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캠프에서의 안병훈 전 부사장
'언론계의 큰별' 안병훈 전 조선일보 부사장(도서출판 기파랑 사장)이 10월 31일 별세했다. 11월 3일 조선일보 회사장으로 발인을 마쳤다. 필자 이동욱 씨는 추모 회고 성격이지만 선거판 비화가 담긴 이 글을 본지에 보내기 전에 안병훈 대표 유족의 게재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편집자)
저에게 마지막 은전(恩典)을 베풀어 주시고 이렇게 떠나셨군요.
제가 쓴 ‘보수나 진보들도 몰랐던 건국 대통령의 삶과 죽음’의 초고를 기파랑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보내드렸던 것이 7월 무렵이었지요. 그 어떤 조건도 없이 출판하겠다는 연락을 담당자로부터 받고 안병훈 대표님께 인사라도 드려야겠다고 하니 와병 중이시라는 답신을 받은 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8월 중순쯤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대표님이 입원실에서 주신 전화였는데, 그때는 마지막 통화인 줄 알 리가 없었던 제 불찰이 참 큽니다.
"아, 이동욱씨. 책 썼대? 수고했어."
"감사합니다. 한 번 찾아뵙고 인사도 드리려 했는데..."
그날 대표님은 "내가 이동욱 씨한테 고맙지. 올 필요 없고, 몸이 좀 나아지면 그때 보자"시며 격려와 함께 통화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소담한 책이 10월 초 출간되었는데, 쾌차하셨다는 연락은 오지 않다가 돌연 10월의 마지막 밤 12시에 떠나셨다는 기별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황망함이란….
돌아보면 처음 뵈었을 때가 30년 전입니다. 자유기고가이던 무명의 제가 당시 월간조선 1995년 4월호에 우남 이승만의 기사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를 기고했을 때였습니다.
기사가 나간 뒤 한 보름쯤 지나서 난데없이 저를 보자시며 당시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을 통해 연락을 주셨지요. 광화문 조선일보사 뒤편 한식당의 방에 앉아 제가 처음으로 대표님을 뵙게 됐지요.
"하와이 망명 시절을 정리해서 쓰는 기사인데, 국립묘지까지 참배해 가면서 기사를 쓴 정신이 참 대단해. 기자 정신이 이래야 하는데" 라며 기자도 아닌 일개 자유기고가에게 과찬해 주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번에 출간한 제 책의 후기에 그 기사와 관련된 당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과 안병훈 당시 조선일보 전무님과의 에피소드를 기록으로 남기게 된 것도 지금 와서 보면 그나마 참 다행이란 생각도 듭니다.
제가 조선일보사에 월간조선부 기자로 입사하면서 대표님과 관련하여 크게 히트 친 기사들이 몇 건 있었지요.
1998년 초라고 기억합니다. 당시 안병훈 전무이사 방으로 호출을 받아 갔었지요. 그날 저에게 한 분을 소개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미국에서 장의 산업을 하시는 친구인데, 이 분 말씀을 듣고, 이동욱 씨가 기사 한번 써봐. 선진국 언론에서는 죽음에 관한 좋은 기사들도 많이 나오는데, 우리는 부음기사 말고는 거의 없어."
그 명령(?)에 따라 저는 재미교포 김병관 씨로부터 우리나라 장례문화의 전근대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1996년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는 매년 여의도 절반 만한 크기의 땅이 매장으로 인한 묘지로 잠식되는 중이었지요. 대신 화장율은 20.5%에 그치고 있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전국 각지의 화장장이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노후한 시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서울추모공원'으로 알려진 벽제 화장장 역시 마찬가지여서, 하층민들의 장례시설에 불과한 대표적인 혐오 시설인 상태였습니다. 즉, 화장로와 화장장의 현대화를 거쳐야 80%에 육박하는 매장 문화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김병관 씨의 이름을 빌려 ‘우리도 아름답게 죽고 싶다’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지요. 그 기사에 가장 아파했던 곳이 다름 아닌 서울시청이었던 모양입니다.
그해 8월에 고건 당시 서울시장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함께 '화장 선언'을 하잖습니까. 동시에 혐오시설이던 화장장을 전면 개보수하여 현대적인 시설로 탈바꿈시켰었지요.
오늘날 전국의 화장률은 91.7%, 2024년 서울시의 경우 74.9%나 됩니다. 대표님께서 발인(發靷) 뒤에 가신 곳도 서울추모공원 이어서 대표님 마지막 길을 제가 닦아 놓은 셈이라고 자평하게 됩니다.
크게 기억되는 사건 중 하나로 '반공소년 이승복 기사는 조선일보의 오보'라는 좌익들의 조직적 캠페인과 맞섰던 일들입니다.
1998년 9월 경이었습니다. 홀로 현지로 급파되어 30년 전인 1968년에 벌어진 사건을 바닥 취재를 통해 '오보가 아니라 진실'임을 밝혀 돌아왔을 때, 대표님은 부사장실에서 저를 불러다 앉혀 놓고 사진부 기자들을 불러 직접 지휘하셨지요.
"지하 자료실 **에 가면 당시 필름들이 있어. 1968년 12월 9일에 사건이 발생했으니까 그때부터 한 달간 필름 전부 가져와!"
그날 그 장면은 제 눈에 해병대 장교의 지휘관 그 자체였습니다. 강력한 추진력이 빛을 발했지요. 이승복 사건이 발생했던 1968년에도 이미 3년 전부터 조선일보 기자이셨으니 당시의 디테일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을 겁니다.
사진부 기자들이 들고 온 상자 속의 네거티브 필름들을 천정의 불빛에 비춰보면서 저와 함께 하나하나 '알리바이'를 찾아가기 시작했지요. 그러면서 당시 조선일보 강인원 기자가 현장에서 사진 촬영을 한 시점과 그 현장에 함께 있던 이승복 군의 이모 최순옥 여인과의 대화의 순간을 '물증'으로 입증하게 됩니다.
당시 대표님은 조선일보사의 말초신경까지 전부 감각하고, 통제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저로서는 우르러볼 수밖에 없는 분이었지요.
그때 기자로서 30년 전 사건의 진상을 복원하는 데 성공한 저의 경험은 2019년 12월부터 2023년 6월까지 존속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40여 년 전에 발생한 5.18과 관련한 수백 여 단일 사건들의 진상 복원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1997년 10월부터 조갑제 당시 월간조선 편집장과 시작한 박정희 대통령 전기작업은 2000년 1월까지만 제가 함께하는 바람에, 저로서는 안 대표님의 숙원 사업에 대한 미완의 기록에 불과합니다.
대신에, 대표님과 제가 함께 했던 2007년 '박근혜 선거 캠프'에서의 기록은 누구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니 제가 여기에 조금 남겨도 되겠지요?(안병훈 전 부사장은 조선일보 퇴임 뒤 기파랑 출판사를 하던 중 박근혜 후보의 간청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의 인연으로 경선후보 선거 캠프 좌장을 맡음-편집자)
2007년 5월 마지막 주 월요일로 기억합니다.
저는 2000년 1월부로 조선일보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갤럽여론조사연구소로 직장을 옮긴 뒤였습니다. 갤럽에서 전문위원 타이틀로 여러 분야를 드나들었지만 특히 선거 여론조사에 많이 관여했었습니다.
기억하시다시피 그 무렵부터 우리나라에 핸드폰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가정집 전화번호부로 랜덤(random·무작위) 샘플링을 해오던 방식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할 때입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선거 예측에 목을 매야 하는 조사회사 입장에서는 타사보다 적중률이 높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전화여론조사에서 오차 범위 내에서 시소 게임 하듯 오르내리는 선거구가 13군데나 됐습니다.
그때 저는 이 13군데 선거현장을 모두 발로 뛰었습니다. 전화조사의 샘플링에 한계가 있기에, 알 수 있는 방법은 현장을 보는 수밖에 없다고 당시 박무익 대표를 설득한 결과였습니다.
그리고 13군데의 선거 예측은 제가 한 '현장조사 기법'이 모두 적중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2006년 지방선거에서는 지방의 한 시의원 후보가 저에게 '필사적'으로 의뢰를 해오는 바람에, 저는 제가 조사기법으로 활용하던 '현장조사 기법'을 선거 현장에 적용시켜 볼 기회를 갖게 됩니다. 약 25일간 선거 캠프에서 분투한 결과, 그 시의원 후보는 경상남북도 최다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지요. 제 자랑이 아니고, 잘 아시겠지만, 안 대표님과 이야기가 연결되기에 요령부득으로 이렇게 제 이야기를 좀 해야 했습니다.
해가 바뀌어 2007년 3월 무렵, 갤럽의 최시중 회장께서 저를 불렀습니다. 긴밀한, 비공개 요청이라며, 당시 서울시장 이명박 씨가 대선에 출마하고자 하는데, '전략 조사'를 해줄 수 없냐는 제의였습니다.
중간 과정을 다 생략하면, 그 해 4월 한 달 동안 전국의 주요 지점들을 찾아 다니며 대선 전략을 만들어 가게 됩니다. 이명박 서울시장의 첫 번째 경쟁자는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였지요.
선거란 상대적이니 이명박 진영의 진단뿐 아니라 박근혜 진영의 진단도 동시에 수행하게 됩니다. 이렇게 조사하면 각 진영의 강점과 약점, 기회 요인과 위협 요인들을 SWAT(마켓팅 전략 분석)로 정리할 수 있거든요.
그리고 4월 말 오후 6시부터 롯데호텔 31층 회의실에서 제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과 나란히 앉아 한 권의 두툼한 PPT 보고서로 브리핑을 했습니다. 무엇을 하면 유리하고, 무엇을 하면 불리해지며, 어떻게 해야 상대 진영보다 표를 많이 얻을 수 있는지, 어느 지역에서는 어떤 이슈에 역점을 두어야 하며, 어느 지역에서는 어떤 용어는 절대 금기여야 한다는 등... 훗날, 이 선거는 제가 그려낸 보고서 대로 진행됩니다.
그 당시는 조선일보사에서 역점을 두고 연재했던 박정희 전기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가 돌풍을 몰고 와서 1998년, 박 전 대통령의 장녀 박근혜 씨가 국회의원으로 정계 진출을 가능케 했지요.
제가 박 대통령의 삶을 초근접 취재해본 결과, 그의 장녀인 박근혜 씨는 극도의 모범생인 반면에 아버지 박정희로부터 정치수업을 받은 바가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 육영수 여사로부터 물려받은 이미지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 등이 버무러지며 강력한 후광이 만들어지는 바람에 이른바 정치인으로서의 '실력'에 대한 모든 이들의 의구심을 지워버리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여파로 2007년 대통령 경선 후보로 등극하게 된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의 향수가 박근혜 후보의 가장 강력한 정치 자산이었을 때였습니다.
이명박 진영에서는 이것을 극복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이명박 시장과 동향이던 최시중 갤럽 회장을 통해 제가 관여하게 된 선거판이었던 겁니다.
그해 4월 말, 롯데호텔 회의실에서 제가 역점을 두고 강조한 방식 중 하나는, "이명박 후보는 박정희 대통령의 흉내를 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적벽대전에서 적의 화살 십만 촉을 가져오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브리핑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박근혜 후보의 정치 자산인 박정희 대통령 지지자들을 갈라지게 만드니까. 이명박 후보의 '검은 선글라스'가 그렇게 해서 등장하게 됩니다.
하여간, 그 일이 있고 저는 이명박 캠프에 잔류하지 않았습니다. 브리핑을 끝내면서 이명박 후보의 스타일과 그 집단의 분위기가 저에게 맞지 않았지요. 거절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조사비용 청구서를 들이밀면, 그것으로 관계는 정산되어 버리는 풍토였거든요.
지금 와서 봐도 참 전근대적 문화가 아니겠습니까? 정당하게 집행될 비용을 개인이 부담하고, 대신에 당선되면 관직으로 갈음하는 문화 자체가 말입니다. 요즘은 좀 덜하겠으나 그 당시는 좀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여간 저는 결별이라 생각하고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엄청 큰 액수도 아닌 비용을 받게 됩니다.
제가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의 대선 전략 조사를 수행하고 보고한 것은 절대 비밀이었지만, 이게 새나간 듯했습니다. 박근혜 대표나 그 동생인 박지만 회장과는 박정희 대통령 전기 취재 차 여러 번 만나온 관계여서 이런 사실이 알려진다면 제 입장도 편치 않았을 사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안병훈 대표께서 어떻게 아셨는지 저를 불러 내셨지요. 그렇게 해서 제가 안 대표님과 함께 한국 보수 정치판의 격랑 속을 몇 달간 함께 하게 됐습니다.
2007년 5월 마지막 주였다고 기억합니다. 서울 홍은동 당시 스위스 그랜드 호텔로 저를 불러내셨지요. 첫날, 한 시간여 대화 속에서 제가 참여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드렸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날 대표님께서 제게 같이 하자고 몇 번 설득하신 것도 있었고요. 저는 "제가 이명박 캠프의 조사를 해주었는데 어떻게 그 상대 진영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였습니다. 대표님은 "아니, 그래도, 이봐, 이동욱 씨,..."를 반복하신 듯하고요.
대표님은 이틀 뒤 다시 한 번 저를 다시 불러내셨습니다. 예의 같은 내용의 설왕설래가 계속되다 헤어졌고요.
그런데, 그다음 날 대표님은 또 다시 저를 불러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저는 이명박 후보의 전략 보고서를 들고 나갔던 겁니다.
그 보고서에는 박근혜 진영의 강점과 약점 등이 소상히 조사된 극비에 해당하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때 안 대표님께서는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상세하게 들여다 보지 않으신 채 제게 몇 가지 질문을 하신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명박 캠프 안에 누군가가 통째로 이 문건을 넘겼구나' 하고 짐작했지요. 사람 사는 일이 다 그렇듯, 지금 보면 웃을 일이기도 합니다만, 안 대표님께서 지금 제 곁에 계셨더라면, "아!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말이야…" 하시면서 시원하게 설명해 주셨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 말씀도 안 해주시고 이렇게 떠나시니 참으로 먹먹할 뿐입니다.
다시 우리의 이야기로 돌아가지요. 그날 제가 대표님께 보고서를 봉투에 담아 드리면서 이런 말씀을 남기고 헤어졌을 겁니다.
"제가 제갈공명도 아닌데, 이렇게 세 번이나 찾아주셔서 황공스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보고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박근혜 후보가 이기기는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더 이상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헤어지고 이틀 뒤 대표님이 저를 다시 불러내셨지요. 네 번째입니다. 그 날도 저는 비슷한 내용으로 거부 의사를 피력하고 있었는데,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봐, 이동욱 씨, 그러지 말고, 나하고 같이 해. 나를 좀 도와줘. 박근혜 후보가 안 되면 이 나라 안보가…."
저는 그때 보았습니다. 대표님의 큰 눈망울에서 갑자기 눈물이 고이더니 주루룩 흘러내렸던...대표님, 기억 나시는지요.
돌연 안병훈 대표님과 서울 법대 동창이던 저의 은사 이상우 교수님이 해주신 이야기가 스쳐 지나가더군요.
"6·25 때 조선일보 편집부장으로 계셨던 부친 안창수씨는 납북되시고, 형도 사망하고…"
제가 그 자리에서 "알겠습니다. 가겠습니다. 하겠습니다"라며 제의를 받아들이게 된 일 기억하시지요(지금 제 곁에서 "허허, 내가 그랬나? 난 기억이 도무지..." 하시며 웃고 계신 듯합니다).
"캠프에 뒤늦게 합류하면 텃세가 심해 쉽지 않을 텐데, 제가 무슨 직함으로 어떤 일을 해드려야 합니까?"
"아, 이동욱 씨는 내 옆에서 내가 필요한 일들을 좀 거들어 줘. 박 후보를 잘 설득할 수 있게. 직함은 '공보특보'로 하지 뭐."
침울했던 표정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한 표정이셨던 걸 저는 기억합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대표님을 모시면서 그 캠프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그때 대표님 덕분에 한나라당 의원들의 면면을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생각이, '아, 인물이 없구나' 였습니다.
당시 대표님은 5선이던 홍사덕 의원과 함께 '제17대 대통령 선거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 경선 대책위원회'의 공동 대표를 맡았지요. 당시 출마한 후보들은 이명박, 박근혜, 원희룡, 홍준표, 고진화 등이었습니다. 그래도 이명박, 박근혜 두 후보 중심일 수밖에 없었고요.
캠프에서 대표님과 함께 회의에 참석한 최초 한 달여 동안에 많은 한계를 절감했지만, 대표님 또한 그러셨다고 기억합니다. 처음엔 저에게 박근혜 후보를 설득할 비책(祕策)을 주문하셔서 며칠을 밤을 새며 이른바 '페이퍼'를 작성해 드리면, 읽어보신 대표님께서는 "이동욱 씨, 아, 이거 내일 독대해서 해보자고"라며 결의에 찬 표정이셨습니다.
다음날 대표님은 득의양양해 하시며 다음 단계를 제게 주문하셨지요. 저도 뭐가 큰 그림이 가능하겠구나 하고 자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자 박근혜 후보의 언설이 다시 돌아가버리는 겁니다.
흔히 말하는 외곽을 넓히는 차원에서 지켜야 할 이념적 가치를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행태가 나타 났습니다.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다가 어느 날 저와 단 둘이 있던 대표님 방에서 대표님이 혼잣말처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거 받아 먹어주질 않으니…"
저나 대표님이나 참으로 딱한 처지였다는 걸 사람들은 모를 겁니다. 허나, 제가 볼 때 박 캠프는 대표님을 영입하여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 확실했습니다. 각축장이던 캠프 내부를 온화한 인품으로 보듬어 안고 계셔서 내부통합은 어느 선거 캠프보다 좋았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마치 큰 항공모함을 탄 느낌이었으니까요.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는 홍사덕 위원장을 중심으로 한 의원들과 당료들이 점점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안병훈 대표의 안보와 이념을 중심으로 하는 전략과 공약들은 힘을 잃어 갔습니다.
경쟁자인 이명박 후보에게 상대적으로 강한 아젠다가 되는 안보와 이념이 이렇게 해서 수포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무렵, 캠프 내에서는 여러 곳에서 볼멘 소리가 나오기 시 작했습니다.
"자고 나면 결정이 뒤집어진다"는 소리였습니다. 제게 특명을 주셔서, 그 원인을 추적해 갔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주변부 사람들을 만나다 그때 처음으로 듣게 된 이름이 "최순실" 이었지요.
저나 대표님이나 이 인물의 배후에 '정윤회'가 있고, 그 아래에 박근혜 후보를 1998년 국회의원 출마 시절부터 지근에서 모셔 온 '4인방'이 존재하는 구조 앞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허...참...어쩌겠어? 이런 말 다른 데서 하지 말고. 이동욱 씨. 그래도 우리가 이 선거에서 이겨야지.“
그리고 이명박 후보 쪽의 '한반도 대운하 건설 공약'에 맞대응하겠다고 내놓은 '서해 열차 페리호'가 박근혜 후보 쪽의 공약이었습니다.
이 공약 제안자를 만나 제가 하나하나 따져 물어가며 좌초시시켰습니다. "열차로 바다를 건너다 배가 침몰하면 쇳덩어리 열차 안에 탄 승객들 대책 있나?"에 상대가 무너졌습니다.
대신에 '가로림만(충남 서산-태안) 프로젝트'를 제가 만들어 제출하였지요. 당시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수석을 뵙고 타당성 등을 다 조사한 뒤 만든 작품이었습니다 만, 뭐, 선거 패배로 인해 이마저도 침몰한 셈이 되었네요.
그때 박근혜 캠프는 값싼 ARS 자동응답기에 의존한 여론조사로 일관했습니다. 명색이 대한민국 최고의 선거여론조사기관 갤럽에서 온 제가 그들을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캠프는 "조사회사들이 MB한테 넘어가 가짜 여론조사 결과를 퍼뜨린다"고 믿고 있었고요. 과학적, 합리적 대응이 어려운 지경이란 점도 확연하게 알게 되지요. 사람들은 조사의 결과가 보여주는 수치의 마력에 빠져서 자신에게 유리한 수치를 보면 비판력이 마비되곤 했습니다.
제가 대표님을 설득하다 실패하고, 그런 절 보시며 짜증도 많이 내셨지요? 그때 저는 대표님을 설득하지 못한 제 자신에게 짜증이 났었습니다. 다들 '동굴 속 우상의 그림자'를 보며 저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에 빠져버리더군요. 결과적으로 주먹구구식 선거판이 되어 버린 겁니다.
돌아보면 제가 대표님을 모시고 석 달 가까이 특명 조사 중심으로 활약한 게 아닌가 합니다. 각종 음모론에 대한 진위 파악 및 대책 수립을 제가 가장 많이 했던 듯싶습니다.
어느 날 오 후에 갑자기 호출하셔서는 매우 긴장된 표정으로 제게 이런 특명을 내리셨지요.
"이봐, 이동욱 씨, MB 쪽에서 우리 박근혜 후보의 '숨겨둔 딸'이 박정희 대통령 비서관을 했던 이광형 씨의 딸이라는 데 확인 좀 해봐.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문 닫아야 해."
저는 그날 밤 12시 반에 대전의 한 호텔 로비에서 이광형 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침에 올라가 진상을 보고드리니 흡족해하시면서 가슴을 쓸어 내리던 모습이 선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캠프의 모든 사람들은 '승리감'에 도취되고 있었습니다. 저 혼자만,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고요.
대표님, 기억나시는지요? 8월20일 전당대회장에서 결선 투표가 있을 때, 전당대회장으로 떠나시던 대표님께 제가 건네드린 '우황청심환'을 받아 묵묵히 드셨던 일 말입니다.
"제가 볼 땐, 아무래도 우리가 이기기 어렵습니다. 이걸 드시고 충격 덜 받으시라고…"
"이 사람은, 그런 말을…."
부정적인 보고를 좋아하시 않으셨던 걸 알면서도 저는 그날 이실직고해야 했습니다. 저를 제외한 모두가 승리를 자축하는 분위기였거든요. 대표님은 그때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없이 밖에서 출발을 재촉하는 의원들과 합류하셨고요. 모두 승리에 들떠 있던...
그 선거는 선거인단 투표와 여론조사를 합쳐 승부를 내는 방식이었는데,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박근혜 후보와 이명박 후보가 49.39% : 49.06 으로 아슬아슬하게 박근혜 후보가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여론조사에서는 42.73% : 51.55 %로 이명박 후보가 거의 10%P나 앞섰지요. 그리고 끝이었습니다.
해단식과 한두 번의 회식 뒤에 대표님도 일상으로 돌아가고, 저도 삶의 현장으로 돌아간 채 한동안 뵐 수 없었지만 저 못지 않게 대표님도 이 과정에서 상처와 교훈도 얻지 않았을까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대표님도 자리나 지위에 연연치 않으시고 퇴임 후 출판사 기파랑에 전념하며 묵묵히 저변 운동을 해오신 줄로 압니다. 그리고 그 의연함을 늘 존경해 왔습니다.
저는 그 후에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를 맡았습니다. 그때마다 조건은 '최종 의사결정권을 나한테 맡긴다'는 것이었습니다. 2007년 경선 캠프에서 얻은 교훈이었습니다.
그 결과, 20% 이상 뒤지던 후보들을 모두 당선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매번, 매 순간, 후보를 설득시키다 못해 서로 언성을 높여야 겨우 이기게 되니 끝이 좋을 리 없지요.
‘눈 목(目)’ 자로 돌을 놓아야 하는데 자꾸만 33을 막겠다고 후보가 나서니 자칫 대마가 잡힐 일들이 비일비재했거든요. 그때가 다시 생각날 따름입니다.
프리랜서로 삶을 꾸려 나가던 2011년에 대표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아, 이동욱 씨. 내가 출판사를 하고 있는데, 당신 글을 책으로 냈어. 계좌번호 보내줘. 초판 인세가 얼마 안 되지만."
정말 뜻하지 않게 대표님께서는 ‘우리의 건국대통령은 이렇게 죽어갔다’를 기파랑의 이름으로 출판해 주셨습니다. 그것도 94쪽에 불과한 얇은 책을 양장본 하드커버로 단단히 무장한 채 말입니다. 저는 그 책을 통해 대표님의 넉넉하고 인자하신 마음을 전해 받으며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몇 차례의 만남과 식사 자리가 있었지만 소소한 이야기들입니다. 한 번은 출판사에 들러 제 책을 한 20권을 사가려 했지요. 포장 꾸러미를 받아든 제가 책값을 지불하려 담당 직원에게 가는데 갑자기 "어잇!"하는 기합 같은 고함소리를 들었습니다.
안 대표님께서 큰 눈을 더 크게 부릅뜨시면서 저를 만류하시는 겁니다. 그 고함소리와 함께 저에게 전해진 따스한 마음이 잊히지 않습니다.
올 들어 갑자기 한 번도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를 인정하지 않던 민주당이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인한 난리통에 주도권을 잡으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언급하고 있었지요.
대표님께서 병환 중이셨지만 다 들어 알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좌익들에 의해 헌법이 수호되는 중이고, 그들에 의해 자유민주주의가 예찬되는 와중에 여전히 그들은 이승만을 독재자로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뭔가 씌인 듯이 제가 집필 작업을 하게 됐습니다.
이번에 출간된 ‘…건국 대통령의 삶과 죽음’이란 책이 나오기까지 와병 중이신데도 마지막까지 저에게 전화로 격려해 주시고 떠나셨군요. 여전히 저를 불러주시던 "이동욱 씨" 하시던 음성이 귓가에 맴돕니다. 늘 어디선가 계실 듯해서 의지하고 살아왔다는 자각이 들게 되니 스산한 바람마저 더 시리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치하를 듣고 계실 줄 믿습니다.
"수고했네. 거, 우리나라 일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그런데두 자네가 그렇게 나를 위해 애써 주다니 참으로 고맙네..."라고 하셨을 것 같습니다.
이제 이곳에 남은 저와 제 동료들이 대표님이 못 다 이룬 꿈을 성취하기 위해 계속 분투해 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염려 놓으시고, 부디 영면 하소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5년 11월2일 이동욱 기자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