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둥이 기자의 짧은 회고록 ⑮ 고문과 조작을 1980년대의 主題로 삼다!

독립운동 名門家 출신 許鉥, 보안사에서 전기고문 당하다

“설마 죽이기에 하겠나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불구(不具)가 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은 들었습니다. 고문의 강도(强度)가 경찰이나 안기부와는 차원이 달랐다고 할까요. 전기고문에 의한 뇌손상의 공포감도 엄습했습니다. 그 이후 특별히 트라우마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이 무슨 횡액(橫厄)인가 하는 생각으로 좀 괴로웠지요. 후유증은 목 디스크보다 허리쪽에 심했습니다. 디스크와 척추의 전방 이동과 전이증 등으로 결국 두 번에 걸친 수술로 통증을 완화하여야 했지요. 저의 아버지께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장기간 옥중에 계셨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만년에 고생이 심했지요. 심문(審問)이나 고문을 받을 때는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j01.jpg

집으로, 가족 품으로! 서둘러 양복으로 갈아입은 선원들은 선측 사다리를 따라 통선으로 달려 내려갔다. 

나갈 때 벌써 돌아올 것을 걱정한다는 선원들이다.

 

 

“당신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되었다.”


내가 동해 2호를 타고 울산항으로 다가가고 있던 1982년 무렵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해난(海難)사고가 나는 나라들 중 하나였다. 미국 브리태니카사에서 펴낸 ‘재난’이란 책에는 1959년에서 1978년 사이 20년 동안의 세계 주요 해난사고 기록이 실려 있었다. 수십 명 이상이 떼죽음한 큰 사고만 추린 것이었는데 316건의 사고가 실려 있고 한국이 19건으로 으뜸, 2위는 필리핀으로 16건, 3위가 일본으로 11건이었다.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뛴 죄로 해서 나는 수많은 해난사고를 접했다. 

 

한밤중에 단잠을 깨운 기자를 바라보는 선원 부인과 아이들의 불안한 눈망울. 그 얼굴을 향해 “당신 남편이 탄 배가 실종됐다”고 사정없이 내뱉어야 할 때, 그래서 부인은 허물어지듯 핑그르 돌면서 까무러치고 그 위로 사진 기자의 플래시가 터질 때 나는 “선원들이 동네북이다”고 중얼거리며 “배를 안 타면 못 먹고 사나”고 속으로 배부른 소리를 하기도 했었다. 

 

원양수산 회사들이 몰린 부산 충무동 해안, 상선 회사들이 집중된 중앙동엔 한 달에도 몇 번씩 종종걸음을 치곤 했다. 선원들은 십중팔구 부산·경남·전남 사람들, 특히 영도·거제도·남해 사람들이 많았다. 형제나 친구끼리 서너 명이 같은 배를 탔다가 몰죽음을 당하는가 하면 남편이 그렇게도 바라던 사내아이를 부인이 낳은 바로 그날 남편은 대서양의 황파(荒波) 속에 묻혀버린 일도 있었다. 

 

아우성, 통곡, 책상이 날고 유리창이 박살 나는 회사 사무실, 지긋지긋한 수색기간 중의 기다림, 그리고 사망 선고. 밀고 당기는 피해보상 교섭. 선원들, 특히 원양선원들의 목숨값은 또 얼마나 쌌던가? 육상 사고 사망자의 반도 안 되었다. 남편, 동생, 오빠의 유골 대신, 목숨과 바꾼 돈 보따리를 들고 가는 허망한 귀향길. 해난 사고가 너무 자주 터지자 이삼십 명이 실종된(해난사고에선 시신이 확인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실종’이라고 보도하며 따라서 ‘사망’만큼 독자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 사건도 2, 3단으로 신문에 나기도 했다. 

 

1976년 겨울 동해 대화퇴 어장에서 수십 척의 어선이 돌풍을 만나 어부 3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을 즈음엔 “진도개가 사라진다”는 기사가 “어부가 무더기로 사라진다”는 기사를 누르고 사회면 머리에 박힌 적도 있었다. 

 

삼국시대와 신라통일시대 지배층은 여러 번 어로 금지명령을 내렸다. 어구(漁具)도 불태우게 했다. 불교의 살생 금지 사상을 실천에 옮긴 것이었다. 

 


뭍이 무서운 선원들


고려와 조선시대 뱃사람들은 사회계층 구분에서 가장 밑바닥을 맴돌았다. 어민들에 대한 착취의 정도는 농민의 그것을 훨씬 앞지르는 것이었다. 重과세 때문에 어촌이 붕괴, 유민(流民)이 생기고, 아전들에게 혹사당하기 싫어 바닷가에 좌초한 고래를 어민들은 밤에 몰래 바다로 떠밀어 넣었다.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넉넉해지면 수탈당해 버리므로 일부러 가난 상태에 머물러 그 가난을 방패로 삼고 있었다. 

 

해방과 함께 온 한반도 분단은 남한을 대륙과 단절시켜 사실상의 섬으로 만들었다. 남한의 생존은 미국 등 해양 세력과의 밀착, 그리고 해외무역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2026년 현재 한국은 세계적 해양국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거대한 해양적 하드웨어를 뒷받침해야 할 해양정신이란 소프트웨어는 세월호 사고 수습과정에서 보았듯이 여전히 조선조적이다. 한국의 관료·기자·검사·판사 등 이른바 사(士) 계층은 침몰 소식을 듣고 30분 만에 넘어가는 세월호 곁에 도착, 170명 이상을 살린 해경정장을 왜 다 살리지 않았느냐고 추궁, 훈장수여 대신 감옥에 보냈다. 박근혜 정부는 영해를 지키는 제2의 해군인 해경(海警) 해체를 ‘결단’이라고 발표했다. 

 

동해2호는 제주도 동쪽을 지나 부산과 대마도 사이 대한해협을 향해 다가갔다. 제주도는 보이지 않았다. 조국의 바다로 돌아왔다는 징표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징어잡이 배 정도였다. 선내(船內)의 텔레비전 수상기에 똑똑히 잡히고 있는 KBS와 MBC의 프로가 조국의 자장(磁場) 안에 들어왔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뭍이 가까워지면 선원들은 가슴을 설렌다. 그런 설렘 사이사이로는 불안감이 깃들기도 한다.  유체(流體) 위의 생활을 제2의 천성으로 받아들인 그들에게 고체 위의 생활은 상당한 문화적 충격을 강요한다. 

 

“늘 흔들리는 배 위에 있다가 갑자기 딱딱한 땅을 밟으면 섬뜩한 기분이 들기도 해요. 걸음걸이가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발놀림이 안 맞아 두 다리가 제멋대로 노는 것 같기도 하답니다. 외국의 약삭빠른 화류계 여자들은 걸음걸이만 보고도 선원들을 가려낸다고 합니다.”(최화섭 동승 선장) 

 


드디어 조국의 山河 


선원들이 잘하는 건 탁구, 못하는 건 축구라고 한다. 선원들은 대체로 장발이다. 배에는 이발사가 없고 귀항해선 머리를 깎고 있을 한가한 시간이 없다. 선원들은 거의 안경을 끼지 않는다. 별자리를 많이 안다. 직업상 천측(天測)을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깨끗한 밤하늘을 구경할 기회가 많아서다. 

 

귀가 시간이 없는 탱커 선원들은 술을 천천히 마신다. 옷값은 거의 쓰지 않는다. 여름 항로를 뛰기 때문에 하복(夏服)으로 족하다. 선원들은 겁이 많다. 세관원뿐 아니라 경찰관, 상인, 선박회사 직원 등등 뭍 사람 일반에 대한 공포감이다. 느릿느릿한 탱커의 리듬과는 너무나 딴판인 택시의 질주, 망망대해와 북적대는 도심의 자동차 행렬·인파, 수평선과 그 너머의 고향을 그리는 데 굳어버린 향수 어린 눈동자와 또릿또릿, 번득번득 돌아가는 육지 사람들의 눈매, 상쾌한 바다의 공기와 숨막힐 듯한 도심의 대기. 

 

“역시 내가 살 곳은 바다로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될 때 그들은 ‘육상의 패배자’로 되어버릴 공산이 크다. ‘동해’에는 선원생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육상의 직업으로 바꾸려 했다가 실패, 다시 바다로 돌아온 선원들이 있었다. 힘이 센 변기찬 씨는 수출 선원으로 고생하여 모은 돈으로 제주도에서 술집을 차렸다가 ‘돈 천만 원을 까먹고’ 다시 배로 돌아왔다. 조기장 정명수, 기관수 정상율 씨는 택시운전을 시도했다가, 갑판원 정태석 씨는 공사판의 노동자로 일해 보다가 바다로 복귀했다. 

 

동해가 중동∼극동 항로의 네 번째 해협인 대한해협을 통과, 부산의 태종대 등대 앞을 지나간 것은 1982년 2월27일 정오 무렵이었다. 브리지의 무전기에선 “부산무선, 부산무선, 여기는 ○○○”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부산에 집이 있는 선원들은 부산 무선국을 불러 집으로 전화를 거느라고 바빴다. 송정을 지나 기장, 일광, 좌천 쪽으로 ‘동해’는 북상하고 있었다. 비로소 왼쪽으로 조국의 해안과 그 위로 고래등같은 산 능선이 부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에겐 모두 눈에 익은 지형, 두 달 만에 처음 보는 조국의 산하였다. 별 감회가 없었다. 오후 네 시쯤 왼쪽으로 간절갑 등대가 허옇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뒤로 얼룩말 무늬 등대 세 개가 부연 스모그 사이로 솟아났다. 다시 그 북쪽에는 울기 등대, 이어서 종착점 울산항인 것이다. 

 


짐을 싸다


오후 5시, 동해2호 브리지에 이덕인 선장이 나타났다. ‘동해’는 아시아상선(주)의 지시보다도 하루 일찍 울산항에 들어온 것이었다. 해가 저물어 입항 수속을 밟을 수 없었다. ‘동해’는 저녁, 닻 내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울산 외항에서 이 날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전봇대만한 밧줄이 바닷속으로 덜컹덜컹 풀려나갔다. 12새클, 약 70미터가 풀리자 ‘동해’는 조류에 밀려 닻줄을 팽팽하게 당기면서 멈추었다. 닻줄은 자체 무게로 뻘 바닥 밑 10미터쯤까지 들어가 박혔다. 수심은 35미터. ‘동해’의 갑판에는 작업등들이 환하게 켜졌다. 전등불 때문인지 주위의 공기가 탁하게 보였다. 얼마 있으니 분뇨 마르는 냄새와 비슷한 아황산가스 냄새가 울산 공단 쪽 해안에서 밀려와 ‘동해’를 감쌌다. 싱그러운 갯바람만 마시던 선원들은 “캑캑”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배가 멈추자 브리지는 오히려 분주해졌다. 울산 무선국을 통해 집으로 전화를 걸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죽는 일이 아니면 서로 전화를 걸지 않기로 했다”는 조타수 주문길 씨만은 바위처럼 잠자코 있었다. 이틀 동안 김치 없이 식탁을 대했던 선원들을 대표하여 김무 씨가 울산 시내의 자기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 일찍 김치 한 동이를 통선 편으로 보내라!” 

 

그는 부인에게 명령했다. 나와 박상원 기자는 이날 밤 짐을 쌌다. 

 


j02 복사.jpg

1981년 9월호 마당 창간호 표지.

 


교양잡지 마당


두 달 만에 돌아온 대한민국은 전두환(全斗煥) 정부의 극성기였다. 1981년 서독(당시) 바덴바덴에서 88서울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정부와 여당(민주정의당)은 사회 선진화를 내걸고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를 외치면서 질주하고 있었다. 1980년대의 초입에 선 나는 앞으로 10년이 한국 역사에서 획기적인 대전환의 연대가 될 것이란 전망을 할 여유가 없었다. 종로2가의 마당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대양 항해의 감상(感傷)은 금방 잊고 고문과 조작 사건 취재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 

 

내가 1981년부터 2005년 월간조선 편집장을 그만둘 때까지 24년간 월간잡지를 만들고 그 뒤에도 잡지와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해준 이는 월간중앙에 글을 쓸 때부터 알고 지낸 허술(許鉥) 씨였다. 그는 1981년 초 두 번째 해직상태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고민하던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새 잡지를 만드는 데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도 신군부에 의하여 해직된 처지였다. 

 

‘마당’은 1981년 9월호가 창간호인데 나는 취재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편집인은 허술, 편집부장은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이종욱, 이 잡지에 고정적으로 긴 글을 썼던 오효진(吳効鎭) 씨는 MBC에서 해직된 기자였다. 反정부 성향 해직기자들에게 신문·방송·통신사 복귀는 허용하지 않았지만 잡지사 근무는 눈감아 주던 시절이었다. 그 2년 뒤 나는 앞서 월간조선 부장으로 옮긴 허술 씨의 권유로 월간조선 기자가 된다. 

 

‘마당’은 판형이 여성지만큼 넓고 사진을 크게 썼다. 미술부장은 나중에 유명한 디자이너가 되는 안상수(홍익대학 교수 역임)·차장 조의환(조선일보 아트디렉터 역임)씨였다. 사진부장은 동아일보 출신 박상원. ‘뿌리깊은나무’ 등 여러 잡지가 폐간된 뒤에 창간된 잡지라 관심을 끌었다. 요사이 당시의 ‘마당’을 다시 펼쳐 보면서 세련되고 교양 있는 편집방향에 새삼 감탄하기도 한다. 한국 잡지 역사를 쓸 때 꼭 기억해야 할 名편집장 허술 씨의 안목이 스며 있는 잡지였다. 치밀한 심층 기사, 사진은 크게, 시원한 디자인, 표기는 한글전용이었다(나중에 나는 한글전용 반대론자로 바뀐다). 

 

1982년 3월호 마당에는, 내가 쓴 “슈퍼탱커 타고 오일로드를 가다”, 홍사중이 쓴 “한미수교 100년 특집기획”, 유홍준의 “읽어버린 조형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오효진의 인물탐구 “연극배우 권성덕”, 강홍빈의 “한국의 스카이라인: 도시 속의 시간, 성벽”, 박경리의 “토지 제4부”, 현기영의 연재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 박태순의 “국토기행: 구룡포에서 죽변으로”, 윤호미의 “해방세대의 여성들/운동은 나의 해방”, 조동일의 “다시 쓰는 한국 문학사/향가의 작품세계”, 김방옥의 연극평론 등이 실렸다. 지금은 이름만 가지고도 알 수 있는 인물들이 44년 전 이 잡지의 필자들이었다. 

 

 

j05 복사.jpg

허술 당시 마당 주간은 물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리기, 무지막지한 구타를 당했다. 

그는 유명한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 

 

 

1980년대의 주제 고문과 조작


취재와 집필에 시간과 지면이 많이 주어지는 잡지는 경찰 출입 기자로 늘 시간에 쫓기던 나에겐 일종의 쉼터였다. 그런 장점을 살려 나는 부산에서 사회부 기자로 있을 때부터 벼르고 있었던 소재를 연재했다. 시리즈 제목은 “하나님은 아신다. 그러나 기다리신다.” 

 

1967년 부산에서 있었던 김근하 군 살해사건의 공소시효(15년)가 끝나가는 것에 맞춰 쓴 글이었다. 한 번은 경찰에 의하여, 두 번째는 검사에 의하여 범인 체포가 발표되었으나 모두 무혐의와 무죄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무지막지한 고문과 조작이 자행되었는데 패가망신한 그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는 취재였다. 살인범으로 몰려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2심에서 무죄선고로 풀려났으나 고문으로 망가진 몸에다가 “그래도 수상하다”는 주위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폐인이 되어 일찍 죽은 김기철 씨가 주인공이었다. 이 기사는 1982년에 극작가 윤대성 씨에 의하여 ‘신화 1900’이란 연극(실험극장)이 되었고 백상예술대상을 받았다. MBC의 실화 드라마로도 상영되었다. 나는 연재 기사를 보완하여 <김기철 씨는 왜 요절했나>라는 책으로도 냈다. 후배 기자들에게는 이 기사를,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고 말하곤 한다. 

 

1980년대에 들어 고문과 조작은 내가 물고 늘어지는 주제가 되었다. 1970년대 경찰서에선 기자들이 드나드는 데도 용의자들을 공공연하게 고문하곤 했다. 형사들이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걸 보고도 기자들은 당하는 자들이 절도범이나 소매치기 등이니 눈감아 주자는 분위기였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 민주화 흐름과 함께 수사기관의 고문 풍조에 언론이 집중조명을 하게 된다. 1987년에 대폭발하는 민주화의 에너지는 상당 부분 고문에 대한 국민적 분노였다. 고문은 오판(誤判)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형장에서 “나는 억울하게 죽는다. 원혼이 되어서라도 원수를 갚겠다”는 유언을 남긴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를 취재하여 기사도 쓰고 책으로도 냈다. 1986년에 나온 이 책은 지금까지도 법학도들의 관심을 모은다. 18년 전 이수근 관련 사건의 재심 법정에 증인으로 나간 적이 있는데 재판장이 본안 질문을 미루고 내 책에 대하여 이모저모 묻기도 하였다. 1989년 3월호 월간조선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는 기사가 계기가 되어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재심을 권고했다. 재심에서 이 사건은 정보부에 의한 조작으로 판명되어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수근은 이미 사형집행된 뒤라서 종범으로 징역 20년을 살고 나온 조카 배경옥 씨가 보상을 받았다.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지금도 70대 이상에선 이수근(李穗根) 하면 ‘가짜 수염 달고 탈출했다가 붙잡혀 온 2중 간첩’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1986년, 월남에 억류되었다가 5년 만에 돌아온 이대용 전 월남대사관 공사(6·25 때 춘천을 3일간 지켜 흐름을 바꾼 6사단 장교 출신)를 만나 다른 취재를 할 때 그가 불쑥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조 기자는 이수근이 간첩이라고 생각하죠?”

 

“물론이지요. 나쁜 놈 아닙니까?”

 

“그래요? 여기에 써 둔 게 있는데 언젠가는 내가…”

 

1987년을 계기로 언론자유가 만개할 때 나는 이대용 장군을 다시 찾아갔고 그는 일기장을 들고나와 펴놓고는 자신이 사이공 공항에 착륙한 여객기로 들어가 직접 끌어내린 이수근과 나눈 대화 기록을 자세히 털어놓았다. 1967~1969년 무렵 이수근을 관리했던 정보부 요원들을 두루 만나고 황장엽 등 고위 탈북자들을 취재하여 내린 결론도 ‘간첩으로 조작되었다’였다. 2009년 국정원에 갔더니 이수근을 간첩으로 기록한 전시관이 있어 지적한 적도 있다. 

 

1960년대의 정보부는 정부 위의 또 다른 정부였는데 언론인 특유의 활달하고 오만한 성격의 소유자 이수근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이것이 그의 탈출로 이어졌는데, 김형욱 정보부장은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하여 위장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던 것이다. 나는 이수근 사건의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벌어진 불법을 폭로했고, 종범 배경옥 씨가 20년 수감 생활을 끝내고 출소하면서 취재는 더욱 입체적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난 직후 나는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라는 책을 한길사에서 급히 펴냈다. 그동안 쓴 기사와 모아둔 자료를 후다닥 합친 책인데 여기에 ‘조선인 출신 고등계 형사와 헌병들의 그 후’란 장(章)이 있다. 충직한 식민지 관료로서 독립운동가나 사상범 감시와 수사를 전담했다가 해방된 뒤에도 경찰과 軍방첩대·정보부 등에서 근무한 친일경찰(고문 기술자도 포함) 인맥을 정리한 자료이다. 살아 있는 일제(日帝) 사상 경찰관들을 두루 만나 조사한 보고서로는 유일한 기록일 것이다. 1960년 4·19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게 되는 데는 마산 앞 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 군의 시신(屍身) 사진(부산일보 특종)이 준 충격이 컸다. 마산 경찰서장의 지시를 받아, 최루탄을 머리에 맞고 죽은 소년을 바다에 던진 경비주임은 일본 헌병 출신이었다.

 

우리 시대 기자들의 가장 위대한 집단적 성취 중 하나는, 불과 20년 만에, 수사기관에서 수백 년 이상 이어져 오던 고문의 전통을 끊어버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점이 아닐까? 1981년의 작가 한수산 고문사건은 당시엔 보도가 되지 않았으나 6년 뒤의 박종철 고문치사는 특종을 한 중앙일보와 동아일보 덕분에 한국 현대사를 바꾼 대사건으로 바뀐다(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교체는 그 부산물이다). 이 6년의 차이를 만든 데는 ‘고문은 안 된다’는 기자들의 결단이 있었다.

 

j03.jpg

한수산·허술 등이 검거되어 전기고문을 당했던 보안사 서빙고 분실 건물. 

정승화 계엄사령관도 이곳에서 물고문을 당했다.

 

 

전두환 정권의 極盛期에 있었던 한수산 고문사건

 

작가 한수산 고문 사건으로 알려진 무지막지한 구타사건의 피해자중 한 명은 마당 주간(편집장) 허술(許鉥) 씨였다. 중앙일보 출판국 기자로 있다가 신군부에 의하여 해직된 후 마당 창간호를 준비중이던 1981년 5월 말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서빙고동 대공(對共)분실 지하 조사실로 연행되어 1주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1979년 12월12일 밤 납치되어 온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물고문한 곳이기도 했다. 

 

한수산 작가가 중앙일보에 연재중인 소설에 전두환 대통령 부부를 조롱하는 듯한 대목(이것도 억측)이 문제가 되었는데 허술 씨(나중에 조선일보 문화부장 역임)가 고초를 당한 경위는 전두환 정권의 출범 시기 분위기를 보여준다. 그는 해직된 뒤 출판사에서 근무중이었는데 한수산 씨와는 딱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한 씨는 보안사에 끌려간 직후 수사관이 최근에 만난 사람들 이름을 대라고 하자 허술 씨 등을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허술 씨는 끌려간 직후부터 보안사 고문기술자 박 모로부터 물고문, 전기고문, 거꾸로 매달기, 몽둥이질을 당했는데 추궁의 초점이 ‘언제 입당했느냐’는 것이었다. 북한에 잠입, 노동당에 입당하고 왔다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연행자 7명이 한결같이 대공(對共) 용의점을 부인해도 고문과 구타는 계속되었다. 허술 씨는 몇 번 까무러치기도 했다. 보안사는 범법사실을 확인하지 못하니 다 풀어주었는데 허술 씨는 며칠간 치료를 받느라 늦게 나왔다고 한다. 그는 그때부터 목과 허리 디스크를 앓게 되었다. 전기고문을 받을 때 손과 발에 전선을 연결하였는데 발뒤꿈치에 파인 상처로 몇 달간 보행이 불편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보안사 문건을 조사해 확인한 연행자 명단은 한수산 외 여섯 명이었다. 한 씨는 당시 중앙일보에 장편소설 《욕망의 거리》를 연재 중이었다. 손기상(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겸 문화부장), 정규웅(중앙일보 편집위원), 권영빈(중앙일보 출판부장). 이근성(중앙일보 출판부 기자). 허술(전 중앙일보 출판부 기자), 시인 박정만. 진상조사 보고서는, 이들이 1981년 5월 29~30일경 서울 서빙고동 보안사 대공분실로 끌려가 수일 동안 조사와 고문을 당했다고 적었다. 특히 박정만 시인은 이때 받은 고문으로 심신에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고, 건강 악화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사건의 단초가 된 한수산 연재소설의 문제 표현은 이렇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j04.jpeg

소설가 한수산. 보안사는 중앙일보 연재소설 몇 대목이

전두환 부부를 조롱했다고 억측, 불법 연행과 무자비한 구타를 했다. 

 


독립운동 名門家 출신을 고문한 전두환 정권


고문에 대하여 상세한 증언을 남긴 이는 정규웅이다. 알몸 상태에서 몽둥이와 구둣발로 구타당하고, 장딴지 사이에 각목을 넣어 무릎을 짓누르는 고문, 얼굴에 수건을 씌우고 고춧가루 물을 붓는 고문, 손가락에 전선을 연결한 전기고문, 두 팔을 묶어 공중에 매단 뒤 각목으로 때리는 고문 등을 당했다고 한다. 그는 제대로 걷지 못해 이근성 기자 등에 업혀 보안사를 나왔다고 한다. 한수산 역시 몽둥이·물·전기·주먹과 발길질·매달기란 낱말로 표현했다. 허술 씨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데 최근 나에게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 당시의 심경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했다. 

 

“설마 죽이기에 하겠나 하는 생각은 들었으나 불구(不具)가 될 수 있겠다는 공포감은 들었습니다. 고문의 강도(强度)가 경찰이나 안기부와는 차원이 달랐다고 할까요. 전기고문에 의한 뇌손상의 공포감도 엄습했습니다. 그 이후 특별히 트라우마라고 할 것은 없었지만 이 무슨 횡액(橫厄)인가 하는 생각으로 좀 괴로웠지요. 후유증은 목 디스크보다 허리쪽에 심했습니다. 디스크와 척추의 전방 이동과 전이증 등으로 결국 두 번에 걸친 수술로 통증을 완화하여야 했지요. 저의 아버지께서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시다가 장기간 옥중에 계셨습니다. 그 후유증으로 만년에 고생이 심했지요. 심문(審問)이나 고문을 받을 때는 아버지 생각을 했습니다.”

 

허술 씨는 독립운동 명문(名門) 출신이다. 할아버지(허형)는 순국한 의병장 허위(許蔿)의 사촌이었다. 아버지 허규(許珪)는 허위가 의병을 일으키자 격려문을 배포하다 체포되었고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국내로 들어와 군자금 모집과 동지 규합 활동을 하다가 붙들려 감옥생활을 했다. 허형의 딸 허길은 시인 이육사의 어머니다. 수십 명이 독립운동에 투신, 순국(殉國)·투옥되었던 집안이다.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뒤 정권에 저항하다가 정보·수사기관의 기술자들에 의하여 고문을 받은 사례들과 비슷한 경우인데, 허술 씨가 이런 사실을 적극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니 여기 적어 두는 것이다. 


  • 트위터
  • 페이스북
  • ↑위로
Copyright ⓒ 조갑제닷컴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달기 댓글쓰기 주의사항

댓글달기는 로그인후 사용하실 수 있으며, 내용은 100자 이내로 적어주십시오. 광고, 욕설, 비속어, 인신공격과 해당 글과 관련 없는 글은 사전통보없이 삭제됩니다.

PC 버전