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1 때 서울 도심 재개발로 순화동 집(현 중아일보 사옥)에서 이사를 하였다. 서대문 바깥 북아현 산자락으로 나무가 많고 이웃 간 간격이 있는 지역이었다. 이사전문용역이 없던 시절이라 흔히 가구는 하루 먼저 옮기고 사람과 귀중품은 이튿날 움직여야 했다. 먼저 보낸 짐을 지키려 맏아들인 나 혼자 새집에서 지나게 되었다.
마침 학교 도서관에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백작’을 빌렸던 터였다. 예약이 밀렸다가 공교롭게 바쁜 때 차례가 와서, 사흘의 대출기한 중 이사준비로 이틀을 공치고 말았다. 가족들 돌려보내고 밤 10시에 책을 잡았다. 런던의 젊은 변호사 죠나산이 트란실바니아에 도착한 날부터 스토리가 전개된다.
‘드라큘라 성의 첫날밤, 이상한 기척에 창을 열고 옆 벽면을 보니 저 멀리 수직에 가까운 경사 벽면을 걸어 내려가는 검은 망토의 그림자’…..소름이 끼쳐 책을 더 볼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는 상황인데…..11시 반 통금 예비 사이렌이 뚜우 불며 갑자기 정전이 된다. 뒤에서 누가 곧 덮칠 듯한 오싹한 순간… 그 길로 어두운 산길과 좁은 골목 사이를 냅다 달려 족히 2km 거리였던 순화동 집에 도착하니 11시 50분… 다음날 깨어보니 여기저기 찢기고 멍든 곳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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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란실바니아의 브란성 모습. |
바로 그곳이었다. 근 50년의 세월이 지난 후 트란실바니아의 브란 城을 방문하였더니 옛날 그 소설 속의 모든 장면이 고스란히 눈앞에 전개된다. 울창한 삼림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고성, 육중한 성문이 열리고 음울한 중정과 낡은 우물을 지나 저택에 들어서면 높은 천장과 가파른 층계의 복잡한 미로가 계속된다.
브람 스토커는 1895년 트란실바니아를 여행하다가 마침 東알프스 민속 괴담을 소재로 집필 중이던 소설의 무대를 이곳으로 옮겼다. 덕분에 불후의 명작은 탄생하였으나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사람이 블라드 드라쿨 공작 가문이다. 영어의 blood와는 관계없는 “Vlad 家”는 왈라키아(남부 루마니아)의 영주로서 15세기 외세의 침입에 맞서 대를 이어 항쟁해온 민족영웅 집안이다. 아버지 블라드II세는 강력한 리더십과 혁혁한 전공으로 드라쿨(龍)이란 별명을 얻는다. 그러나 막강한 오스만에게 화평 조건으로 어린 두 아들을 인질로 보낸다.
당시 여섯 살이던 큰아들은 후에 가계를 부활시키며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친다. 아버지와 숙부의 모살, 가신들의 배반, 동생의 배교(이슬람으로 귀의하여 오스만 총독 역임). 수감과 탈출, 등등, 온갖 아픔을 겪으며, 45년 생애의 대부분을 집권, 망명, 전쟁(대개는 야산에서 게릴라군 지휘)을 반복하며 보낸다. 후천적 잔학성으로 적군 포로를 모두 막대기에 꽂아 처형하여 블라드 체페쉬(=Vlad the Impaler)라고도 불리나 뱀파이어의 전설과는 무관하다. 별명 Dracula는 루마니아어 접미사 -a가 영어의 son에 해당되므로 용의 아들(父龍과 구분되는 子龍)의 뜻이다. 공식호칭은 블라드III세 공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