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아의 최초 탈북자(脫北者)
  
  1996년 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출발하여 2시간 남짓한 비행 끝에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공항에 내리니 꼭 시골 간이역에 도착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뉴스도 암담한 것이었다. 불가리아가 외환 부족과 인플레 및 은행의 부실화로 사실상의 파산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이었다. IMF도 금융개혁을 하지 않으면 구제대출을 해주지 않겠다고 선언하여 수십 개의 은행과 국영기업이 정리대상이 돼 있다는 것이었다. 외환보유고는 작년의 12억 달러에서 올해는 지난 10월 현재 5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청년공산당 조직가 출신인 현 비데노프 수상 정부는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늦추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었다. 올해는 선거의 해이기 때문에 대량 실업을 부르는 국영기업 정리는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실업률이 거의 20%에 육박하고 물가는 월평균 인상률이 두 자리 숫자였다.
  
  3일간 불가리아 문화부 장관 이반 마라조프, 외무부 대변인 카라시메오노프, 필립 디미트로프 前 수상, 소피아 대학 교수 드라간 드라가노프氏들을 만났다. 불가리아가 건국된 지 1천3백년 동안 고난의 길을 걸어와서 그런지 한결같이 생각이 깊고 신중하며 인내하는 인상들이었다. 고통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성숙시키기도 한다는 것을 이번 동구 여행에서 실감했다. 마라조프 문화부 장관은 『나는 터키 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에서 성장했는데 어떤 차별의식도 갖지 않고 자랐다. 우리 헌법에는 소수민족이란 말까지 금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한과 거의 면적이 비슷한 이 나라의 인구는 약 900만 명인데 약 9%가 터키系 사람들이다. 그들은 정당도 갖고 있다.
  
  불가리아에서 나를 안내한 崔東俊씨는 脫北人이었다. 함흥이 고향인 崔씨는 1956년에 친구 세 명과 함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 대학에 유학을 왔다. 수리공학과(水理工學科)에 다니다가 졸업을 열흘 앞둔 1962년 초 駐불가리아 북한대사 임춘추의 호출을 받았다. 대사는 내일 즉시 귀국하라고 명령하는 게 아닌가. 네 학생은 처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충직한 친소(親蘇) 공산국가였지만 북한에 비하면 천국이었다. 네 청년은 金日成이 말하는 평등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유의 바람이 든 네 청년은 자신들에 대한 정보 보고가 평양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소환되는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고는 소피아 근교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그 산은 소피아를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비토샤 山이었다. 기자 일행은 崔씨와 함께 비토샤 산에 올라가 소피아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회고담을 들었다. 나라는 망해도 山河는 아름답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수려한 풍광을 감상하면서 듣는 절박한 옛 이야기는 기자의 가슴을 시리게 만들고 있었다.
  
  崔씨와 친구들은 산 속에 숨어살다가 소피아 시내로 빠져 나와 영화구경을 하고 나오다가 북한 대사관 직원들에게 붙잡혔다. 대사관 5층에 감금되었다. 철사로 꽁꽁 묶인 채였다. 이상종(李尙鍾)씨와 李상직씨는 탈출했다. 李尙鍾씨는 『우리를 감시하던 여자가 아이에게 젖을 먹이려고 옆방으로 간 사이 이불 천을 잘라 끈을 만들어 타고 내려갔다』고 했다. 李씨는『우리가 귀환 명령을 거부한 데는 6·25의 진실을 알게 된 것도 중요한 이유이다』고 말했다. 이들은 불가리아에 유학 중 인민군 출신 선배를 만났다. 그는 『나는 그때 38선에 배치된 부대에 있었는데 새벽에 깨우더니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것이었다』고 실토하더란 것이다. 이 네 학생들은 귀환을 거부하는 이유를 편지로 써서 북한 대사관에 부치기도 했다고 한다.
  
   불가리아·북한의 외교 단절로 비화(飛火)
  
  이상종(李尙鍾)씨는 『대사관에 감금돼 조사를 받을 때 저들은 불가리아 사람들이 사주하여 탈출하게 되었다고 허위자백을 하도록 강요했으나 우리는 끝까지 버티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중국과 소련 사이의 이념분쟁으로 소련편인 불가리아와 중국편인 북한은 사이가 좋지 않을 때였다. 먼저 탈출한 두 사람은 불가리아 당국에 신고했다. 그리하여 탈출 못한 두 친구가 소피아 공항에서 평양행 비행기에 강제로 태워지기 직전에 불가리아 당국의 개입으로 구출되었던 것이다.
 북한 대사관 측에선 자진귀국이라고 우겼다. 불가리아 측에서는 월맹 대사관 사람을 입회시켜 두 학생의 진의(眞意)를 확인시켰다. 이 자리에서 최동준(崔東俊), 최동성(崔東成)씨는 여권을 찢어 버렸다. 이 사건은 외교문제로 번져 불가리아 정부는 북한 대사를 추방했고 북한은 불가리아 대사를 추방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네 사람에게 국적을 주지는 않았지만 거주는 허용했다.
  
  네 망명자가 불가리아 국적을 얻은 것은 공산주의 붕괴 후인 1991년이었다. 현재 대통령 젤레브씨는 네 한국인들과는 소피아 대학 동창으로서 이들의 국적 취득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崔東俊씨는 음료수 연구소에서 일하던 중 불가리아 여자와 결혼하여 남매를 두고 있다. 딸은 치과의사이고 아들은 소피아 대학 수학과에 다니고 있는데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 엉덩이에 시퍼런 몽골 반점이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놀라더군요.』
  崔씨는 지난해 우리 정부가 광복 50주년을 맞아 실시한 해외동포 수기(手記) 현상공모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기념식에도 초청받아 조국을 찾았고 청와대에도 초대받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崔씨는 돌아올 때 배추씨를 갖고 와서 심었는데 사라 몸통만한 배추가 자라 소피아에 사는 한국인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李尙鍾씨는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고 李상직씨는 삼성물산 지사장으로 있으며 崔東成씨는 화학공장 副공장장으로 있다.
  
   우리의 고향은 몽골고원
  
  불가리아는 유럽의 동남쪽 변경에 자리잡고 있어 동쪽 아시아에서 밀려오는 몽골-투르크 유목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지리적 조건을 갖고 있었다. 유라시아 草原의 서남단(西南端)에 위치하기 때문에 비록 산악이 우리나라처럼 많은 지형이지만 초원의 질풍을 막을 수는 없었다. 불가리아라는 국명(國名)은 몽골-투르크族에 속하는 불가르(Bulgar)族에서 유래한다.
  
  지금의 불가리아는 이 불가르族이 서기 7세기에 카스피海 북쪽 지금의 러시아 남쪽 草原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와서 이곳의 정착민인 슬라브族을 정복하여 세운 국가에서 기원한다. 보지다르 디미트로프라는 학자가 쓴 「불가리아人-슬라브族을 개명(開明)시킨 사람들」이란 책에는 불가르족의 원거주지는 몽골고원이었다고 적혀 있다. 예수 탄생 전 수백년 동안 몽골과 중앙아시아에서 강성했던 흉노를 자신들의 선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석기 시대나 청동기 시대에는 이 몽골에서 한국인의 선조와도 섞여 살았을지도 모른다. 유럽에서 부족명을 국명으로 쓰고 있는 또 다른 나라는 헝가리이다. 헝가리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국명을 마자르(Magyar)라고 부른다. 마자르族도 유목민족인데 서기 5∼7세기경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불가르族과 섞여 살았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은 서기 4∼7세기 사이에는 카스피海 북쪽 초원에서 국가(부족국가 형태)를 이루고 살았다. 불가르란 말은 혼합이란 뜻이라고 한다. 부족연합인데다가 인종·종교의 차별을 하지 않는 것이 초원의 법칙이므로 불가리아族은 몽골族에서 아리안族까지 섞여 있는 지금의 아메리카와 비슷한 다종족 사회였다.
  
  불가리아族의 특징은 큰 건축물을 짓는 기술을 갖고 있었고 제철기술(무기를 항상 많이 만들어야 하는 유목민 사회에선 제철기술은 늘 앞서 있었다)과 천문관측기술이 뛰어났었다고 한다. 불가리아 학자들은 이들이 만든 달력이 세계에서도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0여 년 전에는 이 달력을 그대로 세계공통의 달력으로 채택하자는 논의가 유네스코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불가리아族은 장신(長身)이었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중세 사람들의 평균 키는 1백60cm인데 불가리아族은 1백75cm였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군율(軍律)도 엄했다. 1∼2년간의 의무복무를 끝내면 軍馬 두 마리와 무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출동하는 예비군 체제를 유지했는데 이 군마를 전투가 아닌 사용(私用)으로 부리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
  
   불가리아族의 西進
  
  서기 7세기 중반 불가리아族은 다른 유목민족의 공격을 받게 된다. 유목민족 국가의 한 특징은 영토개념이 거의 없으므로 불가항력일 때는 사수(死守)가 아닌 퇴각을 택한다. 그들의 국가는 농경민족 국가처럼 땅에 붙박인 게 아니라 이동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불가리아國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이사(移徙)를 결정했다. 주류는 북쪽 볼가강으로 이동하여 국체(國體)를 보존했다. 불가리아 왕자 세 명은 볼가강쪽으로 이동하는 데 반대하여 서쪽으로 무리를 데리고 나아갔다.
  
  長子는 지금의 독일 남부 바바리아 왕에 복속하기로 했으나 의심 많은 왕은 이들이 잠든 사이 습격하여 몰살시키려 했다. 생존자들은 탈출하여 알프스 산맥을 넘어 北이탈리아 지방 롬바르디에 정착했다. 이들은 현지인들과 결혼하여 곧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된다. 지금도 이곳에는 불가리 또는 불가르니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더러 있는데 이들은 불가리아族의 후손들이라고 한다. 둘째 왕자는 지금의 헝가리서 강성하고 있던 아바르國에 복속하게 된다.
  
  그는 나중에 반란을 일으켜 동조자들을 이끌고는 지금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정착한다. 셋째 왕자가 불가리아의 국부(國父)에 해당하는 아스파루 칸(Asparuh Khan)이다. 이 칸이란 명칭은 북방 유목민족 문화권의 중요한 상징어인데 王을 지칭한다. 신라가 아직 부족국가 단계에 있을 때 왕이란 호칭 대신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이 간(干)은 칸의 한자표기이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아의 동쪽 끝과 유럽의 남쪽 끝에서 왕을 칭하는 중요한 정치적 용어가 같았다는 것은 몽골-투르크 정치체제의 광범위한 확신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의 한국인이 이 문화권과 같이 호흡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군사력이란 자본
  
  아스파루 칸은 수만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뉴브江 하류 삼각주 지방에 정착했다. 그들은 이곳을 불가리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러니 볼가강변의 불가리아와 다뉴브강변의 불가리아 두 개의 동족 국가가 생긴 것이다. 다뉴브 강변의 원주민은 슬라브族이었다.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두고 있던 비잔틴 제국(東로마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슬라브 귀족들은 불가리아 부족의 기마군단이 가진 강력한 군사력의 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아스파루 칸의 통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수의 불가리아 군사집단과 다수의 슬라브 민족이 일종의 합작회사를 구성한 것이다. 이 합작회사의 대표는 군사력이란 다수 주식을 소유한 불가리아였다. 사람들의 머리수가 아니라 군사력이 위력 있는 자본이 될 수 있던 시대였다. 이 자본(기마군단)을 잃지 않는 한 기마군단은 어디를 가든지 지배적 위치에 설 수 있었다. 기마군단은 이 시대에는 국가도 살 수 있는 통화이자 자본이었다. 
  
  불가리아는 1393∼1878년 사이 약 500년간 오토만 터키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900만 국민의 약 10%가 터키系이다. 1954년에 집권, 1989년까지 45년간 당 서기장으로서 1인독재를 강행했던 토도르 지브코프는 1984년에 『터키系 사람들은 이름을 기독교-슬라브式으로 바꿔라』는 명령을 내렸다. 불복하는 터키系 사람들에게 터키로의 이주를 허용, 약 30만명이 불가리아를 떠났다. 그러나 오랜 터키 압제에 비해 불가리아 사람들의 對 터키 감정은 놀라울 정도로 관대하다. 터키系 사람들의 이익을 대표하는 「권리와 자유 운동」(MRF)이란 정당은 국회에서 제3당이 되었고, 이 黨의 당수인 경제학 교수 출신 루벤 베로프氏는 연립정부의 총리로서 1992∼94년간 불가리아를 이끌었다. 한국에 남은 일본인 출신 총리가 한국을 통치했다는 것과 비슷한 얘기이다. 
  
  한 高官은, 『불가리아 민족의 가장 큰 특징은 자유와 인내 관용이다』라고 설명했다. 『1878년에 터키로부터 해방되고 그 다음해에 소집된 국회에도 불가리아內 터키系를 대표하는 의원이 있었지요. 그들은 불가리아에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불가리아는 2차대전 중 유일하게 유태인을 나치로부터 보호한 나라일 것입니다. 터키가 아르메니아人을 추방했을 때도 우리는 그들을 받아주었습니다』라고 했다.  
 불가리아人의 특성인 자유와 인내는 불가리아 민족이 자유를 사랑하는 몽골系 유목민족 불가르族과 인내심이 강한 토착 슬라브 농경민족의 혼에서 이뤄졌다는 역사적 사실과도 관계가 있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