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잃는 한이 있더라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1987년 6·29 선언은 노태우 민정당 대표 겸 대통령 후보의 고독한 결단으로 포장되었으나 사실은 전두환 대통령이 먼저 노태우 후보에게 제의하여 이뤄진 것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정치적 도박이었다. 이 선언으로 전날까지 가장 미움을 받던 노태우는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이 되어 그해 대선에서 승리, 직선제 초대 대통령이 되고, 서울올림픽을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성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북방 정책을 추진, 격변기의 동구, 소련, 중국, 베트남과 수교, 북한을 고립시키고 한국인의 삶의 무대를 바꾼다. 6·29 선언을 결심하는 데 있어서 전두환 대통령 머리엔 서울올림픽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7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전두환 대통령은 연설문 담당인 김성익 비서관을 청와대 식당으로 불렀다. 그는 약 50분 동안 직선제를 받아들이는 담화문 작성에 참고하도록 6·29 선언의 내용과 후속 일정을 미리 구체적으로 일러주면서 직선제 수용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노(盧) 대표 의견도 그렇고 직선제로 나가야겠어. 지식층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들도 그걸 원하고 있어. 우리가 직선제를 안 받을 이유가 없다. 선진국에서도 직선제를 하는 나라가 거의 없고 또 직선제는 선거가 끝나면 결과에 승복을 안 해서 혼란이 야기되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안 받았는데 직선제를 하지 않음으로 해서 야기되는 혼란보다는 적을 것 아닌가. 국민이 원하면 해보자.
직선제를 해서 나라가 망하는 일이 생기면 불행하지만, 중산층이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거야. 내가 주장해온 대로 대통령 선거법을 고쳐서 직선제에 가까운 간선제를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직선제를 하자고 하는 것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워서는 평화적 정부 이양도 안 될 뿐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우리가 약속한 올림픽도 안 될 것 같아. 내 소신은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
역사가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

전두환-노태우 콤비는 1987년 6·29 선언으로 정국을 단번에 뒤집어놓았다. 사진=조선DB
“정권이 민정당에서 떠나도 올림픽은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거야. 그게 나라가 잘되는 길이다”는 말은 서울올림픽에 순정을 바친 한 사나이의 감상적 고백처럼 들린다. 그러나 여기엔 차가운 계산이 깔려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단합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 그는 이렇게 말을 이어갔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나서 닷새 후에 7월 7일 당 총재직을 사퇴함으로써 정치인과 지식인층, 그리고 국민들한테, 사심(私心) 없이 해온 내 이미지를 확실하게 보여준다. 김대중은 직선제가 되면 대통령 선거에 안 나가겠다고 했지만 안 나올 리가 없다. 김영삼도 마음을 비웠다고 했지만 그렇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은 안 하지만 행동으로 사심이 없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확실히 하는 거야.
당 총재직을 내가 가지고 있으면 영구 집권이라고 하고 또 현실적인 권력 구조로 볼 때 다음 권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게 된다. 전 국민과 전 세계인에게 나의 모든 것을 던지고 프리(free)하게, 페어플레이(fair play)하는 거다.”
전 대통령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그것을 보면서 6·29 선언의 구체적인 내용을 하나하나 구술해주었다. 며칠 전부터 직선제로 방향이 선회되는 느낌을 받고 있었으나 막상 구체적인 내용을 듣는 순간 김 비서관은 “역사가 큰 굉음을 내며 달려오는 듯한 충격과 흥분으로 잠시 먹먹해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우선 대통령이 민의(民意)를 있는 그대로 읽고 있다는 점과 시국(時局)을 이상한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지 않고 지극히 정상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점에 안도감을 가졌다. 그다음으로 생각이 미친 것은 모든 국민이 소망하는 이 좋은 소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내놓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1987년 6월 28일 오후, 직선제 선언을 대통령 명의로 발표하는 것이 좋겠다는 김성익 비서관의 건의를 받고 전두환은 6·29의 배경 등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직선제 이외에는 국민 대중과 중산층에 뭘 갖다 대도 속임수 인상을 주어서 바람직하지 않다. 힘으로 해서 노 대표가 대통령 된다고 해도 1년도 못 가. 저 사람들이 지금 올림픽을 담보로 잡고 있는데 다음 정권을 힘으로 만들면 올림픽도 못 치른다. 그러면 역사의 큰 호기를 놓친다. 내 손으로 우리 대통령을 뽑겠다는 직선제 민의를 우리가 받아준다고 해서 야당한테 지지 않는다.
김대중을 풀어주면 김영삼과 부딪치게 돼. 외부적으로는 역할분담론이 나와 있지만. 직선제를 받는 것은 야당과 언론의 급소를 찌르자는 거야.
얽히고설킨 것, 원한 많은 사람들한테, 누가 권력을 잡든, 어떤 정권이 잡든지 간에 맺힌 원한을 모두 풀어주겠다, 그래서 모두가 깨끗하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라의 백년대계를 향해서 출발하자는 거지. 내가 그 뚜렷한 명분과 이상을 추구하는 이상 직선으로 다음 정권을 창출해내야 돼. 대통령 후보는 노태우 아닌가. 노 대표가 부각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의 목표다. 노 대표 이름으로 해야 돼. 나는 국민으로부터 정치는 무능하구나 하는 소리를 듣더라도 노 대표가 부각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다. 사실은 내가 노 대표한테 직선제를 받도록 시킨 것이다. 2주일 전에 그랬는데 노 대표가 펄쩍 뛰었어. 그렇게 해서 되겠느냐고. 그래서 내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이라고 했다. 그쪽에 팀이 있는 모양인데 극비리에 작업을 해왔다. 더 이상 보안을 하기도 어려운 모양이야. 괜히 질질 끌어서 미루면 담화 발표의 참뜻이 없어진다.”
전두환 대통령은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대가 시청을 포위하는 것을 보고 다음 날 군 출동 준비 명령을 내렸으나 오후에 취소했다. 계엄령 선포 소문이 퍼지도록 하여 자제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면 서울올림픽은 날아간다는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당시 ‘나는 중산층이다’는 이들이 70%나 되었다. 그들은 시위 격화로 서울올림픽이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올림픽은 정권과 시위대 양쪽에 다 브레이크 역할을 했던 것이다. 무혈(無血) 민주화의 길을 연 6·29 선언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다.
“김대중이 열세, 김영삼을 때려라”

노태우 민정당 대표는 1987년 6·29 선언 다음 날 박세직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과 함께 미사리 올림픽 조정경기장을 둘러보았다. 사진=조선DB
‘1노(盧) 3(金)’의 대통령 선거운동이 치열하던 1987년 11월 9일 오전 대통령 주재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은 김대중과 김영삼의 단일화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민정당은 김영삼 공격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한다.
“앞으로 공략 목표를 김대중보다는 김영삼에 두라고 하시오. 김대중이 열세야. 이 사람은 구속학생 모임, 서대협, 대구학생 모임 등에 나가는데 2·12 총선 때 학생들이 일어나서 야당 붐을 조성하듯이 이번에도 학생들을 최후 보루로 쓰는 것 같아. 조직의 핵심을 학생에 두고 있어요. 김대중이 열세가 되면 야당 후보가 단일화되거나 김영삼으로 집중될 우려가 있어요.”
1987년 12월 대선(大選)의 가장 큰 쟁점은 전두환 정권의 치부인 12·12 사건이었다. 그해 9월호 《월간조선》에 정승화(鄭昇和) 전 계엄사령관 인터뷰 기사가 실린 직후 김영삼은 그를 통일민주당 부총재로 영입, 군사반란 세력 단죄를 다짐하니 정권 측은 긴장하게 되었고 선거판이 살벌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영삼이 주적(主敵)으로 되고 김대중을 전략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계산이 이뤄진 것이다.
1987년 12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은 교육개혁심의위원회 위원들을 불러 점심을 대접하면서 9일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기 폭파 사건에 대하여 올림픽 방해 책동이라고 설명한다.
“KAL기가 공중 폭파된 게 틀림없다고 나는 봐요. 상당히 센 폭탄인 것 같아요. 해상에 떨어진 부상물(浮上物)이 거의 없어요. 범인을 잡아낸 게 우리 국력입니다. 이북은 두 가지를 목표로 한다고 봐요. 첫째는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 이북에서는 이 기간에 최대한 혼란을 조성해서 선거가 안 되게 해야겠다 하는 것과, 둘째는 전 세계에서 올림픽에 참가하려는데 다 죽을 위험성이 있다고 겁을 주어서 참가를 안 하도록 하는 것으로 봅니다. 북한의 계획적인 테러인 것만은 분명해 보여요. 다른 나라는 이런 짓을 할 나라가 없고 할 이유도 없어요. 시체와 범인 여자를 인수해보면 상당히 빠른 시일 내에 전모를 알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부가 지금 신경 쓰는 게 이북이 대통령 후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해칠까 봐 걱정입니다.”
KAL기 폭파 사건이 난 것은 11월 29일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아웅산 테러 때와 마찬가지로 즉각 북한의 계획적인 범행이라고 추정했다. 폭파범 ‘마유미’는 12월 15일 서울로 이송되었다.
전두환 대통령은 1987년 12월 10일 오전 제5공화국 경제치적 보고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안정을 다지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허무는 것은 삽시간입니다. 건물 짓는 데는 5년에서 7년이 걸리지만 불을 싸지르면 하루 만에 다 타요. 이번 KAL 사건도 보세요. 그 뜨거운 중동에 어려운 사람들이 가서 일을 끝내고 손에 몇 푼씩 쥐고 희망에 차서 귀국하는데 폭발시키는 참사가 났어요.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외면하고 김일성을 순화해서 평화 공존시킨다고 하는데 김일성이 순화될 인물입니까. 그 얘기 하고 나서 며칠 안 돼 총격을 가해왔고 이런 참사가 일어났어요. 모스크바에서 얘기를 해도 말 안 듣는 김일성을 우리 대통령이 순화하고 타일러서 한반도에 평화 정착을 시키려 하는 것은 얼마나 소견머리 없는 일입니까.”
1988년 12월 18일 대선에서 노태우 후보는 김대중-김영삼 분열구도 덕분에 3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6·29 선언을 결심할 때의 계산이 적중했던 것이다. - 계속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