 피욜드를 구경하였다. 앨라스카 피욜드보다 더 크고 아름다웠다. 송네 피욜드는 北海에서 내륙으로 205km나 들어간 강처럼 생긴 긴 灣(만)이다. 그린란드의 스코레스비 순드 피욜드 다음으로 길다.
필자는 송네 피욜드가 內陸(내륙)으로 가장 깊숙이 들어온 지점인 프램이란 작은 항구에서 유람선을 탔다. 수심이 깊어 8만t 이상 나가는 크루즈 선박도 接岸(접안)할 수 있는 마을이다. 송네 피욜드의 가장 깊은 곳은 1308m이고 평균 폭은 4.5km, 가장 좁은 곳은 300m이다. 피욜드 양쪽으로 솟은 산은 절벽을 이루는데 水面에서 1000m 이상 되는 直壁(직벽)도 많다. 이 직벽에 수많은 폭포들이 걸려서 흘러내린다. 세계에서 낙차가 가장 큰 10大 폭포 가운데 다섯 개는 노르웨이에 있다. 송네 피욜드의 물색깔은 지구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짙은 綠色(녹색)이다.
사람 눈이 간사하다고 할까? 이 지구상의 최고 자연경치중 하나인데도 오래 보고 있으니 익숙해지면서 감동이 잦아들었다. 구도가 너무나 완벽하기에 싫증이 난 것인가.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처음 보는 이들은 "와!"하고 부르짖고는 말문을 닫는다고 한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완벽하고 장엄한 경치는 그 자체로서도 완결성을 갖기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프램에서 산악열차를 타면 20km를 달려 864m 산꼭대기에 오른다. 다른 보조시설이 없는 철도로서는 가장 경사가 급한 구간이다.
노르웨이를 여행할 때 大自然속으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 안내자가 시크릿 가든(SECRET GARDEN)이 작곡한 노래들을 틀어주었다. 노르웨이人(롤프 러브랜드/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남자)과 아일란드人(피오눌라 세리. 여자. 바이얼리니스트) 두 사람으로 구성된 이 시크릿 가든은 수많은 노래를 작곡하였다. 특히 '저녁기도'(NOCTURNE)란 음악이 자연과 딱 들어맞았다. 눈 덮인 山, 명경 같은 강물, 숲, 드문 드문 보이는 집들을 버스 車窓 밖으로 음악과 함께 흘려보내면서 달리고 또 달렸다.
시크릿 가든이 작곡한 음악과 노래는 youtube.com에 수십 곡이 올라 있다. 한국의 텔레비전 드라마 배경음악으로 자주 나와 친숙하다. 요사이 결혼식의 祝歌로 가장 많이 불리는 노래 두 곡은 시크릿 가든이 작곡하였다. '유 레이즈 미 업(You raise me up)'과 '봄을 위한 세레나데(Serenede to Spring)'이다. '봄을 위한 세레나데'는 한국에선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로 번안되었다. 봄 노래가 가을 노래가 된 것이다. 시크릿 가든의 노래를 들으면 노르웨이의 자연이 생각난다. 노르웨이人이 작곡자임으로 노르웨이的 감수성(자연과 人情 등)이 들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섬이 2만4000개 몰려 있는 스톡홀름 群島


北歐(북구)를 여행하면 배를 많이 타게 된다. 지난 5월 필자는 보름간 스칸디나비아 4개국을 돌았는데 코펜하겐에서 오슬로, 스톡홀름에서 헬싱키까지는 여객선을 탔다. 유람선 비슷한 구조를 가진 여객선이라 즐길 것이 많다. 이런 배를 타면 역시 바다 구경이다. 바다가 보이는 선실은 60 유로 정도 더 줘야 한다. 여객선은 오후 늦게 출발, 다음 날 아침에 목적지에 닿는다.
스톡홀름에서 오후 5시에 출발한 5만t 여객선은 스톡홀름 群島(군도)를 지난다. 남북 방향으로 약 2만4000개의 섬이 몰려 있는 곳이다. 정원 같은 섬, 등대만 있는 돌섬, 초등학교 운동장만한 섬, 높이가 5m도 안 되는 평평한 섬들 사이로 巨船(거선)이 지나는데, 수십 m 거리를 두고 아슬아슬하게 빠져 나가기도 한다. 섬의 종합전시장 같은 스톡홀름 군도중 사람이 사는 데는 1000곳 정도라고 한다. 이곳에 약 5만 개의 별장이 있다. 약간 과장이겠지만, 스톡홀름 사람들은 자가용 자동차만큼 요트를 많이 갖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은 호수도 많다. 2에이크, 즉 8100평방미터 이상의 호수가 9만7500개이다. 핀란드는 500평방미터 이상을 호수라고 계산하는데 18만7888개이다. 여객선의 바에서 夕陽(석양)이 드는 자리를 잡고 스쳐지나가는 바다와 섬과 갈매기의 飛翔(비상)을 구경하면서 머리를 텅 비우고 한 잔 하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헬싱키의 名物 수오멘리나 요새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서 머문 세번째 날 아침 호텔 프론트 근무자에게 "오늘 어디를 구경 갔으면 좋은지 추천해줄 곳이 없느냐?"고 물었다. 여직원이 반문하였다.
"수오멘리나 요새를 가 보셨어요?"
안 갔다고 하자 그는 "자신 있게 권합니다"라고 했다. 더구나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등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보증수표이다.
헬싱키 항구에서 배를 타니 15분만에 요새에 닿았다. 짧은 항해이지만 헬싱키를 바다에서 바라보는 재미가 있다. 스칸디나비아 4개국의 수도는 모두 항구이다.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코펜하겐. 이들 도시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제대로 보인다. 바다에서 바라본 헬싱키 시가지의 풍경 속에서 視野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루터교회와 러시아正敎 교회 건물이 마주 보면서 兩立하고 있는 모습. 루터교회는 스웨덴의 영향, 正敎 교회는 러시아의 영향을 상징한다.
수오멘리나 요새는 1748년 핀란드가 스웨덴 속국일 때 러시아를 막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북쪽의 지브랄탈이란 별명을 얻었다. 두 섬에 걸쳐 있는 요새를 한 바퀴 도는 데는 하루가 걸린다. 벙커, 포대, 잠수함, 박물관, 兵營, 교회 등 볼 것도 많고 쉴 곳도 많다.
러시아의 알렉산더 1세는 1808년 나폴레옹과 우호조약을 맺은 뒤 스웨덴을 공격, 이듬해 핀란드를 빼앗아간다. 이 스웨덴 요새는 그때 러시아 군대로부터 수개월간 포위된 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였다. 그 뒤 러시아는 터키를 상대로 한 크리미아 전쟁 때 프랑스와 영국을 敵으로 돌린다. 1854년 8월9일 英佛 연합함대는 이 요새를 향하여 2만1000발의 함포 사격을 퍼부었다. 요새의 대포는 제대로 대항하지 못하고 얻어맞기만 하였다. 英佛軍은 상륙작전을 하지 않고 물러났다. 1906년 7월30일엔 요새 수비군이 러시아와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을 받아 군사반란을 일으켰다가 즉시 진압되었다. 78명의 반란군이 피살되고 처형되었다. 핀란드가 1917년 12월에 독립을 선언한 직후 벌어진 內戰이 끝나자 이 요새는 포로로 잡힌 공산주의자들을 수용하는 감옥 역할도 했다. 1만 명에 육박하는 포로가 수용되었다. 그 가운데 10%는 수용중 질병 등으로 사망하였다. 2차 대전중엔 단 한 차례 러시아 공군의 폭격을 받았을 뿐이다.
요새안엔 러시아군이 만든 正敎 교회 건물이 남아 있다. 핀란드가 독립한 후엔 루터교회로 개조되었다. 언덕 위의 이 교회는 등대로도 쓰인다. 교회가 등대로 쓰이는 세계에서 유일한 경우라고 한다. 헬싱키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꼭 권하고싶은 곳이다. 스웨덴, 러시아, 핀란드의 역사를 느낄 수 있고, 평화로운 바다를 향해 있는 녹쓴 대포 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고,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식사를 즐길 수 있다.


핀란드 독립을 도운 레닌


한국인들이 우리 국민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쓰는 단어가 '恨'과 '신바람'이듯이 핀란드 사람들은 '시수'라는 말을 자주 쓴다. 핀란드語인데, '배짱' 또는 '견디기'란 의미가 들어 있다. 이는 핀란드의 역사를 반영한다. 핀란드는 極限의 자연환경과, 이웃한 두 강대국 스웨덴-러시아 사이에서 핍박과 설움을 견디며 민족적 정체성을 지켜내고 드디어 세계 최고 국가를 만들었다. 고생을 많이 한 핀란드 사람들은 과묵하다. 친한 사람들끼리 사우나에 들어가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경우가 예사이다. 휴대전화의 메시지 기능은 말을 하기 싫어하는 핀란드 사람들이 발명한 것이란 농담까지 있다.
수천년간 한번도 독립하지 못하고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국으로만 있었던 핀란드 사람들이 독립국가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이는 러시아 혁명의 主役 레닌이었다. 그는 帝政러시아 시절 혁명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시베리아에서 流刑생활을 할 때 감방동료인 한 핀란드人의 도움을 받았다. 레닌은 핀란드로 탈출, 숨어지내기도 하였고,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때는 페테스부르그(나중에 레닌그라드로 개칭)와 핀란드를 오고 가면서 모의를 하였다. 러시아 공산혁명 이전부터 핀란드가 독립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1917년 11월 러시아 혁명이 성공한 직후 핀란드 의회가 독립을 선언하자 레닌은 러시아 신생 국가를 승인하게 하였다. 러시아는 독립 핀란드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기를 원하여 핀란드내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8년 핀란드에선 親러시아 공산세력과 親독일 민족세력 사이에서 內戰이 일어났다. 108일간 계속된 전투에서 약3만 명이 죽었다. 매너하임 장군이 지휘하는 민족파의 白軍이 승리, 立憲군주제를 선택하였으나 독일이 1차 대전에서 항복하자 공화국으로 바꾸었다.


핀란드 國父 매너하임 장군


핀란드의 建國과 세 차례 전쟁을 지도한 인물은 칼 구스타프 매너하임 장군이다. 그는 터키의 國父 아타 투르크(케말 파샤)를 닮은 드라마틱한 생애를 산 위인이다. 그의 父系는 독일, 母系는 스웨덴인이었다. 러시아가 핀란드를 지배하고 있을 때 러시아군의 장군으로 복무하였다. 러일전쟁에도 참전, 봉천會戰에서 훈장을 받기도 하였으며 1차 대전 때는 러시아 기병부대를 지휘하였다. 1917년 2월 혁명이 났을 때는 기병군단장(중장)이었다. 핀란드가 독립을 선언하였을 때 노동자 세력은 사회주의를, 자본가와 농민과 상공인들은 자본주의를 원하였다. 양쪽이 內戰을 벌이자 매너하임은 후자의 白軍을 지휘, 赤軍을 물리쳤다. 그는 독일이 항복한 이후 王政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출범하는 과도기에 섭정을 맡았다.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국가승인을 얻는 데 기여하였다. 이 시기 일부에선 그를 王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19년부터 1939년 소련군의 침공이 있을 때까지 20년간 매너하임은 公職을 맡지 않았으나 국방력 건설에 자문을 해주고 핀란드가 內戰의 후유증을 치유하고 國論을 통합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는 탐험과 여행을 좋아했다.
1939년 11월 스탈린의 명령하에 소련군이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조국은 그를 다시 불렀다. 자신으로선 네번째 참전이었다. 핀란드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의 60만 대군을 상대로 잘 싸웠다. 핀란드의 스키 부대는 게릴라 전법으로 대항하였고, 소련군 戰車에 '몰로토프 칵테일'이란 별명이 붙은 화염병으로 저항하였다. 1940년 3월 소련과 핀란드는 모스크바 협정을 맺고 휴전하였다. 핀란드는 국토의 상당부분을 빼앗겼으나 國體를 보존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소련이 휴전 이후에도 추가적 요구를 하자 핀란드는 독일의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다.
1941년 6월22일 나치 독일군이 소련으로 쳐들어가면서 獨蘇전쟁이 일어났다. 開戰 전에 핀란드는 自國내에 독일군이 들어와 對蘇 공격을 준비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소련이 初戰에서 밀리자 핀란드는 失地를 회복하려고 독일 편에 서서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1939년의 전쟁을 '겨울전쟁', 1941년 전쟁을 '연장전'이라고 부른다. 매너하임은 이번에도 핀란드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히틀러는 매너하임을 존경하여 핀란드 주둔 8만 독일군의 지휘권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매너하임은 독일 편에서 싸웠지만 선을 그었다. 소련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는 데만 참전 목적을 두었다. 독일군이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벌일 때도 핀란드군이 합세하지 못하게 하였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존경을 받다


1942년 6월4일은 매너하임의 75세 생일이었다. 히틀러는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비밀리에 핀란드를 방문하였다. 매너하임은 히틀러를 그의 사령부나 헬싱키에서 맞이하면 공식적인 성격의 회담으로 비쳐질까 신경을 써 지방 도시에서 만났다. 핀란드측은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비밀녹음하였다. 히틀러는 매너하임에게 對蘇戰에 더 적극적으로 참전할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1944년이 되면 소련이 독일군을 밀어붙이고,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 핀란드가 '지는 쪽'에 줄을 선 것이 확실해졌다. 매너하임과 핀란드 국가 지도부는 어떻게 하면 독일과 잡은 손을 떼고 소련과 휴전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그들은 매너하임만이 이 難局을 헤쳐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하였다.
핀란드 지도부는 지혜롭게 대처하였다. 소련군이 핀란드를 공격하자 우선은 독일과 동맹조약을 맺고 독일군의 도움으로 국토를 지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동맹조약에 서명하였던 대통령이 사임한다. 그를 이어받아 매너하임 장군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前任 대통령이 서명한 조약을 무효화시키고 소련과 휴전회담을 시작, 한 달 뒤 휴전이 성립되었다. 핀란드는 일부 國土를 소련에 넘기고, 전쟁 배상을 하기로 하였으나 國體(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의 보존을 약속 받았다. 소련 편에 서게 된 매너하임은 총부리를 돌려 한때의 동맹국이던 독일군을 핀란드에서 쫓아내는 전투를 벌이게 된다.
소련 등 연합국의 승리로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매너하임은 대통령직을 계속 수행하였다. 연합국중 아무도 매너하임을 戰犯으로 재판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스탈린은 1947년 모스크바를 방문한 핀란드 대표단을 맞아 "소련군이 핀란드를 점령하지 않은 것은 매너하임 덕분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매너하임은 히틀러와 스탈린으로부터 동시에 존경을 받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1946년 3월4일 대통령직을 사임한 그는 1951년에 사망하였다. 84세였다.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전쟁배상을 기계류와 조선 등 물품을 통하여 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기계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轉禍爲福이 된 셈이다. 핀란드는 냉전시기에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도 소련에 대하여는 유화적인 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 정부는 정치적인 人事에 대하여는 사전에 소련정부와 상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國益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소련 또한 두 차례 전쟁을 통하여 핀란드인들의 투지와 自立정신을 절감하였기에 무리한 압박을 하지 않은 덕분이다.
1989~1991년 소련 해체기에 핀란드는 재빨리 발틱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승인하는 등 脫소련 정책을 선택하였다. 매너하임 기념관은 헬싱키 시내에 있다.


교육 1위 핀란드, 2위 한국


지난 여름 뉴스위크誌가 실시한 '最高 국가(Best Countries) 랭킹'에서 1등은 핀란드였다. 한국은 프랑스, 아일란드, 싱가포르, 벨기에, 스페인보다 앞선 15위에 올랐다. 이 조사는 '어느 나라에 태어나는 게 성공을 보장하는가'라는 設問으로 이뤄졌다. 현재와 과거보다는 미래의 잠재적 가능성을 더 重視한 조사이다. 그렇더라도 한국의 等數가 매우 높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높게 평가되었기 때문이다.
핀란드는 국가가 교육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모든 국민들이 경쟁력 있는 교육을 받도록 엄격하게 관리한다. 뉴스위크는 사람과 국가의 成敗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교육이라면서 특히 就學(취학) 전 早期교육이 가장 성공적인 투자라고 강조하였다. 1960년대에 불우한 환경의 어린이들을 상대로 조기교육을 받은 이들과 받지 못한 이들을 비교하는 조사를 시작하였다. 35년 뒤 결과는 너무나 명백하였다. 조기 교육을 받은 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좋은 직장을 갖고, 범죄와 이혼율도 낮았다.
早期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학생들은 18세까지 깨어 있는 시간의 반을 학교 바깥에서 보낸다고 한다. 학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는 게 좋다. 登校를 빨리 하고, 下校는 늦게 하고, 토요일에도 공부하는 게 좋다는 것이다. 과외수업이 나쁠 게 없다는 이야기이다.
교사들의 질을 높이는 투자도 효과적이다.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를 놓고 학생들의 배움 量을 조사한 결과 3배의 차이가 났다고 한다. 父母의 수준도 자녀들의 學業과 출세를 좌우하는 큰 요인이다. 전문직 종사자를 父母로 둔 경우엔 3세 때 이미 다른 아이보다 語彙力과 지능지수에서 1년을 앞서간다. '最高 국가 조사' 항목 중 교육부문에서 한국은 1위 핀란드에 이어 2위로 평가되었다. 뉴스위크의 평가가 다소 과장된 면이 있고, 한국 사정에 어두운 구석도 있겠지만(애국심 교육과 國語 교육의 실패를 간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한국 교육의 전체적인 모습은 안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너무 다르다. 그러니 교육亡國論이란 말은 쓰지 않아야겠다.
헬싱키의 핀란드의 국립박물관에 가니 자신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글이 있었다.
<우리는 인종적으론 20%가 아시아 계통, 80%가 유럽계통이다. 문화적으론 유럽이다>
핀란드인들은 바이킹族과 이웃하여 살다가 바이킹 文明의 일원이 되었다. 좋은 친구를 둔 덕분에 超一流국가 클럽에 들어간 셈이다. 한국도 李承晩 대통령 덕분에 韓美동맹을 통하여 세계에서 가장 선진되고 강력하고 너그러운 나라와 친구가 되었다. 이 행운에 한국인의 교육열이 더해졌다. '삶의 질' 랭킹 12위는 그렇게 하여 가능해진 것이다. '一流 DNA'는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교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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