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연설
드골은 기갑사단장에서 국방차관으로 옮겼다가 프랑스 정부가 항복을 결정하자 불복, 영국으로 도피, 결사항전을 결심한다. 그가 처칠을 설득하여 맨 첨 한 일은 BBC를 통한 방송이었다. 1940년 6월18일의 이 방송 연설은 역사적 명문(名文)이다. 이날은 하필 워털루 패전 125주년이었다.
"프랑스 인들에게 보내는 드골 장군의 호소: 오랜 동안 프랑스 군의 수뇌부에서 일했던 지도자들이 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우리 군대가 패배하였다고 주장하면서 이 정부(注 프랑스 정부)는 적대(敵對) 행위를 중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적(敵)과 협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우리가 기계화된 적의 군사력에 의하여 육상과 공중에서 압도되었고, 지금도 압도당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병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독일군의 탱크와 비행기와 전술이 우리 군대를 퇴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들을 곤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독일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 만들어낸 기습의 효과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끝장일까요? 우리가 모든 희망을 버려야 할까요? 우리의 패배는 최종적이고 재기불능인가요? 이런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아니요!
내가 모든 사실을 아는 입장에서, 프랑스의 대의(大義)는 패배하지 않았다고 말할 때 나를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패배시킨 바로 그 요인들이 어느 날 우리를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걸 기억하십시오, 프랑스는 홀로 선 게 아닙니다. 프랑스는 고립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뒤에는 광활한 제국이 있고, 우리는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고 싸움을 계속하는 대영(大英)제국과 같은 대의(大義)로 손 잡을 것입니다. 영국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미국의 엄청난 공업력을 무제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불운(不運)한 우리나라에 한정된 전쟁이 아닙니다. 이 싸움의 결과는 프랑스 전역(戰役)으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세계전쟁입니다. 실수가 많았고, 늑장도 부렸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있었지만 이 세계가 장차 우리의 적을 파멸시킬 모든 수단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덮친 기계화 부대의 거대한 중량(重量)에 의하여 붕괴되었지만, 더 강력한 기계화 부대가 우리를 승리로 인도할 미래를 내다 봅니다. 세계의 운명이 여기에 달렸습니다.
나 드골 장군은 런던에서, 영국 영토에 있거나 있게 될 모든 프랑스 장교들과 남자들, 무기를 가졌거나 갖지 않았거나를 불문하고 여러분들에게 호소합니다. 영국 영토에 와 있거나 장차 오게 될 군수공장의 기술자와 숙련공들에게도 호소합니다. 나와 연락 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프랑스 저항 운동의 불꽃은 죽지 않아야 하며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 연설에서 예언한 경로대로 히틀러는 진다. 드골의 역사적 예지력(豫知力)이 놀랍다.
몽클라르 장군
드골의 호소에 응한 프랑스 군인들은 적었다. 나치 독일이 허용한 남불(南佛) 비시 정부의 패탕 원수는 한때 총애했던 드골의 저항운동을 반역으로 규정, 궐석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하도록 했다(프랑스 해방 뒤 드골은 반역죄로 사형이 선고된 페탕을 감형했다). 6월29일 드골은 노르웨이 전선에서 영국으로 철수한 프랑스 산악사단의 주둔지를 방문했다. 사단장은 항복한 프랑스로 돌아가겠다면서도 드골이 부대원들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 사단에 배속되었던 외인부대 여단의 지휘관은 라울 마그랭베르느레 대령이었다.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드골에 합류하겠다고 했다. 드골이 얼마나 고맙게 생각했는지 짐작만 할 뿐이다. 이 대령은 별명이 있는데 몽클라르이다.
한국전에 프랑스 대대장으로 참전한 바로 그 사람임을 드골 회고록을 읽다가 알게 되었다. 특종을 한 것처럼 반가웠다. 한국전이 터지자 프랑스는 지원병 700명을 보내는데 2차 대전 참전자들로 구성된 강팀이었다. 퇴역을 앞둔 현역 중장 몽클라르는 스스로 중령으로 강등, 프랑스 대대를 이끌었다. 미 2사단에 배속되어 1951년 초 양구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으나 구조될 때까지 버티어냈다. 당시 58세였다. 1차 대전에도 참전, 여러 번 부상당하였다.
그는 1941년 자유프랑스군으로서 프랑스의 비시 정부 소속 외인부대와 싸울 처지가 되자 옛 동료들을 상대로는 총을 쏠 수 없다고 지휘를 거부하기도 했다. 드골 회고록엔 몽클라르의 용전(勇戰)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레 나온다. 그는 1951년 한국전선에서 귀환, 퇴역했다가 1962년 파리의 유명한 군사박물관 겸 군인묘지인 앵발리드 관장으로 취임, 2년 뒤 사망, 거기에 안장되었다.
역전의 용사들로 구성된 한국전 프랑스 대대는 연3000명이 참전, 30%가 죽거나 부상했다. 그의 아들 증언에 따르면 몽클라르 장군 부인은 갓 태어난 아들을 봐서라도 한국에 가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몽클라르는 한국에서 생후 11개월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아들아, 언젠가 너는 내가 한국으로 떠나야 했던 이유를 물을 것이다. 너와 같은 또래 한국의 아이들이 길에서, 물 속에서, 진흙 속에서, 눈 속에서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버지는 여기 왔단다."
히틀러와 독일의 情慾
샤를 드골의 전쟁 회고록에 나오는, 그가 직접 상대했던 처칠 스탈린 루스벨트, 트루먼 등에 대한 인간적 묘사는 절묘한데, 특히 히틀러의 최후에 대한 평가는 몇권의 책을 응축한 것 같은 밀도이다. 역사와 문학과 정치가 만난 경우이다. 번역하여 소개하고싶은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명문이다.
<히틀러에게 있어서 자신의 악업(惡業)을 종식시킨 것은 반역이 아니라 자살이었다. 그 악업을 구현한 것도 그였고 끝장낸 것도 그 자신이었다. 이 프로메테우스는 묶이지 않으려고 자신을 심연(深淵)으로 던졌다. 무(無)에서 출발한 이 사나이는 독일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 새로운 애인을 갈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을 내던졌다. 몰락한 황제와 패배한 장군들과 멍청한 정치인들에게 싫증이 난 그녀는 미지(未知)의 이 거리의 사나이에게 몸을 맡겼다. 이 사나이는 모험적이고, 지배적이었으며, 그의 히스테릭한 목소리는 그녀의 비밀스러운 본능을 자극했다. 더구나, 베르사이유에서 당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이 용감한 커플은 그들 앞에 기나긴 미래가 열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유럽은, 여기 저기서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유혹과 공포로 시야(視野)가 흐려졌고, 민주주의에 절망했으며, 한물 간 이들의 훼방 속에서도 독일의 역동성에 수많은 기회를 제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것을 이루려 했다. 그는 파시즘과 인종주의를 결합한 교리를 만들었다. 전체주의 시스템은 그가 견제나 제약없이 행동하도록 허용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의 손에 놀랍고 충격적인 카드를 쥐어주었다. 그 시스템은 폭압으로, 폭압은 범죄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괴물에겐 모든 행동이 정당화되는 법. 더구나 히틀러는 강력할 뿐 아니라 간교하기도 했다. 그는 독일이란 애인을 어떻게 유혹하고 어떻게 쓰다듬으면 되는지를 잘 알았고, 완벽하게 낚인 독일인들은 그들의 주인을 열광적으로 따랐다. 최후의 최후까지 독일인들은 그를 노예처럼 모셨고, 어떤 나라 사람들이 그 어떤 지도자에게도 제공한 적이 없는 봉사를 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적 장애물에 직면하게 된다. 그의 거대한 계획은 인간의 밑창에서 나오는 저열한 힘에 기초를 두었다. 그러나 사람은 진흙만으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 어떤 용기도 가질 수 없는 존재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너무 나간 오만이었다. 독일 제국은 무엇보다 먼저 민주국가들이 전쟁을 두려워한다는 점을 이용하여 베르사이유 체제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러고 나서는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를 합병하는데, 파리의 비겁한 굴종과 모스크바의 공모(共謀)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그 다음엔 중립을 지키는 러시아 앞에서 프랑스를 정복하거나 겁을 먹은 프랑스 앞에서 러시아를 타도하려 했다. 이 두 목표가 달성된다면 영국은 미국의 사치스러운 중립 때문에 (독일의) 멍에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럽은 좋든 싫든 새로운 질서의 물미 아래로 완전히 통합될 것이며 일본은 동맹국의 역할을 맡아 미국은 포위, 고립되고 굴복하고 말 것이다.
처음엔 계획한대로 흘러갔다. 무서운 무기와 무자비한 법으로 무장한 나치 독일은 연전연승(連戰連勝)의 가도(街道)를 달렸다. 제네바, 뮌헨, 독소(獨蘇)불가침 조약 등은 히틀러가 이웃나라들을 경멸하는 근거를 정당화하였다. 그러나, 갑자기 이 나라들 가운데서 용기와 명예심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은 폴란드의 살해를 묵인하지 않았다. 그 순간에 히틀러도 맨정신이었으므로 자신의 속임수가 들통났다고 알아챘을 것이다. 그의 기갑군단은 국가도 지휘부도 상실한 프랑스를 쓸고 지나갔지만 영국은 해협 건너에서 항복을 거부하였고 프랑스 사람들 사이에서도 저항의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후로는 투쟁이 바다에서 바다를 건너 아프리카로, 중동으로, 그리고 프랑스의 비밀저항전선으로 번져갔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독일병력은 다른 전장(戰場)에 분산되어 소련을 굴복시킬 정도로 충분하게 투입될 수 없었다. 그 뒤 미국은 일본의 공격으로 전쟁에 뛰어들었고, 군사력을 확실하게 전개하였다. 독일과 히틀러의 엄청난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운명은 이로써 결정되었다.
히틀러의 시도는 초인적이었고 비인간적이었다. 그 어떤 주저도 없이 이런 자세를 유지하였다.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맞이한 최후의 고통스러운 시간까지 그는 전성기 때처럼 아무런 반대도 없이 강고하고 무자비하게 초인적, 비인간적 자세를 견지하였다. 자신의 투쟁이 가져온 그 기억들의 끔찍한 위대성을 위하여 그는 주저하지도, 타협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지구를 들어올리려 하는 타이탄은 굽힐 수도 접을 수도 없는 법이다. 그러나 정복당하고 파멸당함으로써 그는 다시 인간성을 되찾았을 것이고, 모든것이 종말에 이르렀을 때, 아무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을 흘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드골-아데나워 역사적 회담
드골은 패전한 나라를 전승국으로 만들어 프랑스는 유엔 안보리 5대 상임 이사국의 일원이 되었다. 프랑스가 1958년 알제리 독립문제로 내전 일보 직전까지 가자 싸움만 하던 정치권이 만장일치로 그를 불러내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 제5공화국을 열었다. 10년의 재임 기간 그는 독일과 화해, 유럽통합의 기초를 놓았고, 핵무장했으며 자유진영의 한 중심이면서도 미국과 소련에 독립적인 외교노선을 유지하였고 원자력 산업 등 과학과 공업을 진흥시켜 GDP에서 처음으로 영국을 추월했다. 이런 드골의 공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높게 평가되는데 특히 서독의 아데나워와 손잡고 추진한 독불(獨佛) 화해는 EU(유럽연합) 탄생으로 이어져 코로나 사태 속에서 나도 편하게 이 지역을 여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58년 9월14일 콘라트 아데나워 수상은 82세의 노령이었다. 서독을 10년간 통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권위에도 불구하고 그는 프랑스 영내로 들어서자 불안해졌다. 그 몇 달 전 권좌로 돌아온 샤를 드골 수상(5공화국 개헌 뒤 대통령이 된다)의 초대로 콜롱베에 있는 드골의 자택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길가엔 독일군의 공격으로 죽은 프랑스 군인들 묘지가 많았다. 그는 드골이 권위주의적이고 공격적이며 반독(反獨)성향이 강하다는 보고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회담을 수락한 것이 실수가 아닐까 생각도 했을 것이다.
콜롱베 자택에서 그를 기다리던 68세의 드골도 불안했다. 도착 시간이 지나도 아데나워가 나타나질 않는 것이었다. 늦어지면 늙은 부인아 마련해놓은 점심 요리가 식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데나워가 탄 차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느라고 늦었다. 드골은 아네나워가 천천히 승용차에서 내리자 다가가서 두 손으로 악수를 하고 독일어로 인사를 했다. 독일 손님을 집안으로 인도하느라 서두는 바람에 아네나워는 넘어질 뻔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천주교 신도인 두 사람은 출생지(콜롱베와 쾰른)도 라인강 주변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관계여서 그날 대화는 영혼과 영혼의 교감으로 이어졌고, 그 뒤의 독불(獨佛)화해는 물론이고 유럽 통합의 길을 내는 데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데나워를 자택으로 초대한 드골!
- 趙甲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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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2, 07: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