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⑭ 최대 壯觀! 폭풍 속 유조선에서 파도 구경하기



⊙ 그리스·아테네·바이킹·노르만·미국에서 한국으로 이어진 ‘해양화’와 세계 1류의 길


⊙ ‘동해’가 대만과 필리핀 사이 바시 해협으로 들어간 것은 싱가포르를 지난 지 7일째인 2월 22일 아침


⊙ 하늘로 솟구친 허연 물 덩어리… 소복(素服)한 유령이 머리를 풀고


⊙ 페르시아만에서 남중국해까지 여름 바다를 건너온 ‘동해’, 바시 해협에서 맡은 조국의 냄새


⊙ 하역 기계화·고속화는 정박 기간 단축시켜… 이국(異國) 풍경과 술을 탐할 시간 없어


⊙ 가족, 그 가운데서도 아내와 떨어져 산다는 것은… 불안, 그리움, 안타까움, 망상, 울분


⊙ 통선 타고 온 여자들은 그 위험한 줄 다리를 잽싸게 타고 와 남편과 ‘해상 허니문’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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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공동광구 바로 옆, 중국의 갑판 승강식 석유시추선. 

동해2호는 이 시추선에서 약 5해리 떨어져 지나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것은 자유 세계에 알려진 최초의 사진이다.


증기선을 몬 한국 최초의 근대적 선장은 인천 출신 신순성(愼順晟)이다. 대한제국 해군 함장이기도 했다. 《조선일보》 주불(駐佛) 특파원으로 이름을 날린 신용석(愼鏞碩) 전 인천 아시안게임 유치위원장은 신(愼) 선장의 손자다. 그가 연재 중인 나의 유조선 항해기를 읽고 흥미진진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대한민국의 오디세이

 

나는 ‘저의 오디세이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오디세이를 일반 명사로 쓰면 ‘대항해’ ‘대장정’ ‘모험 여행’이란 뜻이다. 나는 3시간짜리 영화 <오디세이>를 보고 나서 ‘이건 우리나라 이야기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소셜미디어에 영화평을 올렸다. 9월 초 1000만 관객을 기록, 인구 비례로는 한국인이 미국인보다 더 많이 본 이 영화의 당기는 힘은 전쟁과 바다일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저는 묘한 공감을 느꼈습니다. 3000년 전 그리스의 이야기가 왜 오늘의 저에게 공감을 줄까요? 이것이 바로 문학의 위대성입니다. 오디세이가 어쩌면 대한민국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화기로부터 시작해 식민지로 들어갔다가 건국, 전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갈등 속을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뒷모습이 오디세우스와 닮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 영화의 핵심 테마는 전쟁과 귀환과 항해입니다. 트로이 전쟁에서 비록 승리했지만,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문명을 파괴한 그리스 군대에 신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왜 귀향길에서 오디세우스 한 사람만 살아남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했느냐는 화두가 던져집니다. 평화를 파괴한 자가 그 대가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10년간의 귀향길에서 생고생해야 하는 존재가 오디세우스입니다.

 

저도 6·25를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여섯 살 때 경북 청송에서 우리 마을이 유엔군의 오폭을 받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우리 집은 불탔습니다. 놀러 왔던 할머니 한 분은 기총소사를 당해 돌아가셨고, 할아버지는 같은 시간에 집에서 폭격으로 변을 당했습니다. 그 뒤 몇 달 동안 인민군 치하에서 숨어 다녔던 기억도 생생합니다. 소년의 눈으로 본, 어떤 의미에서는 동화 같은 6·25였습니다. 진짜 지옥을 온몸으로 감당한 이들은 우리의 삼촌, 부모 세대였습니다. 전쟁을 겪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한 생존력을 갖게 되었고, 그 힘으로 산업화를 해냈고 민주화의 바탕을 만들었습니다. 한국 전쟁으로 약 300만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그 몇 배의 사람이 다치고 삶이 파괴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300만 명의 원혼이 저승에서 과연 편히 잠들 수 있겠습니까? 영화 <오디세이>에서도 트로이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이 유령으로 나타나 오디세우스에게 ‘왜 우리를 제대로 장례 치르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디세이>에는 신도 있고 괴물도 있고 영웅도 있고 간신배도 있고 여러 인간상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이야기의 배경은 바다입니다. 지난 80년, 대한민국의 오디세이는 ‘한국의 해양화’였습니다. 38선이 그어지면서 대한민국은 사실상 섬이 되었습니다. 삼면이 바다고 북쪽까지 차단되자 살기 위해 바다로, 세계로 뻗어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다를 개척했고, 세계적인 해양국가가 되었습니다. 민주화도 해양화의 산물입니다.

 

고대 그리스, 특히 아테네 중심의 해양 정신은 서방 문명을 주도했습니다. 이후 바이킹과 노르만의 해양 진출이 8세기부터 11세기까지 유럽을 뒤흔들었고, 바이킹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정착했다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법치의 전통을 발전시켰습니다. Law는 바이킹 말인데 노르만의 영국 경영으로 공동체를 유지하는 수단으로서의 법정신이 정착합니다. 바이킹-노르만식 법치 위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했고, 1689년 권리장전을 거쳐 미국의 건국 정신으로 이전되었으며 이승만, 개신교, 프린스턴대학을 매개로 하여 한국의 헌법과 건국 정신으로도 이어집니다. 한국의 민주화와 해양화는 그리스-아테네-바이킹-노르만-미국-한국으로 흘러온 세계 1류 모델이기에 이 정도의 발전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80년간 한국의 민주주의는 3개의 자유를 지켜냈습니다. 언론의 자유, 선거의 자유, 사유(私有)재산권의 자유. 특히 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언론의 자유만 있으면 한국은 공산화도, 독재화도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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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탱커 선원들의 일터는 마스트의 꼭대기(사진)에서 탱크의 바닥까지다.

 

鄭和의 오디세이

 

1982년 2월, 쿠웨이트산 원유 20만 t을 가득 채운 유조선 동해2호는 세로로 길쭉한 남중국해의 한복판을 북동~남서 방향으로 비스듬히 가르며 10~12노트 속도로 북상을 계속했다. 보르네오의 나투나섬 서쪽 150km 해상을 지날 때는 오른쪽으로 불야성을 이룬 반잠수식 시추선들이 보였다. 싱가포르 해협을 빠져나와 남중국해로 들어선 지 닷새째 되는 2월 20일 오후 1시쯤 ‘동해’는 홍콩 정남(正南)쪽 400해리, 마닐라 정서(正西)쪽 400해리 수심 4300m 해상을 지나고 있었다. 이날은 토요일 오후였지만 선내(船內)는 위생 및 안전 검사로 찬바람이 돌았다. 이덕인 선장 이하 사관들은 침실을 비롯한 선내 구석구석을 돌면서 정돈 및 안전 상태를 점검했다. 군대의 내무반 검열 같았다. 선장의 순시가 끝나자 사관들은 휴게실에서 선장의 강평을 들었다. 침실의 창에 전등 불빛을 막는 커튼이 있긴 해도 제대로 광선 차폐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등이 지적됐다. 이날부터 식당 매점에선 술이 떨어졌다. 맥주 80상자, 소주 열 상자를 이번 항차에서 다 마셔버린 것이었다.

 

1항사 최명기씨는 ‘소주 한 병을 5000원에 삽니다’면서 선내를 돌아다녔으나 한 병도 구할 수 없었다. ‘동해’는 이날 밤 한때 월남을 두 동강 냈던 북위 17도선을 넘었다. 필리핀의 텔레비전 방송이 흐릿하게 잡히기 시작했다.

 

이 남중국해 항로는 이름 그대로 중국 문명의 전파로(路) 구실을 해왔다. 이 항로를 따라 중국의 선진문물과 화교들이 동남아시아로 밀려 내려갔다. 명(明)나라의 전성기 영락제 시대의 정화(鄭和)는 그런 흐름에 하나의 분수령을 만든 인물이었다. 환관인 그는 서기 1405년 상해 근방에서 62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출항했다. 총 일곱 차례 있었던 대항해의 경로를 종합하면 선단은 남중국해를 남하, 인도지나 반도를 경유, 자바에 도착했다가 말라카 해협을 지나 벵골만의 밑변을 가로질러 스리랑카에 기항했다. 그 뒤 인도 서해안을 거쳐 페르시아, 곧 지금의 이란에 당도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당시 칭기즈칸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의 통치 아래 있었다. 이곳에 정화는 중국의 발명품인 자석을 전해주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지금의 페르시아만~극동 원유 항로와 거의 같은 노선을 잡았던 정화의 1차 원정엔 두 해가 걸렸다. 5차 원정 때 선단의 한 지대(支隊)는 아라비아를 거치지 않고 인도양을 횡단, 아프리카 동해안에 도착했다. 킬리만자로산의 만년설이 보이는 케냐 동해안까지 갔다.


黑潮, 바다를 흐르는 강

 

정화의 항해는 그 규모나 거리에 있어서 그때까지의 세계 탐험 사상 가장 장대한 것이었다. 1차 항해의 참가 인원은 2만7000명. 큰 배는 수천 t. 1세기 뒤 세계를 누빈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수백 t짜리 함선을 갖고 있었다. 당시의 영국 군함은 200t 내외였다. 정화의 함선 가운데는 길이 140m, 너비 16m짜리 목선도 있었다고 한다. 갑판을 흙으로 덮어 채소를 가꾸어 가며 둔전식의 항해를 했다니 중국인 특유의 유장한 마음가짐을 알 것 같다.

 

명은 정화의 대항해 직후 국내 사정으로 해금(海禁) 정책을 펴 대외무역을 금지시킨다. 조선도 같은 시기 바다에서 철수했다. 중국과 조선이 같이 해외 항해를 금지시키니 동양의 지중해 역할을 해왔던 서해는 통항이 금지된 채로 수백 년간 사막 같은 바다로 방치되었다. 해상무역의 엄청난 생산력이 사라지면서 중국과 조선이 쇠망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동해’가 대만과 필리핀 사이 바시 해협으로 들어간 것은 싱가포르를 지난 지 7일째인 2월 22일 아침이었다. 대만 남단 어란비 등대가 왼쪽으로 보일 정도로 근접 통과했다. 맑은 날에는 대만 동해안의 해발 3000m 연봉(連峯)들이 어렴풋이 보인다고 한다. 바시 해협에 들어서면서 풍랑이 한결 거세어졌다. 항해 일지에는 풍력 7등급(초속 14~17m), 파도 7등급(파고 6~9m)으로 적혔다.

 

대만 남단은 조류와 해류가 거센 곳으로 유명하다. 한국의 어느 슈퍼 탱커는 항해사가 방향 계기만 믿고 천측(天測)을 않고 항해하다가 왼쪽으로 보여야 할 대만 해안이 오른쪽으로 나타나자 기겁을 하고 부랴부랴 남쪽으로 내려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4노트까지 나가는 해류에 밀려 대만 북안(北岸)으로 올라간 것이었다. 대만 남쪽에서부터 ‘동해’는 흑조(黑潮)에 밀리고 있었다. 멕시코 만류(Gulf Stream)와 함께 세계 2대 해류로 꼽힌다. 필리핀의 루손섬 동해안에서 발원(發源), 바시 해협까지 북상, 거기서 북동쪽으로 꺾어 동중국해를 종단, 일본 규슈 근해 및 동해 쪽으로 올라오는 이 해류는 바다를 흐르는 강이다.

 

너비는 수십 km, 두께는 수백 m에 이르는 이 해류의 수량(水量)은 초당 약 4200만 t으로서 지구 최대의 강인 아마존의 약 200배다. 흑조(쿠로시오)는 1~2노트로 흐르는 게 보통이지만 곳에 따라선 4~5노트로 달리기도 한다. 플랑크톤이 농밀하게 모여 검게 보인다고 해서 ‘흑조’. 이 더운 해류의 주변엔 좋은 어장, 따뜻한 기후가 형성된다. 동해2호는 해류에 얹히자 흘러가는 강물을 탄 배처럼 밀리기 시작했다. 스크루를 분당 68회씩 돌리면 속력이 12노트밖엔 안 나오는데 흑조를 타자마자 14노트로 빨라지는 것이었다.

 

“이러다간 입항 예정일보다 빨리 들어가겠다. RPM(분당 회전수)을 떨구어라.”

 

이덕인 선장이 지시했다.

 

폭풍 속으로!

 

바시 해협을 지나면 동중국해. 2월 23일 오전. ‘동해’는 첨각열도(尖閣列島) 서쪽 해상을 지나 제주도 남쪽을 겨냥, 침로(針路)를 굳혔다. 일본이 첨각열도라고 하는 이 섬들을 중국에선 어조도(漁釣島)라고 부른다. 서로 영유권을 주장하며 다투고 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휴게실에서 장기 대국을 구경하던 최화섭 동승(同乘) 선장이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더니 ‘천지창조인가?’라고 중얼거렸다. 과연 낮은 먹구름이 천지창조의 형상을 그리며 흩날리고 있었다. 해가 지자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바람은 거세졌다. 나는 밤 9시쯤 브리지로 올라갔다. 고장 난 풍력계의 바늘은 20(노트)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진짜 풍력은 저 숫자에 15쯤 더해야 한다’고 3항사가 일러주었다. 1시간쯤 지나자 풍력 바늘은 25 밑으로 내려오지 않게 되었다. 브리지의 양쪽 문을 열면 베란다인데 그곳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바람이 측면에서 불어 문을 열면 브리지 안이 엉망이 될 게 분명했다.

 

밤 11시가 넘자 풍력 바늘은 45를 예사로 넘기 시작했다 항해사는 최대 풍속이 초속 30m는 될 것이라고 했다.

 

“잘 나가다가 결국 여기서 한 방 맞는구나.”

 

조타수 주문길씨가 앓는 소리로 말했다. 기관장이 파카를 입고 올라왔다.

 

“야, 이거 대단하군요.”


자정 직전에 드디어 이 선장이 나타났다.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겠군요.”

 

그는 씩 웃었다.

 

“파도 구경 한 번 할까요? 어이, 작업등 켜!”

 

갑판 위의 작업등이 환하게 켜지자 바다의 장관이 드러났다. 파도는 9시 방향에서 밀려와 좌현을 거의 직각으로 때리고 있었다. 달려온 파도는 선수 좌현을 직격하고 펄쩍 뛰어 하늘 높이 올라가 60m쯤 떨어진 건너편 우현 쪽 바다로 떨어졌다. 하늘로 솟구친 허연 물 덩어리는 작업등의 불빛을 받고 푸른빛이 돌 만큼 새하얗게 채색되었다. 소복(素服)한 유령이 머리를 풀고 엄청난 멀리뛰기를 하는 광경이었으나 이것은 무지막지한 파도의 연속 폭격이었다. 끊임없는 파도의 멀리뛰기로 선수(船首)에는 물의 터널이 생긴 듯했다. 중앙 갑판의 좌현 쪽에서 파도가 넘어오기 시작했다. B급 태풍의 중심권 폭풍과 맞먹는 바람이 같은 방향으로 계속 불자 해면과 해면상 5m의 갑판은 미끄러운 비탈처럼 서로 이어져 버렸다. 이 미끄럼판을 타는 파도가 갑판 위로 넘어 들었다. 길쭉한 파도 줄기가 휙휙 갑판을 넘어와 치솟다가는 제풀에 꺾이며 물벼락을 때리곤 했다.

 

파도가 작열할 때마다 반잠수정처럼 된 선체(船體)는 멈칫멈칫, 기우뚱기우뚱했다. 배는 항진과 정지를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 끄떡없이 서 있을 만큼 안정성을 잃지 않는 ‘동해’였다. 파도 구경에 정신이 팔린 나는 슬그머니 겁이 났다.

 

“저렇게 얻어맞아도 괜찮을까요?”

 

“허, 왜 겁이 납니까? 안심하십시오. 제가 안전을 보장하죠.”

 

이 선장은 또 씩 웃더니 슬리퍼를 끌면서 침실로 내려갔다. ‘동해’에선 아무도 겁먹지 않고 있었다. 탁구 치는 소리까지 들려왔다. 처참한 바다의 풍경과 선내의 평화는 기묘한 불균형을 이루었다. ‘동해’의 왼쪽에는 일본 배로 보이는 어선 서너 척이 애처롭게 붙어 파도를 견디고 있었다.

 

중국 석유시추선 발견



다음 날 아침까지도 폭풍 속의 황천항해(荒天航海)가 계속되었다. 날이 밝자 바다는 간밤과는 판이한 모습으로 시야를 압도해 왔다. 해면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뒤집어진 백파(白波)가 바다를 뒤덮었다. 골에서 꼭대기까지 10m를 훨씬 넘는 파도는 해면에 깊숙한 주름을 만들며 쉬지 않고 탱커를 향해 밀고 들어왔다. 선수가 파도의 벽을 찢고 또 찢어도 성난 소떼처럼 뱃머리를 정면으로 들이받으며 산화하고 있었다. 간밤과는 달리 이젠 파도가 11시30분 방향. 곧 거의 정면에서 오고 있었다. 정면충돌한 파도는 두 팔을 활짝 펴고 만세를 부르며 부챗살처럼 치솟았다. 700평쯤 될 것 같은 거창한 물의 장막이 가속도가 붙은 듯 쭉쭉 퍼졌다가는 갑판 위로 무너져 내리며 몇 트럭분씩의 해수를 쏟아 놓았다. 선수에 의해 양단된 물결은 옆으로 밀리면서 다른 파도와 맞부딪쳐 튀어 오르기도 했다. 나는 ‘박수 파도’라 이름 붙였다.

 

선수의 진격 앞에 옆으로 밀려났던 파도는 되돌아오면서 배의 옆구리를 차며 퉁겨 올랐다. ‘2단 옆차기 파도’. 파도의 골과 꼭대기가 뱃전을 따라 뒤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파도의 주기(週期)와 파고(波高)를 정확히 계산할 수 있었다. 파도의 꼭대기가 높을 때는 가드레일 같은 모습의 갑판 난간을 세로로 뺨치듯 때리며 지나갔다. 타다닥 피비빅 소리를 내면서 파도의 머리들은 난간에 의해 연속 참수를 당하는 꼴이 되었다. 파도를 좋아하는 동물로는 기자 이외에 갈매기가 있었다. 어느새 십여 마리가 날아오더니 허옇게 뒤집힌 파도의 골로 급강하 공습을 거듭했다. 물고기도 파도와 함께 뒤집혀 올라오므로 갈매기는 이럴 때 좋은 먹이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오후가 되자 하늘은 투명하게 개었다. 바람과 파도도 서서히 자기 시작했다. 1항사는 갑판장과 함께 선수 창고로 내려갔다가 오더니 ‘왼쪽 닻이 제자리에서 어긋나 덜컹덜컹한다’고 했다. 이번에 울산에 돌아가면 닻 수리를 해야 할 것이고, 덕분에 며칠 더 쉴 수 있을 거라며 선원들은 이 고장을 반기는 듯했다. 오후 3시쯤 이종권 2항사가 ‘정체불명의 시추선이 나타났다’고 소리쳤다. 나는 쌍안경을 들었다. 오른쪽 수평선에 회색 시추선이 희뿌옇게 보였다. 갑판 승강식이었다. 그 북쪽으로 똑같은 모습의 시추선이 보였다. 두 시추선 사이의 거리는 정확하게 18.6km. ‘PG로 갈 때도 여기를 지났는데 저런 게 없었다’며 이씨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씨는 두 시추선의 위치를 내어 해도에 기입했다. 한일 공동 광구의 서쪽 경계선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것이 북쪽 시추선이었다. 나는 두 시추선이 중국 것이라고 단정했다. 1981년 여름에 중국이 뚫은 용정(龍井)1호가 저 북쪽 시추선에서 정북(正北)으로 약 17km 떨어진 해저였다. ‘여러 겹의 천연가스층과 함유(含油) 사암층을 발견했다’고 발표한 용정1호 부근에 두 구멍을 또 뚫기 시작한 것은 무슨 뜻인가? 유전의 감을 잡았다는 뜻인가?

 

걷는 속도로 항해

 

쿠웨이트의 아하마디 항구를 떠난 지 27일 만에 동해2호는 조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거리 안에 들어갔다. 마라도 등대. 한반도 최남단의 이 기점에서 남남서 150해리 바다. ‘동해’는 한일 공동 광구 안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페르시아만, 오만만, 아라비아해, 인도양, 벵골만,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여름의 바다들을 거쳐온 ‘동해’에 조국의 냄새는 겨울 공기와 함께 밀려왔다. 기온이 섭씨 15도까지 떨어졌다. 나는 비로소 스웨터를 꺼내 입었다. 이날 한국(아세아상선)에서 전문(電文)이 날아왔다. 울산 입항 날짜를 2월 27일로 늦추라는 통보였다. 식당과 휴게실에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로써 입항 예정일은 세 번째 연기된 것이었다.

 

이덕인 선장은 속도를 9노트에서 6노트로 낮추도록 지시했다. 저녁에 또 전문이 왔다. 입항 날짜를 하루 더 연기하라는 명령이었다. 이 선장은 스크루 회전 속도를 분당 32회로 다시 느릿하게 했다. ‘동해’의 속력은 4.3노트로 떨어졌다. 시속 8km다. 어른의 빠른 걸음걸이와 같은 속도, 섬 같은 탱커가 이 속도로 움직이니 떠 있는지, 가는지 감을 잡기가 매우 어려웠다. 고향의 코밑에서 제자리걸음을 강요당한 선원들은 이젠 허탈에 빠져 비꼬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PG로 떠밀려 되돌아가겠다.”

 

“차라리 남아 연방으로 밀려갔으면 좋겠다.”

 

“남아 연방엔 왜?”

 

“우리 기름을 몽땅 팔아버리지 뭐. 그 나라는 지금 경제 봉쇄를 당해 기름을 못 구해서 야단들이란 말이야. 도둑질한 것이든 해적질한 것이든 대환영이란 거야.”

 

“그거 잘됐네, 우리가 싣고 있는 원유가 얼마짜리야. 배럴당 32달러로 잡으면 150만 배럴이니까 4800만 달러. 선체까지 치면 5000만 달러가 넘네. 선원 34명이 나누어 가진다면 1인당 약 150만 달러, 야! 10억원이구나!”

 

“10억원으로 무얼 하나? 우선 성형수술을 해서 서양 사람처럼 꾸미고 공소시효가 끝나면 고향으로 금의환향이라… 좋군, 좋아!”

 

원유 공급 과잉과 기름 소비량의 감소로 저유(貯油) 탱크는 어디서든지 가득 차 있고, 슈퍼탱크로 이어진 오일 로드의 벨트는 더욱 느릿느릿 돌아가고, 그 지루함을 몸으로 때우며 감당해야 하는 것이 유조선 선원들의 애환이었다.

 

다음 날, 이번엔 밝은 소식이 달려왔다.

 

“계선 준비를 하라.”


계선(繫船)이란 탱커를 항내(港內)에 띄워 놓고 짐이 생길 때까지 놀려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럴 동안 선원들은 번갈아 쉴 수가 있다. 번갯불에 콩 튀겨 먹듯 1박 2일로 후딱 집에 다녀와야 하는 선원들에게 이것은 꿈같은 기별이었다. 그렇지만 불안이 없을 수 없었다. “설마 거제도 앞바다에 띄워 놓지는 않겠지…” 어떤 선원이 말했다.

 

바다의 우주비행사들

 

1980년 10월에 코리아스타호가 이런 꼴을 당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원유의 전략 비축을 위해 이 배를 ‘떠 있는 저유탱크’로 이용했다. 스타호는 기름을 가득 실은 채 뭍을 지척에 두고 하염없이 떠 있기만 했다. 근 두 달의 항해 끝에 조국으로 돌아온 선원들은 손 닿을 곳에 육지를 두고도 ‘해상 고아’ 신세가 되었다. 갑갑증으로 죽을 지경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켜놓고 상륙 기분을 내려 했으나 짜증만 더해갈 뿐이었다. 보다 못한 회사에서 휴가 중인 선원들을 소집했다. 그들을 스타호에 대신 태우고 스타호 선원들을 하루만 상륙시켰다. 세관에선 입항 수속 이전에 상륙했으니 밀입국이 아니냐고 따졌다. 이런 해상감옥 생활로 20일을 보낸 뒤 스타호는 울산항에 들어가 기름을 부릴 수 있었다.

 

이덕인 선장은 오키나와 앞바다에서 50일간이나 떠 있은 적도 있었는데 낚시로 소일했다고 한다. 기관부원 정한근씨는 몇 년 전 세브론사의 48만 t 유조선 노스 아메리카호를 탔었다. 2년 동안의 항해 중 뭍을 밟은 것은 바하마에서의 이틀뿐이었다고 한다.

 

48만 t 배가 접안할 수 있는 부두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바다 한복판의 해상 부두에서 기름을 부리거나 원양(遠洋)에서 다른 소형 유조선에 기름을 옮겨 주어야 하는 것이 이런 극초대형 유조선(ULCC)의 일이었다. 큰 유조선을 탈수록 기항(寄港)이나 상륙의 기회는 더욱 줄어든다. 유조선은 바다에서 바다로만 오가고 선원들은 ‘바다의 우주비행사’ 신세가 되고 만다.

 

탱커뿐이 아니다. 자동차 운반 전용선은 부두에 접안하면 시간당 200대 꼴로 자동차를 부린다. 컨테이너선도 거대한 육상 기중기의 도움으로 컨테이너 상자를 단숨에 내려버린다. 곡물은 고압 수송 파이프로, 광석은 벨트로 순식간에 실려지고 부려진다. 하역(荷役)의 기계화·고속화는 선박의 정박 기간을 단축시켰다. 이국(異國)의 풍경과 술을 탐할 시간이 있을 리 없다. 대부분의 경우 상륙도 못 하고 도시의 스카이라인만 먼발치에서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여러 가지 화물을 싣는 잡화선만이 옛날의 외항선 기분을 아직도 내고 있을 뿐이다.

 

2월 25일 식당에 방이 붙었다. ‘채소가 동이 났으니 선원 여러분은 서로 이해하고 참아달라’는 내용의 선장 담화문이었다. 이날부터 김치도 끊겼다. 이 선장은 “배가 너무 빨리 가서 큰일이다”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스크루 회전 속도를 최저선으로 줄였는데도 6~7노트로 가고 있었다. 해류가 뒤를 밀기 때문이었다. “이러다가 하루 먼저 입항하게 생겼다”고 선장이 걱정하자 어느 사관이 “회사에서 뭐라고 하거든 배가 고향을 보더니 미친 듯 달려서 할 수 없이 먼저 들어왔다고 말씀하십시오”라고 농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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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 시아일랜드의 동이 트는 풍경과 함께 유조선에서 여자가 건너왔다. 외국 배는 선원의 가족을 태우고 다닌다.


배와 여자

 

선실(船室)은 이미 입항 분위기였다. 이번에 연가(年暇)를 받아 배에서 내리게 된 사람은 여섯 명. 선장, 기관장, 통신장, 기관원 백평호, 갑판원 정태석, ‘살롱’ 이영우씨.


“지금부터는 목욕물이 많이 쓰일 겁니다.”

 

최화섭 동승 선장이 말했다.

 

“입항 준비 때문이죠. 지금쯤 육지에선 아내들도 한창 남편 맞을 준비를 하고 있을 거예요. 방을 치운다, 미장원에 다녀온다, 화장을 한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은 여자의 들뜬 모습을 보고는 남편의 귀국이 가까워졌다는 걸 안다고 합니다.”

 

탱커 선원들의 생각을 가장 크게 점하는 존재는 아내다. 가족, 그 가운데서도 특히 아내와 떨어져 산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과 행동양식을 지배하고 있다. 불안, 그리움, 안타까움, 망상, 울분. 한국의 선원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 그들을 일찍 바다에서 떠나게 하는 것, 뱃사람이란 직업에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 외국의 선원들을 부러워하게 만드는 것들이 모두 ‘아내로부터의 격리’에서 비롯된 문제다. 사주장 박도석씨의 방에는 어린이 및 여자용 구명조끼가 걸려 있었다.

 

동해2호의 원주민이었던 노르웨이 선원들이 두고 간 유물. 그것은 박씨의 방에 선원 가족, 곧 아내와 아이가 함께 타고 있었다는 증거다. 외국 상선에서는 가족을 태우는 것, 통신장이나 취사부원으로 여자를 채용하는 것은 이미 관습으로 굳어 있었다. ‘동해’에는 그런 외국 배에 수출 선원으로 일했던 보통 선원들이 많았다. 조타수 황보씨는 그리스 화물선에서 여자들과 같이 지냈다.

 

“사관들의 아내뿐 아니라 통신실의 차석이 여자였어요. 사관 마누라들은 낮에는 할 일이 없으니까 브리지로 올라와요. 저는 그 서양 애들이 앉을 의자를 정렬하곤 했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더군요. 브리지나 발코니에 쭉 늘어앉아 바다 구경, 배 구경을 하는데 비키니 수영복 차림이에요.

 

발코니에서 일광욕을 한다고 브래지어까지 벗어놓고 있다가 내가 가면 모포로 몸을 감싸곤 합디다. 이 여자들이 개까지 데리고 타는 경우도 있었어요. 어느 한국 선원은 자기에게 엉겨 붙어 핥아대는 애완견의 꼬리를 잡고 떼기장을 쳤는데(내팽개치다) 선장 아내가 애지중지하는 개였죠. 선장에게 혼이 나 하마터면 강제 하선당할 뻔했어요. 그 배의 통신실은 브리지 바로 뒤에 붙어 있었습니다. 차석 여자가 개를 꼭 껴안고 침대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게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거예요. 이 차석은 나중에 초사와 눈이 맞아 초사 방으로 옮겨 동거를 해버리더군요. 얼마 뒤 임신을 해 배에서 내리게 됐는데 내가 싫어한 강아지는 그새 송아지만 한 어른 개가 되어 하선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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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장의 집무실은 일류 호텔의 특실과 비슷하다. 바다에서 선장은 왕이다.

 

가족과의 재회, 또는 면회

 

김상달씨는 세브론의 탱커에서 다른 선원들의 아내들과 함께 생활하는 고역을 치렀다.

 

“일곱, 여덟 명의 여자들이 탔는데 복도고 식당이고 온통 향수 냄새, 여자 냄새예요. 그래도 그들은 마음씨가 좋아 저녁의 파티에선 우리하고도 곧잘 춤을 추고 선내 분위기는 좋았어요.”


갑판원 변기찬씨는 외국 배의 수출 선원으로 일할 때 한국인 아내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 회사에선 사관들(한국인)에겐 부부 동반 승선을 허락했어요. 선장, 기관장, 초사의 아내가 탔는데 선내 분위기가 흐려집디다. 여자가 남편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아 우리를 하시(下視)하는가 하면 자기들끼리도 암투를 벌이고 해서… 다른 배에서 일본 선장의 아내와 함께 있을 때는 그 여자의 자상한 배려로 선원들이 모두 포근한 마음을 가졌는데 말입니다.”

 

울산에 기항해도 선원들의 반은 배에 남고 반은 1박 2일의 가족 면회를 하고 돌아와야 한다. 울산과 가까운 경북 월성군 감포에 집이 있는 조타수 주문길씨는 ‘오후 1시 통선을 타고 나갈 때 벌써 돌아올 걱정부터 하기 시작한다’고 했다. 울산항에 상륙하면 오후 2시,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닿으면 저녁 무렵, 저녁상을 물리고 두 달 만에 만난 가족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자정이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 날 새벽밥을 먹고 아쉬워하는 아내의 눈길을 뒤로하고 집을 나서야 했다.

 

다시 두 달 별거의 시작. 장생포항에서 탱커로 향하는 오후 1시 통선을 놓치면 자기 돈으로 빌려서라도 귀선해야 했다. 주씨는 그래도 사정이 좋은 편이다. 집이 서울에 있는 최명기 초사는 ‘별을 보고 집에 들어갔다가 다음 날 새벽 별을 보고 나와야 한다’고 했다. 총각인 그는 귀가를 단념할 때도 많다. 남동생을 부산으로 불러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가족 안부를 듣기도 한다.

 

전북 이리에 집이 있는 2항사 이종권씨는 지난 1년 동안 한 번도 집에 가지 못했다. 인천에 집이 있는 갑판원 정태석씨의 아내는 입항 날짜에 맞춰 아이를 데리고 울산으로 내려왔다. 진주 서쪽, 대전 북쪽에 집이 있는 탱커 선원들은 대부분 정씨처럼 울산에서 ‘하루 랑데부’를 하는 것으로 때운다.

 

이건 가족과의 재회가 아니라 면회에 불과하다. 짧은 만남이지만 아내와의 면담을 끝내고 배로 돌아오면 그동안의 불안과 걱정이 말끔히 가시고 홀가분해져 새로운 의욕이 솟는다고 했다. 그러나 걱정거리를 안고 오는 선원들도 있었다. 그 걱정거리를 해결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못함으로 해서 선원들은 더욱 괴로워했다. 탱커가 울산항을 떠나면 그런 선원들은 한동안 굳게 입을 닫고 공상만 골똘하게 했다.

 

집에서 같이 배를 타는 부인들

 

“제 집사람은 제가 휴가를 받아 육지에 있을 때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려고 해요. 제가 배를 탈 때는 아내의 몸무게가 평균 3kg 줄어버립니다. 저의 휴가 기간에는 감쪽같이 원상 복구가 되대요. 제 집사람은 신경성 심근경색 증세를 갖고 있어요. 충격을 받으면 아이들처럼 숨이 막히고 입술이 파랗게 질려 넘어가요. 이런 증세도 제가 집에 있으면 없어져요. 모두가 저 때문에 얻은 병이지요.”

 

이덕인 선장의 고민이다. 최화섭씨가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이렇게 받았다.

 

“저의 친구 아내는 여섯 달 이상 남편(선장)이 집에 안 오면 신경성 위장병이 발작, 아무것도 못 먹고 바짝바짝 말라요. 그래서 그 친구는 수입 좋은 수출 선장직을 그만두고 요즘은 대일(對日) 정기선을 타지요. 보름 만에 한 번씩 부산항에 돌아와요. 남편들만 배를 타는 게 아니에요. 남편들이 배를 탈 동안 아내들도 고통스러운 정신적인 항해를 함께 하는 거지요.”


통신장도 말했다.

 

“언젠가 무전기를 조정하고 있는데 한국인 선원과 아내의 통화를 엿듣게 되었지요. 선원은 수출선을 타는 모양인데 인도인가 어디에선가에서 상륙, 오랜만에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어요. 아내는 ‘지금 그곳이 어디냐, 이래선 도저히 못 살겠으니 당장 그쪽으로 가겠다’고 나서는 거예요. 어찌나 애절하게 말하는지 정말이지 전화 끊고 당장 비행장으로 달려갈 것 같은 기분이 듭디다. 남편은 아내를 달랜다고 땀을 빼더군요. 나중엔 아내가 전화통을 붙들고 엉엉 우는데…”

 

윤 기관장도 말했다.

 

“한국 수출 선원들이 탄 부정기화물선이 우연히 부산에 들른 적이 있었죠. 선장은 부산항에서 하역을 끝내고 출항, 자기 재량으로 오륙도 부근에 배를 띄워 놓도록 한 뒤 선원 아내들을 불렀죠. 통선을 타고 온 여자들은 그 위험한 줄 다리를 잽싸게 타고 올라와 남편과 감격의 재회를 했지요. 몇 시간 동안 선원들은 ‘해상 허니문’을 즐겼고요. 이건 잘된 경우고 그렇지 못한 적도 있었죠. 어느 외국 배가 부산에 들어왔는데 수출 선원들의 가족들이 부산으로 집결했어요. 그러나 선원들은 하역 일에 바빠 상륙을 못 하고 다시 인천으로 배를 돌려야 했습니다.

 

선원 가족들은 기차, 버스 편으로 우르르 인천으로 몰려갔죠. 인천에서도 하역이 빨리 끝나 선원들은 가족들의 애타는 아우성을 선박 전화로만 듣고선 출항을 해야 했습니다. 배를 하루 정박시키는 데 수백만원이 날아가니까 회사에선 ‘인간적 편의’를 봐주기 힘들지 모르겠지만 남편 얼굴 한 번 보려고 이리저리 몰려다니다가 닭 쫓던 뭐 신세가 된 아낙네들의 허탈감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바다와 배를 모르는 엘리트들

 

2026년 한국은 세계적인 해양국가다. 무역량, 해외 이민자 수, 해외 여행자 수, 상선대 규모, 항만 능력, 해군력, 조선(造船) 능력 등을 종합하면 10위권에 든다. 한데 배를 타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나 대우는 낮다. 특히 언론·정치·사법 등 지도층 인사들의 바다와 배에 대한 이해력이 문제다. 그래서인지 막강한 해양력에도 불구하고 선원 숫자가 적다. 인구가 10분의 1인 노르웨이와 비슷할 정도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의 문제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때 박근혜 정부가 그 책임을 해경에 지워, 해체를 결정한 것이 뭍에 사는 먹물 먹은 엘리트들의 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사고 30분 만에 현장에 도착, 170여 명을 살린 해경 정장에게 업무상 과실죄를 적용, 실형을 살게 한 것은 세계 해난 사고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40년 전에 자주 들었던 ‘바다에서 번 돈은 처자식 먹여 살리기도 아깝다’는 말은 다른 형태로 지금도 유효한 것 같다. 빛나는 ‘대한민국 해양화 오디세이’의 그늘은 해양 정신의 부재(不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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