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사 100명 중에 왜 한 사람도 없나”

5·18 진상규명위 조사보고서 분석 <3>

⊙ 5·18 진상규명위도 사람을 겨냥한 기총소사가 아닌 위협사격 수준의 ‘헬기 사격’만 인정,

    이마저도 조종사들 전원이 부인

⊙ 국방부 특조위의 구성과 조사 과정에 근원적 의문점 있어

⊙ 무장헬기 출동이 있었고 사격 명령이 있었으니 사격이 있었을 것이란 난폭한 논리

⊙ 사격 명령 받은 조종사들이 인명 피해를 우려, 이를 거부했는데도 ‘사격했다’고 몰아 

    진짜 ‘광주의 義人들’을 학살범으로 만들었다

⊙ 대통령과 국방장관은 국군 명예회복에 나서고 안보 단체가 앞장서야

⊙ 역사 조작의 가장 큰 피해자는 광주시민들이 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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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빌딩에 대한 새벽 헬기 사격은 불가능 

 

<5·18 단체가 주장하는 헬기 사격에 관한 직접적·객관적 증거란 전일빌딩 탄흔이 유일하다. 헬기 사격 목격자들의 증언은 직접 증거이기는 하나 객관적 증거가 아니고, 군 작전 기록은 객관적 증거라고는 하나 직접적 증거가 아니다. 따라서 전일빌딩 탄흔이 유일한 객관적·직접적 증거다.

조비오 신부의 주장은 5월 21일 금남로 상공의 헬기 사격인 반면 5·18 단체가 주장하는 전일빌딩 탄흔은 5월 27일 재진입 작전 당시 발생한 탄흔이란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설은 2017년 초경에 처음 등장한 주장이었다. 5·18 단체는 처음에는 코브라 헬기의 발칸이라고 주장하다가, 500MD라고 주장하였다가, 전일빌딩 탄흔과 7.62mm 탄흔의 차이가 너무나 확연하자 슬그머니 M16 소총이라고 주장하였고, 소총을 헬기와 연결시켜려다 보니 UH-1H 헬기에 탑승한 승무원이 헬기 출입문을 열고 소총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전두환 회고록 재판 중 변호인 측에서 검사에게 전일빌딩 사격을 구체적으로 특정해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하자 검찰이 뒤늦게 공소장에서 주장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은 소총 사격이라고 밝힌 것이다.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특별한 목격자가 없다. 즉 계엄군이 자정 무렵 작전을 시작하여 새벽 4시 무렵 전일빌딩 점령을 완료하였다. 검사는 계엄군이 4시 무렵 전일빌딩으로 진입할 때 사격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전일빌딩 헬기 사격에 관해서는 탄흔의 존재만이 유일한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전일빌딩 진입을 현장 지휘하였던 당시 중대장이 전두환 회고록 광주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하였다. 중대장은 전일빌딩에 접근할 당시 전일빌딩 상층부에서 지상을 향한 사격을 받고 상층부를 향하여 응사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공수부대가 전일빌딩에 진입한 후 10층 내부 수색을 할 당시 10층 방송실 문이 잠겨 있어서 문밖에서 방 안으로 총구를 바닥으로 하여 위협사격을 한 후 진입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방송실 바닥에 난 탄흔은 그때 전일빌딩을 수색하던 계엄군이 문밖에서 방으로 위협사격을 하였을 당시 발생한 탄흔이라고 주장하였다.

나는 전일빌딩 헬기 사격의 쟁점은 국과수 감정인의 감정 결과를 검증하는 것이 실질적인 진실규명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UH-1H 실사격 검증을 주장하였고, 당시 재판장이던 장동혁 현 국민의힘 의원도 법정에서 자신도 현장검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런데 재판 도중 장동혁 판사가 사직, 김정훈 판사로 교체되었고, 김 판사는 현장검증 신청을 기각하고 1심 판결을 선고하였다.

전일빌딩 탄흔에 대한 헬기 조종사들의 주장은 ① 비행 중인 헬기 안에서 어떤 사격을 하더라도 전일빌딩 방송실 안에서 발견한 밀집한 형태의 탄착이 형성될 수 없다 ② UH-1H의 프로펠러 때문에 헬기 안에서는 소총 사격을 할 수 없다 ③ 전일빌딩 방송실 바닥에서 발견된 100여 개의 탄흔 중 대부분의 탄흔이 창문에 인접한 곳에서 발견되었고, 심지어 창틀에서 10cm 이내의 탄흔도 여러 개 발견되었는데, 창틀 때문에 80~90도의 탄도가 나와야 하는데 헬기에서는 그와 같은 탄도를 만들어낼 수 없다 ④ 전일빌딩 천장에서 30여 개의 탄흔이 발견되었고, 그것도 모두 창문에서 1m 이내에 밀집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상향으로 70~80도 탄도가 나와야 탄흔이 형성될 수 있지만 방송실이 10층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탄도 형성은 불가능하다 ⑤ 전일빌딩에 대한 진입은 4시에 이루어졌고, 그 시간은 심야 시간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조명이나 불빛도 없이 UH-1H가 도심에서 야간 비행을 할 수 없고(그 당시는 야간 비행 장치가 없었고 오로지 육안으로만 비행하였음), 시야가 확보되지 아니한 상황에서 10층 방송실의 좁은 창문 안으로 150발의 소총 사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 등이었다.

그 때문에 회고록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조종사들은 헬기를 띄워서 한 번만 사격을 해보면 전일빌딩 탄흔이 얼마나 거짓인지 금방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끝내 헬기 실사격 검증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주교 변호사는 이렇게 끝냈다.

 

<헬기 사격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구체적 사실을 주장하여야 한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느 장소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종의 헬기에서 어떤 종류의 사격을 하였다고 주장하여야 한다. 그래야 그것에 대하여 헬기 사격이 없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와 같은 구체적 사실은 밝히지 아니한 채 여러 가지 의심할 정황을 근거로 막연히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결정한다는 것은 반론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에 부당한 주장인 것이다. 결국 5·18 진상규명위 역시 헬기 사격에 관한 객관적, 직접적 증거는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고, 1995년 검찰 수사에서 밝혀진 사실 이외에 새로운 사실도 밝혀낸 것이 없다.>

 

왜 헬기 사격 주장자들이 특조위 조사관이 되었나? 

 

2020년 9월 21일 전두환 회고록 재판정에서 있었던 최해필씨의 증언은 문서상의 논란과 다른 박진감이 있다. 그가 조종사 출신의 육군 항공작전 사령관 출신이고 국방부 특조위 위원으로서 유일하게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다는 소수의견을 낸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문(변호인) 국방부 특조위 민간인 조사관의 이력이 백서에 나와 있는데 거기를 보면 안길정, 송선태, 정문영, 최용주 이상 4명의 위원은 이 사건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고 있는 5·18기념재단의 전·현직 연구원 또는 상임이사이고, 나머지 김희송 교수와 김정한 교수는 평소 개인적 논문을 통하여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여 오던 사람인데, 증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나요.

답  안종철 박사는 5·18 기록을 유네스코에 등재했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고, 김희송 교수 등은 광주에서 KTX를 타고 오가고 한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문  그분들이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했다는 사실은 몰랐나요.

답  그런 내용의 깊이는 몰랐습니다.

문  평소에 헬기 사격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조사를 하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려워 보이는데, 왜 현역 군인과 현역 공무원으로 구성된 실무조사단에 굳이 민간인, 그것도 헬기 사격설을 평소에 주장하는 사람을 6명이나 위촉한 이유가 무엇인가요.

답  저는 그 이유는 잘 모르고 제가 들어갔을 때 공군 준장 출신 한 사람과 저만 공군과 육군 대표로 국방부에서 위촉되었고, 제가 나머지 사람들의 면면을 자세히 알 수 없고 그냥 느낌에 특정 사안을 조사한다면 거기에 관련이 없는 객관적인 사람들로 구성하는 것이 나중에라도 객관성을 입증하는 데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이런 생각은 했습니다.

문  특조위의 궁극적 임무는 지시나 명령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지시나 명령이 시행되어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는지 여부를 밝히는 것이지요.

답  그렇습니다.

문  지시나 명령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의심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될 수는 있지만, 명령 자체가 사격은 아니지요.

답  실제로 계엄 지휘부의 황○○, 김○○ 이러한 장군들이 위력시위만 할 것이 아니라, 사격을 해서라도 시위진압을 빨리 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그때 출동했던 이 중령, 김 중령, 차 소령은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우리가 구두 명령으로는 움직일 수가 없다, 꼭 그렇다면 서류로 된 명령을 달라고까지 하면서 사격 지시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거부했다는 진술을 받았고요.

문  특조위는 그 지시와 명령에 따라서 실제로 헬기 사격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조사하였나요.

답  조종사들에게서 진술을 다 받았습니다.

문  그러면 그 지시나 명령에 따라서 헬기 사격을 했다고 나왔나요, 안 했다고 나왔나요.

답  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고 들었습니다.

 

사격 명령을 거부한 조종사들 

 

문  증인이 (헬기 기총소사설에) 동의하지 못한 이유는, 헬기 사격 명령을 받았다는 사람이 사격을 실시할 수 없다고 진술한 명확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지요.

답  500MD나 코브라의 사격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지에 대해서 조종사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적을 향해서 쏘라는 총을 우리 국민을 향해서 쏘라고 지시한 사람들의 지시를, 속으로 아마 저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것인가, 이런 생각으로 못 하겠다고 말은 못 하고 서면으로 된 명령을 달라고 요구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면으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격하라는 지시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문서로 달라, 당신이 확실하게 책임질 수 있냐는 뜻으로, 거부하는 뜻으로 문서로 된 명령을 요구한 것이지, 문서로 된 명령을 주면 쏘겠다는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문  특조위는 세 번째 결론으로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시인한 항공부대 관계자의 진술이 존재한다”라고 판단하였는데, 무장헬기가 출동했다는 것은 1995년 서울지검에서 조사할 당시부터 대부분의 헬기 조종사들이 무장 출동 사실을 다 시인하였지요.

답  예, 그렇습니다.

문  특조위 조사에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 아니지요.

답  예,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닙니다.

문  특조위에서는 무장헬기가 광주에 출동하였다고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시인했다고 하였는데, 이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기로 사격했다는 사실도 진술했나요.

답  아닙니다. 사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무장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문  항공부대 관계자 5명이 무장 사실은 인정했지만 헬기 사격을 했다고 진술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답  그렇습니다.

 

“조종사 100명 중에 왜 한 사람도 없나” 

 

문  특조위는 마지막 여섯 번째 결론으로 “특별조사위원회는 조사 결과 AH-1J 코브라에 의한 헬기 사격 가능성도 높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라고 밝혔는데, 헬기 사격 조사팀이 서면조사, 면담조사, 현장조사, 국민제보를 받아서 코브라 헬기가 사격했다는 어떤 증거를 발견했나요.

답  없습니다.

문  증인은 실제로 헬기 사격이 실행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지요.

답  예.

문  증인이 그렇게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무엇인가요.

답  제가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목격자들이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헬기가 도시 상공으로 낮게 비행을 하면 로터가 다운롯이라고 해서 하강풍과 반사 바람을 맞아서 우리가 호각을 불 때 바람만 불어도 소리가 나는 것처럼 다다다다 하면서 굉장히 시끄러운 소리가 납니다. UH 같은 경우는 거의 총소리처럼 들리고, 충돌방지등인 라이트가 붉은색으로 휙휙 돌아가는데 모터가 원형으로 돌아가서 회전 디스크라고 하고 이것이 두 개가 고속으로 돌아가면 한 개의 원판이 돼서 빛이 반사되어 아주 넓은 지역에 붉은 섬광이 비칩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 일반 목격자 입장에서는 헬기가 아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지나가고 붉은빛이, 섬광이 막 비치면 총을 쏘는 것으로 생각하기 딱 좋습니다.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서 오락가락하며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런 목격자의 헬기 사격을 봤다고 하는 진술을 과연 믿을 수가 있는지, 그리고 만약 실제로 사격을 했다면 한 발씩 정확하게 사격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면서 드르륵 하고 쐈을 것인데 그랬다면 사람이 한 발만 맞을 수가 없습니다. 60발 이상 맞을 수밖에 없고, 공중에서 기관총을 쏘면 길바닥에도 탄피가 비처럼 수두룩 떨어집니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분명히 탄피를 주웠을 것이고, 한 발 맞아서 병원으로 후송했다는 말은 있을 수 없고 그 정도의 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헬기에 의해 여학생이 다쳐서 기독병원으로 후송을 했다는 진술은 적절하지 않고, 그다음에 당시 내려온 헬기만 해도 수십 대인데 그렇다면 조종사만 해도 약 100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무장사, 정비사, 그 많은 사람들 중에, 40년이나 지났는데 그중에 단 1명이라도 무장했다, 사격했다고 진술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그리고 육군항공장교들은 지휘관, 계급에 복종하지 않고 옳지 않은 일에 대해서는 절대 응하지 않습니다.

장군이 뒤에 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안전하지 않은 비행은, 장군이 이쪽으로 가라고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 헬기에 탄 이상 뒤에 누가 있더라도 본인 자신이 지휘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우리 시민을 향해서 총을 쏘면 끔찍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떻게 총을 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조종사들이 한결같이 말하는 부분입니다.

특전사 병력이 UH-1H를 타고 화물실 문에 걸터앉아 M16으로 (전일빌딩을) 쐈을 수도 있다고 하는데,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수십 발의 탄알이 밀집되도록 사격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건물 안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M16으로 연속으로 쏘면 가능할까… 특전사 병력이 헬기에 걸터앉아서 M16으로 쐈기 때문에 탄흔 중 일부는 M16 실탄도 있고 M60 실탄일 가능성도 있다는 국과수 발표가 있어요. 그런데 각도 측면에서 보면 건물 상공에서 그렇게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만약 사격한다면 그 건물 안에도 누군가가 위협 세력이 있다는 것인데, 어느 간 큰 조종사가 공중에서 제자리 비행을 하면서 나를 쏘라고 하면서 쏠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쏜 실탄이 어떻게 그렇게 밀집되어 있을 수 있는지, 바닥에 있을 수 있는지, 그래서 제가 유사한 상황에서 한 번 해보자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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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국방부 특조위 위원 명단.

 

특조위를 조사해야! 

 

2017년 이후 광주 헬기 기총소사설은 조사와 재판을 거치면서 ‘양민 학살’로 커졌다가 ‘헬기 사격설’로 격하되고 이마저 사격 조종사가 특정되지 않아 증명되지 않은 상태로 마무리되었다. 2018년 10월호 《월간조선》 기사는 이런 사태를 예측이나 한 듯 이렇게 마무리했다.


<국방부 5·18 특조위가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 것을 재판에 비유하자면 살인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한 것과 같다. 특조위 발표대로 헬기 사격이 있었다면 조종사들은 ‘양민 학살범’이 된다. 사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려면 완벽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특조위 조사결과보고서에는 완벽한 증거는커녕 비약과 추리만 있다. 어떻게 이런 조사를 근거로 조종사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었는가? 더 섬뜩한 것은 이런 부실한 조사가 아무런 반론도 없이 국가적 사실로 인정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중대한 사안에 객관적 증거 없이 ‘야만적 사격’이 있었다는 발표를 하는 것을 묵인한다면 이는 국가 기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용인하는 것이 된다. 적어도 국방부 장관은 이 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선언, 대한민국 국군의 명예를 지키고 현대사의 왜곡을 막았어야 했다.

이 조사 결과가 번복되지 않고 ‘국가가 공인한 사실’로 굳어지면 조종사들은 나치 유대인 학살범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있고, 국군과 국가도 전(全) 세계 앞에서 학살 집단으로 취급될 것이고,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감옥에 갈 수도 있다. 특조위는 이런 끔찍한 연쇄반응을 생각하고 이런 무서운 결론을 내렸는가? 언젠가는 특조위 조사위원들이 조사를 받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국방부 특조위 위원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5·18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위원 중 최해필 전 항공작전사령관만이 소수의견을 냈다.

 

국군통수권자의 책임! 

 

이제 당시 국방부 장관과 특조위를 조사하고 특조위 보고서를 취소해야 할 긴급한 이유가 생겼다. 국제적으로 대한민국 국군이 나치 군대나 일본 제국 군대 같은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국군통수권자인 윤석열 대통령,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그리고 국방부 장관이 회의를 하고 자구책을 내어놓아야 한다. 성우회, 재향군인회, 사관학교 동창회, 호국안보 단체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광주사태에 북한군 600명이 개입했다는 황당한 자해적 주장을 했던 세력은 빠져야 한다. 누구보다도 헬기 기총소사가 없었음을 잘 알고 있을 광주시민들이 국군의 명예회복에 앞장서야 한다. 그리고 사격 명령을 받고도 거부한 조종사들을 ‘광주의 의인(義人)’으로 기려야 할 것이다.

최근 국제적 호평을 받던 방글라데시의 수상이 반정부 시위대에 관저가 포위될 지경이 되자 탈출, 인도로 갔다. 수상의 아버지는 방글라데시 독립을 이끌었던 건국의 영웅이었다. 수상은 독립투사 가족들에게 공무원 자리를 우선적으로 배정하는 고용특혜를 추진하다가 대학생들의 분노를 자극, 정권을 잃었다.

일부 광주사람들이 피해 보상을 넘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하는 특권까지 주장한다면 국민적 저항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불공정에 참지 못하는 젊은 세대가 커가고 있다. 국방부 특조위의 ‘헬기 기총소사에 의한 양민 학살’ 결론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이들은 광주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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