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월 15일 기준으로 앞으로 보름 정도가 윤석열 본인, 국민의힘, 보수층,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의 골든타임
⊙ 윤 대통령, 여론 악화되었던 작년 12월 7일과 달리 상당히 강한 입장에서
하야 결단할 수 있어
한국 보수의 원점 이승만의 민주주의
한국 보수는 지금 음모론에 넘어간 사람들과 맨 정신을 가진 이들로 분열되었다. 보수 재건의 길을 찾으려면 보수의 원점 이승만(李承晩)을 역사 속에서 불러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연설에서 민주주의는 참을성이 있어야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연설은 한국 보수의 한 기준점이 될 만하다.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을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 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을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 하고 또한 더러는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義)로운 것이 종말에는 악(惡)을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요 우리 친우들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들여다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추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삼십 년 전부터 결정하고 실행하여 온 것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人民)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도 결국 한국의 민주주의를 전진시켰느냐 후퇴시켰느냐로 심판받을 것이다.
1950년 6·25 동란에 부산으로 피란하였던 이승만 대통령은 9·28 서울 수복으로 그의 관저인 경무대로 되돌아왔다. 그때에 몇몇 신문이 서울에서 복간되었다. 그해 10월 중순의 일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넘어 평양을 점령하고 승승장구 압록강을 향해 진격하여 국토 통일의 부푼 꿈이 막 실현되려던 무렵이었다. 전국은 비상계엄령하에 있었으므로 국방부 정훈국 관장하에 신문 검열제가 엄격하게 실시되고 있었다. 국방장관의 담화문이 동일 지면에 들어갔는데 《동아일보》는 관례대로 대통령의 것을 5단 표제 머리기사로 하고 장관의 것을 4단 표제 중앙 부위에 둔 조판대장(臺帳)을 떠서 검열을 받으러 갔다. 한데 당무자는 장관의 것을 ‘톱’으로 하여 대통령의 것과 바꾸라고 하였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니 신문사는 판을 고쳤다.
戰時에도 언론 검열 폐지
다음 날 예정된 이승만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경무대 관저에서 있었는데 이것은 서울 수복 후 최초로 열리는 것이었다. 《동아일보》 최흥조(崔興朝)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이 대통령이 먼저 반가운 어조로 회포를 푸는 말로 시작한 기자회견은 까다로운 형식을 빼고 흥겨운 대담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화제가 다 끝났다고 생각될 즈음에 최 기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산까지 피란을 갔다가 돌아오는 이 처절한 전쟁을 하는 동안에 신문을 만드는 저희도 애국심에 불타고 있습니다. 공산당을 이롭게 하고 우리나라를 해치는 보도를 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국방부 정훈국이 모든 신문에 대해서 검열을 실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 사람의 대위가 앉아서 마음대로 대한민국의 언론을 좌우하는 결과가 됩니다. 이래가지고서는 저희들이 좋은 신문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순간 이승만 대통령은 안면근(顔面筋) 경련으로 두 볼이 실룩거리는가 싶더니 엄숙한 어조로 분연히 선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공산당과 전쟁을 하고 있는 까닭은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서야. 민주주의 국가에서 신문을 검열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는 옆에 앉은 공보처장 김활란(金活蘭) 여사를 돌아보더니 말을 계속했다.
“국방부의 정훈국장이라는 사람이 누구요? 국방장관에게 훈령하여 즉시 신문 검열을 중지하도록 해요.”
이는 공산당을 잡는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의 가치를 포기, 공산당을 닮을 수 없다는 위대한 선언이었다.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지 마라”
1946년 2월에 작성된 조지 F. 케난(당시 駐蘇 미국 대사관 대리대사)의 ‘긴 전문(Long telegram)’은,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를 도운 미국에 스탈린이 공격적으로 나오는 데 당황한 미국 지도부의 이해를 돕고 대안을 제시하기 위하여 쓴 글이다. 이후 대소(對蘇) 전략의 지침이 되었다. 소련과의 대결선언인 트루먼 독트린, 서구(西歐) 부흥 계획인 마셜 플랜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케난의 문서는 외교관이 아니라 역사학도가 쓴 것처럼 파격적이다. 고급 수필의 문학성도 느껴진다. ‘긴 전문’이란 말은 외교 전문답지 않게 길었다는 뜻이다(5000단어가 넘는다). 읽어보면 머리에 남는 대목이 많은데 특히 마지막 문장이다.
〈소련 공산주의와 싸우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드리워질 가장 큰 위험은 우리가, 우리가 싸우는 적과 같아지는 것을 허용하는 일이다.〉
니체가 한 말 “괴물과 싸우다가 괴물이 되지 마라”와 같은 맥락이다. 선동좌파와 싸우다가 선동우파가 되고 광우병 선동을 욕하다가 부정선거 음모론자가 되어 도덕적 우위(優位)를 잃어버리는 것을 미리 경고한 사람들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중인 1952년엔 최대 규모의 선거(대통령 및 지방선거)를 실시하도록 했다. 그해 4월엔 1만7000명 이상의 시·읍·면 의회 의원을 뽑는 지방선거, 8월엔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 4년밖에 안 되는 나라가 전시에도 언론 검열을 하지 않고 선거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민주주의는 반드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성장하므로 실수를 참고 기다려줄 줄 알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전쟁 중 화폐개혁 때도 개인 예금 동결에 반대했었다. 민주주의는 실수를 견디는 제도로 알려져 있는데 이번에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이승만의 下野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을 때, 시민들은 그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것으로 화답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1960년 4월 26일 오전 육성으로 하야(下野) 성명을 발표했다. 담백한 명문(名文)이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들어와서 우리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 알면 민의(民意)를 따라서 하고자 하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사랑하는 우리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하여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여기에 대해서 내가 아래 말하는 바를 할 것이며, 한 가지 내가 부탁하고자 하는 바는 이북에서 우리를 침략하려고 공산당이 호시탐탐 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말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첫째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둘째는 지난번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애게 하기 위해서 이미 이기붕 의장이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넷째는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하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할 것이다.
이상은 이번 사태를 당해서 내가 굳게 결심한 바이니 나의 이 뜻을 사랑하는 모든 동포들이 양해해 주어서 이제부터는 다 각각 자기들의 맡은 바를 행해 나가며 다시 질서를 회복시키도록 모든 사람이 다 힘써주기를 내가 사랑하는 남녀 애국동포들에게 간곡히 부탁하는 바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라이벌인 민주당의 조병옥(趙炳玉) 후보가 미국에서 치료 중 급사(急死)함으로써 당선이 사실상 확정되어 있었는데 자유당이 부통령에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무리하게 당선시키려고 경찰을 앞세워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시위대는 재선거를 주장하고 이승만 퇴진은 외치지 않았었다. 부정선거임을 뒤늦게 안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선거 당시 내무부 장관 최인규는 5·16 뒤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부정선거는 사형감이다. 그렇다면 공정한 선거에 불복, 부정선거로 몰고, 국민들의 주권적 결단을 거부하는 윤석열은? 공정해야 할 선거를 부정선거로 만드는 것과 공정한 선거를 부정선거로 만드는 것의 차이는?
전격 하야
윤석열 대통령은 2024년 12월 7일, 계엄 선포 4일 뒤, 대(對)국민담화를 발표했다. “많이 놀라셨을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면서 “이번 계엄 선포와 관련하여 법적,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습니다. 저의 임기를 포함하여 앞으로의 정국 안정 방안은 우리 당에 일임하겠습니다”고 약속했다. 머지않아 그가 하야 일정을 발표할 것이란 전망을 낳게 했지만 지금은 결사항전의 태세이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오는 3월로 예상되는 가운데 다시 윤석열 하야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윤 대통령으로선 여론이 악화되었던 작년 12월 7일과 달리 지금은 상당히 강한 입장에서 햐야를 결단할 수 있다. 그와 국민의힘 지지율이 상당히 올라갔고, 헌재에서 탄핵이 기각되어 현직에 복귀할 것이란 희망적 전망도 지지층에선 나온다.
그렇지만 세계가 지켜본 비상계엄 선포가 헌법 위반이란 사실은 변함이 없어 탄핵이 인용될 가능성이 높고, 여론도 윤 대통령에겐 불리하다. 동아시아연구원-한국리서치 최근 여론조사에 의하면 비상계엄이 ‘잘못되었다’가 73%, ‘잘했다’가 21%이다. 탄핵 찬성이 65%, 반대가 23%다. 보수층의 44%도 계엄 선포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유동적 상황에서 만약 윤석열 대통령이 헌재 결정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하야성명을 발표하면 정치판에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다.
1. 국민통합과 법치수호를 위하여 희생하는 모습으로 비쳐 인기가 폭발하고 특히 국힘당에 대한 영향력을 갖게 될 것이다. ‘국민 계몽령’이란 막말도 순정으로 인정받을지 모른다.
2. 이재명 대표에 대한 압박은 최대치에 이를 것이다. 3월 중에 나올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에서도 그에게 1심처럼 당선 무효 형량이 선고되면 출마 포기 압박이 거셀 것이다.
3. 헌재의 탄핵 결정을 둘러싼 국론(國論) 분열을 원천적으로 막을 수 있다.
4. 동정적 여론이 법원에 영향을 끼쳐 진행 중인 윤석열 관련 내란죄 혐의 재판을 불구속으로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5. 자유 진영 후보 단일화의 계기가 되고 그 후보가 대선(大選)에서 이긴다면 윤석열 대통령이 유죄선고를 받았을 때 사면해 줄 가능성이 높아진다.
6. 그는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할 것이다.
7. 다만 자신이 확산시킨 부정선거 음모론을 결자해지(結者解之)할 수 있는가가 남는다. 그가 키운 1000만이 넘는 음모론자들을 방치하면 좀비화, 야수화하여 공동체의 삶을 황폐화시킬 것이다. 윤석열이 안고 퇴장해야 한다.
8. 국회법 134조 2항은 탄핵소추 중인 공무원은 사퇴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대통령에겐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다. 판례가 없으므로 헌재가 결정할 사안이다.
골든타임 놓치지 말아야
전격 하야는 정치적으로 죽어서 구국(救國)의 영웅이 되는 길인데, 문제는 타이밍이다. 누가 봐도 파면 결정이 나올 것이란 전망이 굳어지기 전에 약간의 기각 가능성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기를 놓치면 효과가 줄어든다. 윤석열 대통령도 탄핵이 기각되어 현직으로 돌아온다고 한들 정상적인 집무는 불가능할 것임을 잘 알 것이다. 2월 15일 기준으로 앞으로 보름 정도가 윤석열 본인, 국민의힘, 보수층, 그리고 나라를 위한 마지막 결단의 골든타임이다.
참고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의 타이밍을 놓쳤다면 군부 쿠데타로 제거되고 감옥에 갔을 것이다. 1980년 8월 최규하(崔圭夏)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실권(實權)을 잡은 전두환(全斗煥) 그룹에 의하여 그해 가을 밀려났을 것이다. 1974년 8월 닉슨 미국 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았더라면 역사상 처음으로 상원에서 탄핵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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