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살아야 대한민국이 산다"

심양섭 著 '이승만 평전', 양장 473쪽, 정가 4만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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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핵심 결론 10문장

1. 이승만 재평가는 2024년 <<건국전쟁>> 영화 한 편에서 갑자기 시작된 현상이 아니라 1990년대 말 이후 학계·시민운동·출판운동이 축적한 결과다.

2. 이 평전의 출발점은 ‘친일·분단·독재’로만 압축된 ‘이승만 기억’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재평가다.

3. 이승만의 90년은 독립·건국·전쟁·동맹을 둘러싼 ‘사투’라는 말로 관통된다.

4 그는 ‘분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냉전과 소련 점령으로 갈라지던 한반도에서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했다.

5. 1948년 건국은 헌법·선거·국민주권·국제승인을 통해 해방을 현실 국가로 전환한 제도혁명이었다.

6. 농지개혁은 지주제를 약화시키고 소작농을 자영농과 국민으로 바꾼 자유민주주의의 토지혁명이었다.

7. 반공포로 석방은 개인의 귀환 선택을 지키면서 미국을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압박한 ‘위험한’(?) 외교적 승부수였다.

8. 한미동맹·의무교육·시장제도와 제조업의 성장은 박정희 시대 산업화가 활용할 안보·인적·제도적 기반이 됐다.

9. 부산정치파동은 국민 직선제라는 민주적 목표와 계엄·의원 연행이라는 비민주적 수단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10. 이승만의 공과를 같은 저울에 올리는 것이 다음 세대에 대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PART I


제1부. 왜 지금 이승만인가

 

1. 영화 한 편이 아니라 20여 년의 역사투쟁

이승만 재평가는 2024년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만든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그 씨앗은 1990년대 말 학계에서 뿌려졌고, 2002년 대선과 노무현 정부 출범 이후 대중적 보수운동으로 확장됐다고 본다. 〈건국전쟁〉의 약 117만 관객은 이 흐름의 원인이 아니라, 학자·저술가·출판인·시민·목회자·평신도가 오랫동안 만든 토양에서 나온 결과라는 설명이다.

1998년 전향 주사파 출신 지식인들이 창간한 『시대정신』은 자유주의, 북한 인권, 대한민국 정통성의 언어를 정비했다. 2003년 3·1절 서울시청 앞에서는 북한 핵개발과 주한미군 철수에 반대하고 한미동맹과 자유통일을 외치는 대규모 국민대회가 열렸다. 2004년에는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학법 개정 등 ‘4대 개혁입법’에 반대하여 보수 진영이 장외투쟁에 나섰다.

교수·예비역 장성·전직 공무원·기업인·교회 장로와 권사들이 거리의 시민세력으로 등장했다.

거리의 각성은 역사와 교과서 문제로 이어졌다. 2004년 자유주의연대, 2005년 교과서포럼과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출범했고, 교과서포럼은 ‘대한민국은 실패한 역사가 아니라 성공한 역사’라는 문제의식으로 기존 근현대사 서술에 도전했다. 기파랑 등 보수 출판사들이 이승만·박정희 시대를 다시 읽는 책을 펴냈고, 2008년에는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가 출간됐다.

이 연속선 위에서 이승만 재평가는 학술 논쟁을 넘어 시민운동과 문화운동이 되었다.

 

2. ‘건국전쟁’ 이후에도 남은 오래된 프레임

영화가 흥행했다고 해서 ‘친일·분단·독재’라는 세 단어의 프레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자가 출석하는 우리들교회에서 김양재 목사가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밝히고 청년들에게 관련 강의를 하며, 소그룹 지도자들에게 〈건국전쟁〉 관람을 부탁했을 때 일부 평신도 지도자들이 반발한 일은 개인적으로 충격이었다.

보수적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도 오래된 인식이 견고하다는 사실은 영화보다 길고 정확하며 설득력 있는 평전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했다.

저자는 기자 경험과 정치학 연구를 결합해 이승만의 전 생애를 한 권의 서사로 복원하고자 했다. 논문과 논설은 많았지만 배재학당·독립협회·한성감옥에서 시작해 미국 유학과 하와이, 임시정부와 워싱턴 외교, 귀국과 건국, 전쟁과 동맹, 전후 재건과 하야까지 90년을 연결한 읽기 쉬운 본격 평전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 책은 저널리즘의 서사성과 아카데미즘의 검증을 결합하고, 스토리텔링으로 독자의 접근성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3. 김일영 교수가 남긴 미완의 숙제

집필은 학문적 기획인 동시에 스승에게 진 빚을 갚는 일이었다. 저자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였던 고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는 2009년 마흔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정치학자였지만 사료에 뿌리내린 ‘역사 있는 정치학’을 추구했다. 외국 이론을 한국 현실에 얹는 데 그치지 않고, 국가형성·전쟁·정치경제·지도자의 선택을 구체적 역사 속에서 설명하려 했다.

김일영은 이승만을 무조건 찬양하지 않았다. 농지개혁의 혁명성을 밝히면서도 부산정치파동의 강압을 외면하지 않았고, 북진통일론과 반일정책의 진정성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국내정치와 정권 유지에 활용된 방식을 분석했다.

김일영 교수의『건국과 부국』, 「농지개혁을 둘러싼 신화의 해체」, 「전시정치의 재조명」, 「이승만정부에서의 국내정치」는 이승만 시대를 비교사와 정치경제의 관점에서 다시 읽는 좌표가 되었다.

저자는 김일영의 연구뿐 아니라 유영익의 저서, 이승만 서한집, 로버트 올리버의 전기와 서신, 이택선의 『우남 이승만 평전』 등을 다시 읽었다. 반면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평전은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라는 부제를 단 김삼웅의 책이었고, 이택선의 균형 잡힌 평전은 새 책을 구하기 어려웠다.

이 불균형을 보며 스승이 남긴 미완의 재평가를 후학이 이어야 한다는 책임이 구체적인 집필로 이어졌다.

 


PART II


제2부. 비교사·제도·시시비비의 방법

 

4. 비교사의 저울: 같은 시대의 국가건설 지도자들과 함께 보기

이 평전이 선택한 첫 번째 방법은 비교사다. 이승만을 남한 내부의 좁은 맥락에만 가두지 않고, 제국 해체·식민지 해방·전쟁·체제 경쟁이라는 유사한 조건 속에서 국가를 세운 지도자들과 나란히 놓는다. 비교는 이승만을 다른 지도자와 동일시하거나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다.

오늘의 완성된 민주주의 기준을 1940~1950년대 취약국가에 그대로 투사할 때 놓치는 구조적 제약과 선택지를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제1, 2차 세계대전 전후 신생국 국민들이 원한 것은 수입된 제도만이 아니었다. 질서를 세우고 외세와 협상하며 국가 생존을 확보할 강한 지도력을 요구했다. 튀르키예의 아타튀르크, 이집트의 나세르, 싱가포르의 리콴유는 장기집권과 권위주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독립·국가건설·근대화의 공로를 함께 평가받는다.

대만의 장제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사리크와 베네시도 비교의 창에 넣어, 건국 지도자에 대한 기억이 단순한 철거와 망각만으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지도자

재임·통치 기간

비판 쟁점

국가적 기억의 방식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1923~1938, 약 15년

권위주의·장기집권

앙카라 아느트카비르에 국부로 모시고 국가 차원의 공식 추모

가말 압델 나세르

1956~1970, 약 14년

권위주의·야당 억압

자택을 박물관으로 보존하고 수에즈운하 국유화 등 정치적 유산을 기억

리콴유

1959~1990, 약 31년

장기집권·정치적 통제

‘건국 총리’로 공식 기록하고 추모 아카이브·건국세대 기념사업 추진

이승만

1948~1960, 약 12년

부산정치파동·개헌·부정선거

독립·건국·동맹의 공과 권위주의의 과를 함께 기억해야 한다는 재평가 과제

  

5. 제도의 시선: 영웅의 의지보다 지속되는 국가의 장치

두 번째 방법은 제도다. 지도자의 의지만으로 국가의 생존과 성장을 설명하지 않고 헌법, 선거, 국제승인, 농지개혁, 군사동맹, 교육, 은행과 시장제도가 어떤 경로를 만들었는지를 추적한다. 1948년 헌법과 총선거는 해방 공간의 정치적 가능성을 현실 국가로 조직했고, 농지개혁은 소유 구조와 농민의 이해관계를 바꾸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전쟁 재발을 막는 가장 확실한 제도적 장치였고, 학교는 산업화와 민주화의 주체를 동시에 길러 냈다.

이 접근은 이승만의 공로를 과장하지 않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건국은 한 사람의 단독 작품이 아니었다. 연합국의 전후 질서, 소련과 북한의 움직임, 미국의 정책, 국내 정치세력, 국회, 관료, 군인, 시민의 선택이 함께 작용했다.

물론 이승만이 여러 가능한 미래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선거와 국제승인의 길로 조직하고, 그 체제가 생존할 제도를 얻기 위해 강대국과 투쟁한 정치적 역할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6. 시시비비: 재평가와 비판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기

오랫동안 이승만의 과는 청동에 새기고 이승만의 공은 물에 써 온 기억의 불균형을 바로잡되, 불편한 사실을 지우지 않는다.

농지개혁의 혁명성과 교육 팽창, 전쟁 지도와 동맹 건설을 복원하면서도 부산정치파동의 계엄과 의원 연행,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자유당과 이기붕 일파의 인의 장막을 함께 기록한다.

저자는 이승만을 시대의 한계 안에서 최선과 최악을 함께 남긴 인간으로 읽자고 제안한다. 공의 역사적 비중을 복원하면서 과의 책임도 분명히 하는 것이 보수우파가 지켜야 할 시시비비의 역사관이다.

 

7. 이승만의 생애를 관통하는 말: 사투

이택선은 “이승만, 그의 사투의 흔적은 고스란히 역사가 되었다”고 썼다.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웠고, 임시정부 승인을 얻기 위해 워싱턴의 닫힌 문을 수십 년 두드렸다. 태평양전쟁 전 일본의 미국 공격 가능성을 경고했으며, 해방 뒤에는 소련과 김일성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기 전에 자유민주공화국을 세우려고 투쟁했다.

6·25 남침으로 국가가 붕괴할 위기에서는 미국과 유엔군을 붙잡고 국군을 재건하려 했다. 정전이 안전보장 없는 분단 고착으로 끝나지 않도록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위험한 승부수를 던졌고, 미국으로부터 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냈다.

그의 강한 자의식과 카리스마를 개인적 권력욕만으로 설명해서는 곤란하다. 식민지에서 갓 풀려난 취약국가, 북한의 전체주의, 소련·중국의 팽창, 한국을 버릴 수도 있었던 강대국이라는 상대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승만은 욕을 먹더라도 나라를 남기는 지도자가 되려고 했다.

 


PART III

 

제3부. 독립운동·체제선택·건국혁명

 

8. 독립운동 50년의 연속선

 먼저 독립과 개혁을 외치던 청년 이승만이다. 배재학당과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그는 대중의 정서를 읽어 언어로 동원하는 선동가였고, 국제정세의 틈을 찾는 정치가였다. 독립과 개화개혁을 외친 대가로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을 보냈다. 감옥은 그의 기독교 신앙, 근대국가 구상, 교육과 출판에 대한 집념이 형성된 공간이었다.

그 뒤 미국 유학, 하와이 한인 교육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워싱턴 중심의 외교독립운동이 이어졌다. 미국의 승인을 얻는 일은 번번이 실패했지만, 문서·연설·인맥·출판을 통해 한국 독립을 국제정치의 의제로 만들려 했다. 1941년 『일본내막기』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미국 공격 가능성을 경고한 일도 이 장기 외교전의 일부였다.

1945년 귀국한 이승만은 갑자기 권력을 얻은 노정객이 아니다. 그의 권력은 수십 년의 조직·외교·대중정치 경험에서 형성됐다.

 

9. 분단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체제를 선택했다

이승만 재평가의 첫 열쇠는 분단과 체제 선택을 구분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반도 분단을 원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미·소 점령과 냉전으로 갈라지던 한반도에서 어떤 체제의 국가를 세울 것인가를 선택했다. 그 선택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민주권을 헌법과 선거로 제도화하는 길이었다.

1946년 정읍 발언은 미소공동위원회가 멈춘 상황에서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를 세우고 소련 철수를 국제 여론에 호소하자는 논리였다. 1947년 유엔은 총선거를 결의했으나 소련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진입을 거부했다. 1948년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가 실시되는 경로가 열렸다.

이승만은 미국이 선호한 미소협조와 좌우합작의 틀에 순응하기보다 정읍 유세와 같은 대중집회, 국내외 여론전, 외교를 통해 자유민주주의 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국내 조직 기반이 취약했던 그에게 권력은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익힌 장외 대중정치, 국제정세의 균열을 이용하는 외교, 정부 수립이라는 단일 목표에 세력을 결집시키는 능력으로 정치적 승리를 쟁취했다.

 

10. 1948년 건국혁명: 해방을 국가로 바꾸다

1948년은 해방이 현실 국가가 된 해였다. 이것은 제도의 대전환이라는 의미에서 ‘건국혁명’이다. 헌법은 민주공화국, 국민주권, 기본권을 선언했고, 총선거는 왕조와 식민지의 신민을 주권을 가진 시민으로 전환했다. 정부·영토·국민·헌법과 국제승인을 갖춘 대한민국은 1919년 임시정부의 공화국 정신을 현실국가로 이어받았다.

건국은 완결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국제사회와의 공존, 언젠가 자유와 평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질 통일이라는 방향을 세웠다. 이승만의 역할은 이 가능한 미래를 국가 제도의 경로로 조직한 데 있었다. 건국 과정의 불완전성과 정치적충돌을 인정하면서도 대한민국이 우연히 생긴 나라가 아니라 치열한 선택과 투쟁의 산물이라는 사실을 복원해야 한다,

 

11. 월남민과 탈북민이 보여 준 체제의 선택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북에서 남으로 내려온 실향민과 1990년대 중반 이후 대한민국을 선택한 3만4천여 탈북민의 발걸음은거대한 역사적 선택이다. 

핵심은 그들이 완전한 나라가 아니라 김일성 전체주의가 아닌 자유의 가치 위에 세워진 나라를 선택했다는 데 있다.

탈북민에게 대한민국은 추상적 제도가 아니라 목숨을 걸고 건너온 자유의 땅이며, 다시 학교에 다니고 직업을 얻고 신앙을 지킬 수 있게 한 실제의 국가다.

‘나라가 서야 사람도 선다’는 결론은 국가주의적 구호가 아니라, 선택 가능한 자유의 국가가 존재해야 개인의 삶과 권리도 지킬수 있다는 체험적 주장이다.

 

 

PART IV

 

제4부. 국가 생존과 근대화의 기초

 

12. 농지개혁: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수행한 토지혁명

1940년대 후반 남한 인구의 약 70.9%가 농민이었고, 그 가운데 80% 이상이 소작농 또는 자소작농이었다는 수치는 토지 문제가 국가 생존의 문제였음을 보여 준다. 개혁이 실패하면 대한민국은 지주과두제 국가로 굳어지거나 공산혁명의 토양이 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지주세력에 기대어 농지개혁에 소극적이었다’는 통설에 대해 김성호·박종철·신병식·김일영 등의 실증연구가 재검토를 요구했다.

농지개혁은 대통령의 명령 한 줄이나 무상몰수·무상분배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제헌헌법과 국회의 입법, 유상매수·유상분배라는 헌정 절차를 거쳤다. 1950년 4월부터 분배예정통지서가 발송됐고, 일부 연구는 6·25전쟁 전에 분배 대상 농지의 70~80%가 농민에게 넘어갔다고 본다.

동기와 과정은 복합적이고 절충적이었지만 결과는 지주계급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약화하고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바꾼 구조적 변혁이었다.

농지개혁은 북한의 토지혁명 선전을 약화시켰고 농민에게 ‘지켜야 할 내 땅’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이해관계를 만들었다. 토지 소유의 확대는 사회 이동과 교육 투자의 기반이 되었고, 훗날 산업화가 동원할 비교적 평평한 사회경제적 바닥을 조성했다.

한국 현대사의 큰 사회혁명 가운데 하나가 공산혁명이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헌정 절차로 수행한 토지혁명이었다.

 

13. 6·25전쟁: 갓 태어난 국가의 생존 시험

6·25전쟁은 1948년에 세워진 국가가 실제로 존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 시험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국제전으로 규정하고 미국과 유엔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서울 함락과 피란, 국군 붕괴의 위기 속에서 정부를 유지하고 전쟁을 국제화한 선택은 대한민국의 소멸을 막는 핵심 조건이 됐다.

전쟁은 헌법과 정부만으로 국가가 지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인시켰다. 군사력, 외교, 동맹, 국민의 신뢰, 지도자의 결단이 함께 작동해야 했다. 공산군 점령을 직접 경험한 시민들에게 대한민국과 북한의 체제 차이도 관념이 아니라 삶의 문제가 되었다.

전쟁 경험은 이후 이승만의 정전 반대, 북진통일 주장,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를 하나의 연속된 국가 생존 전략으로 만들었다.

 

14. 반공포로 석방: 자유와 절차가 충돌한 위험한 승부

1953년 6월 18일 새벽, 이승만 정부는 유엔군사령부의 동의 없이 약 2만7천 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북송을 거부하는 포로에게 귀환을 강제해서는 안 된다는 개인 선택의 원칙과, 안전보장 없는 정전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국가전략이 만난 사건이었다. 이 결단은 정전 협상의 판을 흔들었고 이승만을 국제적 논쟁의 중심에 세웠다.

이승만은 이 사건을 계기로 『타임』지의  표지인물이 됐다.

성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맹의 군사 지휘질서와 합의 절차를 깨고 전쟁 재개 위험을 키웠으며, 미국은 이승만을 통제하거나 제거하는 비상계획까지 검토했다. 반공포로 석방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절차를 흔들었고, 동맹을 위험에 빠뜨리는 방식으로 동맹의 제도화를 앞당긴 역설적 사건이다.

평전의 서장이 「위대한 탈출」인 것은 이승만 정치의 결단·모험·성과·위험이 한 사건 안에 압축돼 있기 때문이다.

 

15. 한미상호방위조약: 미국에 순종해서가 아니라 붙잡아서 얻다

이승만을 미국의 하수인으로 보는 단순한 친미 프레임은 그가 미국과 벌인 충돌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는 미국 지원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안전보장 없는 정전에는 순응하지 않았다.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압박 뒤 미국은 한국군 20개 사단 증강, 장기 경제원조, 상호방위조약 협상에 나섰다.

미국의 분노와 이승만 제거 검토는 역설적으로 그가 워싱턴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는 지도자가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1953년 10월 1일 변영태 외무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이 조약에 서명했고, 미 상원은 81대 6으로 비준했다. 조약은 1954년 11월 18일 발효됐다. 이승만이 원한 자동개입 조항을 담지는 못했으며, 한국을 보호하는 동시에 단독 북진으로 미국이 원치 않는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막는 통제 장치이기도 했다. 보호와 억제가 함께 들어 있는 동맹이었다.

그럼에도 조약과 미군 주둔은 북한의 재남침 비용을 미국과의 전쟁 수준으로 높였다. 한국은 미국의 일방 통보를 받는 주변부에서 조약상 협의를 요구할 수 있는 동맹 당사자로 이동했다. 이승만이 얻은 것은 군사원조만이 아니라 학교를 세우고 공장을 돌리며 제도를 정비할 시간이었다.

‘단 한 발의 총알도 쏘지 않는 무기’라는 표현은 한미동맹이 산업화와 민주화에 제공한 장기 안보의 가치를 압축한다.

 

16. 교육혁명: 산업화의 인적 연료와 민주주의의 주체

전쟁과 빈곤 속에서도 초등의무교육과 문맹퇴치, 중·고등·대학의 확대가 진행됐다. 1950년대 말 취학률이 96%를 넘고 비문해율이 급격히 낮아졌다. 학교는 공장을 관리할 기술자, 수출서류를 작성할 사무원, 작업지시를 읽는 노동자, 국가를 운영할 공무원과 전문가를 길러 냈다. 돈과 공장은 부족했지만 글을 읽고 기술을 익힐 청년이 늘어나는 사회가 형성됐다.

농지개혁이 소유와 사회 이동의 바닥을 평평하게 했다면 교육은 그 바닥 위로 올라갈 사다리를 놓았다. 한미동맹이 외부의 방패였다면 교육은 내부의 근육이었다. ‘박정희가 산업화의 엔진을 가동했다면 이승만은 그 엔진에 들어갈 인적 연료를 미리 쌓아 두었다.’

교육의 효과는 권력에 순응하는 인력 양성에 그치지 않았다. 교육받은 학생과 시민은 4·19혁명의 주역이 되어 3·15 부정선거와 권위주의를 심판했다. 교육혁명은 경제성장의 토대이면서 동시에 권위주의를 되받아친 민주주의의 토대였다. 국가가 심은 교육의 씨앗이 정권의 한계를 교정하는 시민을 길러 냈다는 점에서 가장 생산적인 역사적 역설이 나타난다.

 

17. 1950년대: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발전국가의 맹아기1950년대를 전쟁·원조·빈곤·부패만 남은 불임의 시대로 규정하면 1960년대 산업화의 전제조건을 설명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 1959년까지 미국 원조 총액은 20억 달러를 넘었고, 1954~1959년 제조업은 연평균 12% 넘게 성장해 생산량이 거의 두 배가 됐다. 같은 기간 총고정자본형성은 약 70% 증가했다.

수출입링크제와 보호관세의 초기 형태, 은행법 등 시장경제와 산업정책의 제도적 기틀도 1950년대에 나타났다.

성장의 한계도 분명했다. 원조 의존과 삼백산업의 과잉, 자본 축적의 부족이 겹쳤다. 미국의 대한 원조는 1957년 3억3천만 달러에서 1961년 1억9천만 달러로 줄었고, 경제성장률은 1957년 9.4%에서 1960년 2.4%로 하락했다. 절대적 궁핍과 상대적 성장이 공존했으며, 성장 기반은 만들어졌지만 자립적 축적 체계로 완성되지는 못했다.

 

지표

수치

의미

미국 원조

해방 이후 1959년까지 20억 달러 이상

전후 복구와 경제 유지의 외부 기반

제조업 성장

1954~1959년 연평균 12% 이상

공업화의 초기 축과 생산능력 확대

총고정자본형성

1954~1959년 약 70% 증가

설비·기반 투자 확대

미국 원조 감소

1957년 3.3억 달러 → 1961년 1.9억 달러

원조 의존 성장구조의 취약성 노출

경제성장률

1957년 9.4% → 1960년 2.4%

정권 후반 경제 위기와 사회 불만의 배경

초등 취학

1950년대 말 96% 이상

산업화·민주화의 인적 자본 형성

 

18. 이승만의 기초와 박정희의 근대화: 건국과 부국의 바통터치

박정희의 산업화는 진공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국가의 행정골격,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헌법적 방향, 지주제를 약화시킨 농지개혁, 보편교육으로 축적된 인적자본, 미국 원조와 한미동맹이 제공한 안보, 초기 제조업과 산업정책이 이미 존재했다. 박정희 정부는 이 기반 위에서 경제개발계획, 수출주도형 공업화,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와 자본 도입을 결합해 속도를 냈다.

1950년대의 제도와 사회 변화는 다수 행위자의 선택과 전쟁·원조라는 국제조건 속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놓은 국가·안보·토지·교육의 토대가 없었다면 박정희의 개발국가가 동원할 사회적 능력과 시간을 얻기 어려웠다는 인과적 연속성은 분명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건국과 부국은 단절이 아니라 바통터치’다.

맹자의 ‘항산이 있어야 항심이 있다’, 『관자』의 ‘창고가 차야 예절을 안다’는 문장은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의 선후관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동원된다. 인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빈곤국에서 민주주의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어렵고, 영국도 경제와 사회구조가 변화한 뒤 참정권이 확대됐다.

오늘의 풍요와 민주주의를 1948년 또는 1950년대에 동시에 완성하라고 요구하는 현재주의적 평가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

 

 

PART V

 

제5부. 전략·권위주의·과오를 함께 읽기

 

19. 북진통일론: 신념·협상·국내정치의 복합 전략

이승만은 자유통일을 진심으로 원했고 공산주의 세력이 협상만으로 점령 지역과 권력을 내놓을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정전 뒤 열린 제네바 정치회담이 성과 없이 끝난 일은 그의 불신을 강화했다. 그러나 북진통일론은 실제 군사작전 계획만이 아니었다.

분단의 영구 고착을 거부한다는 국가 목표를 밝히고, 미국을 압박해 군사원조와 안전보장을 얻으며, 전쟁에 지친 국민을 자유통일의 명분으로 결집시키는 외교·국내정치의 자원이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1조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규정하면서 이승만의 단독 북진 가능성도 제약했다는 점은 중요한 역설이다. 북진을 외친 지도자가 자신의 북진을 봉인하는 조약을 받아들였다. 이는 북진통일이라는 구호가 전쟁 선동만이 아니라 협상 지렛대였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동맹’이 약소국을 보호하면서 모험주의도 통제하는 제도임을 드러낸다.

 

20. 반일노선: 역사적 신념과 정치적 자원

이승만의 반일노선은 오랜 신념에서 출발했다. 그는 1941년 『일본내막기』를 출간해 진주만 기습 이전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경고했다. 대통령이 된 뒤에는 평화선을 선포하고 일본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를 구축하려는 미국의 구상에 맞섰으며, 한일 국교정상화보다 안전보장과 불가침을 먼저 요구했다.

반일정책은 동시에 국내의 민족주의 여론을 결집하고 미국을 압박하며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자원이었다.

다만 미국 원조의 감소와 일본을 배제한 경제노선은 정권 후반 성장 둔화 (나아가서는 이승만 정권의 몰락)와도 연결됐으며, 박정희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와 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다른 경로를 선택했다.

 

21. 부산정치파동: 대통령 선택권의 확대와 헌정 절차의 훼손

1952년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 정치의 양면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국회 다수파는 내각제 개헌을 통해 대통령 권력을 무력화하려 했고, 재선이 불투명해진 이승만은 국회 간선제를 국민 직선제로 바꾸려 했다.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를 유권자에게 돌린다는 목표에는 민주적 실질이 있었다.

그러나 수단은 헌정주의를 훼손했다. 5월 25일 비상계엄이 선포됐고, 다음 날 국회의원 통근버스가 헌병대에 의해 연행됐다. 반대파 의원들에 대한 수사와 관제 시위, 국회 압박이 이어졌다. 7월 4일 발췌개헌안은 찬성 163, 반대 0, 기권 3으로 통과됐다. 형식적 절차(합법성)는 존재했지만 강압적 환경은 표결의 정당성을 약화했다.

이 사건으로 한국판 보나파르트가 등장했다. 국민에게 직접 호소해 기존 의회 권력을 돌파하는 힘과, 자신을 민의의 유일한 대변자로 간주해 제도와 반대파를 억누르는 위험이 함께 나타났다. 보나파르트는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목표의 민주성과 수단의 비민주성을 동시에 기록해야 한다.

 

22. 적대적 상호공존: 북한 전체주의와 남한 권위주의

이승만의 권위주의를 평가할 때는 북한의 전체주의와 군사적 위협을 함께 보아야 한다. 북한은 전쟁 전부터 공산당 일당지배체제였고, 전후 내부 숙청을 거치며 김일성 일인지배와 수령제 전체주의로 나아갔다.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은 전후에도 북한에 주둔하다가 1958년에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의 동유럽 장악과 1949년 중국 공산화는 남한 정치가 놓인 국제환경을 더욱 압박했다.

남북한 체제는 군사적 대치와 상호 위협을 통해 내부 통제를 강화하는 적대적 상호공존의 측면을 가졌다. 이 구조를 빼고 남한 권위주의를 개인의 권력욕만으로 설명하면 분단국가의 절반만 보게 된다. 물론 계엄, 강압적 개헌, 야당 탄압과 부정선거는 별도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구조적 압력과 행위자의 선택을 함께 보는 것이 비교사와 제도 분석의 과제다.

 

23. 사사오입·조봉암·인의 장막·3·15: 말년의 과오와 4·19

집권 말기의 과오는 재평가를 위해 지워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반드시 함께 기록해야 할 역사다. 사사오입 개헌은 헌법의 숫자와 절차를 권력 연장에 맞춘 사건이었고, 조봉암 처형은 진보당 사건과 사법정치의 문제를 남겼다. 고령(1956년에 82세)의 대통령 주변에는 자유당과 이기붕 일파의 인의 장막이 두꺼워졌으며, 민심과 현실 정보가 차단됐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보나파르트적 정치가 제도적 견제를 약화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부의 정당성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교육혁명으로 성장한 학생과 시민이 4·19혁명을 일으켜 권력을 심판했다. 부산정치파동을 보나파르트의 등장, 4·19를 보나파르트의 퇴장으로 읽을 수 있다. 이승만은 하야했고, 대한민국의 헌정체제는 정권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이는 건국의 제도가 건국자의 권력까지 교체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말년의 과오가 독립운동 50년, 건국, 농지개혁, 교육혁명, 전쟁 지도와 한미동맹의 공적을 모두 소각할 수는 없다. 반대로 앞선 공적이 말년의 헌정 파괴를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한 인물의 전 생애를 시간의 순서와 제도의 결과 속에서 평가할 때에만 시시비비가 가능하다.


 

PART VI


제6부. 기억·기념·다음 세대의 책임

 

24. 건국 지도자를 비판하면서 기념할 수 있는가

튀르키예는 아타튀르크를 국부로 추모하고, 싱가포르는 리콴유를 건국 총리로 기록하며, 이집트는 나세르의 정치적 유산을 박물관으로 보존한다. 이 국가들이 권위주의 논쟁을 끝냈다는 뜻은 아니다. 비판과 기념을 동시에 제도화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대만과 체코, 미국(남북전쟁의 리 장군)의 사례도 언급하며 국가 지도자를 우상화하거나 파괴하는 양자택일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전시수도부산 기념관에 설치됐던 이승만 동상에 붉은 페인트가 칠해져 철거로 이어진 사건은 역사 기억의 미성숙을 상징한다. 기념관과 동상은 무비판적 숭배물이 아니라 공과를 공적 공간에서 토론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장기집권이나 권위주의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독립과 건국의 기억 전체를 지우는 방식은 역사교육의 빈곤을 낳는다.

 

25. ‘공은 물에, 과는 청동에’ 새긴 기억을 바로잡기

복거일의 문제의식을 빌리자면, 지금까지 이승만의 과는 청동에 새겨졌고 공은 물로 씌어졌다. 재평가는 공적의 역사적 비중을 사실에 맞게 복원하고, 과오 역시 원인·과정·결과를 구체적으로 가르치자는 요구다.

이승만을 ‘친일·분단·독재’라는 세 단어로만 기억하면 독립운동, 국제외교, 자유민주 체제의 선택, 농지개혁, 교육 팽창, 전쟁 지도, 한미동맹과 전후 재건이 사라진다. 반대로 ‘건국 대통령’이라는 한 단어만 남기면 부산정치파동, 개헌과 야당 탄압, 3·15 부정선거가 사라진다.

성숙한 역사교육은 두 목록을 병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각각의 역사적 무게와 제도적 결과를 토론하게 해야 한다.

 

26. 서장에서 종장까지: 한 인물보다 한 국가의 탄생을 읽다

책은 1953년 6월 18일 반공포로 석방의 새벽을 그린 「서장: 위대한 탈출」로 문을 연다. 프롤로그 역할을 하는 이 장면에서 자유, 국가 생존, 동맹, 절차의 역설을 먼저 보여 준 뒤 1875년 황해도 평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어 왕조의 황혼, 망명과 외교독립론, 임시정부와 대미외교, 귀국과 건국혁명, 한국전쟁과 한미동맹, 전후 재건·교육혁명·하야의 순서로 90년 생애를 따라간다.

에필로그 역할의 「종장: 역사전쟁과 기성세대의 책임」은 신화도 악마도 아닌 한 인간의 초상을 다음 세대에 넘기자고 호소한다. 대한민국의 존재는 공산주의와 전쟁을 피해 온 사람들에게 다른 삶의 선택지를 제공했지만, 국가 생존이 절차 훼손을 자동으로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사랑과 미움을 넘어 사실·비교·제도를 통해 판단하는 역사적 성숙이 평전의 마지막 요청이다.

 

27. 종합 결론: 이승만을 알아야 대한민국의 경로가 보인다

이승만이 없었으면 박정희도,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다. 그것은 국가형성의 선후관계를 강조하는 압축 명제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한 국가, 토지 소유가 분산된 사회, 교육받은 인구, 재침략을 억제하는 동맹, 국제승인을 받은 정부가 있었기에 다음 단계의 개발과 민주화가 가능했다는 뜻이다.

동시에 이승만 시대가 모든 것을 완성한 것도 아니다. 원조 의존, 산업 기반의 취약성, 반일노선과 미국 정책의 충돌, 권력 집중과 헌정 절차 훼손, 부정선거는 다음 시대에 해결하거나 단절해야 할 유산이었다. 박정희 시대는 이승만의 기반을 활용하면서 다른 대외경제 노선과 개발국가 체제를 구축했고, 이후 시민은 권위주의를 다시 밀어내며 민주화를 진전시켰다.

대한민국의 발전은 건국·부국·민주화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진 누적 과정이다.

따라서 ‘왜 지금 이승만인가’라는 질문의 답은 과거의 인물을 현재의 진영전쟁에 소환하는 데 있지 않다. 대한민국이 어떤 선택과제도 위에서 태어났고, 무엇으로 살아남았으며, 어떤 과오를 스스로 교정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승만을 제대로 읽는 일은 대한민국의 성공만 찬양하는 일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가 함께 만든 국가의 경로를 설명하는 일이다.

 

저자 약력

심양섭은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일보 정치부 기자와 서울시장직무 인수위원을 지냈고, 미국 워싱턴대학교(UW) 방문학자로 두 차례 연수했다. 이화여대·아주대·한림대·가천대 등에서 강의했으며, 한국연구재단 등재지 수록 논문 18편을 비롯해 논문·저서·역서가 다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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