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사건의 불법성과 全대통령의 업적은 모순 관계가 아니다”

[趙甲濟의 현대사강좌] 129회 '12·12 사건 30년의 재평가' 녹취록 全文
지난 주말에 강연할 일이 있어서 김동길 선생님, 서정갑 회장하고 같이 중국 南京(남경)에 갔습니다. 한국인이 세운 정식학교에 150여명의 한국 학생이 다니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중국어를 배우고 졸업 후 중국 대학교에 진학을 하는 私設(사설) 학교에 가서 강연을 하고 왔습니다. 중국에서도 강남 지방이라고 하면 아주 부자들이 사는 동네죠, 양자강 남쪽을 강남지방이라고 합니다. 강연하러 간 김에 강남 지방의 중심인 남경을 관광하고 왔습니다.

남경은 관광지역은 아니죠, 크게 볼만한 게 많지는 않습니다. 남경은 중국에서 수도를 아주 오랫동안 했습니다. 가장 최근의 수도가 과거 장개석 정부가 남경에 일시적으로 수도를 했다가 1937년에 일본軍(군)한테 넘겨주고 중경으로 갔다가 거기서 8.15를 맞았죠. 그 전에는 明(명)나라가 초창기에 남경을 수도로 정했고 주원장의 무덤이 남경에 있습니다. ‘太平天國(태평천국)의 亂(난)’이란 게 있었어요. 19세기 말에 洪秀全(홍수전)이라는 사람이 기독교 영향을 받은 일종의 邪敎(사교)를 만들어서 반란을 일으켜서 남경을 수도로 했던 적이 있습니다.

《三國志(삼국지)》에 나오는 손권의 吳(오)나라가 그 곳을 수도로 정한 것이 처음입니다. 삼국지를 보면 마지막에 통일이 되는데 그 때 등장하는 나라가 晉(진)나라죠. 그런데 그 진나라가 백 년도 못 채우고 북방민족에게 망하고 남쪽으로 가서 東晉(동진)이 됐습니다. 그 동진이 남경을 수도로 삼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남경은 북경, 장안, 낙양과 함께 중국 역사에서 수도를 가장 많이 했던 도시였습니다.

남경에 중요한 무덤이 세 군데가 있습니다. 첫째는 辛亥革命(신해혁명)을 일으킨 유명한 三民主義(삼민주의)-삼민은 民族(민족), 民生(민생), 民權(민권)이죠-의 孫文(손문) 무덤이 있습니다. 손문은 호가 중산이죠. 中山陵(중산릉)이라고 합니다. 1929년에 蔣介石(장개석)이 한창 북벌 운동을 하는 혼란기 때 만든 무덤인데도 아주 거창하게 만들었어요. 손문은 毛澤東(모택동) 사람들도 존경하고 장개석 쪽 사람들도 존경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國父(국부)로 모시는 사람이죠. 잘 아시겠지만 손문의 부인이 송경령이죠. 이 사람은 공산주의 운동을 했고, 송경령의 동생이 송미령이라고 장개석의 부인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朱元璋(주원장)의 무덤이 있어요. 주원장의 무덤은 墓域(묘역)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 중에 하나입니다. 주원장은 사람을 참 많이 죽였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미천한 사람으로서 황제가 된 사람을 꼽으라면 주원장이 들어간다고 해요. 혼란기 때 가족이 다 굶어죽고 주원장 한 사람만 살았습니다. 이 사람이 절에 들어가서 구걸하면서 먹고사는 托鉢僧(탁발승)이 되었습니다. 원나라 말기에 백련교도 같은 반란군이 일어나자 거기에 들어가 실력을 발휘해 도둑질도 하고 거지역할도 하고 나중에 황제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황제가 된 후에는 1등공신도 죽이는 등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주원장이 죽인 사람이 얼마인지 통계가 각각 다른데, 많이 잡는 사람은 30만 명 가까이 죽였다고 합니다. 또 작은 꼬투리까지 잡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원장이 죽기 전 부터 ‘내 묘를 파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겁을 냈다고 합니다. 자기 무덤을 진시황처럼 지하에 만들었습니다. 장례식을 하고 관을 13개를 똑같이 만듭니다. 어느 관이 진짜인지 모르도록 만들었습니다. 出喪(출상)을 할 때도 성문을 나오면서 13개의 문에서 동시에 나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그 관이 지금 어디 가 있는지 조차 미스테리입니다. 묘역은 일단 남경에 만들었는데 무덤이 없어요. 다만 ‘무덤이 있다’고 생각되는 동산이 있습니다. 그 동산 밑에 있을 것이다 라고 해서 1997년에 중국에서 ‘지하탐사 방법, 위성추적를 통해서 그 근방을 조사 했더니 수 십 미터 밑에 주원장의 관으로 추정되는 것이 있다’는 발표를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가보면 명나라 때 건물은 딱 하나 남아 있습니다. 남경이라는 데는 혁명과 내전이 빈번히 일어나 도시가 불타고 해서 오래된 건물이 별로 없어요. 동양에서 찬란한 문화를 자아냈지만, 의외로 오래된 건물이 없는 이유가 목조건물이기도 하고 동양에선 전쟁이 일어나면 건물을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내전이 일어나도 성당을 불태우지는 않죠.

남경은 장강에 면해 있습니다. 강폭이 아주 넓어요 강폭은 4km, 수심은 20m정도가 되고요. 거의 바다와 같죠. 양자강 하구가 상해 근방에 있는데 거기서 남강까지는 300km 내륙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낙동강에 비교 하면 대략 충주지역 까지 올라와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5만 톤이나 되는 배가 강을 통해 남경까지 들어옵니다. 물동량이 얼마나 많은가 하면 상해에서 들어오고 나가는 배가 강의 양쪽에 러시아워 때 자동차 행렬처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걸 보니까 ‘거대한 중국의 동맥, 맥박이 이것이 아니겠는가? 정말 무서운 일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구나’하는 것을 눈으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모래, 핫코일 철광석을 실은 배들이 줄을 서서 400~500m 간격으로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합니다.

양자강을 보면 ‘중국이 정말 크구나’하는 걸 느낄 수가 있죠. 어느 도시를 가든지 정말 사람이 많구나 하는 것을 느낍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지 않습니까. ‘중국 사람들이 동시에 의자에서 뛰어내리면 지진이 일어난다.’ 14억 인구에 몸무게를 다 곱하면 1억톤 정도 되는데 지진이야 안 일어나겠지만 이런 농담도 있습니다.

남경에 유명한 박물관이 하나 있죠. 남경대학살 박물관이 있는데, 1937년에 일본군이 쳐들어와 점령을 하고 양민 학살을 많이 했어요. 중국 사람들 통계로는 30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통계는 항상 과장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많이 죽인 것은 사실이죠. (학살한 시신을) 집단 매장했다가 발굴한, 해골이 된 시체들을 그대로 들어내 아주 거대한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그걸 보면 부끄럽던지 보복을 당할 까봐 겁이 나서 못 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물관 관람이 다 끝나고 마지막에 ‘12秒(초)실’이라는 방이 하나 있습니다. 캄캄한 데서 12초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설명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6개월 동안에 30만명을 죽였으니까 12초 마다 한 사람씩 죽였다. 12초마다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다는 것을 느껴보라’는 것입니다. ‘12초실’을 보고 나오는데 옆에 ‘結束語(결속어)’라는 글이 있었습니다. ‘결론’이라는 뜻이겠죠. 그 중에 이런 문구가 기억이 납니다. ‘새 둥지를 엎어버리면 둥지 안의 새 알은 깨지게 되어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국가가 침략을 받으면 인민들은 이렇게 고생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安保(안보)를 잘 해야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6.25를 겪으면서 보았던 나라가 침략을 받으면 그 개개인의 삶이 어떻게 되느냐, 즉 새 둥지를 엎어버리면 안에 들어있는 새 알은 부서 질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거기에 써 붙여 놓은 것을 봤습니다.

중국은 올해 경제 성장이 7%인데 내년에는 9%대로 복귀를 한다고 합니다. 세계 물동량의 최대 수요가 중국입니다. 앞으론 기름소비량도 세계에서 제일 많아질 것입니다. 올해 중국의 경제 통계를 보면 기념비적인, 획기적인 통계가 나와 있어요. 중국에서 올해 자동차를 약 1000만 대 팝니다. 드디어 미국시장보다 더 많이 팔게 되었어요. 중국이 또 자동차 1000만 대를 만들어요. 1000만 대를 만들고 1000만 대를 팝니다. 자동차하면 우리 생각에는 다 미국시장이 선두라고 생각했는데 내년부턴 중국이 미국시장을 추월해서 그 격차가 빠른 속도로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 가보면 자동차가 BMW, 아우디 등 외제차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차도 아주 큽니다. 자동차 산업이란 연관성이 아주 강하기 때문에 자동차 산업이 제조업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산업입니다. 그 부분에서 이미 중국이 세계 최대 생산국, 세계 최대 소비국이 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주에 여기서 탈북자 출신 두 사람이 최근의 중국, 북한의 변화에 대해 설명을 했었습니다. 지난 일주일 새에 북한에서 일어난 변화에 대해 요약해 보면 결국 김정일이 화폐개혁을 통해서 시장이 가지고 있는, 또 시장에서 돈벌이를 한 인민의 돈을 상당부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정액수 이상을 강제저축을 하도록 하든지 아니면 무효화를 하던지 하면서 돈을 강탈했습니다. 국가가 국민들을 부자로 만들 생각은 안하고 부자가 된 국민들의 돈을 강도질 한 거죠.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두 번째는 사람을 회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회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북한에서 시장이 계속 확대되니깐 공장과 농장은 가동중단 상태로 들어가니까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공장이나 농장에는 형식상 출근하고 실제로는 시장에 가서 돈벌이를 합니다. 북한의 큰 공장에는 출근을 해봤자 할 일이 없습니다. 공장에 나가서 출근부에 도장 찍어 놓고는 그 길로 시장에 가서 돈 벌이를 해가지고 좀 많이 벌면 그 돈을 오히려 공장에 갖다 주는 겁니다. 이거는 뭡니까. 공장이 월급을 줘야 하는데 오히려 종업원들이 돈을 벌어 공장한테 월급을 주고 있으니까….

이런 일이 계속되다 보니까 김정일이 화가 났어요. 군중집회를 하려고 사람들을 동원해보면 사람들이 옛날처럼 빨리 빨리 모이질 않아요. 왜냐하면 통제를 벗어나서 시장근방에서 돈 벌이에 열심히 인데 사역을 한다, 제방을 쌓는다 하면 잘 오질 않잖아요. 그 만큼 북한의 노동당 정권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한에서 김정일의 절대 권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죠. 시장의 힘에 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탈북자들이 너무 많이 생기니까 탈북자 가족들을 다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과거 같았으면 다 수용소에 보냈을 텐데 그렇게 하려면 몇 백 만 명을 보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탄압할 수 있는 힘이 약해진다는 것입니다.

통제력도, 탄압력도 약해지니까 김정일이 ‘화폐개혁을 통해서 시장 기능을 대폭 축소하고 국가가 배급을 책임진다, 그렇게 해야 다시 사람들을 내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해서 화폐개혁을 했는데, 그럼 이것이 성공할 것이냐? 결론은 나와 있죠. 이것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국가에서 배급을 하려면 북한에서 뭘 만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북한에서 만들어서 배급하고 할 것이 거의 없습니다. 생필품은 거의가 다 중국에서 수입하는 것입니다. 물건을 공급하지 않고 이번에 화폐개혁을 통해서 돈은 또 많이 공급을 했습니다. 선심 쓴다고 1인당 북한 돈으로 500원 그 전의 가치로 5만원을 다 나눠졌는데 그 돈은 다 찍어서 나눠준 것이죠. 돈은 많아지고 물건은 적어지면 물가고가 생기겠죠. 벌써 쌀은 여섯 배가 올랐다고 합니다. 그럼 살라고 해도 물건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다 숨겨버리기 때문에 앞으로 북한에서 일어날 게 인플레입니다. 모처럼 500원씩 나눠준 게 의미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정상적인 시장은 생산과 소비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시장입니다. 그래서 생산이 많아지면 물가가 내려가면서 소비는 또 늘어나는 것입니다. 생산과 소비의 균형에 의해 가격이 결정됩니다. 북한은 그게 아니고 생산은 안 되니까 생산 하는 대신에 중국에서 수입을 합니다. 수입과 소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누가 물가를 좌우하느냐? 수입품을 제공하는 사람, 북한으로 수출하는 중국 상인들이 물가를 결정하고 환율을 결정하게 됩니다. 그럼 중국의 상인들이 김정일을 위해서 값싼 물건을 제공하겠느냐? 그럴 리가 없죠.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중국 공산당이 북한 정권을 보호하고 있지만 중국 상인들이 결국 김정일을 죽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북한의 화폐개혁 소식은 누가 특종을 했느냐면 ‘NK지식인연대’라는 탈북자 단체에서 가장 먼저 그 소식을 들었습니다. 11월31일 오전 11시에 만주 접경지대에 있는 어느 부락에서 노동당 간부가 나와서 모두 모이라서 하더니 “오늘 오후부터 화폐교환이 있습니다”라고 했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NK지식인연대 통신원 한 사람이 10분 뒤에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가지고 제보를 했습니다. 그럼 그 핸드폰은 어디서 났겠습니까? 중국 사람들이 사용하는 중국 핸드폰입니다. 중국 핸드폰을 북한 사람들에게 주면 그 기지국이 있는 압록강 두만강 지역에서 약 10km 북한 쪽으로 들어온 데서는 통화가 됩니다. 그걸 가지고 한국에 얼마든지 전화를 걸 수가 있어요. 이렇게 해서 실시간으로, 10분도 안 지나가지고 북한이 화폐개혁을 했단 얘기를 우리가 알았습니다.

국가정보원은 그걸 몰랐어요. 국정원보다 탈북자가 먼저 알았습니다. 그 다음날 청와대 고위간부한테 제가 물었어요. ‘이런 이야기가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랬더니 ‘아 국정원에서 보고가 안 들어왔다는 거예요. 확인이 안 된다. 국정원은 아마 북한에서 발표할 때 까지 확인하고 신중하게 대처를 하다가 탈북자들이 먼저 특종을 해버렸습니다. 이게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북한하고 접촉하는데 있어서 아주 선봉에 서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남한에 탈북자가 지금 2만 명이 들어와 있습니다. 2만 명.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렵지만 여기서 돈을 벌어요. 이 사람들이 1년 동 안에 북한으로 송금하는 돈이 대충 추정 하건데 2000만 달러가 된대요. 2000만 달러면 북한에서 엄청난 돈입니다. 그래서 함경도와 양강도 거기서는 탈북자들이 송금하는 돈이 그 경제를 좌지우지 한답니다. 탈북자들이 남한에 오면 혼자 오는 게 아니라 가족들을 데리고 오죠. 데리고 오는데 돈이 적게 들면 일인당 200만 원, 많이 들 때는 500만 원만 주면 그 지정해주는 탈북자를 잘 모시고 보름 만에 김포공항에 나타납니다. 500만 원으로 한 사람을 死地(사지)에서 살 수 있어요. 이거 얼마나 좋은 찬스입니까. 그래서 우리나라 부자들이 돈을 잘 쓸, 가장 보람되게 쓸 창구가 하나 있어요. 500만 원 씩 투자해서 탈북자 한 사람씩 데리고 오기 운동을 하는 겁니다.

근데 돈 많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돈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한 번 조사해 보니까 금융소득, 금융자산, 은행에 맡겨둔 돈에 부동산까지 합해가지고 50억 이상 가진 사람이 한국에 약 20만 명 입니다. 여기도 많이 계실 거 같은데...(웃음) 50억 이상 되는 사람이 500만원 내는 것은 천 분의 일을 내는 겁니다. 십일조가 아니에요. 계산상으로는 그렇습니다. 20만 명을 탈출 시킬 수 있습니다. 아니 20만 명 빠져 나오면 북한은 무너집니다. 그래서 돈만 쓰면 북한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돈으로 정보의 힘으로 북한체제를 무너뜨리자는 이야기했는데 방법론으로 들어가니까 게 좀 애매했습니다. 근데 알고 보니까 그 방법이 있는 겁니다. 시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북한의 시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강철환 씨 얘기를 들으셔서 아겠지만 라디오도 이제는 풍선에 달아 안 보냅니다. 중국 상인들에게 공짜로 주면서 이거 가지고 가서 북한에서 팔아가지고 북한 주민들에게 공짜로 끼워서 팝니다. 그럼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라디오를 수백개 가지고 가서 순식간에 팔아버립니다. 바로 시장을 통해서요. 그만큼 이 시장이 무서운 겁니다. 남한의 비디오도 시장을 통해서 팝니다. 누가 공작을 해서, 풍선을 통해 보내는 것이 아니고 시장에서 매매가 이루어집니다. ‘역시 돈이 중요하다. 돈이 나를 지켜주지, 시장이 나를 먹여 살리지, 김정일 권력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하는 생각을 퍼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로는 외부세계의 정보를 시장을 통해서 확산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보의 확산, 사유재산의 대한 돈에 대한 생각, 자본주의적 생각을 확산시킵니다. 확대시키는 방법이 뭡니까? 북한에 퍼주기를 안해야 시장이 확대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퍼주기 시작하면 노동당 놈들이 딱 받아가지고 그것만큼 시장이 죽어 버리는 거예요. 노동당 정권을 도와주면 시장이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명박 정부 들어 2년 동안 퍼주기를 안했더니 그 만큼 시장이 커진 거예요. 그래서 김정일이가 참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게 죽을 꾀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요즘 북한을 어떤 식으로 돕느냐하는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습니다. 교회를 가보면 그래도 김정일이 나쁘다는 걸 잘 알지만 북한을 도우려면 노동당 통해서 도와야 되는 거 아닌가. 우리가 실질적인 방법이 없지 않느냐. 이런 생각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건 잘못된 거예요. 노동당 도우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도와야 되는 겁니까? 도덕론적으로 이야기 해봅시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을 도울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게 自助(자조)입니다. 스스로 노력하는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왜 성공했느냐? 새마을 운동을 할 때 시멘트 철근을 어느 마을에 줬느냐하면 스스로 무얼 해보려는 계획을 가진 사람,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보려는 새마을 지도자가 있는 마을에 주었습니다. 잘하는 마을에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하는 마을은 더 잘되고 그 옆에 있는 잘 못하는 마을은 옆 마을이 잘되니까 우리도 정신 차려야 겠다 하면서 또 열심히 하고 해서 경쟁을 붙은 것입니다. 전국에 한 300여개 되는 부락이 잘해 보려고 경쟁이 붙었습니다. 잘하는 곳을 지원해야 한다는 게 자본주의의 논리이자 새마을 운동의 성공의 비결입니다. 그렇지 않고 잘 못하는 마을부터 도와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계속 농땡이를 부립니다. 잘하는 마을은 아무리 잘해도 뭐 주지도 않고, 가난하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하는 마을을 지원해주면 누가 새마을 운동에 참여 하겠습니까?

북한에서 스스로를 돕는 사람들이 누굽니까? 그들이 탈북자 아닙니까? 북한체제를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고 목숨을 걸고 만주로 뛰쳐나간 사람들을 도와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탈북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탈북자들을 도우면 탈북자들이 매개가 되어서 북한정권을 흔들어 놓는 것입니다. 우선 탈북자를 많이 만들어내야 합니다. 10만 명을 만들어 내야합니다. 탈북자 10만 명 만들면 여기 계시는 분들 애국투쟁 하실 필요 없습니다. 과거의 서북청년단이 했던 것처럼 탈북자 10만 명이 남한에 있는 從北(종북) 세력을 끝장 낼 것입니다.

왜냐? 그 사람들이 공산주의를 알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말을 할 때 보통 사람들도 ‘탈북자가 말하는 북한이 이런 곳인데 그 동안 우리가 종북세력한테 속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이 탈북자들의 말이 권위가 있는 것이죠. 그렇게 하려면 탈북자들이 남한사회에서 성공하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탈북자들이 성공했다는 소식이 북한에 들어가야 돼요. 그래야 계속 탈북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고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고생한다더라, 핍박받는다더라, 차별대우 받는다더라 해서 다시 탈북자들이 역류해서 북한으로 돌아간다면 통일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탈북자들이 여러 가지 모자란 점이 있다할지라도 좀 거부반응이 있다할지라도 좀 참고 탈북자들을 돕고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뒷받침을 해줘야 합니다.

예컨데 1000명이상 고용한 사업체는 탈북자 한사람 이상을 의무적으로 고용하도록 하는 탈북자 고용법 같은 것도 만들어해야 합니다. 그럼 그 사람들이 무슨 쓸모가 있느냐?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사원들 모이라고 해서 북한의 실상을 탈북자를 통해서 설명하면, 그게 좋은 사원교육 아닙니까. 그럼 깽판 치는 노조를 얼마나 미워하게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이용할 방법이 있는 것입니다.

동독이 무너진 이유도 탈출자들 때문에 무너진 거 아니겠습니까. 헝가리 국경을 통해서 오스트리아 쪽으로 빠져나가니까. 결국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도 서베를린, 서독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무너뜨린 것 아닙니까. 똑같은 공식이 한반도에도 적용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냉전에서 서방이 이긴 바로 그 공식을 적용하는 것인데 전쟁을 통해서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탈북자들을 통해서 북한 시장을 키우고 북한사람들이 생각을 바꾸도록 하고 생각이 바뀐 북한 사람들이 북한 정권을 바꾸도록 하면 북한 핵문제도 해결되고 동시에 남한의 골칫덩어리인 친북세력문제도 해결이 됩니다. 즉 북한 사람들 손으로 북 정권을 무너뜨리고 핵 문제도 해결하고 남한의 종북세력까지 해결하도록 만들려면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가 돈을 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탈북자를 우리의 동반자로 삼아야 됩니다.

국가가 나서는 게 제일 좋지요. 예컨데 100억 달러를 북한에 보냈는데 1억 달러만 북한정권 붕괴 공작에 썼더라면, 북한 노동당 간부 매수에 썼더라면 지금 우리가 북한 노동당을 갖고 놀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100억 달러를 북한 노동당 정권 강화시키는데 썼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국민세금, 남북교류기금의 상당부분을 탈북자를 돕고 북한 노동당 정권을 약화시켜 개혁개방 쪽으로 오도록 해야 합니다. 이 일을 하라고 우리가 세금주고 먹여 살리는 기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국가정보원입니다. 국방부는 국가 南侵(남침)에 대한 방패로써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북한 정권을 찌르는 창이 하나 있는데 그게 국정원입니다. 국방부는 수비역할, 국정원은 공격역할을 해서 돈을 쓰든지 해서 노동당 핵심 세력 안에 親韓(친한)조직을 만들어야 합니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북한은 돈이 아쉬운데다가 북한 노동당 간부들은 불안해요. 자기 앞날이 불안합니다. 우리 같으면 청와대에서 비서관으로 근무하다가 그만두라고 하면 나와서 또 다른 직장 찾아보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데 북한에서 노동당 과장이라는 자가 ‘오늘부로 면직이다’라고 하면 당장 자기가 사는 집을 비워줘야 합니다. 가구 채 놓고 나와야 합니다. 이제는 간부들이 이용하는 고급병원인 봉화 진료소 같은 덴 갈 수도 없고 약도 제대로 없고, 마취도 제대로 안 되는 그런 병원에 가서 줄 서가지고 치료받아야 합니다. 완전 인격말살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북한 간부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이 미래이기 때문에 노동당에 충성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돈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나를 지켜 주는 것은 김정일의 권력이 아니라 돈이 있어야 된다. 내가 목이 날아갈 때를 대비해서 돈을 모아야겠다. 그래서 뇌물이 통합니다. 세계에서 뇌물이 가장 잘 통하는 나라 랭킹 1위가 소말리아고 2등이 북한입니다. 이게 찬스죠. 노동당 간부라도 밑에 직원이 와서 ‘저를 중국으로 출장 보내주시면 돌아올 때 1000달러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무슨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출장 명령서 써 줍니다.

그러면 중국에 와서 우리 국정원 직원 만나고 공작 密命(밀명)을 받고 들어가서 1000달러 주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이 이제 매우 많다. 우리가 가진 강점을 이용해가지고 이 기회에 북한 노동당 정권을 돈의 힘으로, 돈의 힘이 가장 센 힘이므로 전쟁을 할 때에는 총이 가장 센 힘이지만 전쟁 안할 때에 자본주의하에서는 돈이 가장 셉니다. 돈은 남한사회에 차고 넘칩니다. 우리 경제력이 북한의 200배다. 제주도가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북한보다 많다. 한 회사가 북한 전체 수출액보다 많다. 북한 전체 수출액이라고 해봐야 연간 20억 달러 밖에 안됩니다. 연간 20억 달러 수출하는 회사는 한국에 굉장히 많습니다.

문제는 국가 지도부입니다. 국가 지도부가 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데 그 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게 가능한데 문제는 李明博(이명박) 정부가 이런 의지를 가지고 있느냐? 아직 그런 느낌이 잘 안나와요. 다만 지금 북한 문제에 대해서 무슨 세미나를 하고 그러면 제가 지금 얘기하는 이 방향으로 결론이 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핵 문제가 6자회담으로는 해결 안된다는 게 증명이 됐습니다. 그렇다고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해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핵무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방법이 있느냐? 북한 정권 내부를 붕괴시키는, 그것은 북한의 민주화 공작뿐입니다. 공작이라는 말이 좀 맞지는 않습니다만 사실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북한에 수출하는 것이죠. 우린 또 거기에 대한 노하우가 많지 않습니까? 권위주의 정부와 싸워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면에서는 대한민국이 아시아에서 일등입니다. 일본이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는 맥아더 장군이 선사 해준 민주주의이지 그 사람들이 쟁취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런 강력한 정부를 상대로 학생, 종교단체 등등이 들고 일어나 이 정도의 언론의 자유, 정치의 자유를 쟁취한 민주투사들 아닙니까? 그것을 북한한테 수출 하자는 건데….

이제는 국가가 공세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친북좌익들하고 엉켜서 싸움하는 것도 피곤하니까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사령탑을 아예 부숴버리는 것입니다. ‘시장확대, 정보확산’을 통해서 북한 노동당 정권을 총 한 방 안 쏘고 무너뜨리는 것, 평화적으로 자유통일의 방법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명칭을 잘 정해서 국민 여론을 일으키면 이게 정부에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이 운동을 하려고 합니다. 북한 노동당 정권을 웃으면서 죽이자는 것입니다. 신경질 내지 말고 돈을 써 가면서 말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사람이 만든 ‘쉰들러리스트’라는 영화가 그런 것 아닙니까. 아우슈비츠에서 공장을 경영하며 유태인을 고용한 ‘쉰들러’라는 독일 사람이 ‘사람들을 내가 보호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아우슈비츠 독일 간부들한테 뇌물도 주고 해서 1500여명의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내지 않고 구출했습니다. 그래서 유태인들이 그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똑같은 논리로 50억 이상 되는 재산가들이 한 사람당 500만원 만 쓰자는 것입니다. 1인당 1명 구하기 운동을 하자. 이대로 하면 북한 체제는 무너집니다.

지금까지 계속 ‘대북정책, 대북정책’ 이야기만 하는데 도대체 대북정책의 목표가 뭐냐? 대북정책의 목표는 반드시 통일정책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 20년 동안 대북정책 이야기만하고 통일정책은 없어져버렸어요. 북한은 계속 대남정책이 통일정책으로 가는데. 우리는 대북정책을 자유통일정책으로 바꿔야 합니다. 통일의 대전략을 다시 써야 하는데 그것은 간단합니다. 돈의 힘으로 북한 주민들의 생각을 바꾸고 그 북한 주민의 손으로 북한 노동당 정권을 해체함으로써 북핵문제와 남한의 종북세력을 동시에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一石三鳥(일석삼조)이지요.

지난 토요일 12.12사건 30주년 이었습니다. 10.26사건이 30주년이었고 내년에는 이제 광주사태 30주년. 내년이 뭐가 많습니다. 한일합병 100주년, 6.25 60주년, 4.19 50주년, 또 하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병철 氏 탄생 100주년. 그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이니까. 그런데 30년이 딱 한 세대죠. 한 세대가 지나면 어떤 사건을 어떻게 보게 되느냐? 좀 투명한 마음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거리가 멀어지면 객관적으로 보게 됩니다. 큰 나무 밑에 있으면 그 나무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세월이 흐르고 세월과 사건이 시간이 멀어지면 먼데서 보면 전체를 볼 수 있어요. 30년 지나면 언론도 이해관계에 별로 얽매이지 않습니다. 12.12사건 변호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 사이에 큰 이해관계가 존재하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을 비우고 편하게 12.12사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이 그런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12.12사건이라는 것은 역사적인 사건인데 이것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좋은 교육론이다. 우리가 역사 이야기를 많이 해요. ‘역사의 심판을 받아라’, ‘역사의 법정에 세우겠다’, ‘역사의 평가’라든지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막상 ‘그럼 역사가 뭐냐’ 물어보면 그럼 대답하기 힘들죠. 역사가 뭐냐? 역사가 하나님입니까? 역사가 무슨 권력자입니까? 역사가 책 한 권입니까? 역사는 누가 결정합니까? 역사라는 말을 멋대로 너도나도 빌려가지고 사용하는데 가만 보면 역사를 하나님으로 절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역사의 神(신)이란 말이 있는데, 주로 좌익들이 역사를 자기편으로 세워서 ‘우리가 주장하는 이 노선이 역사의 정의다, 역사의 명령이다,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역사를 자기 등에 딱 세우고 역사의 힘을 가지고 ‘우리가 진보세력이다, 우리가 정의롭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런 게 아니에요. 역사는 다 각각 마음대로입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이 300명이라면 300개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역사에 대한 큰 同意(동의)가 있는 겁니다. 대한민국은 태어나서는 안 될 정권이었다고 생각하는 노무현 류의 역사관이 있고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다수 국민들의 역사관도 있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의 역사관이 서로 머리를 대고 갈등하다보면 어느 한 쪽으로 모입니다. 아 역시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였다는 쪽으로 수렴이 되면 그게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만장일치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세월이 흘러야 하고 많은 재평가가 이뤄지고 합니다. 지금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아직도 역사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통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역사를 볼 때 너무 단선적으로, 역사를 볼 때 정치 도구화 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를 너무 흑백구조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은 거다 나쁜 거다 이런 인식이 아니라 역사는 있는 그대로 보면 됩니다. 가능하면 평가하는 것 이건 나중에 해도 되니까 그때의 실제 상황은 어떠했는가를 봐야합니다. 그래서 ‘역사는 스토리다. 역사는 이야기 거리다. 역사는 실록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문명국가 일수록 역사는 스토리라고 말해줍니다. ‘도대체 스토리가 어떤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약사학자가 대답해주는 것이 바로 역사를 쓰는 것입니다. 12.12사건도 그런 관점에서 새롭게 재인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오늘 나눠드린 이 글이 바로 그런 저의 생각을 담은 겁니다. 이 글을 읽어드리고 결론을 우선 말씀드린 후에 재밌는 녹음 테이프를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原稿 낭독)
<全斗煥(전두환) 그룹이 국방장관과 대통령의 事前(사전) 재가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 鄭昇和(정승화) 대장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군부의 流血(유혈) 사태인 1979년의 12.12 사건은 金泳三(김영삼) 정부 때 대법원이 확정판결한대로 ‘군사반란’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다. 全斗煥측이 자신들의 행위를 법적으로 변호하는 것은 무리이다. 舊(구)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憲政(헌정)질서를 창출하는 혁명의 논리로 12.12 사건을 변호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들이 당시에 그런 혁명 선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이 또한 불가능하다. 全斗煥 그룹이 鄭昇和 연행의 이유로 내세웠던 혐의들도 그들이 주도한 수사, 재판과정에서조차 증명되지 못하였다.

12.12 사건 후 군부의 實勢(실세)가 된 全斗煥 그룹은 1980년 5.17 계엄확대 조치로써 정권까지 장악한 뒤 崔圭夏 대통령을 밀어내고 全 장군을 새 대통령으로 추대, 헌법을 개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5.17 계엄확대 조치 과정에서 新軍部(신군부)는 국회를 군 병력으로 봉쇄하여 ‘계엄해제 결의’를 못하게 하였다. 이는 정권을 차지하기 위하여 主權(주권)기관을 무력화시킨 명백한 쿠데타이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는 또 全斗煥의 경쟁자가 될 만한 金泳三, 金大中(김대중), 金鍾泌(김종필)을 강제로 政界(정계)에서 배제하였다.

全斗煥 그룹은 혁명이나 쿠데타를 선언하고 정권을 잡은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合法을 가장하였다. 崔圭夏 대통령은 그런 合法위장을 위하여 필요한 장치이고 도구였다. 崔 대통령은 鄭昇和 연행을 不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사태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事後 재가를 하였다. 그는 全斗煥 그룹이 군부를 앞세워 제기한 5.17 전국계엄확대조치, 정치인 숙청, 행정부를 무력화시킨 국보위 설치안도 裁可하여 형식적인 합법성을 부여하였다. 全斗煥 그룹은 崔圭夏 대통령의 효용 가치가 없어지자 金貞烈(김정열) 씨(全斗煥 시절에 총리 역임)를 통하여 사퇴를 권유하였다.

10.26 사건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이 大勢(대세)였으므로 3金씨가 단합하여 민주화를 약속한 崔圭夏 대통령 체제를 뒷받침하고 改憲(개헌)작업을 주도하면서 全斗煥 그룹의 등장에 대비하였더라면 신군부의 집권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金鍾泌은 朴正熙(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비판적으로 언급하면서 박정희 親衛(친위)세력인 신군부와 멀어졌다. 김영삼-김대중은 大權(대권)이 눈앞에 있다고 착각하여 서로 분열하였고, 김대중은 학생 및 在野와 손잡는 모습으로 군부를 자극하였다. 崔圭夏 대통령까지 과도 정부 역할을 넘어서는 過慾을 보이기도 하였다. 제2차 오일 쇼크로 경제난이 심화되는 가운데 정치불안과 사회불안이 동시에 덮치자 중산층의 民心은 민주화보다 안정을 더 優先(우선)하는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단결된 군부가 중산층과 분리된 민주화 운동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全斗煥 장군은 10.26 사건으로 발생한 권력의 眞空(진공)상태에서 정규육사 출신 장교단, 그 핵심인 하나회, 그리고 국군보안사령관이란 직책의 전면적인 뒷받침을 받음으로써 집권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다. 全斗煥의 독주를 견제할 수 있었던 두 사람-鄭昇和와 崔圭夏는 10.26 사건 날의 애매한 행적과 행동으로 의혹과 불신을 샀고 全斗煥은 이 약점을 십분 활용하였다.

12.12 사건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鄭昇和 연행이 계획대로 되지 않은 덕분으로 두 대통령이 생겼다는 점이다. 스무스하게 이뤄질 줄 알았던 連行(연행)작전이 全斗煥측 공수부대가 총을 쏘면서 국방부와 육군본부와 수경사를 점거하는 군사변란으로 변질되면서 그날 밤 전두환은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던 것이다. 살기 위하여서라도 정권을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인간은 살기 위하여 행동할 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12.12 사건,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流血사태를 거치면서 출범한 全斗煥 정부는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의 在任(재임)기간 한국경제는 연평균 성장률이 10%를 넘어 세계 1등이었다. 物價(물가)도 잡고 무역흑자도 기록하였다. 이런 경제발전이 소란스런 민주화 운동에 완충제 역할을 하였다. 그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6.29 선언을 결단하여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였다. 그가 퇴임할 때의 대한민국은 그가 취임할 때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민주화되어 있었고, 경제도 튼튼해졌다. 그는 독재자로 취임하였으나 퇴임할 때는 민주화에 기여한 지도자로 변해 있었다. 집권과정의 不法性(불법성)을 집권결과의 肯定性(긍정성)으로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지가 늘 역사평가의 쟁점인데, 정치는 결과를 重視(중시)하는 영역이다.

1995년 金泳三 대통령이 소급입법을 통하여 12.12 사건과 5.17 및 5.18 사건을 재수사하고 全斗煥 그룹을 법정에 세운 것은 역사가 해야 할 일을 政治(정치)가 대신한 셈이었다. 계엄사령관 직책에서 연행되어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물고문을 당하였던 鄭昇和씨의 입장에선 속이 시원한 복수가 되었을 것이다. 이 역사재판은 한국의 보수층을 분열시켜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길을 열었다.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는 자세는 평가가 아니다. 평가는 쉽고 간단하다. 역사는 이야기여야 한다. 역사를 實錄(실록)으로 정확하게 구성해놓으면 평가는 저절로 된다. 全斗煥이 옳았는가, 나빴는가의 논쟁보다는 왜 그가 집권할 수 있었느냐를 탐구하는 게 더 재미있고 유익할 것이다. 권력을 善惡(선악)의 관점에서 연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力學(역학)의 관점에서 들여다 볼 때 더 유익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큰 저해요인은 단순사고, 黑白(흑백)사고, 그리고 지나친 명분론이다. 역사는 복잡하므로 종합적 시각에서 이해하여야 할 대상이다.

전두환이 역사를 만들었고, 그 역사는 전두환을 변화시켰다. 좋은 방향으로.>

대충 이해가 가십니까? 이걸 쓰면 역사를 단선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저한테 의문을 던지실 거예요. ‘12.12사건에 대해서는 전두환 대통령 측에 그렇게 비판적으로 얘기하면서 전두환 재임기간에 대해서는 왜 그렇게 높게 평가하느냐. 그건 앞뒤가 맞지 않는 것 아니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게 역사를 一面(일면)적으로 보는 것이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12.12사건을 부정적으로 보면 그 뒤에 전두환이 무얼 했는지 이거 다 무시하고 전두환을 나쁜 사람으로 해야 되는 거 아니냐,. 그게 맞는 거 아니냐. 그렇게 주장합니다. 그거 상당히 그럴듯하죠. 그러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상당히 복잡합니다.

어느 한 시기를 잘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 요새 박정희가 만주 군관학교 장교였다 해서 그 뒤의 극일성공 행위를 다 부인하고 친일파라고 보는 게 바로 그런 자세일 것입니다. 역사는 총체적으로 봐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보고. 역사에서 어떤 도덕적인 평가를 너무 앞세우려고 하면 역사가 제대로 안 보입니다. 그 도덕적 평가에 맞는 안경으로만 들여다보니까, 빨강 안경 쓰고 보면 다 빨갛게 보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12.12사태에서 전두환 합수본부장의 일이 명백하게 불법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대통령으로 한 일 그것은 우리 역사를 발전 시켰다.’ 굳이 평가를 하자면, 그걸 다 종합해서 봤을 때 그래도 플러스가 더 많았다고 하면 긍정적인 역사의 평가로 남는 것이고 그렇게 합산을 해서 마이너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역사관이란 것은 어떤 사람한테 강요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역사를 보는 기본적인 자세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은 이미 역사학이 발전한 중국이나 유럽에서 확립되어 있는 방법론이 있다.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역사는 권력의 논리로서 봐야 한다, 특히 정치사는. ‘좋다 나쁘다’ 이렇게 결정하지 말고 ‘누가 힘이 셌느냐 누가 힘이 부족했느냐’ 그래서 그 힘의 관계에서 어떻게 됐느냐 이렇게 그 힘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이게 ‘과학’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마키아밸리라는 사람이 16세기에 ‘군주론’을 쓸 때 그런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마키아밸리를 ‘근대 정치학의 창시자이다’ 이렇게 부르는 것이죠.

마키아밸리 전에는 ‘나쁜 놈이냐 착한 놈이냐’ (특히 기독교란 기준을 가지고)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더 뭐 연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마키아밸리는 군주가 권력을 행사할 때 억울한 사람을 많이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군주는 다수 국민들의 행복과 복지를 위해서 일하는 것을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한다.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면서 한쪽으로는 여우처럼 또 다른 쪽으로는 사자처럼 행동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권력의 속성을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보자는 것이 마키아밸리의 철학입니다. 12.12사건도 그런 식으로 보면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건강공단 통계를 보니까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질병으로 수술 받은 사람들이 150만 명입니다. 여기계신 분들 중에서도 아마 어려움을 겪은 분들이 몇 분 계실 텐데 아무쪼록 내년에는 험한 수술 안 받도록 건강을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강연이 다음이 마지막입니다. 그래서 내년을 또 기약하는 새로운 설계를 해보고 더 재밌는 말씀을 드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현대사 강좌를 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뭐든지 재미가 있어야 됩니다. 의미가 강하고 그런 건 너무 무겁고 그런 걸 따지다 보면 머리가 아파요. 역사는 재미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던 이유가 역사를 읽어보니까 거기에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 좋은 사람이 나쁜 사람 됐다가 나쁜 사람이 좋은 사람 됐다하는 기복, 이걸 보면서 ‘아, 인간이 이렇구나.’ 역사는 인간이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이해하는 데도 역사적 관점을 취하면 상당히 어른스러워 진다 그래서 역사, 문학, 철학, 이게 인문으로써 가장 기초죠.

역사는 ‘민족과 국가가 걸어온 길’ 그리고 문학은 ‘인간에 대한 탐구’, ‘철학’은 ‘이 세상의 원리에 대한 탐구’ 이것을 알아야 교양이 갖춰진다고 생각합니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을 하나 꼽으라면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앞에서는 사람들이 다 겸손해집니다. 역사 속에서 영원한 영웅도 영원한 악질도 별로 없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세월이고 세월 앞에서는 어떤 권력자도 세월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 없습니다. 어떤 미인도 세월하고 싸워서 이긴 사람이 없듯이, 어떤 권력자도 세월하고 싸워서 이긴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 악독한 스탈린도 끝에 어떻게 됐습니까? 모택동, 김일성이 지금은 시체로 남아 있지만 통일된 이후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김정일도 지금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지만 결국 시간과의 싸움입니다.

이 12.12사건에 대해서는 저는 가끔 이런 생각들을 해요. 기자로서 어떤 사건과 만나면 저는 굉장히 깊게 들어가서 책도 쓰고 하는데 제가 가장 상세한 부분까지 제일 많이, 자세히 알고 있는 사건이 몇 개 있는데 하나는 10.26사건이고 하나는 그와 연관된 12.12사건입니다. 12.12사건에 있어서는 정승화 쪽 사람하고, 전두환 쪽 사람, 재판했던 사람, 수사했던 사람 두루두루 많이 만나가지고 ‘12.12사건 하면 아마 전두환 전 대통령 보다 내가 더 많이 알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청중 웃음) 그 사람은 어느 한 쪽만 알지만 저는 종합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재판관보다도 내가 제일 많이 알지 않느냐’는 약간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는 부분이 바로 이 12.12사건과 10.26사건입니다.

전 기자니까 사실 관계에 대해서 아주 재미있게 생각하고 있고 또 이 사건이 하루 10시간에 걸쳐 일어났지만 기복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걸 있는 그대로 드라마로 만들면, 가끔 ‘제5공화국’이라든지 텔레비전에서 드라마도 했었습니다만 그건 정치적 목적을 세워가지고 주로 전두환 합수본부장을 악당으로 만드는 쪽으로 맞춰서 하다 보니까 본질이 제대로 전달되지가 않았습니다.

10.26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12.12사건이 있었던 것입니다. 10.26사건의 사건현장이 12.12사건을 胚胎(배태)했습니다.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한테 이용 당해가지고 사해사건 바로 옆의 식당에 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정승화 장군이 ‘혹시 김재규하고 공모를 한 거 아니냐?’ 하는 이런 의문이 커졌습니다. 그리고 정승화 장군의 진술에서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이 나중에 수사결과를 통해서 다 해명이 됐습니다. 해명되었다는 것은 ‘정승화 장군은 김재규하고 사전모의를 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용당했다.’ 그날 거기서(안가) 식사를 하자고 연락을 받았을 때 정승화 장군이 좀 꺼림칙했다고 합니다. 거기 가서 식사를 하는 게 좀 꺼림칙해서 이희성 씨(당시 육군참모차장)한테 ‘선배가 오라고 하니까 가긴 가야겠는데 별로 내키진 않는다’고 하면서 갔다고 증언을 했습니다.

이런 의문점에 대해서 10.26사건 수사 발표를 하면서 전두환 합수본부장이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그때 기자들이 뭐라 물었냐 하면, ‘정승화 총장이 이 사건과 관련됐을 것이라는 의문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데 좀 더 소상히 설명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두환 소장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김재규가 사건 당일 오후 4시5분 쯤 정 총장에게 전화로 저녁약속을 하고 궁정동 사건(대통령 시해사건) 후에 설득하려다 실패하면 협박하려 했습니다. 육본으로 오는 차 안에서도 정 총장을 협박할 것인가 살해 할 것인가를 두고 우물쭈물하며 옷을 갈아입고 신을 신는 사이에 육본 벙커에 도착한 것입니다. 발표문을 자세히 보면 정 총장의 일거일동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만약 정 총장이 중정으로 갔더라면 나라는 더 큰 혼란이 왔을 것입니다. 박흥주가 육본으로 가는데 동의한 것은 이미 김재규와 정 총장 간에 상의 된 것인 줄 알고 그랬을 것입니다.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 육군참모총장은 이 사건이 청와대 내부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해했고 그런 곳으로 가길 꺼려한데다 중앙청은 보안이 잘 안될 것으로 판단하여 국방부에서 주무회의를 연 것입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이 ‘정승화 장군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라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승화 장군이 김재규와 같은 차를 타고 지금은 허문 3.1고가도로를 지나면서 김재규가 ‘어디로 갈까요?’라고 정 총장한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정승화 총장이 ‘육군본부로 갑시다’라고 그랬습니다. 그때 만약 지휘소가 중앙정보부가 있는 남산으로 갔더라면 김재규가 장악 했을 것입니다. 정 총장이 육군본부 벙커로 가자고 그래서 육본으로 가는 바람에 정 총장이 지휘할 수 있는 내에서 이뤄졌습니다.

일부는 요새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10.26이라는 쿠데타 세력을 진압한 것이 12.12사건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견 말이 그럴듯하게 보이는데 그러나 그건 과장입니다. 10.26쿠데타는 김재규가 계획 했던 건 사실이에요. 그럼 김재규를 누가 잡아 들였느냐? 김재규를 누가 잡았습니까? 정승화 총장이 지시를 해서 잡았습니다. 정 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서 김재규 체포를 지시했습니다.

그러니까 10.26쿠데타 모의를 진압한 사람은 정승화 총장입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10.26사건이 났을 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 두 사람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랐습니다. 최규하 대통령(당시 국무총리)이 알았습니다. 8시에 김계원씨가 와서 ‘김재규가 쏜 총에 각하가 돌아 가셨습니다’라고 보고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김계원, 최규하 이 두 사람이 그 뒤에 아무 말도 안했어요. 최규하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소집하기 전까지 김재규하고 불려온 장관들이 우왕좌왕 하면서 ‘도대체 누가 범인이냐?’ 라고 물어도 최규하는 끝까지 대답을 안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니까 김계원 씨가 정승화, 노재현 두 사람을 불러서 이야기했어요. ‘범인은 김재규다.’

그때까지 대부분이 범인을 차지철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사건이 딱 났다고 했을 때 왜 사람들이 차지철이 범인이라고 생각했느냐면, 차지철이가 평소 오만불손하게 행동하는 걸 보니까 ‘저 놈이 나중에 쿠데타를 일으킬 놈이다’라고 다 가슴 속에 가지고 있었어요. 누구도 김재규가 범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원래 김재규가 우직한 사람입니다. 그러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그렇게 충직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권력남용을 별로 안 한 사람입니다. 김재규에 대한 사후에 많은 부정적인 평가가 있지만은 그건 다 사후에 만들어낸 말이고 역대 정보부장 중 권력남용을 가장 적게 한 사람입니다. 김재규는 한 마디로 착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신경질을 조금 내고 울컥하는 성질이 조금 있습니다. 울컥하는 성질 때문에 그 날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정승화 총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불러가지고 체포를 지시합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그 전에 돌아가신 분이 박 대통령이라는 것을 바로 병원 옆에 있었기 때문에 알았습니다. 그러나 전두환 사령관이 먼저 김재규를 체포하진 않았습니다. 정 승화 총장의 명령을 받고 조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최규하, 정승화 두 사람에 대해서 의혹이 따르는 겁니다. ‘여러 가지 행동으로 미루어 보아 정 총장에게 미심쩍은 것이 있다. 예컨대 총성이 들렸는데 왜 적극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느냐?’ 정승화 총장 이야기는 ‘총성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있는 誤認(오인) 사격으로 이해를 했지, 거기서 박정희하고 차지철, 김계원, 심수봉 이런 사람들이 어울려 가지고 식사를 하고 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0.26사건 이후에 최규하 대통령이 ‘우선 민주화를 하겠다’면서 改憲(개헌) 하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國葬(국장)이 끝나자마자 11월 초에 당시의 권한대행인 최규하 대통령이 ‘개헌을 하겠다’ 그래서 ‘유신헌법을 이제 고치겠다. 직선제 개헌을 하겠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환영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 사회에서 ‘自重自愛(자중자애)’라는 말이 유행을 했습니다. 이젠 나라가 위기를 맞았으니까 자중자애 해가지고 이 민주화의 프로세스가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그땐 학생들이 바깥으로 나오기 전입니다. 그건 1980년 넘어가서고 당시는 굉장히 조용 했습니다. 12.12사건 날 때까지 한국 사회에서 소요사태는 한 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들이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민주화가 대세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김대중의 행동이 자유롭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치권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공화당은 김종필을 총재로 만들고, 제명하려고 했던 김영삼씨가 다시 신민당의 당 총재로 돌아오고 ‘이제는 정치의 계절로 가는구나’하는 이런 와중에 12.12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때 저는 부산일보 사회부 기자를 하면서 부마사태 취재를 하기도 하고 하면서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제 민주화의 길로 가는구나.’ 그런데 12.12사건이라는 게 아주 돌발 사건으로 나왔습니다. 이게 12.12사건의 反(반)역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로 가야하는데 12.12사건이 났기 때문에 그게 늦춰졌습니다. 한 10년은 늦춰졌어요.

12.12사건 그 자체는 어떻게 된 것인가? 그건 간단한 겁니다. 전두환 합동수사본부, 그때 계엄사령관이 정승화였고 그 밑에 합동수사 본부장이 전두환 소장이었어요. 합동수사본부 밑에 검찰, 경찰, 정보부까지 다 들어가 있었습니다. 전체 정보수사기관을 통제하는 아주 막강한 권력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12월12일 날, 직책상으로는 국방부 장관의 지휘를 받고, 계엄사의 업무는 계엄사령관의 지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속상관을 체포하는 것이니까 정승화 총장한테 ‘연행 허가서 사인해 주십시오’ 라고는 말 못하는 거 아닙니까?

그럼 국방장관의 재가를 받아야 되죠. 국방장관 아니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죠. 그래서 대통령 재가를 받으러 가면서 동시에 그 전에 허삼수, 우경윤 두 사람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러 갔습니다. 재가가 나오기 전입니다. 이 면에 대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왜 재가를 받지 않고 갔느냐?” 그랬더니 거기에 대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이렇게 주장합니다. “10.26사건에 대한 수사는 합동수사본부장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가 없이 누구든지 연행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검찰이 이렇게 얘기해요. “그럼 왜 재가 받을 노력을 왜 했습니까?” 라고 하니까 전두환 대통령 이야기가 “것은 정승화 장군 예우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법적으로 어디에도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수사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적혀있지 않습니다”라고 얘기 합니다.

검사가 나중에 신현확 당시 국무총리에게 “이 이야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하자 신현확 총리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불법연행이었다. 어떻게 직속상관을, 더구나 계엄사령관을 연행하는 일에 아무 재가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건 뭐 신현확 씨 이야기를 들을 것도 없이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됩니다. 허가 없이 된 것이 사후에, 상황이 다 끝난 다음에 최규하 대통령이 그 다음 날 13일 오전 5시10분에 사인을 합니다. 5시10분이라고 적으면서 사인을 합니다. 연행은 언제 됐느냐? (12일) 7시40분경에 됐습니다. ‘7시40분에 연행했을 때는 허가 없이 했다. 할 수없이 내가 사인할 수밖에 없었다’ 해서 12월13일 새벽 5시10분이라고 적습니다. 그 문서가 남아있습니다.

근데 연행하는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났습니다. 이거는 쿠데타 모의가 아닙니다. 12.12사건은 절대로 쿠데타를 계획한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을 뿐이지 이건 단순한 연행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연행과정이 수월하게 되지 않았습니다. 연행하려고 하니까 정승화 장군이 ‘최규하 대통령에게 전화를 해봐야겠다’해서 부관한테 전화를 하라고 하는데 전화기를 돌리고 있는 부관, 경호대장을 합수본부 사람들이 뒤에서 총을 쐈습니다. 두 사람이 여러 발을 맞았는데 둘 다 안 죽었습니다. 그래서 총격전이 시작 된 것입니다.

12.12 사건과 관련해서 발표문이 그 뒤에 나왔는데 전두환 측 발표문에 뭐라고 되어 있었냐. ‘정승화 측의 경비원이 먼저 쏘는 바람에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라고 발표가 됐습니다. 국민들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건 완전한 거짓말입니다. 전두환 측이 먼저 쐈습니다. 그것도 등 뒤에서 쐈습니다. 총을 뽑아서 저항하려고 하지도 않고 전화기 돌리는 사람 뒤에서 쐈습니다. 정승화 장군 공관을 해병대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냐고 서로 하는 사이에 요행히 정승화 장군을 허삼수 대령이 연행해 가지고 서빙고 조사실로 데리고 가는 것까지 성공을 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그 안에 갇혀가지고 해병대한테 갇혀 가지고 꼼짝 못하고 있고 그런 사건이 벌어졌어요.

이 소식이 전해질 수밖에 없는데, 제일 처음에는 경찰이 받은 보고는 ‘권정달, 우경윤 두 사람이 정 총장을 납치했다’고 해 비상이 발동 됐습니다. 사실은 허삼수인데 권정달로 잘 못 이름이 적혔습니다. 그래서 全軍(전군)에 비상이 걸리고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이에 보니까 경복궁에 30단, 장세동 대령이 단장을 하고 있던 청와대 외곽경비를 하는 곳인데, 그 단장실에 전두환 측 장군들이 다 모여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거기에 누가 갔느냐 수도군단장, 1군단장, 유학성씨라는 국방부 군수차관보 그리고 김진영 33단장, 노태우 9사단장 등이 거길 갔습니다. 한 사람만 빼고는 3군 사령관 이건영 씨한테 근무 중 이탈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일종의 軍律(군율) 위반을 하고 거기에 모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다 실세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 쪽 사람들하고 육군본부의 참모차장 윤성민 씨 하고 양쪽에서 대결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제일 중요한 노재현 장군의 위치였습니다. 노재현 장관 옆 집이 바로 정승화 장군 공관이었는데 이 이야기를 듣고 피신을 했는데 연합사 미 8군 쪽으로 피신을 했다가 나중에 연락이 두절됐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이 가지고 온 연행 건의서에 사인을 거부했습니다. 왜냐? ‘여기 보니까 국방장관 도장이 안 찍혀 있다. 국방장관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국방장관을 아무리 찾아도 연락이 안됐습니다. 그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정승화 장군이 계엄사령관으로서 지휘를 해야 하는 데 이게 무력화 되어 버리니까, 그 다음으로 지휘해야 할 국방장관도 없고,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이 대신해서 지휘를 하게 되고 하는 과정에서 ‘부대 동원하지 말라’ 육군본부에서는 제일 신경 쓰는 게 군사 충돌로 가면 안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노재현, 윤성민 이 두 사람이 3군 사령관 이건영씨에게 얘기하는 것도 ‘절대로 부대동원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합니다. ‘부대동원 하지 말라, 부대동원 하지 말라...’

그런데 결국 부대 동원은 누가 했습니까? 전두환 쪽에서 먼저 해버렸습니다. 김포에 있던 박희도 준장의 1공수여단이 행주대교를 건너서 새벽에 여길 들어와 가지고 정승화 측 사람들이 있던 국방부 육군본부 수경사를 점령해 버렸습니다. 공수1여단이 총을 쏘며 들어가서 점령해 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군사반란이죠. 1개 여단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씨인데 그 밑에 있던 최세창 씨 3여단장이 자기 직속상관을 체포하기 위해서 들어가다 총을 쏴서 정병주 씨는 팔에 부상을 입고 그 비서실장(김오랑 소령)은 사살 됐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미 상황이 끝이 났습니다. 그래도 정승화 장군 쪽에서 ‘가까이에 있는 사단 몇 개를 서울로 불러 들여야 되는 것 아니냐’하는 논의가 잠시 있다가 ‘그러면 국군끼리 싸우게 되는 거니까 해서는 안 된다’해서 포기를 했습니다. 포기를 하니까 자연스럽게 12월13일 아침에는 정승화 장군이 연행되고, 그 다음에 노재현씨는 나중에 어디 피신해 있는 것을 거의 끌고 오다시피 해서 사후에 사인하도록 만들고, 노재현 장관이 사인 한 것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가지고 가니까 최규하 대통령도 ‘할 수 없다’고 해서 5시10분이라고 적고 사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니 12월13일 날 아침부터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됐습니다. 뭐냐?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를 계획하지도 않았는데 자기는 단순연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유혈사태가 되버렸습니다. 사실상 군사반란 사태가 되니까 돌아 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넌 거 아닙니까. 집권을 안 하면 이걸 어떻게 감당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음 대통령이 되는 가장 큰 동기가 12월12일 그 날 밤에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즉 스무스하게 됐으면 정승화 장군 해임, 또 새로운 국방장관 한 사람 쓰고 당연히 정규육사 출신 장교들이 우리 군의 실세가 되고 전두환 장군이 아마 육군참모총장이나 국방장관까지는 되었을 거예요.

이 분이 정권을 잡겠다는 생각은 그땐 좀 약했다고 생각하는데 12월13일 되니까 가장 힘센 사람으로 여겼던 정승화 장군을 간단하게 집어넣은 전두환이라는 사람한테 한국사회가 전부다 모이기 시작합니다. 무슨 부탁할 일이 있으면 무슨 장관도 육군 소장을 찾아오고 기업인들도 찾아오고 그래가지고 이게 자연스럽게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권력의 실세가 되는 거예요. 거기에 플러스 본인의 의사,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는 강박관념 이런 여러 가지가 다 뭉쳐져서 여러 가지 프로세스를 거치면서 5월17일 계엄확대를 하고 광주사태 직후에 국보위가 만들어지고 국보위가 사실상 혁명기구 역할을 하고, 최규하 대통령이 자진 사임 형식으로 물러나고, 전두환 장군이 군부에 의해서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헌법을 고치고 다시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서 또다시 선거를 해 전두환 대통령이 대통령에 취임합니다. 1년 사이에 두 번 대통령에 취임했어요. 그렇게 해서 5공화국이 문을 엽니다.

제가 마침 12.12사건에 대해서 취재를 했을 때에는 정승화 장군과 매우 친했습니다. 그 분이 그렇게 모욕을 당하고 예편 한 뒤 집에 있으면서 자기의 답답한 심정을 이 녹음테이프로 만들어놨다는 겁니다. 1987년 6.29 선언 이후 민주화가 시작 되니까 비로소 발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월간조선에 저하고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어 1987년 9월호에 ‘정승화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녹음테이프가 너무 아까우니까 내가 책으로 만들어 드리겠다 해가지고 그걸 구술 해가지고 ‘12.12사태 정승화는 말한다’라는 책이 1987년 12월에 나왔습니다.

그때 제가 이걸 쓰면서 분노했던 게 하나 있어요. 물고문. 그날 이 보안사 사람들이 정승화씨를 데리고 가서 그 다음날 새벽에 물고문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물고문을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물고문은 이렇게 합니다. 기자할 때 도둑놈들 물고문 하는 걸 봐서 아는데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워가지고 물고문 당할 사람 코 위에 물에 축인 수건을 얹고 거기다 이렇게 물을 붓습니다. 그럼 처음에는 물을 먹다가 나중에는 배가 불러가지고 물을 못 먹고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해가지고 심장 나쁘면 바로 죽습니다. 바로 박종철 군 고문사건이, 그 심장마비가 그렇게 온 겁니다. 이때 정승화 장군이 나이가 오십이 넘었는데 이 사람을 물고문을 했다고 합니다.

물고문 당하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머리를 젖히고 얼굴에 물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 물을 계속 얼굴 위에다가 들이 붓는 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다. 숨을 코로 쉴 수가 없어 입으로 쉬니 물이 목구멍을 막아 물을 먹는 순간 그때마다 약간씩 숨을 쉬게 되어 한참 당하니 정신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고문을 당하면서 ‘내가 6.25때 죽어야 했는데 살아서 부하들한테 고문으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혀를 깨물고 죽고 싶었다. 그때도 건강이 별로 좋은 편이 아니라 ‘이들의 무지한 고문은 나의 생명을 끊게 되겠구나’ 하고 체념했던 것이다.”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제가 이걸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야 어떻게 장교는 포로가 되어도 장교 대우를 해주는데 계엄사령관, 아직도 예편하지도 않은 현역 계엄사령관을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물고문을 하느냐 이 물고문을 하는 게 그때 1987년 이니까 전두환 정권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반드시 여기에 대해서는 보복을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해놓고 이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제 명대로 살 수 있겠느냐 하는 분노가 쳐 올라서 또 그때는 주로 그 쪽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러고 세월이 바뀝니다.

1995년 김영삼 씨가 소급입법을 해 가지고 이미 역사 속에서 다 끝난 거 가지고 재수사를 합니다. 소급입법 그 자체가 원래는 違憲(위헌)이예요. 그때는 저는 정승화 장군 만나면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떻게 이것을 또 고발을 합니까?’ 그땐 또 정승화 장군을 제가 굉장히 비판하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니까 저의 역할은 어느 쪽으로 기울면 균형을 잡아주는 그런 역할이 됐는데, 아무튼 정승화 장군을 장교로서 대접을 안했다. 장교는 명예가 다 아닙니까? 전에도 이런 예가 있었다고 해요. 강창성 씨가 윤필용 사건 수사를 할 때 아마 윤필용 씨를 불러 가지고 그렇게 고문을 했을 것 같습니다. 그 밑의 부하들한테는 더 가혹하게 했겠죠. 우리 군의 아주 나쁜 전통입니다.

그런 식으로 고문한 사람들 김정일 세상이 되면 애국인사를 불러가지고 고문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수사 관행, 그게 바로 일제시대 부터의 유산입니다. 일제시대 때 우리가 친일파라고 절대 변호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제 고등계 형사들, 일본 형사 출신들 이런 사람들이 훗날 우리 수사기관에 아주 나쁜 고문의 전통을 남겼습니다. 그것이 정보부라던지 보안사에 나쁜 전통으로 남아서 결국은 계엄사령관을 물고문하는 세상이 만들어 졌습니다.

12.12사건 취재를 하다가 1995년에 아주 재미있는 테이프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이때 보안사는 감청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도권 방어를 책임 진 이건영 3군사령관 전화를 딱 녹음 했습니다. 그게 테이프로 남아있었어요. 월간조선이 그걸 입수를 했습니다. 오늘 테이프 받으셨습니까? 그거 집에 가서 한 번 들어보시면 세상에서 그렇게 재미있는 테이프는 아마 없습니다. 왜냐? 군사반란 현장중계 아닙니까?

거기 등장하는 인물이 한 40~50명 될 겁니다. 거기 유명한 사람들 많습니다. 그걸 들어보면 그 급박한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나, 어떤 처신을 하느냐 하는 게 적나라하게 나와 있습니다. 이런 테이프는 세계에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걸 발굴해서 부록으로 냈는데 그때 월간조선이 매우 많이 팔렸어요. 근데 이 녹음상태가 별로 좋지는 않습니다. 자꾸 들어보면 말 알아듣는 데는 별 지장이 없어요. 한 번 들어보십시오.

(녹음 청취)

조갑제 편집장: 1979년 12.12사건은 모든 한국인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우리 현대사의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 녹음테이프는 그날 밤 육군본부와 합수본부로 갈라져 맞섰던 우리 군 지휘관들의 긴박한 육성이 그대로 담긴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이 테이프는 주로 수도권 방어를 책임진 3군사령관이 국방부, 육군본부, 각 군단 및 사단의 지휘관들과 통화한 내용입니다. 12.12사건의 현장 중계 방송과 같은 느낌을 주는 이 테이프의 녹취 기록은 월간조선 9월호에 그 全文(전문)이 실려 있으므로 대조하여 들으시면 이해하기가 쉽겠습니다. 역사의 고동과 숨결까지 느끼게 해주는 장군들의 육성 그 길었던 겨울밤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이날 밤 최초의 통화는 1979년 12월12일 밤 8시50분, 육군본부 참모차장 윤성민 중장이 이건영 3군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옴으로써 시작됩니다. 윤 참모차장은 정승화 총장이 납치된 이후 총장을 대리하여 육군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윤: 예, 지금 혼선이 상당히 벌어졌는데...
이: 내 여기 부관한테 잠깐 얘기 들었는데 말씀 좀 하세요.
윤: 그래서 7시40분 경에 권정달 대령하고...
이: 권영달?
윤: 권정달... 권정달 정보처장하고 우경윤 대령.
이: 우경윤?
윤: 범수단장. 그래서 아마 총장님을 납치해 갔다 이렇게 됐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약간 확인해 보니까 그 安家(안가)사건 때문에 한번 조사하려고 한 것이 이렇게 됐다... 그런 얘깁니다. 그래서 조금 더 기다려봐야 사건 내용을 알겠습니다.
이: 그렇더라도 총장님이 어떻게... 그래서 내가 말이오, 지금 모든 부대들은 부대이동에 대해서는 내가 직접 허가하기 전에는 동원하지 말아라, 그리고 검문소에다 전부 지시를 해가지고 총장님을 싣고 가는 게 있으면 붙들어라, 그렇게 지금 지시를 헌병한테 해 놨는데...
윤: 총장님은 어디 가 있느냐 그러니까 보안사령관이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다...
이: 보안사령관이 그래요?
윤: 예, 나하고 통했습니다.
이: 지금?
윤: 예.
이: 그럼 그렇게 뭐할 필요는 없나요.
윤: 예, 그렇게 할 필요가 없고 ‘진도개’는 그것을 취소하라고 했습니다.
이: 난 ‘진도개’ 아직 내리지 않고...
윤: 예, 내리지 마세요.
이: 음.
윤: 그건 다시 들려 드리겠습니다.
이: 지금 어디 계신 건 확실하구만.
윤: 예. 제가 지금 B-2 벙커입니다.
이: 그렇더라도 장관님한테 허가도 안 받고 어디 그럴 수 있나...
윤: 예. 지금 또 어디서 전화 왔습니다.
이: 알겠습니다. 전화받으시고.
윤: 예, 들어가십시오.

지금 여기서는 소리가 울려서 잘 안 들렸을 겁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상황에 맞춰서 변하느냐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밤에는 정승화 장군을 모시고 간 놈이 어떤 놈이냐 흥분하던 사람들이 그 다음날 새벽에 전세가 바뀌면 서서히 순화가 됩니다. 당시 이건영 3군사령관의 고민은 ‘병력을 빼가지고 서울 시내로 데리고 왔을 때 이걸 틈타서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어떡하느냐’하는 북한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우리끼리 싸우면 어떻게 되느냐?’ 그래서 ‘26사단 동원 안 하는게 맞다’ 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해요.

그리고 지휘권이 노재현 국방장관이 전화를 내 육성에 의해서만 부대를 이동하라고 했는데 그 뒤에 이 사람은 나타나질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휘권이 상실해 버린 겁니다. 그 다음 문제는 그런 와중에 부대 이동을 전두환 측에서 한 겁니다. 전두환 측이 동원한 부대가 노태우의 9사단 1개 연대가 들어오고, 1공수여단, 3공수여단이 작전을 해 한 쪽은 나라 생각을 하다 부대 이동을 못하고 한 쪽은 또 살아야 되니까 부대 이동을 해서 전두환 휘하의 부대들이 국방부, 육군본부, 수경사로 총을 쏘며 쳐들어가서 그때 하소곤이라는 육본 작전참모부장은 가슴에 총을 맞고 하는 이런 사태가 벌어졌어요. 그날 일어나는 행동을 보면 이건영 씨는 육사 7기(추정) 인데 그 쪽 출신들이 군의 상층부를 이루고 있었지만 연대장들이 정규 육사 출신들이었습니다. 연대장 급들이 주로 대령이고 육사 17기, 그 뒤에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그 쪽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한테 명령이 잘 안 먹히는 거예요. 그래서 9사단의 경우에 노태우 소장이 여기(30경비단) 앉아가지고 1개 연대를 데리고 오라고 하니까 3군 사령관 한테는 ‘부대이동 없습니다’라고 보고하고는 부대를 출동 시켜 버립니다. 그 보고 하는 게 여기 나옵니다.

이 테이프가 나중에 재판할 때에도 굉장히 중요한 테이프가 되었습니다. 윤성민 참모차장이 이 대화 속에서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거는 쿠데타다’라고 이야기하는 그 장면이 나옵니다. 윤성민 씨는 나중에 국방장관도 하고 1군 사령관도 했습니다. 집에 가셔서 혹은 차 안에서 들으면 시간이 아주 금방 갈 겁니다. 12.12사건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전두환 장군 측이 12.12사건을 적법(適法)했다고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정승화를 수사하기 위함이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면 정승화씨를 그렇게 연행을 해가지고 정승화 장군 입으로 부터 김재규와 손을 잡고 박정희를 죽이는 그 쿠데타에 내가 가담했다는 자백이 나왔어야 했는데 새로운 사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승화 장군이 연행되어 가지고 밝힌 내용이, 그 전에 10.26사건 발표 할 때 전두환 소장이 발표 한 내용하고 똑같습니다.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 그건 뭐냐? 12.12사건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가슴 속에는 무엇이 있었느냐?’하는 추측을 합니다. 첫 번째로 그렇게 아버지처럼 돌봐준 박정희 대통령을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한테 그렇게 신임을 받았던 김재규란 놈이 이렇게 죽이는 패륜아가 어디있느냐?’하는 분노가 있었을 거예요. 박정희 대통령을 향한 의리에 대한 분노 그건 남자로서 아주 멋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고하를 막론하고 수사를 하겠다’그런 게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는 자기 위치에 대한 불안이 있었습니다. 10.26사건이 나니까 군대에서 이런 분위기가 조성이 됐습니다. 박정희로 부터 신임을 받았던 사람들 소위 정치성이 있는 장군들에 대해서 상당한 비난이 조성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정규육사 출신들과 선배세대와의 갈등과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박정희 정권 때 유신체제하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군대를 잘 관리하기 위해서 특정한 사람, 특히 전두환, 노태우를 영관 장교 때부터 밀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 덕을 많이 본 것도 사실이고, 계급을 떠나서 두 사람이 앞으로 우리 군에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해 가지고 상관들도 그 두 사람들한테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분위기가 조성이 되는데 그 후견인인 박정희가 사라져 버리니까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정규 육사 출신, 하나회 출신들을 정치장교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는 겁니다.

정승화 장군은 전두환과 뭔가 맞지가 않았습니다. 정승화 장군은 어떤 사람이냐? 한 쪽에서는 그를 험담하는 사람도 있고 한 쪽에서는 그를 칭송하는 사람도 있는데 전체를 보면 정승화 장군은 괜찮은 분입니다. 그 분에 대한 好評(호평)이 더 많고 6.25때 잘 싸운 사람이고, 무엇보다도 정승화 장군은 권력을 잃은 다음에 좌파정권이 등장하고 나서 그 사람이 잘했습니다. 좌파정권 등장 했을 때 이 분이 星友會(성우회-예비역 장성 조직) 회장을 했습니다. 성우회 회장으로서 김대중 정부가 좌경화 하는데 나름대로의 견제역할을 많이 했습니다.

말년에 연세가 들어서 몸이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팔십 노구를 이끌면서 ‘나라가 좌경화 되는 것을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그런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었어요. 이 분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도 그 이야기가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예컨대 그때 김대중 정부에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고 했을 때 군 원로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때 테이블에 정승화 장군과 김대중이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담소를 나누다가 마지막에 정승화 장군이 일어나서 미리 써 가지고 간 한 페이지짜리 원고를 낭독을 했습니다. ‘왜 국가보안법 폐지는 왜 안 되는가?’ 대통령 식사하는 바로 앞자리에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힘듭니다. 대통령한테 밥 먹으러 가면 다 좋은 소리, 덕담하고 오지 거기서 딱 일어나가지고 ‘국가보안법 폐지는 안 됩니다’하고 문서를 써 가지고 읽고나온 사람이 팔십대의 정 총장입니다.

그래서 저는 권력을 잃은 뒤에, 김영삼 정부에 의해서 수모를 당하고 퇴역한 전두환 대통령 쪽에 섰던 군인들 중에서 지금도 애국운동 열심히 하는 분들이 몇 분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 6.25때 참전 해가지고 피를 흘렸던 사람들이 하는 것과 상당히 비교가 됩니다. 그래서 정승화 장군에 대해서는 ‘그 사람이 뭐 비겁한 사람이었다’, ‘기회주의자’라고 하는 인신공격은 저는 믿지 않는 편입니다. 그러나 정승화 장군이 좋다고 해가지고 전두환 대통령을 악당으로 몰 수가 있느냐? 전두환 장군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가지고 정승화 장군은 악당이 되야 하느냐? 원균이가 악당이 되어야 이순신이 영웅이 되느냐? 그건 아닙니다. 역사란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정승화 장군도 훌륭한 분이고 전두환 장군도 훌륭한 지도자이고 역량이 많은 사람입니다. 두 사람 다 우리 역사 속에서 높게 평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수) 역사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한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척점에 서 있는 사람을 죽이는 역사입니다. 일본은 안 그렇습니다. 일본은 양쪽을 다 영웅으로 만들죠. 그게 차이입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제일 억울한 사람이 누구 입니까? 원균입니다. 이순신을 영웅으로 만드는 소도구로서 원균이라는 사람이 실제 이상으로 나쁘게 되어있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어떻게 했느냐면 공신 세 사람을 정했습니다. 임진왜란에 제일 공을 많이 세운 세 사람을 조정에서 정했는데 권율, 원균, 이순신입니다. 역적 명단에 들어가야 될 사람이 어떻게 3대 공신으로 들어갔냐? 그것은 그 뒤에 후세에 문학하는 사람들이 이순신을 너무 높이기 위해 원균을 악당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걸 생각하면 우리는 12.12사건 30년 지났으니까 여기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역할을 역사적으로 평가를 해주면서 말살하지 않고 한국 역사에서 하나의 재밌었던 스토리로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습니다.

(녹음 청취)

조갑제 편집장: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에게 지시하는 내용입니다. 하나회 출신의 구창회씨는 나중에 대장까지 진급합니다.

이: 아, 난데.
구: 예.
이: 그런데 지금 30연대장이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어디서 출동명령이 내려갔는가?
구: 예?
이: 9사단 30연대가 어디 출동하는 모양인데 어디 출동시키는가.
구: 연대 출동 안합니다.
이: 그런데 어디 출동한다고 그러는데 무슨 소리야.
구: 연대가 말입니까?
이: 응.
구: 연대 출동 안합니다.
이: 지금 9사단 30연대장이 삼송리까지 출동한다고 전화가 왔는데...
구: 연대 출동 안합니다.
이: 사단에서 그런 지시한 거 없지요?
구: 예. 연대 출동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 그럼 뭣이 출동하는 게 있나?
구:......
이: 여보시오. 그 출동하면 안돼.
구: 예.
이: 그런데 그 출동하게 가면 안 되는데...
구: 예. 연대에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어떻게 된 건가 확실히 좀 알아봐.
구: 예.
이: 거 출동하면 안 되게끔 다 내가 연락했는데 왜 출동을 하나?
구: 예,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이: 확인해서 나한테 보고 좀 해요.
구: 예.
이: 출동하면 안돼요.

그러니까 이건영 장군은 자기가 명령하면 연대장이 출동 안 할 줄로 생각했나 봐요. 격동기에는 명령이 안 먹히는 거 아닙니까. 당연히 3군 사령관이 출동하지 말라고 하면 안 해야 되는데 세 번 네 번 ‘출동 안합니다’ 말했는데 그 사이에 이미 열심히 출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런 식으로 결정적 순간에 허위보고를 한 거 아닙니까? 군대 출동 하면서 출동 안한다는 보고를 하면 이거는 쿠데타입니다. 그 말한 사람은 나중에 대장까지 됐습니다. 이게 12.12사건이 던지는 굉장한 고민거리입니다. 저렇게 한 사람이 대장까지 승진한다, 그럼 그 부하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아주 큰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것입니다.

저는 김영삼 대통령이 저런 식으로 하나회를 정리하는 것에 대해서 그 당시에도 지금도 다른 방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 한편에서 저런 것을 잘 아는 입장에서는 저걸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니까 우리 군의 정상화를 위해서, 12.12사건이라는 큰 고민이 있었는데 일단 12.12사건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군사 반란자라고 대법원에서 확정 판결을 했고 거기에 따른 옥고를 치르고 해서 불이익을 당했습니다.

우리 군은 그 뒤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곳으로 휩쓸려 드는 것은 비교적 적었는데 좌파정권이 들어서니까 이번에는 또 좌파정권 밑에서 헌법과 반대되는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이거는 어떻게 보면 이런 抗命(항명)보다 더 질적으로 문제가 있는 짓을 한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이명박 정부 들어서고 나서 그대로 있고 특히 한미연합사 해체에 동조했던 사람들이 아무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방면에 한국군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군은 결국 장교단이 명예를 지켜야 하는데 장교단이 오로지 헌법과 국가만을 기준으로 해가지고 행동할 수 있을 때까지 가야 우리가 안심을 할 수 있는데 아직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고민거리라 하겠습니다. 이 테이프 맨 마지막에 아주 재밌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녹음 청취)

-저기 저 정보부.
-정보부는 지금 차지환씨가 얘기가 있어요.
-응 車(차).
-우리 여기는?
-여기는 유학성씨가 물망에 오른다는 얘기가 있는데.
-아직 결정 안됐다면서...
-1군에는 황영시.
-황영시?
-응.
-이동해야 할 사람이 많아요. 수도군단도...
-G3는 어때요.
-하소곤이...
-응.
-하소곤이 총 맞았지.
-글쎄 맞았다는데.
-복부 관통돼 가지고.
-경비사 내에서 그랬다면서.
-그렇게 하고... 그거지 뭐.
-합참의장도 바꿨다는 얘기가 있던데.
-응 합참의장도 바뀔 것 같아. 그리고 이번 이동이 많을 것 같아. 육사교장이다 뭐해 가지고 아마 오늘 내일 간에 애들이 지어질 것 같애.
-원로들 싹 바뀌더군. 그렇지요. 엘리트들로.
-그렇게 하고 범수단장은 좀 어때요. 척추 수술이라며...
-척추수술보다 총알이 배겨가지고 척추근처에서 맹관이 됐다고...그래서...
-뭘로 쐈는데 그래요.
-권총이겠지.
-리볼버?
-뭔지 모르지.
-누가 쏜 거요. 저쪽에서.
-그러니까 공관에 들어갔을 때 저쪽에서 공관에서 누가 쐈지. 공관의 전속부관이나 경호장교겠지. 딴 사람이야 권총 가진 사람이 없으니까. 경비병들이야 M-16이니까.
-그런데 거기 총을 쏜...
-확실한 내용은 몰라. 쉬쉬 해서...
-그 가족들도 다쳤다는 말이 있어요. 정승화 가족...
-가족 얘기는 없던데...
-참 그... 대충 그 상황이에요.
-글세 오늘 아마 부임한다는 것 같던데. 아마 이제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인원들이 많이 필요하고 여러 가지 선후좌우 관계를 고려하다 보니까 인사에 진통을 겪는 것 같아요.
-그렇겠지 갑자기니까.
-뭐 하면 또 좋은 자리 나가려고 하겠지 뭐.
-우리 朴(박)형 어디 한 자리 없는가.
-이번에 바로 장군으로 해 가지고 어디 한자리 얻을까 싶은데 사양을 하고 있습니다.
-장군은 그만두고 그 옆자리나 옆방이나 밀지 뭐.
-요샌 월급 타 먹고 애들하고 편히 사는 게 좋지, 감투 많이 써봐야 만날 청결이나 하고 말이지.
-그 옆방이나 밀고 들어가요.
-하하하 참...
-참 불행한 일이야. 정승화 참 걔 그... 3군 사령관도 그렇고 참 높은 게 좋은 거 아니에요.
-그저 편하게...
-심부름이나 열심히 하고.
-은하식당에서 만두에다 소주 한잔 하는 팔자가 제일 좋지... 대략 그런 상황이에요.
-변동이 있으면 좀 알려줘요. 요즘 말이야 귀가 멀어서.
-알았습니다.
-OK, 고맙습니다.

대충 알아들으셨습니까? 상황이 다 끝나고 보안사 대령하고 친구 한 명이 지난 밤(12월12일)에 있었던 일들을 정보교환하고 있는 겁니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벌써 ‘정승화 걔 말이야’ 말이 이렇게 나옵니다. 하소곤 어쩌고 존칭 같은 거 다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 대화에 무슨 애국심이 느껴집니까? 나라걱정 하는 게 느껴집니까? ‘이 기회에 당신 뭐 대령에서 준장 다는 거 어때?’, ‘옆방으로 들어가는 거 어때?’ 뭐 이럽니다. 마지막이 걸작이죠. ‘출세하는 것보단 지금처럼 편안히 앉아서 만두하고 소주 먹는 게 편하다’ 이러고 있습니다.

이 테이프를 들어보니까 이 부분이 제일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게 1979년 대한민국 군 장교단의 한 단면입니다, 전부 다는 아니에요. 장교단 이라는 게 우리 대한민국을 만들고 지난 61년 동안 대한민국을 지켜낸 가장 위대한 조직입니다. 그러나 微視的(미시적)으로 들어가 보면 저런 구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군사문화라는 것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만들어지는 하나의 도덕입니다. 기사도, 사무라이, 화랑도라는 게 바로 그런 것이죠. 가장 중요한 것은 명예와 조국, 행동하는 데 있어서 강조하는 게 정직성입니다. 장교가 거짓말을 하면 국가가 넘어가버립니다. 이런 모랄을 2009년 오늘날의 국군 장교단은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가, 1979년보다 나아진 것이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기막힌, 두 장교의 마지막 잡담이었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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