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토와 金泳三
1996년 11월3일 파키스탄의 사르달 팔루크 아하마드 칸 레가리 대통령은 헌법상의 권한에 따라 국회를 해산하고 베나지르 부토 수상을 가택연금 시키는 한편 내각을 해체시켜버렸다. 부토 수상의 권력남용과 부패가 국가안보를 위협할 정도에 이르렀다는 판단에서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기자는 이 뉴스를 들으면서 그해 7월23일 이슬라마바드 대통령官에서 레가리 대통령을 인터뷰했을 때의 대화가 생각났다. 기자는 외국 국가원수에게는 실례가 될 수도 있는 질문을 했다. 한 3일간 파키스탄을 돌아보고 갖게 되었던 분노를 담은 질문이기도 했다. 기자는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층(層)은 국가적 목표의식도, 애국심도, 개혁의지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지배층이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외로 대통령의 대답은 진솔했다.
『우리나라를 며칠밖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핵심을 지적해 주었다』는 게 그의 첫 마디였다. 선량하면서도 위엄이 있어 보이던 레가리 대통령은 그때부터 고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주로 서방언론에 의해 파키스탄 민주화의 기수로 칭송받았던 부토 당시 총리의 민주화란 것은 결국 기득권層끼리의 정권 놀음이고 민주화의 기수란 미명하에서 부패의 극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데는 한 나절도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별명이 「미스터 10%」였다. 정부 이권의 10%를 뜯는다는 뜻이었다. 그때 부토는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金泳三 대통령과의 만찬 기사가 파키스탄 신문에 실렸는데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요지는 두 사람이 서로의 민주화 투쟁경력을 추켜세우면서 과거의 군사정권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우리 金泳三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다. 부토의 민주화 투쟁을 金대통령의 민주화 투쟁에 견주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모독일 뿐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 투쟁에 동참했던 한국이 전체에 대한 모독인 것이다. 파키스탄의 수구적 군사정권을 근대화의 추진체였던 우리나라 군사 정권에 비교하는 것도 무리이다. 한 마디로 그 차이점을 정리한다면 부토는 국가 지도자가 아니라 파당적 지도자이며 봉건영주인 것이다. 봉건영주란 표현은 기자의 발명이 아니고 파키스탄 언론의 용어이다. 레가리 대통령의 조치를 촉발시킨 것은 남편을 투자부 장관에 임명한 부토의 후안무치였다.
불가리아와 오토만-투르크
불가리아라는 이름은 유럽의 국명(國名)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이라고 한다. 서기 681년 東로마제국(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 부족의 칸(Khan) 아스파루에게 조공을 바치기로 약조함으로써 불가리아라는 국가가 탄생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기 865년 불가리아 왕 보리스 1세는 기독교로 개종했다. 종교적인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비잔틴의 동방정교도 아니고, 카톨릭도 아닌 불가리아 교회를 창설했다. 서기 9세기 후반 시릴과 매소디우스 형제는 古불가리아 문자를 발명하였다. 그때는 라틴語와 그리스語만 쓰일 때였다.
불가리아 문자는 세르비아와 러시아로 퍼져갔다. 러시아 문자의 기원이 불가리아語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소피아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10세기 초 불가리아는 시미온王의 治世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영토는 흑해(黑海)에서 아드리아海에 이르고 많은 문학, 예술, 건축 작품이 탄생하였다. 불가리아는 발칸 반도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러나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걸린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비잔틴의 식민지가 되어 가혹한 세금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저항하는 농민봉기가 일어나 서기 1185년에 피터4세의 지도下에 독립을 쟁취, 제2 불가리아 제국을 건설하였다. 14세기 불가리아는 다시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일어난 오토만-투르크의 팽창에 직면하게 되었다. 유럽의 최남단에 위치한 불가리아는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아시아 세력에는 항상 길목이 되어 제1파(波)의 공격을 견디어야 했다. 14세기 오토만-투르크는 유목 기마민족의 특징인 기마술과 활을 결합한 막강한 군사력에다가 이교도를 이슬람化한다는 聖戰의 사명감으로 무장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그리스, 발칸반도, 불가리아가 오토만-투르크의 수중에 들어간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500년에 걸친 오토만-투르크의 지배를 후진성의 이유로 꼽고 있다. 西유럽과의 관계가 단절됨으로써 유럽의 근대화 과정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길목에 있던 죄로 해서 아시아 및 이슬람 세력의 西進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다가 보니까 희생을 크게 당했다는 이야기이다.
불가리아가 西유럽을 방어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투르크族이 건설한 이 나라가 9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한 데서 비롯된다. 비록 불가리아가 투르크族의 나라로서 백인들의 나라인 西유럽보다는 인종적으로 오토만-투르크와 더 친근한 데도 불가리아는 종교적 충성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버드 대학의 사무엘 헌팅턴 교수는 1993년에 포린  어페어誌에 발표한 「문명의 충돌」이란 유명한 논문에서 『사람들이 이중국적을 가질 수가 있지만 반은 기독교도이고 반은 이슬람교도일 수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종교가 인종적 동일성보다도 인간의 가치관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 바가 있었다. 이것은 헝가리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한국의 기독교화
헝가리를 세운 마자르族도 불가리아族처럼 투르크族의 한 부족이었으나 10∼11세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임으로써 西유럽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13세기초에 몽골 기마군단(지휘부는 몽골족, 그 이외는 대부분이 투르크族으로 구성)이 쳐들어왔을 때는 유럽 기독교 문화권의 최전방이 되어 희생적으로 싸웠다. 한 역사학자는 마자르族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것은 유럽의 가장 성공적인 투자였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기독교화를 문명사적 관점에서 해석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 기독교가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지 2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全인구의 약 4분의 1이 기독교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다. 더구나 사회적, 경제적 신분이 높을수록 기독교 신자의 비율이 높은 것과 기독교가 한국의 근대화 및 민주화 과정에서 수행했던 역할을 감안한다면 이 종교가 한국사회를 脫유교화시켜 서구지향으로 끌고가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가리아와 헝가리처럼 한국도 서구 기독교 문명권의 가장 성공적인 투자로 판명되어질 것인가. 예컨대 21세기에 중화문화권과 미국이 패권을 다툴 때 한국은 제2, 제3의 불가리아, 헝가리가 되어 미국의 편을 들 것인가, 아니면 중국 편을 들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中正하여 兩大 세력 사이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것인가. 하나 흥미 있는 관점은 몽골족이 세운 국가들은 대체로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몽골, 한국, 일본, 티벳(국가는 아니지만), 월남, 카자흐스탄이 그런 그룹이다.
이들 나라는 최근 들어서, 또는 전통적으로 미국과는 사이가 좋다. 이들 몽골 국가들은 공교롭게도 동서남북으로 중국을 포위하고 있는 전략적 위치에 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은 중국 학생들보다는 일본 학생들과 친밀해지기가 더 쉽다는 말을 공통적으로 하고 있다. 문화적 친근성으로 따지면 중국인과 더 친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인종적 친근성에서 비롯된 공통된 감수성이 인간관계에서 더 중요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줄을 잘못 선 나라
불가리아를 오토만-투르크의 지배하에서 구출해준 것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1878년 투르크를 격파하고 불가리아를 독립시켰다. 공산주의 시절에 불가리아가 가장 친소적(親蘇的) 국가로 남아 있었던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불가리아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줄을 잘못 선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국제정세가 급변할 때 지도자 그룹이 선택을 잘못하면 국민들이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을 이 나라는 잘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가장 큰 공적은 한국이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 편에 서도록 했다는 점일 것이다. 1913년에 불가리아는 마케도니아의 영유권을 둘러싼 전쟁에서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졌다. 다음 해 시작된 1차 세계대전에서는 독일 오스트리아 편에 섰다가 패전국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때도 독일 편에 섰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통적인 우호관계로 하여 러시아 전선에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다. 불가리아의 보리스 3세 왕은 나치 독일의 압력을 뿌리치고 自國 內의 수십만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보호해 주었다. 불가리아의 민중들은 대중운동을 통해서 정부에 압력을 넣으면서까지 유태인의 보호에 힘썼다고 한다. 1944년 소련군은 불가리아를 점령하고 공산화했다.
저명한 국제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집권했다가 사망한 뒤에는 투도르 지프코프가 1954년부터 1989년까지 집권했다. 공산주의 중에서도 최악의 선택을 한 것이다. 1인 장기집권下의 공산국가는 공산당 내의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에 체제를 자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집단을 양성할 수가 없게 된다. 동구(東歐) 공산국가들 중 체제전환기를 그래도 잘 넘긴 것은 폴란드, 헝가리, 체코처럼 공산주의 시절에 이미 공산당 엘리트들이 고민하고 국민들이 피의 저항을 하는 등 몸부림쳐본 적이 있는 나라들이다.
반대로 루마니아, 불가리아, 알바니아는 1인 장기집권으로 그런 시도조차 못해 본 나라들로서 체제전환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역사 발전에는 공짜가 없는 것이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서기장 지프코프는 1984년에 불가리아 국민으로서 평화롭게 살고 있던 터키系 사람들에게 이름을 기독교-슬라브式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창씨개명(創氏改名) 정책에 반발한 터키系 사람 약 30만명이 터키로 이주해버렸다. 이중에는 희대의 역도선수 슐레이마노루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많은 전란과 압제를 당하고도 보복을 하지 않았던 관용과 인내의 불가리아 사람들은 지프코프의 이 정책이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힌 것이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본문/"한 3일간 파키스탄을 돌아보고 갖게 되었던 분노를 담은 질문이기도 했다. 기자는 '이 나라의 지배 엘리트층(層)은 국가적 목표의식도, 애국심도, 개혁의지도,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국가와 국민을 개혁하기 전에 먼저 지배층이 스스로를 개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어떻습니까'라고 물었다. 의외로 대통령의 대답은 진솔했다.『우리나라를 며칠밖에 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핵심을 지적해 주었다』는 게 그의 첫 마디였다". ㅠㅠㅠㅠㅠㅠㅠ
남의 행복을 원하는 자비행을 보살도라고 하는데 , 바탕 에서 이런 마음이 없다는 것은 싹이 노랗다 라고 밖에, 얼마나 더 고생을 해야 할지? 안바도 비디오죠??
지구촌도 줄서기 , 대한민국도 줄서기 , 피라미드식 줄서기 구조적 모순의 후유증!!!
인연과보를 누가 말리겠습니까? 무엇이 행복 인지 , 내것이 아닌 내것을 찾아 줄서기를 하지 맙시다. 진정한 내것을 찾아 줄을 서시오 . 선량한 것과 어리석은 것은 천양지차 이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