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여순반란 77주기를 맞은 10월 19일에, 자신의 페북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다.
『오늘은 여수·순천 10·19사건 제77주기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장병 2천여 명이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강경 진압 과정에서 전남과 전북, 경남 일대에서 수많은 군인과 민간인이 희생됐습니다. 살아남은 이들과 유가족들은 오랜 세월동안 침묵을 강요받으며 슬픔과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습니다.
다시는 국가 폭력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도록 대통령으로서 엄중한 책임의식을 갖고, 이를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21년 제정된 '여순사건 특별법'에 따라 신속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역사를 바로잡고 정의를 세우는 것은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특별법 제정을 위해 애써주신 유족회와 정치권, 각계 활동가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희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깊은 애도와 위로를 전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며,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굳건히 세워 나가길 소망합니다.』
이 글을 보면, 이재명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이다. 자신이 反대한민국임을 스스로 자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킨 국방경비대 14연대를 이재명은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에 정당하게 명령을 거부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4·3 사건 진압 명령은 부당하며, 여순 반란을 일으킨 14연대 반란 세력들을 (대한민국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 희생자라고 말하고 있다.
필자는 이 페북 글을 읽고 북한에 의해 적화된 대한민국에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었다.
4·3 사건이나 여순반란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희생된 것은 사실이고 이들과 이들의 유족들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3 사건과 여순 사건은 대한민국을 반대하고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자 공산세력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이를 긍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를 주도한 사람과 세력들을 희생자라고 부르는 것 역시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다.
북한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들은 자신의 이념을 실천한 혁명투사이고 영웅일지 모르지만,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반란세력이고, 이들이 무장 반란을 일으킨 이상 진압해야할 대상일 뿐이다.
간단히 생각해 보라. 부정선거음모론을 믿고 이재명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부정선거를 통해 당선되었다고 주장하는 극단 세력들이 미국에서 총기를 반입하여 대한민국의 헌법에 따라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집권한 이재명 정부를 전복하기 위해 대구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켰다면 (이재명)정부는 당연히 이들 무장 반란세력들을 진압하라고 군에 명령을 내릴 것이고, 정부의 진압 명령을 거부한 군 집단이 있다면 이들 역시도 진압하려 할 것이다. 이재명 정부를 전복하려는 극단 세력과 이들을 진압하라는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무장 반란에 가담한 집단이 정부의 진압 과정에서 죽었다면, 이들을 희생자라 부르고 추모해야 한다고 이재명은 주장할 것인가?
인간적으로 한 개인의 죽음을 추모하고,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역사의 질곡의 희생자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의 행위 자체를 대한민국이 인정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님을 자인하는 것이다.
1948년 10월 19일,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후, 한 행위들을 보면 절대 여순 사건을 긍정할 수 없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고, 10월 24일에 공표한 ‘여수인민위원회 결정서 6개항’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가 이재명이 말한 것처럼 단순히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여수인민위원회 결정서 6개항’은 당시 반란군 측에서 발표한 정치/군사적 선언문으로 사건의 이념적 성격과 당시의 사회/정치적 배경을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 결정서의 내용과 발표 배경 및 의의를 함께 각 항목별로 살펴보자.
제 1항 : “제주도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미제의 괴뢰정권인 이승만 정부를 타도한다.”
당시 14연대는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이를 “동포 학살”이라 규정하고 거부했다. 하지만 이는 대외적인 명분일 뿐이다. 반란군은 단순한 군내 항명을 넘어 이승만 정부를 ‘미군정의 괴뢰정권’으로 보고 진압 명령을 계기로 자신의 본래의 목적인 반정부 무장투쟁을 한 것이다.
제2항 : “조선 인민의 참된 정권,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이는 조선노동당 남로당의 노선에 따른 정치적 선언으로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반란군은 이에 반대하고, 좌익의 정치체제인 ‘인민공화국 수립’을 지향했음을 보여준다.
제3항 : “양민을 보호하고 부패한 경찰과 반동분자를 처단한다.”
반란세력은 자신들을 ‘인민군’으로 자처하면서, 경찰/지주/우익단체 등을 “반동”으로 규정했고, 이에 따라 실제로 여수, 순천 일대에서 경찰관, 공무원, 우익인사 등을 처행했다.
제4항 : “군·경 및 공무원은 인민위원회의 지휘를 따른다.”
반란군은 대한민국 행정체계를 부정하고, 자신들이 구성한 ‘여수인민위원회’라는 새로운 인민위원회 체제(좌익 행정조직)를 통해 자치적 통치를 시도했다.
제5항 :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노동자에게는 생산수단을 돌려준다.”
좌익이 일관되게 주장한 토지개혁과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천명한 것으로 여순 반란의 목적이 공산주의 건설에 있음을 명백히 보여준 것이다.
제6항 : “모든 애국 민주 인사를 단결시켜 미군과 그 앞잡이를 몰아낸다.”
반미/반정부 투쟁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것으로, 이는 당시 남로당 중앙의 지시와 궤를 같이하는 내용이다, 여순사건이 단순한 군 반란을 넘어 좌익 무장봉기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세번의 혁명과 이승만’에는 여순반란 사건 당시 국방경비대 14연대에 있던 반란세력이 어떤 만행 저질렀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 있다. 그것을 아래에 그대로 옮겨 적는다.
『1대대가 출발하는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 장교들이 모두 모여 환송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식당 안으로 수백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지창수 등 병사 50여 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장교 20여 명을 막사까지 쫓아가 살해했다.
그리고 비상 나팔을 불어 1대대 장병들을 연병장에 모았다. 지창수는 단상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인민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우리는 이제 인민해방군으로서 북상한다.” 황당한 소리였다. 하사관 두 명과 사병 한 명이 고함을 치며 반대했다. 지창수는 그 자리에서 이들을 사살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더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남로당원 23명이 부대 앞 식품점에서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거사에 성공했다는 전갈을 받고 부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반란군에 합류했다.
반란군은 여수 시내로 몰려갔다. 경찰관 200명이 지키고 있던 여수경찰서는 한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항복했다. 10월 20일 새벽 5시, 여수 전체가 반란군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경찰과 공무원 우익인사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됐다.
대구폭동 때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성이 폭발했다. 여수경찰서 경찰관 9명을 벽에 세워 놓고 차로 들이받아 죽였다. 여경인 국말래와 정헌자를 집에서 끌고 와 끔찍한 성적 학대를 가하다 처형했다. 이들은 칼로 난자당하며 제발 빨리 죽여달라고 절규하다 숨졌다고 한다.
반란군은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경찰은 동천강을 사이에 두고 저항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지원 나온 4연대 중대 병력이 우파 장교와 사병 30명을 죽이고 경찰을 뒤에서 공격했다.
순천에서도 학살극이 벌어졌다. 순천경찰서장의 눈을 뽑고 청년단장과 함께 차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었다. 순천에서 900여 명을 죽였다. 여수에서는 1,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국군이 반격에 나섰다. 반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구성하고 38선 경비 병력을 뺀 12개 대대를 투입했다. 내부 반란을 수습한 광주 4연대는 21일 새벽 순천에서 구례 쪽으로 북상하던 14연대 반란군을 공격해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오후부터 순천 진입을 시도해 다음 날 오전 모두 탈환했다.
열세에 놓인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여수의 방어를 좌익 청년과 학생들에게 맡겼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었다는 말에 속아 멋모르고 나섰다가 옥쇄를 강요당한 것이다. 이들이 무려 나흘 동안 저항한 뒤 10월 27일 새벽 여수가 점령되면서 여순반란은 종결됐다. 군대를 뒤따라온 경찰은 동료와 가족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격분해 무자비한 보복을 벌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반란군들은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공산국가를 건설하려는 목적의 일환으로 여순반란 사건을 일으켰다. 단순히 국민들을 보호해야 할 군인이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었기 때문에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 아니다.
이재명이 10월 19일, 자신의 페북에 올린 글은 1948년 10월 24일에 반란군이 공표한 ‘여수인민위원회 결정서 6개항’과 인식을 같이 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니라 ‘인민위원회 위원장’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여순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여순사건에서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반란을 일으키고 경찰과 공무원, 우익인사들을 참혹하게 학살한 반란군은 대상이 아니다.
반란군과 민간인 희생자는 구분해야 하는데, 얼렁뚱땅 섞어 동일한 지위와 집단으로 올려놓고 여순반란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며,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행위이고,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과 그 유족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재명이 여순 사건의 성격을 이런 식으로 규정하면 국민통합은커녕 이념논쟁을 격화시켜 불필요한 사회/정치적인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대통령이 역사적인 팩트도 무시하고, 대한민국(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했던 사람들을 옹호한다면, 대한민국의 헌법을 부정하고 주권을 가진 국민들을 무시한다고 밖에 달리 해석할 수 없다.
국민들은 이재명의 이념과 사상을 의심해도 이재명은 억울해 할 이유가 없어진 것 같다.
물론 필자는 이재명이 여순 사건에 대해 제대로 알고 저런 글을 올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 글이 얼마나 위험한지, 국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해 보고 썼다고도 보지 않는다. 천박한 역시인식과 진중하지 못한 태도가 저런 글을 아무렇게도 싸지르게 한 것으로 보여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