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 붐 세대가 변혁의 動力源

해방둥이 기자의 年代記 / 40대가 해냈다! <2>
오늘의 풍요와 고민을 만든 1980년대의 대전환은 세계에서 IQ가 가장 높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배우고 가장 오랜 시간 일한 자연스러운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역사는 교실에서 이뤄졌다. 해방된 직후부터 불렸던 ‘졸업식 노래’대로 우리는 ‘부지런히 더 배우고 얼른 자라서 우리나라 새 일꾼’이 되었던 것이다.

 

베이비 붐 세대가 변혁의 動力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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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입시가 폐지된 1969년 은행알 추첨기(속칭 뺑뺑이)를 돌려 

중학교를 배정받는 모습. 1950년대 중반 태어난 이들 세대가 

베이비 붐 세대를 형성했다. 사진=조선DB

 

윤석열(尹錫悅) 대통령과 이재명(李在明)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980년대를 20대로 살았고 그 인격에 시대의 그림자가 보인다. 80년대의 사회적 변혁은 1955~1961년 사이에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당시의 2030, 그 일부는 지금 586 세대가 되어 있다)가 동력원(動力源)이었다. 나는 1984년 7월호 《월간조선》에 이 세대의 역할을 분석한 기사를 썼다.

  

〈6·25 전란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 속에서도 생명들은 솟아났다. 총칼이 솎아낸 수백만 명의 목숨들을 서둘러 보충하려는 듯 주렁주렁 태어난 그들에게 인구학자들은 ‘다출산(多出産) 세대’, 또는 ‘베이비 붐 세대’라는 학명을 붙였다. 역사상 출산율이 가장 높았던 1955~1961년 사이에 난 사람들이다. 만 23~29세의 청년들이다. 1984년 1월 1일 현재 567만 명, 전 국민의 14%, 전체 유권자의 24%를 차지하는 막강 파워 그룹이다.〉

  

나는 베이비 붐 세대가 그 이정표에서 한국 사회에 숱한 경쟁, 팽창, 홍수, 적체 현상을 일으켰는데 물질적 풍요 속에서 주체 못 할 잠재력을 키워온 그들이 오늘날 드디어 대폭발의 임계점을 넘어섰다고 진단했다. 체력, 욕구, 정열, 도전심, 문제의식 등 모든 부문에서 절정에 도달한 이 집단은 면학, 취직, 결혼, 출산 등 이동과 활동이 가장 격렬한 생활 단계에 접어들어 우리 사회의 기반을 흔들고 있다는 분석이었다. 머지않아 그들은 대한민국이란 수레를 끌고 달릴 준마가 될 것인데 문제는 수레가 너무 가볍고 고삐는 너무 약하다는 점이라고 했다. 다가오는 선거에서 베이비 붐 세대가 주류인 20대는 전체 유권자의 36%나 되어 거대한 ‘표의 힘’으로 한국의 정치 기상도를 좌우할 ‘태풍의 눈’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토머스 제퍼슨은 “모든 세대는 자신이 속한 세대의 운명에 대한 주권을 갖고 있다”고 했었는데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유권자의 약 60%를 차지한 당시의 2030 세대는 전두환 정권의 정치공학적 선거 전략을 일거에 깨부수고 민주화를 대세로 만드는 주권적 결단을 내렸다.

  

  

1985년 2·12 총선이 分水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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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6·29 선언은 4050 기성세대와 2030 세대의 합작품이었다. 사진=조선DB

 

선거일 25일 전에 급조(急造)된 신한민주당(신민당)은 김영삼 계열이 주도한 이른바 선거 투쟁을 통해 운동 기간에 많은 군중을 동원하고 직선제 개헌을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방학 중이던 대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야당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한 선거구에서 두 명을 뽑는 전국 92개 선거구에서 집권 민정당은 35.2%의 득표율로 87명(전국구 포함 총의석은 148석)이 당선되었다. 서울과 대구에서 한 명씩, 부산에선 3명이 낙선했다. 전두환 정권 공격에 앞장섰던 신민당은 선명투쟁성으로 29.3%의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50석(전국구 포함 67석)을 차지했다. 얌전한 민한당(민주한국당)은 26석(전국구 포함 35석), 국민당 15석(전국구 포함 20석), 기타 6석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이른바 구(舊)정치인들을, 선거를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984년 11월 30일에 풀어주면서 출마의 길을 터주었다. 이렇게 하면 야권이 강경 신민당과 온건 민한당으로 분열되어 민정당이 압승할 것이라고 계산했다. 김영삼·김대중씨가 지원하는 신민당이 민한당에 이어 제3당이 되면 민한당에 흡수됨으로써 강경노선이 힘을 잃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이런 잔재주를 뒤엎어버렸다. 1980년 봄 이후 5년간 눌려왔던 민주화의 열망이 선거 기간 중 폭발한 것이다. 이 민주화의 핵심은 대통령 직선제였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생애를 건 투쟁을 해온 김대중·김영삼씨가 비록 정치 활동은 금지당하고 있었으나 선거 투쟁의 사령탑이었다. 김영삼씨는 1983년 23일간의 단식투쟁으로 야권을 결속시켰고, 김대중씨는 투표 직전 귀국을 강행했다. 두 김(金)씨가 5년 만에 한국의 정치판으로 복귀한 것이다.

  

1985년 2·12 총선 이변(異變)의 진원지였던 부산의 한 30대 유권자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생처음 유세장에 나갔다. 야당 후보는 정권의 부패, 광주사태, 직선제 쟁취 등 굵직한 주제로 이야기하고, 여당 후보는 어디 어디에 다리 놓겠다는 식의 작은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유세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가 격한 감정을 갖고 있었는데, 선심성 공약은 먹히지 않았다. 야당 후보의 연설을 듣고 있으니 내 가슴도 뜨거워졌다. 그동안 잊어버리려 했던 기억들이 분노로 변해 ‘욱!’ 하고 치받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민정당의 정국(政局) 파트너였던 온건 야당 민한당은 선거 직후 신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100석이 넘는 거대 야당이 등장하여 민주화 투쟁을 이끌게 되었고 그 2년 뒤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진다. 역사의 흐름으로 말한다면 야당 후보가 당선되어야 하는데 김영삼·김대중의 분열로 노태우 후보가 36.6%의 득표율로 당선, 제6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다. 2030의 에너지가 표심으로 폭발한 12대 총선은 한국 현대사가 권위주의 시대에서 민주 시대로 넘어가는 분수령(分水嶺)이었다.

  

  

40대가 해냈다!

  

1980년대의 성공적인 대전환은 2030의 열정과 4050의 경륜이 균형과 통합을 이룬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제기획원이 1985년 3월에 발표한 1984년도 연령계층별 직업 통계에 따르면 약 1440만의 경제 활동 인구 가운데, 장(長)자가 붙어 주로 사람을 부리는 직급인 ‘행정·관리직 종사자’는 20만9000명이었고, 이 중 43.5%가 40대였다. 서울 증권 시장에 상장된 매출액 기준 100대 기업의 임원들 평균 나이는 48세, 그해 초에 새로 뽑힌 매출액 기준 20대 기업의 이사들 가운데 40대가 약 82%였다. 12대 국회의원 276명 가운데 약 30%인 84명이 45~49세 사이였다. 그다음이 50~54세 사이로 82명. 국회의 이 연령 분포는 당시 국가가 50대 초반과 그 측근 참모역을 맡고 있던 40대 후반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했다. 대통령과 수석 비서관들, 민정당 대표위원과 원내 총무의 연령 관계가 그 구체적 사례였다. 근대화의 횃불을 점화한 것은 1910~20년대생의 몇몇 선구자였지만, 그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1960~70년대의 고도성장기를 질주해간 중심 집단은 1980년대에 주도권을 잡은 4050 세대였던 것이다.

  

퀸 엘리자베스호가 세계에서 가장 큰 배라고 배우며 자랐던 그들은 그 세 배나 되는 배를 직접 만들었고, 미군이 던져주는 통조림 깡통에 이마가 터지던 전란 속의 어린이들은 1억 달러짜리 공사쯤은 우습게 보는 어른으로 변해 있었다. 맨해튼의 빌딩숲에서, 중동의 열사(熱沙)에서,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그들은 신들린 듯 일하면서 세계 속의 한국의 변화를 목격했다. 야망의 크기가 이 세대처럼 컸던 적은 역사상 일찍이 없었다. 그러나 물질의 성취를 위해선 정신의 황폐가 따라야 했고, 근대화란 화려한 명제의 뒤안길에선 민중의 소리 없는 침몰이 있었다. 이런 모순을 온몸으로 안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온몸으로 밀면서 1980년대 한국을 세계의 한 중심국가로 만들었던 대전환의 주력군일진대 이들은 현재 김석원 회장처럼 하나둘 사라져가고 있다.

  

해방둥이의 출생 인구는 약 54만5000명이었다. 40년 뒤인 1985년엔 12만6000명이 줄어 41만9000명이었다. 38년이 흐른 2023년엔 다시 14만1000명이 더 줄어들어 약 27만8000명이다. 출생자의 딱 절반이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기아도 전쟁도 아닌 질병이었다. 1950년 한국 영아(嬰兒) 사망률은 1000명당 232명이었다(우리 어머니는 열세 명을 낳았는데 일곱 명이 사망). 작년은 1000명당 2.2명. 한국을 최장수국으로 만드는 데 1등 공신은 의사들이었다. 의료 개혁으로 포장된 의사 집단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적대적 자세는 한국전 이후 최대 규모의 인명(人命) 손실을 부를 위험이 있다.

  

  

낙관론: 눈물겨운 이 ‘약간의 전진’

  

1985년 8월호 《월간조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쓸 때 만났던 이들은 거의가 엘리트였다. 그들은 비판적이긴 해도 비관적이진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에, 역사의 진보에 확신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지요”란 말을 자주 들었다. 이런 글로 기사를 마무리했다.

  

〈나는 25년 전쯤 가족이 파라과이로 이민 가는 수속을 밟기 위해 사진관에 가서 여권용 사진을 찍고 희망에 부풀었다. 그 희망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지만, 당시엔 한국을 떠난다는 그 기대만으로도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지금 나는 미국으로 이민 가는 친구들을, 측은해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런 ‘좋아짐’은 박정희나, 김지하나, 전태일 덕분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우리 국민들, 그중에서도 나 같은 해방둥이를 포함한 430여만 명의 40대가 성실하게 일한 결과이다.〉

  

1987년의 대부분을 미국의 대학에서 연구원 생활로 보내고 이듬해 귀국한 한 선배 기자는 나에게 이렇게 실토했다.

  

“지난 1년 동안 한국을 떠나 있었다는 것이 기자로서는 불행이란 생각이 든다. 6월 사태와 대통령 선거의 열광을 실감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 두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오늘의 현상을 이해하자니 뭔가 허술한 기분이다. 역시 기자는 현장에 가까이 있어야 하는 직업인가 보다.”

  

의도해서 이렇게 한 건 아닌데, 나는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기록하는 행운을 누렸다. 부산에서 신문기자로 1970년대를 보냈던 내가 한국의 파워 센터인 서울 광화문에서 1980년대를 살면서 한국 역사상 가장 뜻깊은 사건들의 현장에 가깝게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1등석에 앉아 한국의 드라마를 공짜로 구경하고 글을 써 돈도 벌었다.

  

이 무렵 친구들이 모여 잡담하는데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세상 돌아가는 꼴이 더럽고 답답하고 속상하지만 언젠가는 바로 이 순간까지도 행복하게 기억될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서울올림픽 두 달 전에 펴낸 1980년대의 르포 《대폭발》(조선일보 출판부)의 머리글에 이런 감상을 남겼다.

  

〈‘즐거운 것’보다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흥분하고 분노하며 환호한 적은 우리 역사상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자신에게 수없이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는, 아무리 캄캄했다 하더라도 소중하며 즐거운 추억인 것이다.

  

저 능선만 넘으면 정상이 보이겠지, 저 터널만 지나면 신천지가 전개되겠지, 하는 기대를 가지고 걸음을 재촉하다가 넘어지며, 실망하고, 또 일어나는 것이 인간사인 것 같다. 역사의 행로(行路)도 같으리라. 이 고비만 넘기면 멋진 지평이 전개될 것이라고 가슴 부풀었지만, 그 고비를 넘겨도 기적 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약간 좋아졌을 뿐이었다. 다만 약간 정상에, 그리고 멋진 신세계에 가까이 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역사에 있어서 이 ‘약간의 전진’은 얼마나 눈물겨운 성취인가. 봉건의 나라에서, 식민지였던 나라에서, 반동강 난 나라에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기도 한 나라에서 눈물·피·땀·함성·비명, 그리고 목숨 걸고 쌓아 올린 이 ‘약간의 전진’이란 탑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 ‘우리’의 기록을, 이 금자탑을 쌓는 데 돌을 놓아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바친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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