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화제작 〈오디세이〉를 봤습니다. 세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놀란 감독의 주요 작품을 거의 다 봤습니다. 〈오펜하이머〉, 〈덩케르크〉, 배트맨 시리즈, 특히 〈인셉션〉, 〈인터스텔라〉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특히 〈인셉션〉을 보며 ‘아, 이런 영화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그 천재성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과거의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들어간 영화이고,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정도의 매출액(10억 달러)을 기록하고 있는, 아마 놀란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오디세이라는 말은 이제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디세이라고 하면 대항해 또는 대장정이라는 뜻입니다. ‘오디세이’는 호메로스라는 그리스 시인의 작품인데, 서방문명의 뿌리에 있었던 신화와 전쟁, 영웅, 비극, 바다가 하나의 이미지로 합성되어 서양 사람들의 정신과 서양 문명의 영혼 한 부분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명작이라기보다는 유럽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영화화된 작품들은 있었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는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편쯤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함해 ‘오디세이’의 전체를 보여주는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란 감독의 문제의식과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재미가 있었습니다. 장면이 장대했고, 요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그래픽에 의존한 장면이 거의 없이 실사에 가까운 장면들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항해 장면에서 고대 배를 실물로 제작해 촬영한 장면은 아주 박진감 넘쳤습니다.
이 영화는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 당시 공격하던 군대가 지쳐 있을 때 오디세우스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목마를 선물로 바치고 물러난 척하면서 그 안에 군인들을 숨겼고, 트로이 사람들이 그것을 선물로 알고 성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밤이 되자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용사들이 나와 트로이를 멸망시킵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묘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3천 년 전 그리스의 이야기가 왜 오늘의 저에게 공감을 줄까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위대성입니다. 문학은 시대와 지역과 민족을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오디세이가 어쩌면 대한민국의 지난 100여 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오디세이의 한가운데 있는 것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개화기로부터 시작해 식민지로 들어갔다가 건국, 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갈등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오디세우스와 닮아 보였습니다.
이 영화의 핵심 테마는 ‘전쟁’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비록 승리했지만,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한 그리스 군대에 신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왜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 한 사람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었느냐는 화두가 던져집니다. 그것은 전쟁 때문 아닐까요? 이기기는 했지만, 그 승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고 얼마나 많은 문명을 파괴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업보가 귀향길에서 이어지는 여러 사건으로 상징화되어 나타났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를 파괴한 자가 그 대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가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입니다.
이 이야기를 지난 80년의 한국 현대사에 대입해 보면 한국전쟁이 우리의 트로이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의 의미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전쟁을 20세기 3대 전쟁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제국, 오스트리아제국, 오스만튀르크제국, 러시아제국을 무너뜨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은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 무솔리니의 파시즘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무엇이었습니까?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이 합작한 국제 공산주의의 도발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이승만과 국군을 중심으로 버티고, 트루먼 대통령의 결단으로 미군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이 참전하면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전쟁이었습니다.
전쟁 초기 대한민국은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열흘간 버텼습니다. 당시 주한미군은 없었습니다. 남침과 기습을 당한 대한민국이 있었고, 이승만과 국군이 외롭게 버티고 있었습니다. 반면 김일성은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도움을 받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기습했습니다. 6월25일 남침 이후 일본에 있던 미 제24사단이 한국에 전개되는 7월5일까지, 그 열흘 동안 버텨낸 이승만과 국군, 그리고 국민의 이야기는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 이상으로 기록되어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는 『오디세이』 이상의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배운 사람들, 지식인들, 정치인들, 좌익 운동권이 그 역사를 말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8월15일 정부 경축식에서 이승만과 국군, 건국과 미국의 도움은 지워지고, 김구를 앞세워 이승만과 국군, 미국과 자유민주주의를 지우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더욱더 〈오디세이〉라는 영화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6·25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여섯 살 때 경북 청송에서 우리 마을이 유엔군의 오폭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 집은 불탔습니다. 우리 집에 와 있던 할머니 한 분은 기총소사를 당해 돌아가셨고, 그 뒤 몇 달 동안 인민군 치하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어떤 의미에서는 동화 같은 6·25였습니다. 진짜 지옥을 온몸으로 감당한 것은 우리의 삼촌 세대와 부모 세대였습니다. 그분들이 겪은 고통은 트로이 전쟁으로 상징될 수 있습니다. 그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한 생존력을 갖게 되었고, 그 힘으로 산업화를 해냈고 민주화의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통일을 바라보고 있지만, 북한은 핵무장을 통해 한반도의 핵 경쟁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한국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300만 명이 죽었다면 그 몇 배의 사람이 다치고 삶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300만 명의 원혼이 저승에서 과연 편히 잠들 수 있겠습니까? 〈오디세이〉에서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오디세우스에게 “왜 우리를 제대로 장례 치르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것을 한국 현대사에 대입하면, 300만 명의 원혼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를 잊었느냐? 이렇게 웰빙으로만 살아도 되느냐? 이렇게 집단이기주의에 빠져도 되느냐? 이렇게 교양 없이 살아도 되느냐? 부정선거 음모론 같은 데 넘어가 좀비처럼 살아도 되느냐?”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디세이』에는 신도 있고 괴물도 있고 영웅도 있고 간신배도 있고 여러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순정도 있고 미녀도 나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야기의 배경은 바다입니다. 오디세이는 육지의 대장정이라기보다 대항해의 이야기입니다. 이 점 역시 한국 현대사와 연결됩니다. 지난 80년 대한민국의 오디세이는 곧 ‘한국의 해양화’였습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까지 차단되자 살기 위해 세계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를 개척했고, 세계적인 해양국가가 되었습니다. 지금 조선과 해운 분야에서 대한민국은 세계 유수의 씨 파워(Sea Power)입니다.
민주주의 역시 상당 부분 해양문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디세이의 무대도 결국 해양이고, 해양화이고, 세계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디세이』는 바로 한국의 이야기, 한국인의 이야기처럼 들렸습니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 중심의 해양문화는 서방문명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바이킹과 노르만의 해양 진출이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을 뒤흔들었고, 노르만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했다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법치의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야만이 문명 건설자로 바뀐 것입니다. 법치를 했기 때문입니다. Law라는 말도 바이킹계 언어에서 영어로 들어온 말입니다. 그렇게 독특한 영국법이 정착했고, 그 위에서 민주주의가 꽃피었습니다. 법치와 민주주의를 함께 발전시킨 영국의 모델은 미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한국 헌법에도 이러한 해양문명과 영미 법치의 유산이 상당 부분 담겨 있습니다.
서양문명의 중심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해양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대항해와 그리스의 『오디세이』, 그리고 그 맥락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지난 80년 해양화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개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한글전용입니다.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야 합니다. 혼용은 더불어 살자는 이야기이고, 섞여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전용은 우리끼리만 살자는 발상입니다. 한글전용으로 한자를 배제하면서 한국어의 문해력과 어휘력, 분별력이 떨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반대로 영어는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어, 특히 고급 개념어를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표현력이 풍성해졌고 세계 언어로 성장했습니다. 이 두 사례를 비교하면 한글전용을 부르짖고 이를 뒷받침해 온 세력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反문명적인 발상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디세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상상력이 이렇게 넓어집니다. 그리고 보편성을 갖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청동기 시대 그리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AI 시대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오디세우스를 연기했습니다. 저는 일생일대의 명연기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만에 다시 만난 부인 앞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생을 하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돌아보며 그 죄에 대한 속죄와 고통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신배들을 물리친 뒤 아들에게 왕권을 넘기고 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서쪽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원작과 다소 다를 수도 있고, 영화적 각색 때문에 원작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놀란 감독의 작품 가운데 이것이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직접 보시고 즐기신 뒤, 대한민국 현대사와 겹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화제작 〈오디세이〉를 봤습니다. 세 시간이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놀란 감독의 주요 작품을 거의 다 봤습니다. 〈오펜하이머〉, 〈덩케르크〉, 배트맨 시리즈, 특히 〈인셉션〉, 〈인터스텔라〉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특히 〈인셉션〉을 보며 ‘아, 이런 영화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그 천재성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이〉는 과거의 작품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우선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들어간 영화이고, 제작비를 회수하고도 남을 정도의 매출액(10억 달러)을 기록하고 있는, 아마 놀란 감독의 작품 가운데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오디세이라는 말은 이제 일반명사가 되었습니다. 오디세이라고 하면 대항해 또는 대장정이라는 뜻입니다. ‘오디세이’는 호메로스라는 그리스 시인의 작품인데, 서방문명의 뿌리에 있었던 신화와 전쟁, 영웅, 비극, 바다가 하나의 이미지로 합성되어 서양 사람들의 정신과 서양 문명의 영혼 한 부분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명작이라기보다는 유럽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 수 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영화화된 작품들은 있었습니다. 가장 드라마틱한 것이 트로이의 목마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입니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는 제가 본 것만 해도 세 편쯤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포함해 ‘오디세이’의 전체를 보여주는 세 시간짜리 영화를 보면서 새삼 놀란 감독의 문제의식과 천재성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영화는 무엇보다 재미가 있어야 하는데, 재미가 있었습니다. 장면이 장대했고, 요즘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컴퓨터그래픽에 의존한 장면이 거의 없이 실사에 가까운 장면들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항해 장면에서 고대 배를 실물로 제작해 촬영한 장면은 아주 박진감 넘쳤습니다.
이 영화는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 따르면 트로이 전쟁 당시 공격하던 군대가 지쳐 있을 때 오디세우스가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트로이의 목마’입니다. 목마를 선물로 바치고 물러난 척하면서 그 안에 군인들을 숨겼고, 트로이 사람들이 그것을 선물로 알고 성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밤이 되자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용사들이 나와 트로이를 멸망시킵니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묘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3000 년 전 그리스의 이야기가 왜 오늘의 저에게 공감을 줄까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위대성입니다. 문학은 시대와 지역과 민족을 뛰어넘는 힘이 있습니다. ‘이 오디세이가 어쩌면 대한민국의 지난 100여 년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오디세이의 한가운데 있는 것 아닌가? 개화기로부터 시작해 식민지로 들어갔다가 건국, 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갈등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뒷모습이 오디세우스와 닮아 보이지 않는가.
이 영화의 핵심 테마는 전쟁과 귀환과 항해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비록 승리했지만,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한 그리스 군대에 신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왜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 한 사람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했느냐는 화두가 던져집니다. 평화를 파괴한 자가 그 대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가 오디세우스라는 영웅입니다.
저도 6·25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여섯 살 때 경북 청송에서 우리 마을이 유엔군의 오폭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 집은 불탔습니다. 우리 집에 와 있던 할머니 한 분은 기총소사를 당해 돌아가셨고, 그 뒤 몇 달 동안 인민군 치하에서 고생했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린 소년의 눈으로 본, 어떤 의미에서는 동화 같은 6·25였습니다. 진짜 지옥을 온몸으로 감당한 것은 우리의 삼촌 세대와 부모 세대였습니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한 생존력을 갖게 되었고, 그 힘으로 산업화를 해냈고 민주화의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한국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300만 명이 죽었다면 그 몇 배의 사람이 다치고 삶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300만 명의 원혼이 저승에서 과연 편히 잠들 수 있겠습니까? 〈오디세이〉에서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오디세우스에게 '왜 우리를 제대로 장례 치르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디세이>에는 신도 있고 괴물도 있고 영웅도 있고 간신배도 있고 여러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은 바다입니다. 지난 80년 대한민국의 오디세이는 ‘한국의 해양화’였습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삼면이 바다이고 북쪽까지 차단되자 살기 위해 세계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를 개척했고, 세계적인 해양국가가 되었습니다. 민주화도 해양화의 산물입니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 중심의 해양정신은 서방문명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바이킹과 노르만의 해양 진출이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을 뒤흔들었고, 바이킹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했다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법치의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Law는 바이킹 말인데 노르만의 영국경영으로 영어로 들어온 말입니다. 바이킹-노르만의 법치 위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그 모델은 1689년 권리장전을 거쳐 미국의 건국정신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승만, 개신교, 프린스턴 대학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헌법과 건국정신으로 이어집니다. 한국의 민주화와 해양화는 그리스-아테네-바이킹-노르만-미국으로 이어지는 세계 1류 모델이기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80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3개의 자유를 지켜냈습니다.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재산권의 자유. 특히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언론의 자유만 있으면 한국은 공산화도, 독재화도 불가능합니다. '
서양문명의 중심에는 바다가 있었습니다. 해양세력이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대항해와 그리스의 『오디세이』, 그리고 그 맥락을 이어받은 대한민국의 지난 80년 해양화가 서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바다로 나아가야 합니다. 개방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한글전용입니다.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야 합니다. 혼용은 더불어 살자는 이야기이고, 섞여 살자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전용은 우리끼리만 살자는 발상입니다. 한글전용으로 한자를 배제하면서 한국어의 문해력과 어휘력, 분별력이 떨어졌다고 저는 봅니다. 반대로 영어는 노르만 정복 이후 프랑스어, 특히 고급 개념어를 대량으로 받아들이면서 표현력이 풍성해졌고 세계 언어로 성장했습니다. 이 두 사례를 비교하면 한글전용을 부르짖고 이를 뒷받침해 온 세력이 얼마나 폐쇄적이고 反문명적인 발상을 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디세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상상력이 이렇게 넓어집니다. 그리고 보편성을 갖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청동기 시대 그리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AI 시대 대한민국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오디세우스를 연기했습니다. 저는 일생일대의 명연기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는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오랜 세월 만에 다시 만난 부인 앞에서 왜 자신이 이런 고생을 하며 돌아올 수밖에 없었는지를 고백합니다. 자신이 트로이 전쟁에서 공을 세웠지만, 그 과정에서 얼마나 잔인한 짓을 했는지 돌아보며 그 죄에 대한 속죄와 고통을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신배들을 물리친 뒤 아들에게 왕권을 넘기고 부인과 함께 배를 타고 서쪽 세상으로 나아가면서 영화가 끝납니다. 해피엔딩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내용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 원작과 다소 다를 수도 있고, 영화적 각색 때문에 원작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놀란 감독의 작품 가운데 이것이 최고의 작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를 직접 보시고 즐기신 뒤, 대한민국 현대사와 겹쳐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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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기선을 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장은 인천 출신 신순성이다. 조선일보 주불(駐佛)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린 신용석(愼鏞碩) 전 인천아시안 게임 유치위원장은 신(愼) 선장의 손자이다. 그는 연재중인 이 유조선 항해기를 읽고 흥미진진하다는 메시지를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저의 오디세이입니다'고 답장을 보냈다. 오디세이를 일반 명사로 쓰면 '대항해' '대장정' '모험여행'이란 뜻이다. 나는 3시간짜리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 '이건 우리나라 이야기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영화평을 써올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