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누님
1954년 가을 우리 가족은 부산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2년 전에 큰누님만 데리고 부산에 가서 장사를 시작한 뒤 기반을 잡자 남은 가족을 이사시킨 것이다. 나는 부산 수정국민학교 2학년에 편입해 전후(戰後)의 소년기를 보내게 되는데, 일본에서 살다가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누님들이 느꼈던 것과 비슷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했다. 말이 너무 거칠고 발음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담임선생님이 국어 시간에 읽기를 시키면 학생들이 일어나 교과서를 펼치고 “대갈 깼습니다”라고 한 뒤 읽어 내려가는데, 나는 아무리 교과서를 훑어봐도 그런 말이 보이지 않았다. 나도 지명을 받으면 “대갈 깼습니다”라고 읽었다. 나중에 찬찬히 들어 보니 “제가 읽겠습니다”를 빨리 말한 것을 내가 잘못 들은 것이었다.
큰누님은 예식장이 아닌 집 안에서 단출한 결혼식을 올렸다. 전쟁이 나기 직전에 이미 결혼식을 올린 것을 희미하게 기억하던 나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갔다.
그 비밀이 밝혀진 것은 그로부터 약 50년이 흘러서였다. 자형(姉兄)이 별세한 후 부산에서 서울 우리 집에 잠시 들른 70대 누님이 처음 듣는 이야기를 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첫 결혼 상대자는 좌익 활동 전력자였다. 당시 검찰이 자수한 좌익 출신들을 교도(敎導)하기 위하여 만든 보도연맹(保導聯盟)에 가입했다. 6·25 남침 소식은 며칠 뒤에 청송 산골에 알려졌다. 자형은 도망치지 않았다. 좌익 활동을 심각하게 한 적이 없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경찰이 상부 지시에 따라 보도연맹원들을 불렀다. 경찰관은 모여든 이들을 총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뭣도 모르고 소환에들 응하니 기가 찼던 모양이다. “돌아가서 옷 갈아입고 오세요”라며 돌려보냈다. 그 길로 달아나라는 신호였지만 자형을 비롯한 대부분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고, 끌려가서 총살당했다.〉
신혼 초였기에 아이를 갖지 않았던 누님은 남편이 죽은 뒤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시댁에서 1년을 살았다. 아버지가 데리고 왔다. 원한에 사무쳐 그렇게 했다는 설명이었다. 누님은 “내가 그때 남자였으면 억하심정으로 빨치산이 되었을지 모른다”고도 했다.
아버지를 따라 부산에 온 누님은 월남(越南)한 함경도 청년을 만나 재혼했다. “복수심에서 북한 출신과 결혼했다”고도 했는데, 악착같은 누님이 후덕(厚德)한 자형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국민학교 때 별명은 ‘계백’
부산 수정국민학교 3학년을 마친 나는 이 학교에서 갈라져 나간 수성국민학교로 옮겨 3년을 다니고 1959년에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의 급조한 교사(校舍)에서 한 반에 60명이 넘는 학생들이 공부했다. 한국전이 쓸고 간 폐허 위에서 새로운 세대가 자라고 있었다. 여러 신문은 신년호에 우리 사진을 찍어 “해방둥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면서 희망의 증거로 삼았다.
우리 반엔 10명 정도의 고아원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은 점심 도시락을 싸 오지 못했다. 나는 그들 중 한 아이가 가진 줄칼이 탐나 10일분의 내 도시락과 교환했다.
우리의 영웅은 관창(官昌)과 계백(階伯)이었다. 그때 아이들끼리 별명을 붙여 불렀는데 나는 ‘계백’이었다. ‘이름이 정체성(正體性)’이란 말 그대로 나는 상당 기간 백제 편이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소설을 읽고 계백의 백제군을 무찌른 김유신(金庾信)이 싫었다.
‘장군’이란 별명을 가진 아이는 힘이 셌다. 1970년대 후반 부산의 국제신문 사회부 기자이던 나는 쌀집 주인이 칼을 맞고도 강도와 격투를 벌이다가 사망했다는 기사를 써야 했는데 피살자는 그 ‘장군’이었다.
그때 선망의 대상이 된 존재는 살찐 아이들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야윈 편이라 살찌는 게 소원이었다. 그러다가 1980년대 광화문에서 길을 걷다가 만난 한 도시계획 전문가가 “조 기자는 몸 관리를 정말 잘하네요”라고 했다. 그 사람이 지나가고 한참 생각했다. 내가 몸이 좋다고?
주먹다짐이 예사였다. 자연스럽게 학생들 사이에 랭킹이 만들어졌다. 나는 5~6등에서 맴돌았다. 랭킹 1위는 수시로 도전을 받아 결투로 챔피언 자리를 지켜야 했다. 결투 때는 말리는 학생들은 없고 둘러서서 구경하다가 한 사람이 코피가 나면 끝을 냈다. 소년들 사이에서 결투 문화가 사라진 것은 1960년대 들어서이다.
1950년대 후반 부산의 거리 풍경을 생각하면 좀 기이한 장면들이 스쳐 간다. 동네마다 골목마다 배고픈 소년들이 역기를 들고 평행봉에 매달리는 등 힘 자랑이 펼쳐졌다.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서 아이들은 왜 그렇게 힘겨루기에 투지를 불태웠는지 의아하다. 일제시대를 겪은 교사들의 스파르타식 교육 영향인지, 불사조(不死鳥)처럼 생존 투쟁을 벌이며 일어서던 나라의 시대정신이 그런 식으로 표출되었는지. 여하튼 바깥에선 역기, 철봉이고 집에선 곤봉과 아령이었다. 당수·유도·권투 도장도 많았다. 의지력을 기른다면서 겨울에도 냉수마찰을 했다.
시네마 천국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라디오도 드물었던 시절, 거의 유일한 오락은 영화였다. 이탈리아 영화 〈시네마 천국〉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모처럼 영화관에 들어가면 낸 돈이 아까워 3회 연속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외화(外畵)였다.
부산 동부경찰서 옆 대로변에 미성극장이 있었다. 집에서 가까웠다. 돈을 내고 입장할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이 나무 문에 구멍을 여러 개 파놓았다. 1956년 여름 방학 어느 날 오전 나는 일찍 가서 안경 구멍처럼 생긴 곳을 선점, 맞은편 스크린에서 상영되는 영화를 정신없이 보고 있었다. 그 순간 오른쪽 눈을 번쩍 하고 쑤시는 게 있었다. 찔린 눈은 깜깜해지는데 구멍을 통해 나온 것은 안에서 아이스케키를 먹고 버리는 막대였다. 나는 아픈 눈을 감싸고 집으로 달려가 누워 버렸는데 다행히 실명(失明)에 이르지는 않았다.
1950년대의 참혹한 장면은 상이군인(傷痍軍人)들의 횡포였다. 국가적 보호를 제대로 받지 못하니 민폐를 끼치는 수밖에 없었다. 팔다리 잃은 이들이 상점에 들르면 고르는 대로 물건을 내주어야 했다. 5·16 군사혁명 뒤 원호처(援護處·현 국가보훈부)가 생기면서 상이군인 문제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1954년 무렵 장사를 하다가 사기를 당해 재산과 집을 날린 다음 연료 상점을 열었다. 부산 동구 좌천동 뒷길, 동명목재 강석진 회장 저택 맞은편이었다. 장작, 숯, 연탄(19공탄)을 찍어 팔았다.
작고한 오원철(吳源哲) 전 경제제2수석비서관(박정희 정부 시절)은 “19공탄 덕분에 산림이 보호되었다”고 했는데, 연탄가스 중독 사망자도 많았다. 지하 깊은 곳을 파야 석탄을 캘 수 있는 광산에선 붕괴 사고로 떼죽음하는 광부도 잇따랐다. ‘산업전사(産業戰士)’란 말은 이들에게 처음 붙여졌다. 몇 년 전 강원도 태백시에 있는 석탄박물관에 갔더니 강원도 탄광에서만 누적 사망 광부가 4000명 이상이었다.
미군, 기름을 끊다
1950년대 부산에선 아직 호롱불(호야)을 쓰는 곳이 많았다. 호야가 넘어져 불이 자주 났다. 지나가는 전선(電線)을 벗겨 놓았다가 밤에는 전깃줄을 걸어 전등을 밝히는 도전(盜電)도 예사였다. 그렇게 공부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이들도 많을 것이다. 1989년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 씨를 처음 인터뷰했을 때 그는 “시내 구경을 나갔다가 가장 놀란 일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상점에 물건이 많은 것과, 그 물건들을 바깥에 진열해 놓아도 도둑맞지 않는 점이 신기했다고 했다. 1950년대의 부산은 북한에 더 가까웠다.
우리 아버지 연탄공장에선 5~6명의 인부가 일했다. 40대의 한 남자는 햇볕 드는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석탄 부스러기를 잘게 깨는 일을 하였다. 종일 말이 없었다. 저녁 무렵이면 부인이 데리러 오는데 단정한 옷차림의 정갈한 얼굴이었다. “남편은 교사였는데 좌익으로 몰려 조사를 받다가 얻어맞아 정신이 온전치 못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건장한 20대 제대 군인 출신은 연탄을 지게로 나르는 일을 했는데 나하고 친해 전투 이야기를 자주 해주었다. 적군과 대치 중인 전선에서 물을 길러 갔다가 북한 군인과 맞닥뜨려 때려 죽인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겨울인데도 냉방에 모셔 놓고 왔다고 걱정을 태산같이 했다.
이 무렵 목격한 우스운 일 하나. 1957년 겨울, 한국엔 난데없는 석유 파동이 일어났다. 미군이 한국 정부에 대주던 기름을 끊은 것이다. 미군은 원조 물자의 하나로 기름을 한국 정부에 주고 정부는 이를 시중에 내다 팔아 번 돈을 정부 예산으로 썼다. 미군은 석유에 대하여 정부가 너무 낮은 환율을 적용한다면서 환율 인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기름 공급을 중단한 것이다. 버스 운행과 공장 가동이 멈추는 등 일대 소동이 벌어지니 이승만 정부는 손을 들고 환율을 인상했다. 5·16 이후 박정희(朴正熙) 정부가 울산에 정유(精油)공장부터 짓기로 한 것도 석유 자립 없는 나라는 나라도 아니란 자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절로 익힌 漢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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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신문을 읽으면서 시사(時事)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기사는 토씨를 빼면 거의 전부가 한자 표기였고 연재소설은 한글이 많았다. 한자가 있어도 재미에 빠져 신문을 읽고 또 읽으니 저절로 한자를 알게 되었다. 나는 한 번도 한자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이 없다. 글자 하나하나가 추상화적(抽象畫的) 이미지인 한자는 그림처럼 스스로 그 뜻을 알려 주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 중학교 들어갈 때는 신문을 자유자재로 읽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메이저리그 야구에 빠져 미군 중계방송을 듣고 야구 잡지(영문)를 닥치는 대로 읽다가 역시 저절로 영어에 문리(文理)가 트인 경험이 있다.
1956년 대통령 선거는 호기심 많은 나 같은 소년들을 유세장으로 끌어 냈다. 민주당 후보 신익희(申翼熙)는 “못 살겠다 갈아 보자”라는 구호로 아이들도 환호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는 수세적 구호였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아버지도 야당 편이었다. 신익희는 투표일을 며칠 남겨 두고 급사(急死)했다. 사람들이 사표(死票)를 각오하고 그에게 던진 표가 160만 표. 부통령 선거에선 장면(張勉) 민주당 후보가 큰 차이로 자유당 이기붕(李起鵬)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 후보는 유효투표의 30%를 받았다. 나중에 내무장관이 되어 부정선거를 지휘, 4·19의 원인을 제공하는 최인규(崔仁圭)는 전 공산주의자 조봉암에 대한 이런 높은 지지를 보고 “이승만 같은 위대한 지도자가 없으면 한국은 선거를 통하여서도 공산화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이 생겼다”고 옥중(獄中) 회고록에 적었다.
당시 11세 국민학교 4학년생이 느낀 바닥 민심도 신익희가 당선될 것 같은 분위기였고 노쇠한 이승만에 대한 싫증이 감지되었다. 아이들까지 신익희 추모곡이 된 ‘비 내리는 호남선’(박춘석 작곡, 손로원 작사, 손인호 노래)을 부르고 다녔다. 6·25의 참화(慘禍)를 겪지 않은 경상도 지역에서 조봉암 지지가 강했고, 빨갱이로 몰려 경찰이나 군으로부터 당한 이들의 반(反)이승만 감정도 상당했다.
1958년 12월 24일 자유당은 무술경위(武術警衛)를 동원,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보안법 파동’이라 불리는 이 사건에 아버지도 흥분했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 이른바 야당지(野黨紙)였다.
중2 때부터 《사상계》 읽어
나는 국민학교 때는 《새벗》 잡지, 중학교 때는 《학원》을 정기구독했는데 중학교 2학년 때부터는 《사상계》를 읽고 있었다. 《사상계》는 4·19와 5·16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비판적 지식인들과 개혁적 장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1960년 3·15의거에서 4·19, 그리고 4·26 이승만 하야(下野)로 이어지는 격동의 주요 현장은 마산·부산이었고 나는 부산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 사상자가 생기면서 시위의 불길은 부산을 거쳐 서울로 옮겨붙는데, 마산·부산에선 고등학생들이 주력이었다. 부산중학교와 운동장을 공유하는 부산고등학교가 시위에 적극적이었다. 중학교 교사들은 시위 찬반으로 엇갈려 교실에서 가르침이 정반대였다. 출범한 지 오래되지 않은 부산문화방송은 마산의 시위 현장을 라디오로 생중계하기도 했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당선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趙炳玉)은 4년 전 신익희처럼 투표일 직전에 사망, 이승만의 당선은 확정된 상태에서 부통령으로 자유당 이기붕 후보를 무리하게 당선시켜 후계자 문제를 없애려 한 것이다.
계엄사령관 박정희
1960년 4월 19일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지고 부산에선 지역 계엄사령관 사진이 신문 지면에 등장했다. 군수기지사령관 박정희였다. 이름이 여자 같다는 게 첫 느낌이었다. 그리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하야를 발표하니 세상이 뒤집어졌다. 가까운 동부경찰서로 달려갔다. 경찰관들은 자취를 감추고 군중이 경찰서로 난입, 약탈한 문서들이 거리를 하얗게 뒤덮었다. 학생들이 징발한 트럭들이 시위대를 태우고 어디론가 줄을 지어 가고 있었다.
4·19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허정(許政)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제로 개헌, 총선을 거쳐 민주당 시대가 열렸다. 부산의 중앙국민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민주당 유세장에는 주요한(朱耀翰), 박순천(朴順天)에 이어 거제 출신 김영삼(金泳三) 후보도 등장했다. 30대 초반의 앳되어 보이는 그의 연설은 별로였다.
집권 민주당은 신·구파로 분열했고 이게 5·16을 부른 원인이 되었다. 구파(舊派)의 윤보선(尹潽善) 대통령 선출 뒤 실권(實權)을 쥔 총리를 뽑는데, 구파가 밀던 김도연(金度演)은 떨어지고 신파(新派)의 장면이 당선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구파 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