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대회사를 하는 박세직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 그 옆은 사마란치 IOC 위원장.
가장 많은 외국 기자들이 한국에 온 것은 한국전쟁 때와 그 38년 뒤 서울올림픽 때였다. 두 사건은 다른 모습으로 세계사를 바꿨다. 김일성의 불법 남침에 “우리는 남녀노소가 다 나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서라도 싸울 것이다”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사생결단 의지에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김일성의 남침을 마적단 습격 사건으로 규정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 개자식들을 막아내겠다”면서 유엔군과 미군 파병을 결단했다. 한미동맹이 없는 상태에서 한국이 1대(對) 3으로 소련·중공·북한을 상대하는 사이 미국은 한국 파병과 동시에 대만해협에 미7함대를 보내 대만 수호를 결단한다. 일본은 한국전으로 경제가 부흥하고 서독이 재무장하며 느슨하던 NATO는 군사동맹체로 강화되고 미국은 군사비를 네 배로 늘려 본격적인 대소(對蘇) 군비 경쟁을 시작, 1980년대 후반 드디어 소련이 붕괴 조짐을 보인다.
바로 이 세계사적 전환기에 한국이 주최한 서울올림픽이 “화합과 전진” “벽을 넘어서”라는 시대정신을 구현하면서 한국과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확산시켜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한국인은 6·25 항전으로 자유세계를 지켜내고 서울올림픽으로 국제 공산체제를 허물었다. 이보다 더한 드라마, 이보다 통쾌한 복수가 또 있을까. 그런데 문제는 한국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거나 애써 숨기려 한다는 점이다.
국내적으론 올림픽 준비 과정이 사회의 선진화(화장실 문화 개선 등), 정치 민주화, 대북(對北) 우위의 촉매제가 된다. 12년 만에 처음으로 이념의 벽을 넘어 온전한 올림픽이 이뤄지고 그 분위기는 이듬해 동구 민주화, 3년 뒤 소련 붕괴에 영향을 주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이 이런 전환기를 북방 정책으로 돌파, 동구·소련·중국·베트남 등 공산권과 수교, 한국인의 활동 공간을 지구촌 전체로 확대시킨다. 6·25 항전이 죽음을 극복한 드라마였다면 서울올림픽은 생명의 약동(躍動)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물리친 달콤한 복수였다. 6·25 항전-서울올림픽 성공이 자유통일로 결실을 맺을 때 한국인의 세계 평화에 대한 기여는 완성될 것이지만 파리올림픽을 계기로 36년 전을 돌아보니 더욱 커지기만 하는 서울올림픽이다. 큰 인물과 사건은 시간적 거리를 두고 봐야 전체상을 그릴 수 있듯이 서울올림픽도 그러하다.
박세직 위원장이 펴낸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1990)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조선조를 지배한 위선적 명분론이 좌파의 계급투쟁론과 결탁, 삼국통일과 대한민국 건국 같은 민족사의 영광을 자학적으로 회칠하는 광풍(狂風) 속에서 서울올림픽도 잊혀 왔다. 이번 기사의 주인공인 박세직(朴世直) 서울올림픽 조직위원장에 대한 위키피디아와 나무위키의 기술(記述)은 거의 무시 수준이고 당연히 교과서에 실려야 할 이름이지만 흔적조차 나오지 않는다. 올림픽 주제가 ‘손에 손잡고’를 즐겨 부르고 세계 5대 조각공원으로 불리는 올림픽공원을 산책하면서도 이 두 개의 문화유산이 순전히 박세직 위원장의 지도력과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아무도 몰라준다. 한국인이 몰라주니 외국인도 알아줄 리 없다.
다행히 나는 서울올림픽의 성공을 위해선 별로 한 일이 없지만 기록을 남기는 데는 약간의 역할을 하였다. 올림픽이 끝난 뒤 박세직 위원장은 안기부장과 서울시장, 그리고 여당 국회의원을 지냈는데 올림픽 이야기를 정리하는 데 도움을 요청하여 취재·편집 분야에서 힘을 보탠 적이 있다(1990년에 나온 박세직 지음 《하늘과 땅 동서가 하나로》).
한 세대가 지나서 그 기록을 다시 읽어보니 “아, 이제 역사가 되었구나”라는 감회가 밀려왔다. 이병주(李炳注) 식으로 이야기하면 “햇빛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데 올림픽은 신화가 아니라 우리의 일상(日常) 속에 살아 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국전쟁, 서울올림픽, 중화학공업 건설, 중동 건설 시장 진출, 새마을운동, 건강보험과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 건설 같은 이야기들은 대한민국 세력이 기록을 정리하여 영원한 기억의 유산으로 가꾸고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3세대에 걸쳐 이룩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야기에 감동하는 이들이 많아질수록 국민들은 자부심과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다. 개인의 자존심은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과 연결될 때 풍성한 에너지를 지니게 될 터이다.
군인 시절의 노태우 대통령과 박세직 위원장. 두 사람은 수도경비사령관과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 직을 수행했다.
세상을 바로 세울 사람 朴世直
수도경비사령관 출신인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위하여 태어난 사람 같았다. 배우처럼 미남이고 스포츠맨처럼 당당하며 늘 웃는 얼굴에 늘 공부하는 사람이며 겸손한 기독교도였다. 절대적 마감시간을 두고 크고 복잡한 국제적 조직을 효율적으로 지휘해야 하는 자리에 그를 발탁한 전두환(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사람 보는 안목에 새삼 감탄한다. 나는 그에게 “이름을 잘 지었네요. 이 세상(世)을 바로잡는(直) 일을 할 사람이네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서울올림픽이란 ‘착한 바이러스’를 만들어 세상에 퍼뜨렸으니, 작명(作名)은 기도(祈禱)란 게 나의 평소 소신이다.
박세직 조직위원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군 지휘관일 때 한 말 “지시는 5%, 확인이 95%다”를 실천한 사람이다. 그는 서울올림픽 개막 하루 전인 1988년 9월 16일 늦은 밤 개·폐회식 상임위원들과 함께 주경기장 시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느라 바빴다. 성화 점화(點火)를 위해 땅에서 솟아오르는 승강기의 안전 상태, 개회식 때 사마란치 IOC 위원장과 함께 쓰게 될 회전연단의 회전속도와 귀빈실 텔레비전을 직접 점검했다.
놀랍게도 이들 두 곳에서 결함을 발견했다. 회전연단이 2분 동안에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데 2분30초 걸렸고, 귀빈실 TV 수상기에선 영상만 나올 뿐 음향이 들리지 않았다. 부랴부랴 이를 시정하고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그는 2009년 여름 급성 폐렴으로 76세에 작고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입원하기 직전이었다. 재향군인회장이던 그는 일부 탈북자들이 주장하는 광주사태 북한군 개입설에 대하여 나에게 물었다. 기침을 자꾸 했는데 그런 몸으로 계단 오르기를 한다고 자랑했다.
둘도 없는 홍보 기회
서울올림픽은 취재기자 수와 텔레비전 방영 기간을 기준으로 한다면 세계 언론사상 최대 규모의 보도 행사였다. 선수보다 더 많은 1만5740명의 기자들이 서울올림픽을 취재하였고, 85개국의 160개 방송사가 텔레비전으로 중계한 시간은 로스앤젤레스올림픽의 3배가 넘는 9200시간이었다. 한국이 이런 짧은 시간에 이렇게 집중적으로 세계인들 앞에 노출된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이야말로 둘도 없는 국가 홍보의 기회였다.
박세직은 86아시아경기대회 두 달 전에 미리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기획단(13명)을 구성, 아시아경기대회의 개·폐회식을 관찰하여 아이디어를 얻도록 했다. 이렇게 일찍 개·폐회식 준비에 착수했던 것은 개·폐회식, 그중에서도 개회식이야말로 올림픽과 국가 홍보의 성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행사임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주최국이 자기 나라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개·폐회식 행사 때뿐인 것이다.
서울올림픽에서는 1030게임이 펼쳐졌다. 경기의 경우, 한두 경기의 운영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경기로써 충분히 실점(失點)을 만회할 수가 있다. 하지만 개·폐회식은 다르다. 한 번뿐이어서 실패하면 회복할 방법이 없다. 개·폐회식에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최다(最多)의 출연 인력과 관중이 등장한다. 그만큼 실수나 사고의 가능성도 많은 것이다. -계속-












박세직 – 박희도,박준병 장군과 함께 쓰리 박의 한 분. 박정희,박태준,전두환,노태우…그러고 보면 이 나라를 최빈국에서 세계적인 나라로 설 수 있게 이끌어준 지도자들이 모두 장군 출신 아닌가.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인 나는 장군 출신 대통령이 다시 나와주기를 학수고대 하는 것이다. 역시 우리나라는 군인 출신이 다스려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