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파리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올림픽을 위해 태어난 사람’ 朴世直 조직위원장을 추억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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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그룹 코리아나가 부른 서울올림픽 주제곡 ‘손에 손잡고’는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됐다.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주제가 

 

잔치가 잘되려면 소문이 나야 한다. 잔치 소문을 내는 데는 노래만 한 것이 없다. 특히 올림픽에서 노래가 중요한 것은 개막 전의 홍보, 대회 기간 중의 분위기 조성, 대회 후의 추억을 위해서이다. 노래를 잘 부르는 박세직은, 좋은 영화 주제가는 영화 자체보다도 더 유명해지듯 좋은 올림픽 주제가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된다고 생각했다. 1986년 봄에 조직위원장이 되고 나서 올림픽 주제가의 추진 상황을 점검해보았더니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86아시아경기대회가 주제가 없이 치러져 좀 메마른 느낌을 주었기에 서울올림픽에 어울리는 세계적인 히트송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 국내 작곡가에게 너무 의존하다가는 돈은 돈대로 들고, 유행에는 실패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했다.

1987년 3월에는 조직위에 이봉조, 김강섭, 김희갑, 이백천, 길옥윤, 최창권씨를 초청했다. 먼저 한국을 포함한 세계를 상대로 주제가를 공모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한국인 음악가도 물론 참여할 수 있고, 같은 조건이라면 한국인 작사, 작곡가의 노래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이 자리에서는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나, 개·폐회식 상임전문위원회에서는 거센 반대가 있었다. 외국인이 작사, 작곡한 영어 노래가 나오면 올림픽 개최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고 한국 음악인들을 소외시켰다는 비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걱정이 많았다.

그는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서울올림픽은 한국인만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인의 축제다. 축제에서는 손님 위주로 생각해야 한다. 손님이 즐겨 듣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적 레코드 회사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세 회사가 참여 의사를 밝혔다. 당시 서독에 본부를 둔 세계 최대의 레코드 판매 다국적 회사인 폴리그램 레코드, 미국의 광고대행사인 B/M사, 일본의 덴쓰(電通) 가운데서 폴리그램을 택했다. 한국의 보컬그룹 코리아나가 이 회사에 전속돼 있었다. 폴리그램에서는 작곡에 LA올림픽 주제가 ‘리치 아웃’의 작곡가 조르조 모로데, 작사가로는 토머스 R 휘트록을 추천하였다.

 

세계적 작곡, 작사가를 모시다 

 

모로데는 영화 <미드나잇 익스프레스> <플래시 댄스> <탑건>의 주제가로 세 차례나 오스카 영화음악상을 받았고, 그래미상 수상 경력도 있는 세계적 작곡가였다. 휘트록은 <탑건>의 주제곡 작사가였다. 조직위는 모로데 작곡, 휘트록 작사에 동의했는데 가사에 한국적인 이미지를 많이 넣도록 요구하였다. 1987년 10월에 데모곡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세 차례에 걸쳐 조직위 개·폐회식 상임위원과 국내 음악가들의 검토 및 수정 요구를 폴리그램사가 수용하도록 하였다. 한국어 가사는 단순한 번역이 아니고 개·폐회식 상임위원인 서울대 김문환 교수가 원문에 충실하면서도 창작성을 살려 깔끔하게 다듬었다. 박 위원장은 폴리그램사의 오시 드레히슬러 사장에게 올림픽 주제곡으로는 템포가 늦은 감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유행이 오래가려면 느린 노래여야 한다”고 했다. 빨리 유행시켜 올림픽 홍보에도 이용하자고 했으나, 유행의 절정기를 올림픽 기간과 일치시키려면 두 달 전에 발매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확실한 흥행 감각을 갖고 있었다.

조직위는 1988년 6월 21일에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내외신 기자를 초청, ‘손에 손잡고’ 발표회를 가졌다. 당시 조용필이 부른 ‘서울 서울 서울’과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유행하고 있었다. ‘손에 손잡고’가 퍼져 나가자 국내 가수들을 개·폐회식에 참석시키라는 청탁이 박 위원장에게 들어왔다. 세 번에 걸친 개·폐회식 시연회에 패티 김, 김연자, 조용필을 참여시켜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토록 했다. 청중들의 반응은 압도적으로 ‘손에 손잡고’ 쪽이었다. 이 노래는 스웨덴, 서독, 일본 등 17개국에서 인기 1위를 기록했고, 30여 개국에서는 10위권 내로 진출하는 등 가장 유명한 올림픽 주제곡이 되었다.

 

동구권의 데모 송이 된 ‘손에 손잡고’ 

 

필자는 1989년 12월에 일시 귀국한 보컬그룹 코리아나를 만난 적이 있다. 코리아나(단장 김영일, 단원 이승규·이용규·이애숙·홍화자)는 1989년 12월 11~13일 동베를린에서 무너진 장벽을 배경으로 ‘손에 손잡고’를 열창한 뒤 국내 공연을 위해 일시 귀국한 터였다. 동구 공산권이 차례로 무너지고 있을 때였다. 그들은 이 노래가 공산권 민주화 현장의 주제가로 변해 있음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베를린 장벽 현장에서의 공연을 위해 마이클 잭슨, 믹 재거 등 세계적인 가수들이 동독에 신청서를 냈으나 코리아나가 동독 국영 텔레비전 방송국에 의해 맨 먼저 초청돼 두 번 공연을 했다.

1989년 12월 12일 오후, 비 내리는 베를린 장벽에서의 공연 때는 수백 명의 동독인이 구경을 하다가 말고 합세, 감동적인 합창을 했고 마침 비둘기 떼가 날아오르더니 머리 위를 한동안 배회하여 극적인 효과를 더해주었다. 분단국가 수도에서 열린 올림픽에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이념을 초월하여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이데올로기 시대의 종말과 개방화 시대의 도래를 극적으로 상징하였다. ‘손에 손잡고’는 그런 분위기를 세계로 확산시켰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1989년 동구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는 결코 견강부회(牽強附會)가 아닌 것이다. 수년 전에 한국에 온 쿠웨이트 북한 대리대사를 만났더니 ‘손에 손잡고’는 올림픽 직후 북한에도 알려져 몰래 불렀다고 했다.

 

휘트니 휴스턴이 부른 또 다른 주제가 

 

여기서 필자가 최근에 발굴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서울올림픽 주제가가 하나 더 있다는 사실이다. 목소리만으로 치면 역대 최고로 꼽히는 불멸의 가수 휘트니 휴스턴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 즈음하여 부른 ‘원 모멘트 인 타임(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는 서울올림픽 주제가로 알려져 있다. 서울올림픽 중계회사 NBC가 이 노래를 주제가로 틀었고 빌보드 차트 5위까지 올랐다. 4분44초. 휴스턴이 전성기에 부른 노래답게 가사와 리듬은 힘이 넘치고 성스럽기까지 하다. 구글을 검색하면 역대 올림픽 주제가 랭킹이 여기저기 나오는데 부동의 1위는 One Moment in Time이고 3등은 Hand in Hand이다.

One Moment in Time은 미국에서 대히트하였고 유튜브로 볼 수 있다. 이 사실은 한국에선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말년에 불우했던 휴스턴이기에 이 씩씩한 노래를 들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One Moment in Time은 앨버트 L. 해먼드와 존 베티스가 작사, 작곡했다. 1991년 슈퍼볼 게임 때 휘트니 휴스턴은 미국 국가를 불렀다. 많은 유명 가수가 국가를 불렀지만 휴스턴의 이 열창을 최고로 꼽는다. 그 이후로 흑인들도 미국 국가를 따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92년 휴스턴은 케빈 코스트너와 함께 <보디가드>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해 두 번째로 돈을 많이 번 작품이었고 휴스턴이 부른 주제가 ‘I will always love you’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이런 전성기 때 휴스턴이 선물한 서울올림픽 주제가 ‘One Moment in Time’을 정작 한국인들이 너무 소홀히 한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침마다 이 노래를 틀어놓는데 좋은 기를 받는 느낌이다. 이 노래의 가사는 최고를 지향하여 나아가다가 넘어지고 일어서는 투지를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쉬운 영어 문장이라 시(詩)처럼 외울 수도 있다. 

이 노래는 불가능에 도전하여 결국 성공하고만 한국인들, 특히 올림픽 주최 세력의 분투를 절정의 목소리로 표현한 것 같다. 노래의 클라이맥스는 마지막이다.

 

Give me one moment in time/ When I’m racing with destiny

나에게 한순간의 시간만 줘/ 내가 운명과 경주할 때를

Then in that one moment of time/ I will be/ I will be

그러다가 그 한순간에/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이룰 것이다

I will be free/ I will be/ I will be free

나는 자유다/ 나는 이룰 것이다/ 나는 자유다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 

 

군 장교단은 속성상 이공계(理工系)로 분류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무기와 인력을 가장 능률적으로 다뤄야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승리의 비결은 속도이니 이공계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박세직 위원장의 지도력은 그런 군사문화의 원리를 깔고 문민문화의 창의성을 보탠 것이다. 그는 조직위를 이끌면서 공식을 즐겨 만들었다. 개념보다 더 구체성이 있는 것이 공식이고 이는 조직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요령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서울올림픽 성공방정식’은 S.O.(Seoul Olympic)=(ACTS)5X(P+F)² S/N였다. (ACTS)5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꼭 해야 할 20가지의 업무 요소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5A는 공항 영접(Airport Reception), 등록 운영(Accreditation), 숙박(Accomodation), 문화행사(Art Programs), 수익관리(Accounting).

5C는 국제회의(Conferences), 식전행사(Ceremony and Protocol), 경기 운영(Competition), 언어 지원(Communication), 보도 지원(Coverage Media).

5T는 성화 봉송(Torch Relay), 수송 관리(Transportation and Traffic), 통신대책(Telecommunication), 기술 지원(Technology), 관광 지원(Tourism).

5S는 안전대책(Security), 관객관리(Seating), 소년캠프(Scouts), 봉사활동(Service), 학술회의(Scholastics)였다.

(P+F)²은 서울올림픽의 소프트웨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 즉 인력(Person)과 계획(Plan)을 2P로 표시했고, 하드웨어에 해당하는 시설 및 환경(Facility)과 자금(Fund)을 2F로 표시했다.

분단국가인 한국에서는 여기에 남북 관계의 긴장도가 가산된다. 그것을 S/N으로 표시하였다. S는 남한(South Korea)의 안정(Stability)이며 N은 북한(North Korea)의 부정적 영향력(Negative)을 가리킨다. N, 즉 북한의 위협이 남한의 안정 S를 압도하면 분모가 커져 성공 확률은 떨어지게 된다.

 

“실패한다면”이란 악몽 

 

그는 이 방정식과 함께 조직위 운영방침도 EQUIPT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E는 Expertise(전문성), 즉 직무정통(職務精通)을 뜻하며 Q는 Quest(for knowledge &;; ideas)로서 중지결집(衆智結集), U는 Unity(단결)로서, 겸언화합(謙言和合)을 의미하였다. IP는 ‘Integrity and Implementation of Plans’의 약자로서, 공명역행(公明力行)한다는 것을 뜻했다. 계획은 공정하고 현명하게 채택하되 일단 채택된 계획은 반드시 추진해나간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T는 시간관리(時間管理·Time control)를 가리켰다. 아무리 다른 노력이 만족스러워도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쓸모가 없다.

박세직은 또 서울올림픽의 5대 목표를 PHASE란 단어로 기호화하였다. 최다의 참가(Participation), 최상의 화합(Harmony), 최고의 성과(Achievement), 최적의 안전 및 봉사(Security and Service), 최대의 흑자(Economy)에서 따온 말이었다.

이 5대 목표는 모두 최(最)자가 5개나 붙은 것이었다. 그는 서울올림픽 조직위를 맡으면서 그 목표를 “잘된 올림픽 정도가 아니라 근대 올림픽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개발연대의 군인 출신 경영자들은 목표를 터무니없게 높게 잡아놓고는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으로 밀어붙여 예상외의 성공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수출 100억 달러’ ‘중화학공업 건설’ ‘서울올림픽 개최 신청’ 같은 게 불가능에 도전한 사례일 것이다. 이런 군인 출신들이 이병철·정주영 같은 불세출의 기업인들을 뒷받침했고 이들이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경쟁하니 현대-기아차 그룹은 세계 제3위의 자동차 회사가 되고 삼성전자는 매출액 기준으로 세계 3~4위의 제조업체가 된 것이다. 산업화가 가장 늦었던 나라가! 

박세직 위원장은 “그때는 ‘만약 올림픽이 실패한다면…’ 하는 걱정이 문득문득 악몽처럼 나를 괴롭히기도 하였다”고 했다. 그런 망상을 잊으려고 더욱 정신없이 일했다는 것이다. 성공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지정학적 조건에서 조직위가 사상 최고란 목표를 정한 것을 그는 ‘대역전의 발상’이라고 표현했다. “서울올림픽이 실패한다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영원히 올림픽이 개최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감에서 나온 오기(傲氣)이기도 했다. 서울올림픽은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몸부림치는 수십 억 개도국 사람들의 꿈이 걸린 행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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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조각공원은 세계 5대 조각공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조각공원 발상 

 

서울올림픽공원의 정문 ‘평화의 문’은 이름이 붙여지기 전까지는 상징 조형물로 불렸다. 높이 24m, 두께 37m, 너비 62m인 ‘평화의 문’은 서울시가 주관하여 만들었는데 박세직 위원장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이 조형물이 원래 계획보다 축소 조정됨으로써 서울올림픽의 장대한 드라마와 역사성을 기념하는 건축물로서는 빈약한 존재가 돼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설계를 맡았던 건축가 김중업씨의 애초 뜻과는 달리 끝내 축소되는 방향으로 결정되자 허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50여만 평이나 되는 올림픽공원 활용 방안을 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예술인은 식물원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한 미국인은 어린이 조각 콘테스트를 해서 입상 작품을 야외에 전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여기서 그는 조각공원의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들이 혼을 불어넣어 만든 예술품 사이로 산책하며 명상한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이런 상상만 했지 그런 꿈을 추진해줄 사람을 찾을 수 없어 이렇다 할 진척이 없었다. 국제적인 친분을 가진 예술인이 없었던 것이다. 국제화 시대에 국제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6년 10월에 스위스 로잔에서 IOC 총회가 열렸다. 박세직 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조각공원 조성 계획을 보고하고 승인을 받았다. 그는 만찬장에서 스포츠 미술계의 대가(大家)인 스위스 화가 한스 에르니 옹과 같은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에게 조각공원 계획을 설명했더니 한국에 한 번 가서 직접 부지를 보고 싶다고 했다. 즉석에서 방한 초청을 했다. 오는 길에 일본 하코네의 조각공원을 둘러보고 오도록 부탁했다.

 

기막힌 발상 

 

에르니 옹 부부는 칠순이 훨씬 넘었는데 건강도 의욕도 왕성하였다. 이들 부부는 한국에 와서 단숨에 경주 관광을 마치고 한국 문화에 대한 감을 잡은 뒤 조각공원의 부지가 될 올림픽공원을 구경하고는 “현대와 고대가 같이 숨 쉬는 장소에 인류 화합의 축제인 올림픽을 기념하여 세계적인 조각품을 모아 설치하는 것은 금세기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고 격려했다. 문제는 실천이었다. 1986년 12월 ROTC 장교 출신이며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조각가 한창조씨와 문장철씨가 일시 귀국했다가 박 위원장에게 인사차 들렀다. 박세직은, 지나가는 말로 조각공원 추진의 애로사항을 이야기하였다. 그 이듬해 1월 말, 이 두 사람은 상세한 추진 계획서를 만들어 찾아왔다.

이들이 뜻밖에도 지나간 이야기를 잊지 않고 준비를 해준 게 고마웠고, 그들의 추진 계획이 비로소 현실성 있는 내용으로 판단돼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계획은 다섯 예술가를 동원, 세계의 유명 조각가들을 서울로 초빙, 조각공원 현장에서 예술품을 즉석 제작, 전시한 뒤 기증토록 하자는 요지였다.

한씨가 추천한 다섯 명은 프랑스의 미술평론가이자 문화부 고문 제라르 슈리게라, 피에르 레스타니(서유럽 및 아프리카 담당), 미국의 미술평론가 토머스 메서(미주지역 담당), 일본의 미술평론가 나카하라 유스케(아시아 담당), 유고 태생의 미술평론가 안테 리보타(동유럽 담당) 씨였다. 이 다섯 사람은 세계적인 전시회를 조직해본 경험이 있고 조각가들과 친면이 넓어 현대의 거장(巨匠)들로부터 협조를 받을 수 있었다. 조직위는 이들을 국제 운영위원으로 위촉하는 동시에 18명의 저명한 국내 예술가 및 교수를 국내 운영위원으로 위촉하여 세계 현대미술제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90억원의 성금 

 

조각공원 조성은 예산에 반영돼 있지 않았다. 박 위원장이 모금에 나서야 했다. 평소 예술 활동과 관계가 있는 여섯 기업의 총수를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한 기업에서 15억원씩 모두 90억원의 예산이 확보되었다. 삼성(회장 이건희), 현대(회장 정주영), 럭키금성(회장 구자경), 대우(회장 김우중), 선경(회장 최종현), 쌍용(회장 김석원)이 성금을 낸 기업체였다. 이와는 별도로 포항제철(회장 박태준)은 조각공원 내 음악분수 제작을 위해 15억원을 냈다. 세계 조각계의 거장들도 자신들의 작품이 올림픽 정신을 구현하는 기념 공간에 영원히 전시된다는 명분에 공감, 금전적 이해타산을 떠나 적극 호응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을 비롯하여 세계 야외조각 초대전, 국제 현대회화전, 그리고 한국 현대미술전을 아우른 세계 현대미술제가 추진되었다.

1987년 7월 1일부터 50일간 올림픽공원에서 치러진 제1차 국제 야외조각 심포지엄에는 한국 조각가 2명, 동구권 조각가 8명을 포함한 15개국의 조각가 15명이 참가하였는데, 현장에서 작품을 제작, 기증하였다. 1988년 3월 11일에는 17개국 19명이 참가한 제2차 야외조각 심포지엄이 열렸고, 그해 9월에는 국제 야외조각 초대전을 가졌다. 66개국 155명의 조각가들이 155점을 출품하여 그대로 조각공원에 기증하였다.

20세기 후반의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화합과 전진이란 정신으로 제작한 200여 점의 국내외 예술품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여기에 들어간 경비는 조각품 1점당 평균 4000만원이었다. 여비, 숙식비, 소재 값이 대부분이었다. 조각가들은 순전히 인류의 유산을 만든다는 열정으로 자원봉사를 한 셈이었다. 국제 현대회화전에는 62개국에서 156점이 출품되었는데 그중 62점이 국립현대미술관(과천)에 기증되었다.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몇 년 전 좌파 매체 오마이 뉴스에 <뉴욕 센트럴 파크 부럽지 않은 ‘서울의 이곳’>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부제(副題)는 <봄 내음 가득한 올림픽공원과 세계 5대 조각공원인 올림픽 조각공원>이다. 고인(故人)이 된 박세직 위원장에 대한 언급은 없이 시민들의 교양 있는 휴식처가 된 이곳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 찬 글이었다. 이 공원은 전적으로 박세직의 꿈과 모금과 지휘하에 이뤄진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민주화 열병으로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등 온 나라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인 1986~88년 한구석에선 세상을 멀리, 넓게, 그리고 따뜻하게 보는 이들이 “제2의 베를린올림픽”이란 저주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고 있었고 그 결과물을 우리는 공짜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새삼 느낀 것은 올림픽이란 이름의 위대한 힘이었다”고 했다. 조직위가 약 7000억원의 사업 수익을 올린 것이나, 약 5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동원한 것, 또는 세계 유수의 조각가와 예술가들을 서울로 오게 한 것, 세계 석학들이 참가한 국제 학술대회를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개최한 것, 그리고 160개국의 팀이 이념의 벽을 넘어서 서울로 모여든 것들은 모두 올림픽이 내건 세계 평화라는 명분 덕분이었다.

그는 “인류가 지향하는 최고 선(善)의 상징인 올림픽의 성공은 세계 사람들의 양심이 힘차게 약동하고 있다는 증표이기도 했다”고 썼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김운용, 이어령, 정주영, 박종규, 이연택, 김종하, 사마란치, 레이건, 고르바초프 등 유명인사들과 수많은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한국인, 세계인이 순정을 바쳐 만든 것이 서울올림픽이었고 우리는 그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고마워하는 사람들만이 그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1988년 10월 2일 제24회 서울올림픽 폐회식도 무사히 마치고 박세직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셨기에 서울올림픽이 성공했음을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말 그대로 하셨던 것이다. 한국인들의 정성이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였던 것이다.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져들면서 나는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큰소리칠 것이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서울올림픽이 왜 성공했느냐”에 대해 딱 한마디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선하게 일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착한 면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여 세계사적 변화를 가져오는 데는 먼저 한국인의 순정을 모아야 했다. 전두환, 노태우, 박세직, 사마란치 네 분이 그 일을 해냈다. 이들이 진정한 올림픽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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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접견하는 전두환 대통령. 전 대통령은 서울올림픽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잊을 수 없는 恩人 사마란치 IOC 위원장 

 

박세직 위원장은 올림픽 회고록에서 세 사람에게 특히 감사를 표했다.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사마란치 위원장이었다. “이 세 분은 나와 조직위의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따끔한 충고와 따뜻한 격려로써, 때로는 믿음직한 엄호와 자상한 가르침으로써 우리를 인도해주었다”고 했다. 세 사람은 올림픽에 관한 한 서로 마음이 통했고, 신뢰 관계를 구축하여 조직위가 마음 턱 놓고 올림픽 준비 업무에 주력할 수 있도록 뒷감당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에 대한 박세직의 인물평은 흥미롭다. 사마란치는 스페인 사람(외교관 관료 역임)이지만 독일인과 같은 정확한 관리자의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회의를 아주 요령 있게 진행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결론을 유도하고, 그것도 최단시간 안에 그렇게 했다. ‘네’ ‘아니오’가 분명하였다. 기자회견 때 한 번도 그가 코너로 몰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어느 기자회견에서 “서울올림픽 경기 시간을 미국 텔레비전 방송 시간에 맞도록 무리하게 조정한 데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그는 “IOC의 주된 수입원은 텔레비전 중계료이며, 그것은 올림픽 운동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이즈음 필자가 만난 한국의 공직자나 정치인 중에서 박세직 위원장과 김대중 총재처럼 메모를 많이 하는 이는 없었다. 그런 박 위원장도 “사마란치 위원장같이 메모에 철저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1일용, 월간용, 연간용 등 세 가지 메모 수첩을 갖고 다니면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록하는 습관을 지녔다. 개·폐회식의 한국어 연설을 위해 1년 전부터 녹음을 하여 연습하기도 했다.

박세직은 서울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사마란치 위원장과 통화했는데 감탄한 것은 한국의 정치·사회 상황에 대한 정보가 빠르고 정확하다는 점이었다. 한국에 대한 정세보고를 올리는 전문가를 가까이 두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대 IOC 위원장은 거의가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실무는 사무총장에게 맡겼지만 사마란치는 상근하면서 IOC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는 올림픽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많이 안다는 실무지식에서 저절로 우러나온 것이었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 방한

 

그는 휴일도, 취미도 없는 것 같았다. 올림픽 개최 때까지 한국에 열두 번이나 왔는데 관광은 단 하루 제주도에 다녀온 것뿐이었다. 만찬 연설이 짧기로 유명한 그는 파티도 일찍 끝내고, 담배, 술도 좋아하지 않았다. 침실에 각종 운동기구를 비치, 매일 아침 6시만 되면 가벼운 운동을 했다. 독실한 천주교도로서 한국에 머물 때조차 어떤 경우에도 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사마란치는 올림픽 시작 며칠 전부터 매일 아침 8시부터 정확히 30분간 IOC와 조직위 간의 합동 간부회의를 주재했다. 이 회의는 국회 청문회를 연상케 했다. 올림픽 준비의 문제점이 제기될 때마다 이를 받아 넘겨야 할 박 위원장은 즉석 답변을 위하여 조직위 간부들과 함께 꽤나 긴장해야 했던 회의였다. 사마란치는 자신의 착상(着想)인 이 회의의 성과를 높이 평가했다. 그는 약 30년간 IOC 위원장을 지냈고 2010년 별세했다. 향년 89세.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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