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西域美術展을 구경했다. 20세기 초 승려조직인 오다니(大谷) 탐험대가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미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오다니 탐험대의 수집품 중 일부는 조선총독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우리 차지가 된 것이다.
圖錄을 한 권 샀다. 한국예술종합학교 權寧弼 교수가 쓴 [실크로드 미술 새롭게 보기]라는 논문이 실려 있었는데 흥미로운 대목이 있었다.
<적석 목곽분은 흑해 동북연안의 코반지방에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퍼져간다. 이 형식의 묘는 일리강 유역의 베샤티르, 이식, 카자크스탄의 치릭타 등지에 있는데 기원 전 7-4세기에 속한다. 동쪽으로 갈수록 적석목곽분의 시기는 내려와 高알타이 지역의 파지리크는 기원 전 5-3세기, 시베는 기원 전 3세기-기원후 1세기에 속한다.
세렝가 유역의 북몽골의 노인울라의 적석목곽분은 가장 동쪽에 있는데 기원 전 1-기원 후 1세기이다. 古신라와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사례들은 이들 쿠르간 고분들이 대부분 다량의 금제품을 부장한 사실-심지어 차릭타 5호분에서 나온 금제품의 총중량은 100.5킬로그램에 달한다, 또한 목곽내에 白樺樹皮를 쌓아둔 사실, 노인 울라에서처럼 백화수피로 만든 관모를 副葬한 사실, 盛裝馬를 매장한 사실 등등이다.
신라의 이 적석 목곽분은 민족적으로는 스키타이에서 흉노로 이어지는, 지역적으로는 알타이에서 몽골로 이어지는 쿠르간 묘제이다. 스키타이-흉노 세력은 몽골의 노인울라 지역까지 파급되었으며 이들의 문화 역시 親서방적이다. 그런데 北아시아에서 강성했던 흉노세력은 기원 후 1세기에 남북으로 분열되었고, 그 중에 북흉노는 西進하여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서방세계에 (훈족으로) 출현한다. 즉 돈강 동쪽의 이란계 유목 기마민족 국가인 알란 Alan을 격멸시키면서 나타난다.
중국의 고대문헌은 북흉노의 4세기 중엽까지의 몇 세기에 대해 전혀 침묵하고 있다. 노인 울라쪽으로 동진한 스키타이-흉노의 문화세력이 아마도 동남진하여 한반도 동해안 루트를 타고서 신라에까지 파급된 것이 아닌지 추측된다. 흥미롭게도 중국문헌의 북흉노 세력에 대한 침묵기와 신라의 적석목곽분을 포함한 '金문화'의 출발시기와는 시간적으로 거의 일치한다.
4세기 중엽에 닥쳐온 신라사회의 변화, 다시 말하면 금문화를 비롯한 서방제품의 도입이라는 문화변동에 대한 단서는 지금까지 살펴본 직접적인 유물들 외에도 문헌을 통해서 어느 정도 추찰된다. 즉 신라사신 衛頭가 고구려와 함께 前秦에 조공을 바치고 전진의 왕 부견을 알현했을 때의 대화가 그것이다. 부견이 위두더러 묻기를 '그대 말에 의하면 海東의 사정도 예와 같지 않으니 어찐 까닭인가'하니 위두는 '역시 중국과 같이 시대가 변하면 명칭도 바뀌기 마련이오. 어찌 예와 같겠소'라고 했다. 이는 중국과 한국문헌에 같이 실려 있는데 서기 381년에 해당한다.
이 내용으로 미뤄보면 그 당시 중국 북쪽의 非한족이 난립하는 사정과 유사한 민족, 정치, 사회 변화가 신라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변동은 바로 4세기 중엽에 적석목곽분과 함께 들어온 금문화, 외래문물 자체를 의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權寧弼 교수는 신라가 한국의 동해안 루트를 항상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었고 이 해안길을 따라 북상하여 북방 초원과 연결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權 교수는 신라에 갑자기 나타나 고분을 만들고 지배층이 되는 기마민족이 스키타이 문화를 받아들인 흉노계일 뿐 아니라 유럽쪽으로 가서 훈족이 되는 北흉노의 일파일 가능성이 있다는 추정을 하고 있다. 그런 추정을 한 사람이 또 있다.
*알림: 월간조선 수요 강좌는 오는 1월7일 저녁 6-8시 사이 조선일보 광화문 빌딩(옛 원자력 병원 맞은 편) 9층에서 열립니다. 金秉模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가 '훈-흉노-한민족'에 대해서 강연합니다. 연락처는 724-6845입니다.
北匈奴가 신라에 들어왔다
- 조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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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1-05, 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